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엑스

[퀸토]

"와..."

하숙집을 구했다. 원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올해로 학교를 졸업해버린 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본가로 내려가기에 출퇴근이 고달파 서울에 계속 남기로 했다.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얼마 오래 걸리지 않는 위치선정이 제일 중요했다. 그리고 새로 구한 하숙집은 정말 완벽했다. 지리적으로도. 무엇보다 전기세와 수도세만 내라는 집주인의 엄청난 아량에 옳다구나 계약했다.

혼자 원룸을 살기에는 직장과 가까운 원룸촌이 여자 혼자 살기에 위험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꽤 빡센 월세에 골치가 아팠다. 처음에 하숙집 공고문을 봤을 때에도. 아무리 기숙사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지만 그것과 많이 다를텐데. 고민하다가 더할 나위 없는 최적의 조건에 입주를 결심했다. 처음에는 의심도 했다. 그래도 뭐 제대로 먹고 잘 공간만 있으면 되지 해서 별 다른 기대 없이 간 곳은 엄청난 개이득이었다. 왜 고민을 했나 싶을정도로.

"무슨 천장이 이렇게 높아..."

단독 2층 주택으로 이루어진 집은 외관부터 으리으리했다. 그 안은 따로 가정부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듯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집주인이 미리 준비해두었다는 실내화를 신고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어디부터 봐야하지. 너무 넓어 눈동자가 방황했다. 신발장에 둔 캐리어를 들고 오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감탄했다.

"가빈 씨 맞죠? 여기로 오세요."

"아, 네!"

어슬렁거리는 날 발견한 집주인이 이리 들어오라며 마중나왔다.

"이미 계약하면서 들으셨겠지만 다시 소개드릴게요. 제 이름은 김준면이구요. 집주인이에요.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대하지 않으셔도 돼요."

"네."

"말도 놓아도 되고요."

"어... 그럼.. 그럴, 까?"

"그래. 가빈이가 24살이니까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도 돼."

"..넵, 아 아니 응.."

집주인은 생긴 것만큼이나 착했다. 역시 사람의 첫인상은 원래 성격이랑 다 똑같다니까. 더불어 이것저것 설명해준다. 이 집은 자신이 20살, 성인이 될 무렵에 부모님께 선물로 받은 집인데 혼자 살기 너무 적적하고 외로워서 헐값에 하숙생을 구해 같이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조그맣게 감탄했다. 와.. 무슨 성인된 기념 선물로 이런 집을.. 재벌인가보네 했던 내 예상은 거의 기정사실화가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줄게 있는데."

"응."

"사실 우리가 여자 하숙생은 처음이야."

"...아."

"지금은 나 포함해서 3명정도 살고 있어. 다 남자라서 불편하기도 할텐데. 우리가 최대한 맞춰보도록 노력할게."

"..뭐.. 굳이 그러지 않아도.."

"그래도 혼자 여자잖아. 많이 불편할 수도 있고. 그래도 애들은 다 착하니까 괜찮을거야."

"그렇구나.. 고마워.."

아. 원래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남자밖에 없었구나. 혼자 여자라는 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거 하나 때문에 다시 나가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집은 없었다. 당장에 집주인이 이렇게 착한데. (무엇보다 잘생겼음) 어디를 가도 이런 집주인의 하숙집은 구하기 힘들테니까.

"한 명은 가빈이랑 동갑이고 한 명은 두 살 어리고. 아, 나는 27살이고."

"..아하."

"애들 진짜 다 착해. 금방 친해질거야. 불편하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

"...."

"이제 방 안내해줄게. 짐 많아?"

"응? 아니, 아니! 그냥 캐리어 하나랑..."

말을 마치기도 전에 쇼파에서 일어난 준면오빠가 현관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한 손에 캐리어와 백을 단번에 들고 걸어온다. 너무 미안한데.. 안절부절 못하며 주위를 서성였다. 진짜 괜찮아.

"내가 들어도 되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거 아니야."

"..아니 그래도.."

"여기 다 남잔데 그냥 이런 거 막 시켜. 냅둬서 어디다 쓸 거야."

농담조로 말을 뱉은 오빠가 안 그래? 한다.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X나 잘생겼다.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2층으로 향해 계단을 밟는 오빠의 뒤를 따랐다. 2층은 복도식으로 되어 있었고. 난간 밑으로 1층의 넓은 거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더 넓어보이네. 여기서 축구해도 되겠다. 안내받은 곳은 2층의 제일 끝방이었다.

"아무래도 화장실은 따로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치?"

"..아.. 아무래도.."

"원래 여기 살던 놈이 있는데 내가 방 빼라 했거든."

"...헉. 그럼 나 때문에,"

"아냐. 저어기 저 방으로 옮겼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불편하잖아. 걔도 괜찮다고 방 뺐어. 원래 넓은 거 좋아하던 놈이라서. 화장실 차 있을 자리만큼 더 넓어진다고 좋아했거든."

"아.. 그럼 사양하지 않고.."

"응. 이거까지만 넣어주고 내려갈게. 푹 쉬어."

"응. 오빠두.. 고마워."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 오빠는 침대 바로 옆에 짐을 내려다주고 방을 나섰다. 침대에 앉아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확실히 사람이 살다 나간 방이라 그런지 아직까지 온기가 가득 차 있는 기분이었다. 상체를 뒤로 풀썩 눕힌다. 킁킁. 되게 좋은 냄새 난다. 근데 뭔가 익숙하네. 이불에 벤 섬유유연제 향기다.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다 했더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섬유유연제에서 바꾸기 직전에 자주 애용하던 상품이랑 동일한 제품인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있다가 잠들것만 같아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두 손을 들어 볼을 툭툭 내려치고는. 캐리어를 풀어 짐정리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채워넣고 정리하고 끝내니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깨끗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진짜 좋긴하다.

이 넓은 방에서 이렇게 좋은 시설을 쓰면서. 월세도 안내다니. 어딜 가도 진짜 이런 집은 없을거다. 짐정리를 마치로 가볍게 손을 씻은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힘 썼더니 피곤하네. 바로 침대 안으로 직행해 몸을 눕혔다. 3시가 조금 안 됐으니까 저녁 먹기 전에 일어나면 되겠다. 눈을 감았다.

하아암. 푹 자다가 일어나 머리가 부시시했다. 슥슥 대충 손으로 빗질을 했다. 오랜만에 푹 잔 기분이네. 역시 침대가 좋아서 그런가. 땅에 발을 딛고 실내화를 걸쳐 신었다. 창밖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노을이 꽤 예뻤다. 정확히 6시 10분이었다. 부시시한 몰골을 정리하고 문을 열고 나왔다. 터벅터벅 계단을 딛고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슬슬 저녁 준비를 하는지 맛있는 냄새가 맡아졌다.

"...어.."

"자고 일어났나보네."

"아, 응."

"애들하고 인사도 못 했지? 다 저기 있어."

오빠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부엌이었다.

"저녁당번이거든."

"아하.."

여기는 돌아가면서 정하는구나. ..나 진짜 요리 못하는데.

"부담스러우면 안 시켜. 쟤네보고 쭉 하라고 하면 돼."

"..그래도.."

"쟤네도 신경 안 쓸껄?"

"와. 당사자 없다고 막말하시네."

"...."

그때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목소리가 능청스럽게 소리를 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돌리자 처음 보는 얼굴이 인상을 확 찌푸린다. 되게... 무섭게 생겼다.

"세훈이야. 아까 두 살 어리다고 했던."

"...아아."

"아 오늘 새로 오신 그 분이구나? 안녕하세요."

"네에..."

저 얼굴이 나보다 두 살 어리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욕이 아니라.. 그럼 나 지금 두 살이나 어린 애한테 쫀거야? 금방 찡그린 인상을 핀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한다. 반달처럼 접힌 눈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럼 그냥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그렇지 않을까.. 요?"

"와 되게 설렌다. 아저씨들 냄새만 나는 집에서, 아!"

손을 들어올린 준면오빠가 그대로 뒤통수를 퍽 갈긴다. 아! 고통이 담긴 신음을 내뱉던 세훈이 씩씩거린다. 정확히 맞은 뒤통수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다가 오빠를 살짝 째린다. 뭐 임마.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지만. 발을 쿵쿵 구르며 입을 씰룩이곤 자리를 피한다.

"집 울린다."

금세 뒤꿈치를 들고 총총 걸어나간다. 확실히 아직 하는 행동은 애같네. 첫인상이랑 분위기랑 실제 성격이랑 완전 딴판이네. 그 모습이 꽤 웃겼다. 웃음이 터질랑말랑 했다. 정확히 눈이 마주친 준면오빠가 입을 연다.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집어넣었다.

"많이 애같지."

"그래도 귀여운데 뭘.."

"그래서 내가 종종 많이 놀려."

"나쁘네."

어깨를 으쓱인 준면 오빠가 등을 돌린다. 하긴 5살 차이나 나니까. 오빠 눈에는 한창 애같아 보이겠다. 세훈을 뒤쫓아 사라진 준면오빠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나 뭐하려고 했지. 아. 부엌으로 향하던 걸음을 마저 잇는다. 물 마시고 싶은데. 컵에 정수기물을 받아 들이킨다.

그리고 미처 확인하지 못한 준면 오빠의 말을 간과하고 말았다. 애들 '다' 저기 있다는 말. 대충 둘러본 부엌에 아무도 없어서 그런가보다 했더니. 마시고 있던 컵을 입에서 떼어놓기도 전에 아일랜드 식탁에 가려져 보지 못한 인영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다.

"...푸웁! 켁!"

"아."

사레가 들린 목이 켁켁거린다. 제대로 넘어갔는지 눈이 붉게 달아오른다. 숨을 헐떡거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누군가 다급히 물을 한잔 더 따라 내게 건넸다. 콜록콜록. 컵을 거의 뺏어들어 한번에 들이켰다. 아직도 흘러나오는 기침이 멈추지 않아 다가온 남자가 결국에 등을 두드려준다.

슬슬 기침이 멎어들 무렵에는 괜히 쪽팔려 큼, 크흠. 나오지도 않는 기침을 인위적으로 낸다. 그걸 눈치 챘는지 입꼬리를 끌어올린 얼굴이 재수없어 보였다. 그래. 너는 평소에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인사가 꽤 격하네."

"...."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진 편?"

"...."

빌어먹을 변백현은 내 첫사랑이자... X-남친이었다.

/

녀석과 나는 같은 초, 중, 고, 대학교까지 같이 나왔다. 그리고 14살부터 21살까지. 8년동안 지독히도 붙어먹었다. 그 긴시간동안 그렇게 뭐가 좋다고 떨어지질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미쳐있었고 눈만 맞으면 불타올랐다. 바야흐로 첫 불을 지핀 18살. 처음으로 녀석의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 틈을 타서 우리는 잤다. 코 자는 그런 거 말고 진짜 숭한.. 불장난의 시작이었다.

사춘기의 도입. 14살짜리가 사랑을 뭘 알겠어. 호감으로 시작한 우리는 점점 그 싹을 키워나갔다. 8년을 같이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 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헤어진 데에는 딱히 이유가 크지 않았다. 마음이 식어서. 더이상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럼 굳이 관계를 나눌 필요가 없지. 평소와 같이 자고. 평소와 같이 데이트를 나누고. 평소와 같이 데이트를 하다가 밥을 먹고. 헤어짐은 갑작스러웠다.

'백현아.'

'응.'

'우리 헤어질까?'

'...넌 무슨 밥 먹다가..'

'..그럼 먹고 얘기할까..?'

'됐어.'

'....'

'나랑 헤어지고 싶어?'

'솔직히 우리 옛날 같지는 않잖아.'

'....그래, 그럼. 또 하고 싶은 말은?'

'..없는 것 같아.'

녀석은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좋은 놈이었다. 그런 매너가 원래부터 몸에 벤 녀석이었으니까.

'그래. 잘 지내고.'

'...응.'

'행복했어.'

'....'

'너 덕분에. 8년동안.'

'...나도 고마웠어.'

'조심히 들어가라.'

녀석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처음 이별에 대해 말문을 꺼낸 내가 되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차피 어찌됐든 헤어짐을 결심한 건 맞으니 무를 생각은 없었다 치지만. 원래 이별이 이렇게 쉬운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만큼. 일찍 시작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다 처음이었고. 서로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한 번은 잡을 줄 알았는데.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녀석은 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간 학교에서 녀석은 더이상 볼 수 없었다. 휴학. 헤어짐을 고하고 녀석은 돌연 군에 입대했으니.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떨어졌고. 녀석이 군대에서 2년을 보낼동안 나는 수월하게 졸업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엿한 새내기 사회인이 되었고 녀석은 4학년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아.."

"잘 지냈어?"

들어온 하숙집에서 우연찮게도 녀석을 딱 맞닥뜨리고 만 거다. 몇년전에 헤어진 구남친을 하숙집에서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머릿속에 수만가지 생각이 휘몰아쳤다. 아직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없었던 일이라 치고 무를까. 보증금도 월세도 없었는데.. 그런 내 표정을 기막히게도 눈치챈 놈은 입을 열었다.

"잘 잤어?"

"...."

"너 온다고 내가 방까지 빼줬는데."

"...."

"되게 잘 잤나보네."

새로운 입주자가 온다는 것을 집주인인 준면 오빠에게 미리 들어서 알았을 녀석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내가 없었던 일이라고 계약을 무를까 괜히 내색한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침대에서 나던 익숙한 섬유향기가. 내가 자주 쓰던 섬유유연제는 놈과 같은 제품이었고. 괜히 찝찝해서 세제를 바꿨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향기가 녀석에게 너무 잘 어울려서.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떠오를까봐.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내가 그렇게 바꿔놓고. 고작 몇 년이 지났다고 완전히 잊었긴 했나본지 그 냄새를 까먹고 있었다니. 참 멍청했다.

"왜! 갑자기 튀어나와가지고.."

"...."

"사람 놀라게..."

"...."

괜히 방귀 낀 놈이 성낸다고. 엄밀히 따지면 놈을 발견하지 못한 내 탓이 더 컸다. 큼큼. 목을 가다듬는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린다. 힐끔거리다가 또 기막히게 눈이 마주친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짧게 들린다. 아 씨... 괜히 쪽팔린 모습만 잔뜩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그에 반해 녀석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여유로운 건 여전했다. 짜증나게.

"나 보고 싶었어?"

"뭐래! 아니거든!"

"그래?"

"...."

"난 되게 보고 싶었는데."

"...뭐라는거야."

"여전하네."

"...."

"이쁜 거."

"...."

얼굴이 삽시간에 확 달아올랐다. 아니 얘가 지금 뭐라고..

"어 가빈이 백현이랑 인사 좀 했어?"

"...아, 어어. 으응."

"밥은,"

"안! 먹어도 돼! 나, 그.. 그 졸려서! 먼저 들어갈게..."

그때 타이밍 좋게 들어오는 준면오빠가 보였다. 방금까지 자다 일어났으면서. 졸리다는 씨알도 안 먹힐 핑계를 들이대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계단을 오르는 다리가 급하다. 그러다 스텝이 꼬여 넘어질 무렵.

"어어. 조심해요 누나."

"...고마워."

다행이 넘어지기 전 팔을 잡아준 세훈이 덕에 계단에 코 박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막아냈다. 고맙다고 짧게 인사하고 서둘러 계단을 마저 오른다. 혹시나 따라올까 간간히 뒤도 힐끔거리면서. 첩보영화 찍는 거 마냥 당도한 방문을 열고 후다닥 들어갔다. 문을 완벽히 닫고 안에 들어와서야 가슴을 쓸어내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게 뭐야..."

생각해보니 모든 게 웃겼다. 먼저 헤어지자고 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당황한 꼴이라니. 앞으로 살면서 당연하게 녀석을 안 마주칠 거라고 단정지었나. 애초에 학교도 같이 다니는 거 다 감수하고 이별을 고했으면서 녀석이 군입대로 시야에서 비켜주니까. 그게 당연시 되었다. 놈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어지럽게 맴돈다. 진짜...

"짜증나게 잘생기긴 했네.."

2년이 더 지난 녀석의 모습은. 제 첫사랑답게 시간이 들수록 더 잘나졌다. 으으! 침대로 뛰어들어 팔다리를 동동 구른다. 같은 학교도 아니고. 같은 직장도 아니고. 앞으로 지낼 집에서!

지금이야 핑계대고 어찌저찌 피했다고 하지만. 앞으로 같은 밥상머리에서 겸상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볼테지. 방 밖으로 나올 때마다 보이겠지. 어떡해. 그걸 어떻게 버텨. 소름끼쳐 몸을 부르르 떨다가도.

"...짜증나.."

내 몸이 뉘여진 이 침대도. 내가 들어오기 하루 전까지 녀석의 것이었다고 하니까 괜히 또 심장이 간질해진다. 불가항력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이라 그런지. 내가 먼저 마음이 식어서 이별을 고해놓고. 아니 왜 이러냐고!

굳게 다짐한다. 이러는 건.. 녀석한테도,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한테도. 예의가 아니니까. 제 이상형을 빼다막은 그 유순하면서 능글맞은 얼굴을 오랜만에 마주해서 그런거야. 고개를 내린다. 녀석이 썼던 침대. 익숙한 체취가 묻은 침대.

"..바닥에서 자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부르르- 진동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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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채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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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새로 팠어~ 괜찮지?

와 대박 드디어 실감나

홀애비 냄새만 가득하던 곳에

어서와요 누나~^^

세훈이 다음주까지 식사당번 하자~

제가 뭐했다고 이러새요

사람냄새나고 좋네

우리는 사람 아니라는 소리를 돌려서 하네...

가빈아 불편한 거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바로 말해줘~

응! 알겠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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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방 이름을 하숙집으로 설정해 바꿔놓았다. 끊임없이 울리는 알람을 느끼며 진땀을 뺐다. 확실히 세훈이가 어리긴 하구나.. 이런 애한테 쫀 게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 카톡이 쌓여가는 상단바를 미리보기로 보며 웃음을 짓는다.

그때 또 한번 진동이 울리고. 기존의 상단바 밑으로 새로운 이름이 깔린다. 변백현. 녀석의 이름이 새로 보인다. ...뭐야. 표정을 굳히고 다급히 들어가보니 개인으로 온 연락이었다. 이걸.. 봐 말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차피 같은 집에 있는데 씹히는 거 들키는 게 더 무안하다 싶어 울며 겨자먹기로 터치했다.

→가빈아

→01019920506

→번호 저장해

이걸 왜 나한테.. 눈을 의심했다. 아씨 괜히 봤나. 뭐라고 답장 해야하지.

→이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잖아

→우리 이제 같이 사니까

우리 이제 같이 사니까. 맞는 말인데..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나도 알고 싶은데

알려줘도 될까. 만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 2시간 정도 됐으려나. 게다가 녀석은 지나간 구연인인데. 이렇게 쉽게 다시 연락처를 저장해도 될까. 망설이는 나를 알았는지.

→그냥 알려주기 싫으면 내 번호로 전화 한번만 걸어봐

→목소리도 듣고 좋겠다

←01012345678

←됐지?

→고마워~

능청스럽게 번호를 결국 얻어내기에 성공한 녀석이다. 이 놈은 사람을 구슬리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보내고 나니 또 그건 그거대로 후회가 막심했다.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고 망연자실한다. 대체 왜... 그렇게 전남친과의 한살림라이프가 시작되었다.

/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 너무 일찍 잠에 들었나. 창문 밖으로 이제 해가 밝아 푸르스름해지고 있었다. 대충 양치와 세수만 하고 방을 나섰다. 다들 아직 안 일어났겠지?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내려가려는 찰나에. 그 옆에 위치한 방문이 갑작스레 열린다. 문을 열고 나온 건 변백현이었다. 아씨.. 하필 이렇게 마주칠 건 또 뭐람.

가디건을 걸치고 가벼운 차림의 행색을 한 녀석의 한 손에는 머그컵이 들려 있었다. 피곤이 내려앉은 두 눈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밤 샜나보네. 하긴 4학년이면 한창 힘들 때니까.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고 마저 걸음을 옮긴다. 먼저 걸음을 떼자 그 뒤로 발걸음 소리가 따라붙는다. 괜히 뒤에 있을 녀석을 혼자서 의식한다. 걸음이 부자연스럽다. 혹시나 같은발 같은손이 나가지는 않을까. 엄청 신경쓰고 있으면서 그렇지 않은 척.

부엌으로 들어와 물 한컵을 따르니. 그런 나를 지나친 녀석이 싱크대에 다 쓴 컵을 내려놓는다. 그때 아일랜드 식탁에 올려둔 핸드폰이 우렁차게 울린다. 상단바에 박힌 이름은 이모지였다. 나는 항상 그랬다. 괜히 낯간지러운 건 싫고. 그렇다고 댕강 이름만 해놓으니 정 없어보여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을 하트 하나로 통일시켰다.

다만 놈과 만날 때는 예외였다. 그 이름 뒤에 친절히 하트까지 붙여서. 한창 '백현이♥'라는 이름이 핸드폰 액정 위에 쉴틈없이 울릴 때가 있었지. 나도 모르게 잠긴 과거에 화들짝 놀라 재빨리 핸드폰을 붙들고 숨긴다. 이미 핸드폰 위에 뜬 이름을 확인했을 놈의 표정이 이상하게 묘해진다. 그런 녀석의 얼굴을 힐끔힐끔 눈치보다가. 벨소리가 끊길세라 통화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으, 으응 혁아. 아.. 오늘? 이따가? 좋지. 난 괜찮아. 어.. 어. 그래."

정적이 가득찬 곳에서 민망하게 내 목소리만 울려퍼진다. 최대한 볼륨을 낮추고 통화를 했는데도 이미 녀석의 귀에도 들어가고도 남았겠지. 평소와는 다르게 통화를 빠르게 마친다. 꺼진 핸드폰을 잠옷바지에 쑤셔넣었다. 내색하지 말자. 자연스레 물컵을 들어올린다. 숨을 내쉬고 물을 들이킬 찰나에 갑자기 귓가에 꽂히는 놈의 목소리에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혁이야?"

"...."

"아니면 애칭인가."

"...."

"나한테 했던 것처럼?"

"...무, 뭐라는!"

녀석과 사귈 때 한창, 현아 현아 하고 자주 불렀다. 이름 석 자 중에 맨 끝자리만 불러서 더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했고 변백현도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했으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 그렇지."

"...."

"깜빡했네."

"...."

"김가빈 지난 사람한테 피도 눈물도 없는 거."

"...아니거든!"

괜히 욱했다. 네가 뭘 알아. 라고 말 하기에는 정말 모르는 게 없었고. 평범했던 내 일상에 갑자기 돌을 던진 녀석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위해 컵을 내려놓았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고보니 남친한테는 아직 말 하지도 못했는데. 내가 새로 집을 구했다는 것만 알지. 그 집이 하숙집이라는 것도. 나만 빼고 남자가 득실득실하다는 것도. 아마 알면.. 난리나겠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최대한 숨기는 쪽으로 마음이 비튼다.

"있잖아. 그 혁이라는 새끼는 알아?"

"...."

"네가 전남친이랑 한 지붕에서 사는 거?"

"...."

정곡이 찔렸다. 우물쭈물 하는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빠르게 캐치한 녀석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러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다. 말이 한 걸음이지. 녀석에게 한 걸음은 내게 두 걸음, 세 걸음이었다. 훅 다가와 끼치는 그 섬유향기에 또 머리가 아득해진다. 아 제발..

"그 전남친이라는 새끼가 아직 미련도 못 버린 거?"

"...뭐?"

"너 나 감당할 수 있어?"

얘가 무슨 소리를... 처음 듣는 소리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변백현은 내가 헤어짐을 말할 때 아무런 동요 없이 등을 돌린 사람인데.

"같이 살게 될 줄이야."

"...."

"내가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나보네."

장난스럽게 웃은 녀석이 아직도 멍청한 표정을 짓는 나를 내려보다가. 허리를 굽혀 얼굴을 정면에 들이민다.

"그 새끼가 뭐래?"

"...."

"오늘 만나자고 해?"

"..그러면 네가 어쩔껀데."

녀석의 앞에서 입 한마디 떼지 못하고 처음 듣는 소리들의 향연에 정신 못 차리는 게 그대로 티가 나서. 짜증이 났다. 어쩌면 그게 녀석한테는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어쩌냐니."

"...."

"그럼 내가 이렇게 말하겠지."

"...."

"가지마."

"...."

"만나러 나가지마."

"...하지마,"

"싫은데."

눈동자가 여실히 흔들렸다.

"그러게."

"...."

"왜 내 앞에 다시 나타났어."

"...."

"그러니까 네가 나 감당해."

"...."

"나가지마라. 가빈아."

"...."

속이 울렁거린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토해낼 것 같은 울렁임이었다.

"내가 이러는 게 싫었으면, 어제 날 보고 바로 나갔어야지."

"..나는,"

"내가 이럴것도, 정말 몰랐어?"

"...."

몰랐는데. 이 집에 들어와서 녀석을 마주친 것부터가 내 모든 계획의 미스였다. 잔잔했던 호수에 점점 파장이 일렁인다. 훗날 그게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칠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너의 말대로 진작에 짐을 싸서 나갔을까.

"우리 엄청 사랑했는데."

"다 지난 일,"

"난 그게 그렇게 식어버릴 줄 몰랐네."

"...너도 동의하고 헤어진 거잖아."

"내가?"

"...."

장난스럽던 눈이 금세 날카롭게 변한다.

"내가 언제."

"...."

"난 네 말에 동의한 적 없는데,"

"...."

과거의 대화가 머릿속을 댕댕 울린다.

"기억해내."

"...."

"내가 정말 네 말에 동의했어?"

"...."

"내가 더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네 말에 내가 그렇다고 했냐고."

"...."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었다.

"네가 그 빌어먹을 권태감 때문에 나한테 그런 거 내가 모를거라 생각했어?"

"...."

"그래서 그냥 보내준 거지."

"...."

"난 헤어져 준 적 없어."

"..그럼 나보고 뭐 어쩌라는,"

"그렇게 한번에 매정하게 식을 줄 알았나."

"...."

"나는 아직도,"

"...."

말이 끊긴다. 한 템포 쉰 녀석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연다.

"너만 보면 죽을 것 같아."

"...."

그럼 내가 본 것들은 모두 착각이었나. 헤어지기 며칠 전부터 녀석은 평소와 다르게 예민해져 있었다. 심기가 불편한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가. 애써 말을 걸면 금세 답해주는 게. 마지못해 받아주는 태도였는데. 이렇게 되면 나도 할말은 무지 많았다.

"거짓말 하지마."

"뭐?"

"그럼 너 나한테 왜 그랬는데."

"뭐가."

"맨날 나만 보면 한숨 쉬었잖아. 표정도 안 좋았고.. 또..."

"그래서 서운했어?"

"...."

"그건 입영통지서 날라와서 그랬던거고."

아. 그제야 모든 상황이 딱 맞아 떨어졌다. 나와 헤어지고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입대해서 자취를 감춘 녀석의 행적이.

"또 서운한 거 있었어?"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 안 잡았잖아. 미련도 없이 돌았으면서,"

"그럼 내가 뭐라고 해."

"...."

"이미 너 나한테 마음 식어서 옛날같지 않다는 거 다 아는데."

"...."

"거기서 2년동안 나 또 기다려달라고 했어야 해?"

"...."

녀석이 피식 웃는다.

"생각보다 서운한 게 꽤 많았나본데."

"..이거 놔."

또 말려든 기분이었다. 잡힌 팔을 뿌리치고 등을 돌린다. 그대로 발을 옮기려 하자 끝까지 여유로운 녀석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가지 말라고 했어."

"...네가 뭔데."

"그럼 가."

"...."

"대신 감당할 수 있으면."

"...."

"네 말대로 헤어진 사이라서 어떻게 하지는 못 하겠네."

"...."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부엌을 나와 재빨리 모습을 감춰버렸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급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와 방문을 걸어잠궜다. 힘이 빠진 몸이 벽을 타고 스르르 주저앉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커질 것만 같았다. 모든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기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녀석은 분명 내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으면 이라는 말. 분명 내가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서. 굳어버린 뇌가 돌아가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는 한 쪽의 일방적인 감정. 그 위에서 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애써 무시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