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순례지 개요
성거산 일대에는 180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온 신자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들이 곳곳에 있었다. '학의 둥지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소학골과 인근의 서들골을 중심으로 여러 교우촌들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던 산골 신앙 공동체였다.
성거산 교우촌은 산골이면서도 주변의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연락을 취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성거산에 와서 휴식과 사목 활동을 하며 편지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고, 주변의 공주와 서천, 충북 배티, 경기도와 경상도의 교우촌들과 연계도 가능하였다. 이곳에서 활동한 성직자는 다블뤼 주교, 최양업 신부, 메스트르 신부, 페롱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등이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성거산 출신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1866년 성거산에서 잡힌 배문호 베드로와 최천여 베드로 등 일곱 명이 공주와 청주에서 순교하였고, 1867년에는 배화첨 베드로 등 여덟 명이 서울과 죽산에서 순교하였다. 성거산 출신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순교한 이들도 8위 이상이 된다. 이들 중 공주에서 순교한 이들의 유해가 성거산 줄무덤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67쪽)(순례확인도장: 입구 소성당 앞, 병인박해 기념성당 입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