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전교하기를, “화폐를 주조하는 일은 때에 따라 알맞게 한 사례가 많으니, 지금 어렵고 부족한 때를 맞아 더 많이 주조하여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임시로 주전소를 설치하는 방법으로는 허다하게 계속 공급할 수 없으니, 특별히 ㉠한 기관을 설치해서 항상 주조하여 국가 예산에 보태 쓰도록 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20년 7월 5일-
(나) 엽전의 가치는 높고 ( ㉡ )의 가치는 떨어져서 폐단이 도처에 발생하고, 특히 그중에서도 ( ㉡ )을/를 사용하지 않는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함경도 4도의 폐단은 더욱 심합니다. …(중략)… 지금부터는 ㉢4도에서 경사(京司)에 상납할 때 순전히 엽전으로 상납하게 하소서. - 『승정원일기』 고종 22년 7월 28일-
(다) 화폐의 가치가 높고 낮음이 날마다 다르고 때마다 변하여 마침내 물가가 크게 오르니 인민들의 곤궁과 피폐함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미루어보건대 화폐의 본위가 확립되지 않은 데 있다. 통용되는 가격에 표준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이에 ㉣화폐제도를 창설・시행하여 안으로는 일상에 사용하기 편리한 길을 열고 인민들의 곤궁과 피폐함을 구제하며, 밖으로는 통상 무역의 융성을 기약하여 각국의 이익 쟁탈에 맞서야 한다. - 『동경경제잡지』 제608호, 1892년 1월- |
<작성 방법> ◦밑줄 친 ㉠의 명칭을 쓰고, 괄호 안의 ㉡에 공통으로 들어갈 명칭을 쓸 것. ◦밑줄 친 ㉢의 목적을 서술할 것. ◦밑줄 친 ㉣에 해당하는 내용을 서술할 것. |
∙㉠전환국(1883, 고종 20)
∙㉡당오전
∙㉢목적 : (자료 내용에서 추론) 4도에서 엽전으로 거두어 당오전으로 납부하는 폐단으로 인한 문제점(국고 손실, 관료의 부정)을 해결, 화폐 가치 하락으로 인한 물가 상승 억제 등
∙㉣신식화폐조례 : 은화를 본위로, 동화를 보조화폐로 하는 것
[한국사통론 p388∼389]
이때 개화사상을 가진 젊은 관료들은 청의 내정간섭 및 청에 의존하는 정부의 사대정책에 반발하였고, 더욱이 청의 간섭에 의해서 정부의 개화정책이 적극적으로 진전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맹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들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여 완전한 자주국가를 이룩하고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에 속하는 인물들은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 서광범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영익 · 김홍집 · 어윤중 등 보수적인 집권세력에 대하여 점차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개화당(開化黨, 또는 독립당)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1882년(고종 19)에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뒷처리를 위해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된 뒤부터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때 김옥균 · 서광범 등이 동행하였는데 이들은 일본에서 견문한 내용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여러 가지 개화 정책을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의 건의로 신식군사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유학생 50명이 일본에 보내졌으며, 이 밖에 신문발간을 위한 박문국(博文局), 신화폐 주조를 위한 전환국(典圜局), 병기제조를 위한 기기국(機器局), 우편제도의 실시를 위한 우정국(郵政局)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화당의 활약은 보수적인 집권세력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으로 은연중에 대립이 커져갔는데, 이는 마침내 당시의 국가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표면화되었다. 이때 재정적으로 궁핍했던 정부는 뮐렌도르프의 건의로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려 하였지만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악화의 주조가 국민경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대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건의하였다. 이것은 개화당의 정치자금 확보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결국 고종은 두 가지 정책을 병행하기로 하고 300만원의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김옥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의 사정으로 차관 도입은 실패하였고 이로써 개화당은 정치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도 매우 곤란해지고 말았다.
[우리역사넷]
개항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으로 농민경리도 본격적으로 화폐경제에 편입되고 있었다. 예컨대 1876∼1894년간 조선에서 소비된 면포의 반 정도는 지역내에서 자급하고, 나머지 반 정도를 자본제상품이나 토착면포의 형태로 외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완제품을 구입하고 있을 정도로 기본 의류인 면포의 상품화율이 높았던 것이다. 이처럼 상품화폐경제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화폐유통량 역시 확대되고 있었다. 정부는 화폐유통량의 증대와 재정악화를 보전하려는 의도에서 1883년부터 명목가치는 5배이나 실질가치는 2∼3배에 불과한 當五錢을 발행하였다. 그 결과 전국은 당오전 유통지역과 당일전 유통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당오전 유통권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황해도・충청도의 대부분 지역・강원도 연해지방 등에서 통용되었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엽전인 당일전이 통용되었다. 한편 1891년부터는 당일전(當一錢) 가치의 1/3에 불과한 평양전(平壤錢)이 발행되었다. 이 평양전은 당일전 유통권인 원산・부산 등지까지 침투하여 당일전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이와 같은 악화남발로 인하여 1892년경에는 당일전・당오전・평양전이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게 되었다. 엽전시세 역시 1883년부터 1893년까지의 10년 사이에 3/5수준으로 폭락하였다. 특히 개항 이후 일본화폐의 유통권이 인정됨으로써 개항장을 중심으로 화폐유통권이 재편되었고, 나아가 일본화폐에 의한 조선화폐가 평가되는 엽전시세도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출곡물가격을 엽전으로 지급하던 일본상인이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던 반면,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물가가 폭등함으로써 곡물을 구입하여 생계를 해결하던 도시와 농촌 임노동자, 하급군인, 관리 등의 생계가 곤란해졌으며 정부물자를 조달하는 공인층도 몰락위기에 처하였다. 정부의 악화남발 때문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되었으며, 이는 하층민중의 생계를 압박하고 일본화폐의 유통확대로 일본금융자본에 대한 조선상인의 종속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봉건적 상업체제 아래서 제국주의적 상품유통구조가 창출되면서 소상인과 소상품생산자의 경제적 성장은 저지, 억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품화폐경제는 봉건지배층의 수탈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도 작용하였기 때문에, 국내에 민족적 모순 뿐만 아니라 봉건적 모순도 더욱 격화시켰던 것이다.
[우리역사넷]
한국정부는 일본의 금융 침략 과정에서 금융발전의 중요성을 비교적 일찍부터 인식하고 금융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종은 1880년대 중엽부터 청국의 극단적인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외교 다변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에는 외채를 도입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새로이 발행하고자 수 차례 시도하였다.010) 그러나 그것들은 내부적인 준비부족과 외압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다만 1891년 은본위제도를 수립하고자 하는<신식화폐조례>가 제정, 공포되고 또 소량이나마 이를 위한 銀貨가 주조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의 은화 주조에 그치고 空文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청일전쟁을 계기로 성립된 갑오정권은 1894년 음력 7월 11일 賦稅의 金納化와 함께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갑오정권이 발표한 은본위제의<新式貨幣發行章程>은 1891년의<新式貨幣條例>와 기본골격은 동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