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AnkorWat , 그 신神들의 그림자를 먹고 사는 나라 ---神의 나라, 神이 떠난 나라, 神들의 신화만 남은 나라
“..........이제 하루의 고단함을 풀고 밤이 이울어 갑니다. 사위에 어둠이 내리고 여기저기 작은 웅얼거림이 들리는, 그래서 스산한 초승달이 봄을 이끌고 눈밭으로 내려오는 아직은 이른 봄밤입니다. 언제나 마음 혼자 머무는 집을 떠나 한 닷새, 먼 이국의 초롱초롱한 초승달을 건지려 내일이면 비행기를 탑니다. 홀로 집을 지키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삽살이와 그 친구들은 낯선 시인의 집에서 이국의 하늘을 넘겨다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따숩고 배부른 맛에 주인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른한 밤잠을 잘 자게 될지도 모르지요. 아열대 지역인 그 곳은 너무 더워서 밤 내내 잠이나 잘 잘까 모르겠습니다. 해외여행을 밥먹듯 하던 시절엔 언제나 이국에서 그리움을 앓았는데, 이제 나이먹고 귀 어두운 시절에는 그 그리움조차 막내 동생에게 들킬까 마음조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내 동생과 한 방을 쓰게 되어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입국하기도 어려웠던 나라였는데.....세월이 좋아 그 벽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긴 세월 동안 우주 저편으로 뿌리를 뻗어 허공에 돌고 있는 주인없는 별들과 교신을 꿈꾸는 밥오밥나무처럼 나무뿌리에 엉켜 몸 뒤척이기도 힘든 불교문화의 깊은 흔적---앙코르와트AngkorWat를 더듬어 보는 일정이라니 한 번 기대를 가져 보겠습니다. 혹여 마음조차 빼앗겨 그 곳에 남겨놓고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만........“ 하고 메일을 남겨 놓고 떠난 캄보디아 행 여행은 봄비가 흩뿌리는 인천공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겨울의 끝자락에서 눈이 쌓였던 서울을 두고 열대의 나라로 잠입하기로 한 앙코르와트 여행은 5시간 반이라는 긴 비행기의 좁은 좌석의 불편이 힘겹게 느껴지는 고행의 첫날이었습니다.
캄보디아Cambodia의 수도 프놈펜PhnomPenh 국제공항,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무더운 열대의 날씨가 서울의 겨울 추위를 잊고 땀을 쏟아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안내로 나온 가이드 정시효씨의 말로는 그래도 이 때가 가장 시원하고 좋은 시기라고 하였습니다. 하긴 우기에 오게 되면 비도 많고 습도도 높아서 견디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항을 나서기 무섭게 옆을 지나가는 오토바이들의 행렬이 차도를 막아 섭니다. 어지럽게 얽혀 지나가고 길 복판에서 적당히 U-턴을 하는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보입니다. 그래도 아무도 삿대질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법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법이 없어도 살만한 나라처럼 느껴졌습니다. 서두르지 않는 나라, 천천히 사는 나라, 마주치는 눈길에 수줍음이 묻어나는 나라, 가난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나라, 잠시 동안에 느낄 수 있는 첫인상은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첫인상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도 그렇게 친숙하게 이어졌습니다.
아침에 보는 열대도시의 아름다움이란! 여기저기 때도 철도 없이 꽃은 아무렇게나 피었고, 마치 당연한 일처럼 그 꽃을 경이의 눈길로 보는 캄보디아 사람은 없어 보였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자연을 그저 하나의 자연스러움으로 인식하며 사는 온화한 성격의 국민들이 사는 나라, 캄보디아. 다른 한 편, 공항에서 흔히 보게 되는 공무원이나 경찰들이 아무런 가책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저지르는 비행非行을 보고도 당연하게 여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조금은 답답함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프놈펜Phom Penh에서 씨엠립Siem Reap까지는 버스로 이동하였습니다. 메콩Mekong강을 건너 씨엠립Siem Reap으로 향하는 평원은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광대한 초원과 야자나무 팜트리등이 줄지어 서 있는 구릉지대 하나 없는 평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한반도의 1.8배에 달하는 면적에 북쪽에만 약 30% 정도의 산악지대로 구성되어 있는 천혜의 곡창지대라고 합니다. 인구 14백만명이 사는 나라, 저 유명한 킬링필드Killing-field의 암흑의 시대, 1975년에 폴포트Pol Pot가 이끈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 시절에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파 학살이 이루어져 8백만 인구 중 2백만명이 학살되었다는 비극의 역사가 땅을 적시고 있는 나라,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정변과 부패로 서계 최빈국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는 나라의 느릿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결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도 패망하게 된 강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캄보디아를 유린하여 국경을 폭격하고, 그로부터 캄보디아 정권의 몰락과 부침을 전력적으로 지원 교체해 가면서 캄보디아 국민들이 받게 된 고통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한 시대의 정의란 이렇게 허망한 것일까?를 자꾸 되새기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킬링필드의 현장, 고문박물관에서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자 사진은 끔찍함을 뛰어넘어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뒤에 미국이라는 이해당사자의 괴물이 그 긴 아픔의 그림자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니! 어린아이들의 죽음, 그러면서도 죽어간 그들의 눈빛, 하나같이 순수하고 원망이 보이지 않는 순박한 눈길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상대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백만의 인명을 살상하도록 만든 폴.포트란 사람은 과연 어떤 운명의 사주를 받은 것일까요? 세계 열강들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평화”라는 탈을 쓴 강자들의 시대정신이란 모두가 국민을 위한 것이었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되어 한 시대를 기록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은인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미국이나, 과거의 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중국도 따지고 보면 자국의 이익을 위한 명분 이외의 선의는 의심받아 마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의 의식을 깨워주는 것이 여행이 주는 커다란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소 긴 버스로의 여정이었지만, 주면의 캄보디아의 서민들이 생활하는 것을 살펴보며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5남매+1이라는 인원의 구성이 더욱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리라. 여행지에서도 서로 챙겨주고 염려해 주는 형제들의 배려가 마음을 더 넓혀주는 촉진제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앙코르와트의 인상은 한마디로 경이로움의 세계를 보는 느낌 이상이었습니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초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한다고 합니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라는 것이지요. 이 왕도의 사원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지는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이 왕도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으므로 백성들에게는 그 당시의 군주가 “폭정의 상징”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유적을 자산으로 수많은 캄보디아 국민들이 살아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 그 유산을 이어받은 현대의 국민들로서는 그 당시 왕의 치적이 “위대한 유산”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란 양면성을 가진 것일까요? 당대의 폭정暴政이 후대엔 미래를 내다보는 선정善政으로 평가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존재합니다.
50만 대군으로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시왕은 함양으로 개선하던 길에 제나라 족장의 딸 용녀를 얻게 되었지요. 그후, 진시왕은 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정사를 등한히 한 채 용녀에게 빠져서 헤어날 줄을 모르게 됩니다. 한편 만리장성을 쌓는 일에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의 원성은 날로 높아가던 끝에 그는 천하통일 15년만에 제나라 장수들에 의하여 패망하고야 맙니다. 그러한 아이러니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만리장성과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유적과도 같은 중국의 진시황제의 치적과 유산에서도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시엠립SiemReap에서의 하루는 경이로운 느낌으로 꽉 찼습니다. 사원 전체가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지고 정교한 수작업으로 축조되었다는 그 규모나 정교함은 참으로 감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앙코르 시대(802년 ~ 1432년)에 만들어진 앙코르 와트 사원은 화려했던 유물들은 관리가 소홀한 탓에 파괴와 식민 시대의 약탈 등에 시달려 많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186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1953년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캄보디아는 그 후 1989년 경까지 10여년간 베트남의 식민통치를 받는 등,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 어려웠던 나라였습니다. 이미 800여년 전에 세워진 동남아시아의 영광이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인에 의해 발견되고 탐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전 까지는 역사상으로만 존재하고 구전으로만 내려왔던 것이 발견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가 되기에 이르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프랑스의 100여년에 걸친 장기적인 식민 통치를 받았고, 미국등의 베트남 전쟁으로 원치 않은 전쟁의 틈에서 희생을 치르다가 다시 베트남의 통치를 받기도 하는 등, 외세의 끊임없는 이해관계에 휘둘려 편치 않은 근대를 경험하게 되었다지요.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조산彫像들에 들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이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이면에 깔려있는 힌두교의 신과 신화적 사실들이 아직도 국민정서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힌두교에서의 신들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람보다 많은 신과, 집보다 많은 신전'이라는 말로 힌두교의 다면적인 모습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이방인의 눈에 보기에 힌두교는 여러 원시적인 토테미즘Totemism적 신앙---힌두교Hinduism 신앙이 뭉뚱그려진 신앙쯤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은,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 그리고 절서를 유지하고 재생을 가져오는 신神인 물고기, 거북이, 멧돼지, 난쟁이, 뱀 등 9개의 형상을 가진 비슈뉴, 그리고 파괴의 신인 쉬바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질서유지와 재생의 신인 비슈누에 의해 인간은 수없는 윤회를 거듭하며 각자가 가진 카아마Karma에 의해 이승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힌두교가 가장 발달한 인도에서도 갠지스는 수천년 변함없이 흐르지만 기대어 살아온 인간들은 빈부가 생기고 그것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계급이 되었던 것처럼, 그 계급이 유지되어 온 근본은 이승의 삶이 숙명적인 업보에 의해 자신이 가진 업보만큼의 삶을 살게 되어 있다는 사상으로 연결되어 그 고난이나 삶이 모두 100년 삶의 찰나에 이루어지고 그 다음 생에서는 다른 더욱 좋은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믿음으로 발전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사람들도 그 믿음에 기대어 타인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현세에서의 고통이나 고난은 모두 하나의 찰나적인 것이어서 이승의 삶이 끝나고 또 다른 삶을 시작할 때는 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믿음이 타인에 대한 적의敵意나 탐욕을 억제하며 살게 만든 근원이 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신화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관광 가이드의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한 해 관광객이 들어오면서 내는 공항의 비자 수수료만도 20$. 출국 시에 내는 공항서비스료 25$, 관광객 한 사람이 이 나라에 떨구고 가는 여행비들이 500$~1,000$ 정도로만 계산해도 연간 3,500천명이 다녀간다는 이 나라의 관광수입만으로도 1인당 국민소득을 300$ 이상 올리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도 겨우 1인당 소득이 500$ 정도의 최빈국最貧國이 되어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세계 각국에서 NGO들의 참여와 원조금액들이 수억 달라에 이르는데도 국민들의 삶의 질이 더 나아지지 않고 있는 것은 지도층의 부패가 극심하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훈센 총리의 집이 49Hectare(우리나라 평수로 1헥타르는 1정보;3000평임/ 총 15만평)이나 되는 면적을 가지고 있다하니 어지간한 왕궁의 넓이에 맞먹는 면적에 놀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민들이 세금을 전혀 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대한 분배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설명에는 고개가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쨋거나 캄보디아는 과거에는 신의 나라였고, 신들이 떠난 유적만 남은 나라였고, 신들의 신화만 남겨져 있는 나라로 보였습니다. 그 신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앙코르와트, 그 사원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신화를 먹고 자라나 신들의 자리를 뿌리로 감싸안고 석탑마다 나무의 뿌리가 파고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뿌리가 어마어마하여 몇 미터가 넘는 것도 있고 퍼져 있는 면적도 사방 10여 미터가 넘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나무들을 뿌리를 통해 수 백년 전의 신들의 과거와 소통하고, 하늘로 올라간 신들과 드높은 나무의 잎새들이 손을 뻗어 교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저기 널려있는 불상의 얼굴 표정이 다양합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근엄한 얼굴, 다소 화가 난 듯한 얼굴, 온화한 얼굴등이 다면형으로 조각되어 있는 사원을 오르며, 신앙이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 보리기 어려웠습니다. 때로는 정치를 하는 자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통치하는 도구로 삼기도 했고, 정치적 문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언제나 권력자들은 그 위에서 군림하며 그 교리와 계율을 편리하게 해석하는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일반 대중을 우매화시키기 위해서 산스크리트Hybrid Sanskrit어로된 경전을 돌 위에 새겨놓고도 피지배층에는 교육을 시키지 않고 지배계층인 상층부에게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든가하는 것은 그러한 혐의를 받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한 나라의 쇠퇴기에는 종교가 제일 부패했고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 사회가 무너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더 권력화됐고, 재벌화됐고, 지역화됐고, 서열화됐고 더 많이 가졌으면서도 그들은 그 욕심을 떨쳐내지 못한 과거의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종교를 통치수단으로 악용하였고, 우매한 민중을 손쉽게 다스리기 위해서 종교를 동원한 사례가 어느 역사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만듭니다. 현재의 캄보디아 언어가 산스트리트어의 형상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그 언어나 사상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는가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배를 타고 수상생활水上生活을 하는 바다와 같은 호수를 보는 일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멀리 볼리비아의 수도 인근에 있는 티티카카 호湖나 러시아의 바이칼Baical 호湖 등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로 이곳에서는 수상생활을 하는 가난한 캄보디아 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관광객만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이나 잡상인들의 모습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파는 물건들도 조잡하고 값도 비싼 것이 아니라 그저 1~2$에 불과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디서 배웠는지 작은 아이들이 한국어를 조금씩을 할 줄을 알아서 한국인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라는 인상이 짙었습니다. 가난함이란 항상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해 왔던 과거의 우리 모습과는 달리 그들은 그러한 생활 자체에 그리 우울한 표정이 아닌 것을 보며 많이 가진 자들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 올렸습니다. 아마도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은 부유한 자들과 교류를 하고 좋은 풍광을 즐기게 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가난한 모습의 천진한 얼굴을 대면할 기회조차 없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우리들의 입에서는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축복을 받은 것인가를 이야기 하였고, 우리가 누리는 작은 풍요에 스스로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툭툭이TukTuk 라는 오토바이와 수레를 결합한 4인승 작은 승합자동차가 있는데---이것은 필리핀이나 태국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차라리 버스를 타는 것보다 바람을 받으며 달리게 되어 있으므로 시원하고 경쾌한 느낌이 들어서 더 쏠쏠한 재미를 선사했습니다. 타고 가는 동안 거리의 무질서한 듯한 질서를 발견하기도 하고, 서로 양보하며 서두르지 않는 그들의 여유를 보며 우리의 바쁘고 서둘러 살아온 삶을 문득 견주어 보게 되었습니다. 낮은 것에서의 느리고 여유있는 삶, 가진 것이 없어도 그리 불만스러울 것이 없는 그들의 순박하고 질척한 삶이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그 뜨겁고도 어지러운 정도의 강렬한 햇볕과 땀으로 범벅이 되는 일상만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사철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 잠 잘 장소가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나라,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자연에 순응하며 맨살을 드러내고도 천연덕스럽게 순진한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의 삶이야 말로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은 많은 개발과 가능성이 보이고, 천연자원이나 자연의 혜택이 많이 주어진 나라이므로 할 일이 많은 나라이며 앞으로도 정치만 안정된다면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이든 성급하게 이루어내는 일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너무 느리고, 답답하게 보일 법하였지만, 한 편 되돌아보면 삶이란 작은 것 하나에도 눈길을 주어가며 관조하며, 성찰하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