중앙대학교에서 한 정거장 이동하면 국립현충원이 있다
국립현충원은 1952년 11월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후 1953년 9월까지 10여개 지역을 답사한 후 현 동작동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 착공하면서 시작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장병 처리를 위해 군인묘지로 이루어져왔던 안장업무가 1965년 3월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면서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되면서 겨레의 성역으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국립묘지의 정면에 들어서면 충성 분수탑이 우뚝 서 있고, 금잔디가 깔린 광장을 지나면 현충문(顯忠門)과 현충탑(顯忠塔)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현충탑 안에는 1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위패실과 납골당이 있으며, 이를 가호하고 있는 애국 투사상이 좌측에, 호국 영웅상이 우측에 있다.
국립묘지는 1955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관악산 줄기로 약 44만 평(144만㎡)의 대지에 설립되었다. 2018년 현재 무명용사 11만여 위를 비롯하여 모두 17만 9천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1954년 육군 공병단에 의하여 착공되어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가 설치되었으나, 그 준공은 1957년에 있었다.
1970년 1월 이 영의 개정에 의하여 이 일대를 성역으로 지정하여 한층 미화단장하였고,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조선시대 단종에게 충절을 바쳤던 사육신(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의 제사를 모시던 육신사(六臣祠)가 있던 곳으로 전하여지며 보훈충의(報勳忠義)가 깃들인 곳이다.
지형적으로는, 관(冠)을 쓴 듯 봉우리가 솟았다 하여 관악산이며, 붓끝과 같이 뾰족한 형세라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 일컬어지는 산세로 감싸여 있다. 이들 산세 속의 펑퍼짐한 지형을 ‘동작포란형(銅雀抱卵形)’이라 하여 동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맥(氣脈)이 흐른다 하였다. 또한, 전면을 흐르는 한강수가 용트림하듯 흐르고 있어 한층 미관을 더하고 있다.
먼저 애국지사 묘역을 찾았다
독립유공자 묘역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의병활동 독립투쟁 등 항일운동을 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212위와 배우자 애국지사 13위 등 225위가 안장되어 있다
1906년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한 기산도, 상해의열단 소속으로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독립협회 서재필,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슨을 미국에서 척살한 장인환과 전명운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모셔져 있다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해 민족혼을 일깨운 박은식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비롯 신규식, 노백린, 지청천 장군 등의 임시정부요인 인사들이 또 모셔져 있다
애국지사 묘역을 돌아 동쪽으로 향하면 충혼당과 김영삼 대통령 묘소가 있다
2015년 11월 26일 제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이 안장되었다.
경상도 거제도에서 태어나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 신민당 총재 등으로 민주화를 위해 대도무문의 자세로 유신정권에 결연히 저항하기도 했고 23일간의 생명을 건 단식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에 맞서며 결국 노태우를 도와 마지막 군부정권을 수립하게 하고 그 뒤를 이어 문민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금융실명제 등 개혁을 주도하다 결국 아이엠에프라는 국가와 국민의 위기를 가져오게 하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그의 과가 금융모피아들에 의해 매도된 면도 없지 않지만 그의 치적에 치명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