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10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동이(東夷) 설명 계속 -東夷,或稱夷、夷人,先秦時是指居住在黄河流域下游(青、兖、徐三州[a])的人。夷的最早記錄在商甲骨文記錄中,夷曾與商人發生戰爭,有稱為夷方的國家,傳説有九夷、淮夷、鳥夷、嵎夷、萊夷之分。周朝時稱為“东夷”,有徐國、萊國、郯国等諸侯國家,是今日漢族的祖源之一。 -동이(東夷), 또는 이인(夷人)이라 칭한다. 선진(先时) 때는 황하 유역의 하류(청(靑), 연(兖), 서(徐)의 3주(三州))에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夷)의 최초 기록은 상국(商國)갑골문(甲骨文) 기록에 있다. 이족(夷族)이 인구가 증가하여 장사하는 자들이 생겨나 상인(商人)이라 하였다. 상인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을 치렀다. 이방(夷方)을 국가로 칭했다. 이방에는 구이(九夷)가 있었는데, 회이(淮夷), 조이(鳥夷), 우이(嵎夷), 래이(萊夷)로 구분했다. 주나라(周朝) 때 '동이(東东)'라고 불렀는데, 서국(徐國), 래국(萊國), 담국(郯国) 등 제후국들이 있었다. 오늘날 한족의 조상 중 하나이다. (노중평의 주, 1. 선진 때는 주로 단군조선+삼조선 때를 지나의 학자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청(靑)은 당시의 청주(청주+하북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연(兗)은 연주(燕州)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서(徐)는 서주(徐州)지역이다. 선진시대 이 지역은 모두 조선지역이었다. 북쪽은 진조선, 남쪽은 번조선에 해당했다.연주는 원래 단국의 고토였다.) (주, 2. 이족의 인구가 증가한 이유는 서융(西戎)이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이(九夷)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 9개의 인종 단위로 볼 수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서융에서 갈라져 나간 인종과 단군조선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종과, 원래 그곳에 살았던 인종을 합하여 구이로 호칭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히 이들 사이에서 인종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제준(帝俊)이었다. 제준은 신화에 나오는 인명인데. 제곡고신(帝嚳高辛)이다. “태양을 쏜 예(羿)의 신화”는 제곡고신에게서 나온다. 그는 본래 기성(己姓) 문중 사람이었다. 그가 9개의 동이족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이 이야기가 요(堯)에게 옮겨 가서 요가 진접 구이를 통일했다고 말해지기도 하고, 요가 예를 시켜 구이를 통일했다는 이야기로 전해 오기도 한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9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동이에 대한 역사 기록 东夷 徐昭峰, 商王朝东征与商夷关系 《史记·卷三十二·齐太公世家 第二》: 于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封师尚父于齐营丘。东就国,道宿行迟。逆旅之人曰:“吾闻时难得而易失。客寝甚安,殆非就国者也。”太公闻之,夜衣而行,犁明至国。莱侯来伐,与之争营丘。营丘边莱。莱人,夷也,会纣之乱而周初定,未能集远方,是以与太公争国。… 동이 서소봉(徐昭峰), 상왕조(商王朝)의 래국(萊國) 동정(东征)과 상이(商夷-장사꾼)의 관계: 『사기(史记)』 · 권삼십이(卷三十二)· 제태공 세가(齐太公世家) 두 번째(第二). 그리하여 무왕(武王)은 이미 천하를 평정하여 상왕천하(商而王天下)를 만들었다. 스승 상부(尚父)를 제(齊)의 땅 영구(营丘)에 봉하였다. 동쪽은 나라의 끝에 다다랐으나, 하루 밤길에 오갈 수 있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얻기 쉬우니 잃기도 쉽습니다. 객은 밤길을 가지 않고 자는 것이 편안합니다. 나라에 들어오는 자는 위태롭지 않습니다.“ 태공이 이말을 듣고 밤옷을 입고 나가 밝을 녁에 국도에 도착했다. 래이족의 제후가 처들어와 영구(营丘)에서 싸웠다. 래국(萊國)은 영구의 변방에 있었다. 그들을 래인(莱人), 이(夷-東夷)라 하였다. (노중평의 주, 상국(商國)이 역사에 나타나 존속했던 시기는 BC 1600년경~BC 1046년경)이다. 지나 역사에서 최초의 왕조로 소개되어 있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국(殷國)으로 부르기도 한다. BC 1600년이면, 단군조선 18세 위나 재위 때에 해당한다.) 『유기백과』는 동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是中国中国 先秦时期,中原居民对黄河流域下游(青 [a]、兖 [b]、徐 [c]三州)居民的总称。最先在夏商朝期称为“夷”,不带有外族观念,只是作为部落联盟的称呼,自周朝时首次出现“东夷”一词,是周人对黄河流域下游,非炎黄后裔的称呼,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중원(中原)의 주민들은 황하 유역 하류에 살았다. 주민을 총칭하여 동이라 했다. (그곳은 청(靑), 연(兗), 쉬(徐) 3개 주였다) 하상조(夏商朝) 때 처음으로 외족(外族)이라는 연대감을 갖지 않고, 부족연맹의 호칭으로 '동이'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주조 시기에 동이라는 말이 출현하였다. 주국인(周人)은 황하유역 하류에 살면서 염황후예(炎黄后裔)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동이로 호칭하였다. (노중평의 주, 지나인은 탁록대전으로 배달나라가 지나인(之那人)과 지나인(支那人)으로 갈라진 후에, 지나인(支那人)을 염치족(炎蚩族)과 황제족(黃帝族)으로 불렀다. 자신들을 염황후예(炎黄后裔)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涿鹿)에 귀근원(歸根苑),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짓고 나서는 자신을 염황치후예(炎黃蚩後裔)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考古上有一种观点认为,东夷是指自后李文化始至岳石文化的承载者。但因为东夷族群原本就有一部分来源于炎黄,东夷文化里也有很多中原文化的影子,东夷祖先有很多既是东夷首领,又是炎黄后裔,比如东夷少昊是黄帝之子,伯益是黄帝重孙,所以此观点受到质疑,非主流观点}},东周时期,经齐、鲁等国在山东地区的多年经营,夷、夏逐渐融合。秦 汉以后,东夷多指居住于中国东方的朝鲜半岛、日本列岛及琉球群岛等地的外族或中国东北的少数民族。 .그러나 동이의 선조들은 원래 염황에서 유래한 것이 있고, 동이의 문화에도 중원문화의 그림자가 많기 때문에 동이의 선조들은 동이의 수령이자 염황의 후예가 많다. 예를 들면 동의 소호는 황제의 아들이고 백익은 황제의 중손이기 때문에 이 관점은 의문시되고 비주류 관점은 동주 때 제(齊)를 거쳐 노(魯) 등, 을 거쳐 산동지방에서 다년간 영(营)에 살았다. 점차 이(夷), 하(夏)가 융합되었다. 진한(秦漢) 이후 동이는 중국 동방의 한반도, 일본 열도 및 류큐제도(琉球群岛) 등에 거주하는 외족이나 중국 동북부의 소수민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느낌0
노석태 2019년 9월 14일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反中 親美 44 우리민족 DNA 집단무의식에서 사라진 초기대륙백제역사와 중국 공산당의 백제역사를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中國覇權主義化 전략 (中) - 우리민족 DNA에 집단무의식으로 각인되어 있는 地名에 대한 향수 노중평 우리 조상은 나라 이름을 정할 때, 지명을 따서 국명을 지었고, 또한 성(姓)을 정하고 문중(門中)을 만들 때, 지명을 따서 성과 문중을 만들었다. 백제는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래서 사라진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려면 이 원리를 따라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召西弩)와 제수(濟水) 백제에서 백(百)은 100개의 성(姓)이라는 뜻이다. 백제로 불리기 전에는 십제(十濟)로 불렸다. 십제에는 “제수를 건너간 10개의 성”이라는 뜻이 있다. 이때의 성에는 문중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 10개의 성의 우두머리 성이 소서노(召西弩)를 배출한 소성이었다. 소성들이 모여 사는 곳을 소(邵)라 하였다. 제수가 있는 하북성(河北省)에 소원진(召源鎭)이 있는데, 소원진은 소서노의 성씨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소서노가 우무머리인 10개의 문중 가운데에 온조가 출생한 곳으로 볼 수 있는 온향(溫鄕)이 있다. 소원진에서 제수를 따라 발해만 쪽으로 오면 온향이 있다. 제수는 황하(黃河)남쪽 가까이에 있고, 황하와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흘러가다가 발해로 들어간다. 온조(溫祚)의 조(祚)자에는 삼신(三神)이 만든 사제(司祭)라는 뜻이 있다. 소서노의 소자에는 칼을 입에 물고 춤을 추는 무무(巫舞)라는 뜻이 있다. 소서노가 무당이라는 뜻이 된다. 온조라는 문자에는 어머니 소서노의 신아들이라는 뜻도 있다. 소서노와 온조의 뜻을 합하면 신이 내린 모자관계가 된다. 나는 백제의 시조가 된 온조와 소서노의 관계는 신이 내린 모자 관계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모자관계가 되었을 때는 산동반도 일대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혼란기(混亂期)에 처해 있을 때였다. 소서노와 온조가 만나서 모자관계가 되기 전 시대의 제수 인근의 땅은 조선이 멸망하기 전에는 번조선의 영토였고, 번조선이 들어서기 전에는 단국의 영토였다. 조선(朝鮮)과 대청하(大淸河) 제수를 속칭(俗稱) 대청하(大淸河)라고 한다.(濟水俗稱大淸河) 대청하에 대조선하(大朝鮮河)라는 의미가 있다. 번조선의 강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대청하로 불렸다가 조선이 진에게 멸망하고 전국시대에 제국(濟國)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대청하가 제수로 불리게 되었다. 제수가 발원한 곳이 중국의 하남성 제원시 서북쪽이다. 제원에서 제수라는 이름이 나왔다. (濟水發源於中國河南省濟源市區西北,濟源也因此而得名.) 제수는 탁류(濁流)로 발해, 강수(江水-長江), 하수(河水-黃河), 회수(淮水-淮河)에 흘러들었다. 화하(華夏)에서는 이를 사독(四瀆)이라고 하였다. 제원시에서 건설한 제독묘(濟瀆廟)가 있다. 제수를 따라가는 제수고도(濟水古道)가 있다. 제수가 흐르는 성시(城市)는 제원시, 제남시, 제녕시, 제양현인데, 모두 제수에서 얻은 이름이다. (俗稱大清河。濟水在古時獨流入海,與江水(長江)、河水(黃河)、淮水(淮河) 並稱華夏「四瀆」。在現在濟水發源地,濟源市還建有濟瀆廟。今天的黃河下游是當年的濟水古道。濟水流經的城市濟源市、濟南市、濟寧市、濟陽縣都是以濟水而得名的明顯例子.) 조선과 래이족(萊夷族) 진조선과 번조선은 진시황 8년에 진(秦)에게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의 이명(異名)인 청(淸)으로 불렸다. 청에는 모국(牟國), 추국(鄒國), 등의 소국(小國)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의 인종을 래산(萊山) 밑에 산다고 하여 래이(萊夷)로 불렀다.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백제의 역사가 시작된 때는 고구려의 시조로 알려진 고주몽이 요서지방(遼西地方)의 서남쪽 끝에 있는 고죽(孤竹)에 고구려(高句麗-고래라는 뜻)를 세우고 통치를 시작했을 때였다. 고주몽은 자기보다 연상의 여자인 소서노(召西弩)와 부부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 역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 본토의 중원(中原)에서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제수(濟水)를 끼고 있는 산동반도(山東半島)와 산동반도 주변 지역이다. 이 지역이 연주(兗州)로 알려진 지역이다. 조선의 전신 단국(檀國)과 단국인(檀國人) 중국의 지방정부 사이트에 연주인(兗州人)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에 “兖州古城为古檀国地, 少昊之墟。史称夏邑.”라는 문장이 있다. “연주 고성은 옛 단국의 땅이다. 소호의 터요, 역사는 하나라(夏邑의 읍은 성을 쌓아 방어하는 나라라는 뜻) 칭한다.”라는 뜻이다. 단국은 배달나라 말기에 있었던 나라이고, 단국의 역사는 배달나라 말기의 역사와 조선 초기의 역사 사이에 맞물려 있다. 단국은 천일 태제, 지일 홍제, 태일 단군왕검의 3세만 역사에 기록을 남긴 나라였다. 천일 태제는 배달나라 제16세 축다리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고, 지일 홍제는 제17세 혁다세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고, 태일 단군왕검은 거불단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다. 이들 세 분의 배달나라의 한웅들이 다스린 단국을 중국의 연주인 사이트에서 연주라 한 것이다. 『진서·지리지(晋书·地理志)』는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서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兖)자는 본래의 모양새가 끝과 단정함과 믿음의 의미가 함의(含意)된 말이다. 『사원(辞源)』의 주석에 따르면, “이순(李巡)이 말하기를, ‘제(濟)는 제수와 황하 사이 있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성격은 신의가 있고 공손하다. 그래서 연(兖)이라 하였다. 의사설(意思说)에 따르면, 제수와 황하 사이는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사람의 기질은 실익을 따지지 않고 근신하여, 이런 이유로 연주라 하였다. 명조(明朝) 만력년간(万历年间)에 산동감찰어사(山东监察御史) 순안조은인(巡按姚恩仁)이 『연주부지(兖州府志)』를 찬하였다. 서문에서, “연군(兖郡)은 노국의 옛 도읍지(鲁之故都)이다. 오부자(吾夫子之)의 고향이다.” 허다한 역사가들이 말한 정론은 “연은 천하의 으뜸이다”, 연주는 4천년 동안 단정하고 신의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연주가 중국 유교문화의 발상지라는 말이 긍정적인 말로 들리는 이유이다. 연주는 중국 역사문화의 이름있는 성(城)이다. 역사 이래 역사에 감격하여 저술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글은 단국의 위치가 제수와 황하 사이에 있었고, 여기에 살았던 단국 사람의 기질이 단정하고 근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단국(檀國)의 단(檀)이 단(端)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史记』는 단국의 역사를 하나라의 역사로 둔갑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하(负夏)、부하(负瑕)、하구(瑕丘)、하현(瑕县)、동노( 东鲁)、사구성(沙丘城)、노군(鲁郡)、동군(东郡)、연군(兖郡)、하양(嵫阳)、자양(滋阳), 역사는 요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4번이나 5번째 성을 쌓으면서, 약 4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历史可追溯到尧舜时代, 经过了四迁五筑的变化. 距今约四千多年历史〟)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8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동호황비( 东胡黄罴)와 산융융숙(山戎戎菽)의 의미 동호는 조선계 흉노인이다. 단군조선 때부터 혈연관계가 유지되어 왔다. 『유가백과』는 동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东胡 東胡後来分支出為鮮卑與烏桓。現代語言學者一般認為东胡语言是一種古代蒙古語,属蒙古语族,今蒙古族可能為東胡後裔。“东胡”一名最早见于成书年代可能是先秦的《逸周书》,《逸周书·王会篇》提到 “东胡黄罴,山戎戎菽”,据近人考证认为,早在商初,东… 동호 동호(東胡)는 진조선과 번조선이 진(秦)에게 멸망한 후에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으로 갈라졌다. 현대 언어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둥후 언어가 몽골어족에 속하는 고대 몽골어라고 믿고 있으며, 오늘날 몽골족은 둥후의 후손이다. 동호라는 단일한 이름은 문자로 연대를 기록하기 시작 했을 때에 연대에 최초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선진(先秦) 역사서 『일주서(逸周书)』에서, 『일주서 왕회편(逸周书·王会篇)』에 보인다. “동호황비( 东胡黄罴), 산융융숙(山戎戎菽)이다, 근래 인간의 고증에 따르면, 최초로 장사를 하였다,.. (노중평의 주, 1. 선비와 오환은 단군조선의 방국(方國)으로 생각되는 국가이다. 선비는 풍이족 때부터 오랜 세월을 함께 내려오는 인종으로 보이고, 오환은 한국 때 한인천제의 비(妃)가 된 항영(姮英)을 배출한 조이족(鳥夷族)에서 내려온 인종으로 보인다. 동호황비(东胡黄罴)는 동호의 인종이 황비(黄罴)라는 뜻이다. 즉 황웅족(黃熊族)이라는 뜻이다. 산융(山戎)은 산에 사는 융족(戎族)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숙(菽, 大豆)을 농사지었다. 이 숙(菽)은 숙맥(菽麥) 할 때의 콩이다. 당시에는 콩의 크기가 작아서 숙과 맥이 잘 구분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숙을 재배한 지명이 역사에 남아 있는데, 그 지명이 두만강(豆滿江)이다. 농사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견융족이 두만강에 진출하여 콩 농사를 지었음이 산융융숙(山戎戎菽)이라는 문자에서 밝혀진다. 두만강은 융족이 재배(栽培)한 콩을 수송하는 수송로(輸送路-水送路?)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 2. 융족의 수령의 이름이 풍(豊)인데, 이 풍은 그가 콩 농사를 지었음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그가 콩을 재배하여 제기 두(豆)에 담아 놓은 형상의 문자가 풍(豊)이다. 풍에서 그가 두를 발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콩을 두에 담아 제사 지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두만강 가에서 콩을 재배한 동호족의 조상이 된다고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 3. 박연암 (1737년(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출생) 의 열하일기(熱河日記) 피서록(避暑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哥吾里來者 高麗來也... 乃變三魚 諸人問何謂三魚 蘇魚 在道稱伴當 是蘇魚也... 哥吾里 胡兒群呼 哥吾里 是洪魚也... 위 문장에서 가오리(哥吾里), 소어(蘇魚), 반당(伴當), 홍어(洪魚)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 말은 지나인들이 한국을 폄하나 할 때 쓰는 말이다. 박지원의 시대라면, 조선시대이고, 조선조 말기에 해당하는데, 이 시대에, 한국의 조상 나라와 조상을, 지나인이 물고기에 비유히여 폄하하고 있다니, 이 글을 처음 읽는 분들은, 놀라고 화가 나야 마땅하리라고 본다. 가오리라는 말은 고구리를 물고기 가오리에 빗대어 폄하한 말이다. 고구리(高句麗)가 나라가 망하여, 그 백성이 납작 엎드려 산다는 뜻이 가오리라는 말속에 있다. 소어(蘇魚)라는 말은 밴댕이라는 말이다. 조선엔 소씨들이 많이 살았고, 번조선은 소씨 문중에서 서여(胥餘)라는 분이 세웠다. 서여는 단군왕검의 아들인 부여의 사위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분이 한인천제의 61세 손인 소풍(蘇豊)이라는 분인데, 조선이 진(秦)에게 멸망하면서, 번조선의 백성을 대표하는 소성인(蘇姓人)을 폄하하여 소어라고 했다. ‘밴댕이 속 알머리’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나라가 망하여 나라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의 속알머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당(伴當)이라는 말은 밴댕이라는 말이다. 밴댕이는 소어라는 말이다. 또 반당과 소어와 홍어(洪魚)는 같다고 말했다. 위 문장 제인문하위삼어(諸人問何謂三魚)는 사람들이 세 마리 물고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그 대답이, 삼어(三魚)라는 말이다. 삼어는 가오리, 소어, 홍어를 말한다. 가오리는 고구리를 뜻하고 또 홍어와 같다고 말했다. 소어는 조선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속담에 ‘홍어 좃도 좃이냐’는 말이 있는데, 이 속담에는 고구리를 업신여기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을 충어라고 칭하며, 국을 끓여 퍼먹던 중국인이, 탁록에 귀근원(歸根苑)을 짓고, 그 안에 삼조중화당(三祖中華堂)을 만들어, 그들이 원수로 여기던 치우(蚩尤), 유망(楡罔)을 강제로 모시고, 수천 년 동안 황제(黃帝)만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떠들어 오던 망발을 접었다. 그 짓을 한 사람들이 중국 공산당이다. 치우천왕을 삶아 국을 떠먹던 반 인간적인 망종들이 갑자기 치우천왕을 조상으로 모신다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공산당이 하는 짓은 그렇다.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유사 공산당들도 지금 한국에서 하는 짓이 중국 공산당이 하는 짓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7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하였다.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지금의 낙양은 역사에서 사라진 번조선의 역사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상고시대에는 낙읍(雒邑)이라 하였다. 별칭이 성주(成周)다. 유기백과는 낙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雒邑 (重定向自成周) 雒邑,別稱成周,中國古地名,在今洛阳市。 西周周成王時,周公建成雒邑(今瀍河两岸),又称成周。西周灭亡后,周平王东迁成周,从此又称王城。周敬王前510年修筑新都(今洛阳白马寺以东),新城沿用「成周」之名,俗稱「東周」;旧城称为「王城」,俗稱「西周」。 武王克殷后,回师途中在“管”停留,然后向西至“… 낙읍 (스스로 주국(周國)을 완성하다) 낙읍은 별칭이 성주(成周)다. 중국의 옛 지명이다. 지금의 낙양시에 있다. 서주(西周) 주국(周國)의 성왕(成王) 때, 주공(周公)은 락읍(지금의 瀍河)을 완성하였다. 또 성주(成周)라고도 칭했다. 서주(西周)가 멸망한 후에, 주국(周國) 평왕(平王)이 성주(成周)로 동천(東遷)하였다. 이곳을 주국의 왕성(王城)이라고 하였다. 주국 경왕(敬王)은 BC 510년 신도(新都)를 수축(修築)하였다. (지금의 백마사(白马寺)가 있는 동쪽이다.) 새 도성은 성주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속칭 동주(東周)가 된 것이다. 옛 성은 왕성(王城)이라 하였다. 촉칭 서주(西周)다. 무왕(武王)은 은국(殷國)을 정복한 후에, 회군하는 도중에 '관(管, 客舍)'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갔다. (노중평의 주, 1. 낙읍에는 상고시대 역사 미스터리가 숨어 있다. 주국의 성왕과 주공은 같은 사람이다. 왕이라는 호칭이 생기기 전에 공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ㅇ마 왕이라는 호칭이 생겼을 때는 성왕 때였을 것이다.) (주, 2. 주국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동천(東遷)하였다. 모국을 구성했던 래이족은 제국(齊國)과 초국(楚國)에게 쫓겨 동천했는데, 주국은 스스로 동천했다. 동천하고서 새로운 국도를 수축했다. 수축했다는 말은 옛날에 있던 도성을 개축(改築)했다는 말이다. 주국이 개축한 구도(舊都)는 래이족, 즉 모족(牟族)이나 탁족(涿族-涿水에 사는 苗族)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주국은 그들의 구도(舊都)를 접수하여 수리했다고 볼 수 있는 곳이다.) (주, 3. 대문구(大汶口)는 번조선의 영토였는데, 지금 대문구의 박물관에는 번조선의 유물이 많이 수집되어 있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6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노중평의 주, 본문에 곤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름 기풍을 지명 곤오로 대체해 쓴 것이다. 유독 기풍을 곤오로 바꾸어 쓰는 데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유는 기풍을 감추자는 의도일 것이다. 기풍의 아버지 육종과 노동은 같은 사람 陆终(?—?),或作祿終,中国上古人物,颛顼的玄孙,称的曾孙,老童的孙子,吴回的儿子。根据《史记·楚世家》记载,吴回继承兄长重黎 祝融的职位。 육종(陆终)은 혹은 녹종(祿終)으로 쓰기도 한다. 중국 상고시대 인물이다. 전욱고양(颛顼)의 현손이다. 증손(曾孙)이라고 하가도 한다. 노동의 손자다. 오회(吴回)의 자식이다. 『사기 초세가』에 근거 기록이 있다. 오회는 중여(重黎)의 장형이다. 축융의 직위를 가지고 있다. (노중평의 주, 중여(重黎)는 오회의 동생 순(舜)이다. 그가 우산(羽山)에서 중여곤(衆艅鯀)을 죽였다.) 根据安徽大学收藏安大简的记载,老童生有四子分别是重、黎、吴和回,生昆吾、参胡、彭祖、会人、晏安、季连六人的是黎,并没有陆终其人,黄德宽认为陆终是祝融之误[1]。 안휘대학 수장품인 안대간(安大简)에는 노동이 아들 넷을 낳았다고 하였다. 차례로 말하면, 중(重), 여(黎), 오(吴)와 회(回)이다. 노동이 곤오를 낳았다. .... (노중평의 주, 노동이 곤오를 낳았다는 기록이 수상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다 인명(人名)을 썼는데, 기풍(己豊)만은 인명을 쓰지 않고 지명을 썼기 때문에 수상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엔 무엇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된다. 말 못 할 사정은 그가 제곡고신과 싸웠고, 문중을 이탈하여 단국에 귀순했고, 기성을 소성으로 변성 하여 문중에서 그를 퇴출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소성으로 변성했기 때문에 오가(五加) 부라(部羅) 중에서 견융(犬戎)이 아닌 구가(狗加)로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고 본다. 그는 부여(夫餘)의 사위가 되어 서여(胥餘)로 불렸고, 그의 아들 비서갑(非西岬)의 딸 하백녀(河伯女)는 조선 제실(帝室)에 납비(納妃) 되어 조선의 신모(神母)가 되었다.) 老童(?—?),中国上古人物,根据《史记·楚世家》记载,他叫卷章。《世本》作老童。他的儿子重黎和吴回相继在帝喾时作了祝融,就是后代传说的祝融氏。 据安徽大学收藏安大简的记载,老童是颛顼的儿子,出生即满头白发,好像小老头儿。颛顼占卜得知这个满头白发的婴儿将会子孙蕃衍兴旺,喜出望外,就给他起名叫老童[1],老童生有四个儿子分别是重、黎、吴和回,其中第二子黎生昆吾、参胡、彭祖、会人、晏安、季连六人,没有陆终一代[2] [3]。 위 기록은 야사(野史) 같은 기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축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축융은 불의 신이다. 불의 신을 화정(火正)이라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축융이 된 사람은 한국을 세운 적제(赤帝) 한인천제였다. 그의 축융을 계승한 사람이 전욱고양이었다. 전욱고양의 축융을 계승한 사람이 제곡고신이었다. 「부소보서」는 기풍이 한인천제의 축융을 계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초세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육종의 대가 끊어졌다’고 하였다. 기풍의 대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가 조선으로 갔기 때문일 것이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5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주국은 고구리의 시조 고주몽의 탄생국으로 볼 수 있는 나라다. 백제 온조왕의 탄생지를 그의 이름 온이 들어간 지명 온현에서 찾아 내듯이 고주몽의 탄생국을 지명 주국(邾国)에서 찾아낼 수 있다. 邾国 (分类周代诸侯国) 安其實當為祝融黎的第五子、老童的孙子,老童生有四个儿子分别是重、黎、吴和回,其中第二子黎生昆吾、参胡、彭祖、会人、晏安、季连六人。 周公旦攝政時期,為了削弱諸侯國的勢力採取分而治之的辦法,借邾國夷父顏有功於周室,封其次子友郳地,故叫郳國。因從邾國分出,故名小邾國。… 주국 (주대 제후국 분류) 안은 실제로 축융(祝融) 여(黎)의 5남이자 노동(老童)의 손자다. 노동은 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중(重), 여(黎), 오(吴)와 회(回)의 4남을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인 여(黎)가 곤오(昆吾)를 낳았다. 셋째는 호胡), 넷째는 팽조(彭祖), 다섯째는 안안(晏安), 여섯째는 계연(季连) 등 6명이다. 주공(周公) 단(旦)이 섭정할 때, 제후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분할하여 다스리는 방법을 취하였는데, 옛날에 주국 이부(夷父) 안(顏)이 주실(周室)에 공이 있어, 차자(次子)를 우예지(友郳地)에 봉하고, 예국이라 하였다. 주국(邾國)이 갈라져 나가 소주국(小邾國)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중평의 주, 소주국은 고주몽의 탄생지일 가능성이 있고, 고주몽이 세운 고구리의 첫 이름일 수 있다고 본다. 역사에 나오는 고구리의 첫 이름은 구구리(高句驢)였다. 『유기백과』는 노동(老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老童(?—?),中国上古人物,根据《史记·楚世家》记载,他叫卷章。《世本》作老童。他的儿子重黎和吴回相继在帝喾时作了祝融,就是后代传说的祝融氏。 据安徽大学收藏安大简的记载,老童是颛顼的儿子,出生即满头白发,好像小老头儿。颛顼占卜得知这个满头白发的婴儿将会子孙蕃衍兴旺,喜出望外,就给他起名叫老童[1],老童生有四个儿子分别是重、黎、吴和回,其中第二子黎生昆吾、参胡、彭祖、会人、晏安、季连六人,没有陆终一代[2] [3]。 노동(老童, ? - ?), 중국 상고 때의 인물이다. 『사기·초세가』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권장(卷章)이라고 한다. 『세본』에 노동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들 중려(重黎)와 오(吴), 회回)가 잇따라 제곡(帝喾) 때의 축융(祝融)을 계승하였다. 바로 후대에 전설인 축융씨(融氏氏)로 불리게 되었다. 안후이(安徽)대학이 수장(收藏)한 안대간(安大简)의 기록에 따르면, 노동은 전욱(顓顼)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백발이 되어 마치 어린 영감 같았다. 백발의 갓난아기가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여 이름을 노동(老童)이라 지었다. 노동은 중(重), 여(黎), 오(吴)와 회(回)라는 네 아들을 낳았다. 그 중 둘째 아들인 여(黎)가 곤오(昆吾), 셋째 아들인 호(胡), 팽조(彭祖), 후이인(会人), 안안(晏安), 계련(季连) 6명을 낳았다. 육종(陆终) 세대는 없었다. (노중평의 주, 오와 회는 오회(吳回)다. 오회(吴回,中国神话人物,祝融之弟。)오회는 축융 순의 동생이다. 2사람은 아황(娥皇)의 공동 남편이다. 다른 기록에서는 육종이 낳은 자손이 기록되어 있는데, 봉문에서는 육종의 대가 없다고 기록하였다. 번조선의 역사를 없애기 위한 기록으로 볼 수 있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4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견융은 BC 238년에 번조선에게 멸망한 번조선을 구성한 주류 인종이다. 『유기백과』는 견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犬戎 (重定向自周文王攻犬戎之战) 周幽王,從此周朝遷都雒邑,是為東周。《史記》記載其夏后氏後裔之一。 傳說犬戎是黃帝的後裔之一,居於融父山,父為白犬,故以得名。 犬戎是一支属于戎狄集團的部落,傳說一直是三代王朝之大敌。《后汉书》载:“昔高辛氏(尧帝的父亲)有犬戎之寇,帝患其侵暴,而征伐不克。”周文王时周… 견융 주(周) 유왕(幽王)은 이때부터 주왕조(周朝)가 랑읍(雒邑)으로 도읍을 옮겨 동주(東周)가 되었다. 『사기』에는 그가 하후씨(夏后氏)의 후예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견융(犬戎)은 황제(黃帝)의 후예 중 한 명으로 축융(祝融)의 땅 부산(父山)에 살았다. 아버지가 백견(白犬)이 되어 이름을 얻었다. 견융(狄戎)은 융적집단(戎狄 集团)에 속하는 부라(部羅)다. 전설에 의하면 줄곧 하은주(夏殷周) 3대 왕조의 대적(大敵)이었다. 『후한서(後漢書)』에 "옛 고신씨(高辛氏, 요제(尧帝)의 아버지)에 견융지구(犬戎之寇)가 있었다. 고신에게는 견융이 침공하여 폭력을 행사함으로 우환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그 침공을 받았으나 정벌하지 못했다."... (노중평의 주, 이 길지 않은 문장에는 번조선과 고신국의 악연과 같은 관계가 기술되어 있다. 당시에 견융족의 우두머리는 기풍이었다. 그는 하백이므로 제위(帝位)에 있는 유망의 후예인 전욱고양 쪽에서 하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다음 제위는 황제의 후예인 제곡고신이 물려받았다. 그 다음 제위는 전욱고양의 아들 중여곤이 물려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기풍은 축융의 땅 부산에 살고 있었다. 이 말은 당시에 축융이 전욱고양이었으므로 기풍이 전욱고양의 땅에 살았다는 말이다. 백견(白犬)의 백에는 맏형이라는 뜻이 있다. 백견이 전욱고양의 맡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전욱고양의 맏형의 아들이 기푸이 수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게 된다. 백적(白狄)은 기풍 아버지의 부족으로 볼 수 있고, 적적(赤狄)은 기풍의 부족으로 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제곡고신에게 융적이 하은주 3대에 걸처 제곡고신의 원수가 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번조선이 하은주 3대에 원수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때 황제의 집안과 유망의 집안은 싸우지 않았다. 다만 단국과 싸웠을 뿐이다. 화하족은 당시의 기풍을 그들이 사는 곳의 지명을 따서 곤오라고 불렀다. 제곡고신과 기풍은 불주산 전투에서 싸웠으나, 이 싸움에서 전욱고양이 져서 기풍이 제곡고신에게 쫓겨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풍은 단국의 홍제 8년에 홍제에게 귀순하였다. 홍제는 숙신의 땅을 기풍에게 주어 살게 하였다. 이듬해에 제곡고신이 수동(綏東)에 침입했을 때 기풍이 물리쳤다. 이 싸움에서 기풍이 이긴 이후에, 홍제의 태자인 단군왕검은 오가(五加)를 모아 배달나라를 선포하였다. 단군왕검은 그로부터 20년 후에 국호 배달나라를 조선으로 바꾸었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4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중국 역사에서 중국으로 불리는 중원을 차지했던 민족은 하나 둘이 아니다. 맨 먼저 구한족(九桓族, 9개의 태양족)으로 불리는 9개의 인종이 방국(方國) 체제로 연합하여 한제국(桓帝國)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한제국이 붕괴하고 배달나라가 들어서 구려족(九黎族, 9개의 미스터리한 인종)이 역시 방국체제를 만들어 살고 있었다. 이 역사를 뒤바꾼 것은 황제(黃帝)로 불리는 미스터리한 지도자와 실체가 없는 한족(漢族)이라 불리는 인종이었다. 배달나라의 잔존 세력들이 호시탐탐(虎視眈眈) 중원의 패권을 노리고 도전장을 내었다. 1차로 도전장을 낸 인종이 조선으로 불리는 방국체제의 국가였다. 1차 조선은 단군조선으로 불리다가 2차 조선은 삼조선으로 불렸다. 이 삼조선의 체제가 삼소로 불리는 방국체제였다. 삼조선의 멸망기에 들어섰을 때, 도전장을 낸 것은 영정이 이끄는 선비족이었다. 영정의 꿈은 단일 제국으로의 중원 통일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은 대제국 조선을 멸망시켰을 뿐, 31년의 꿈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다음에 한이 들어서서 단일국가로의 꿈을 실현하여 했으나, 중원 역사에서 단일 통일국가 실현의 꿈은 2백 년을 넘지 못한다는 역사의 선례를 만드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대제국을 꿈꾸었던 일본도 한국을 점령하고 36년을 통치하는 데에 그쳤다. 역사에서 사라진 한국, 배달나라, 조선의 저주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실책은 삼조선의 역사를 대륙 역사에서 지우는 일이었다. 삼조선의 후예인 한족(韓族)에게 단군조선이자 진조선의 군주 단군왕검은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었고, 단군조선의 방국이었던 번조선은 강력한 최고 문명국가의 상징이었다. 중원을 일시적이나마 통일을 꿈꾸었던 여러 인종은 단군조선과 번조선을 역사에서 지우고 자신의 역사를 그 위에 올려세우려 하였다. 이 실책이 대를 물려가며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꿈을 가졌던 인종은 민족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아야 하였다. 지금은 이 역사를 중원에서 중공이 되풀이하며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여러 인종이 죽여버린 한국과 배달나라와 조선의 역사를 중원의 역사로 되살려내는 일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2백년의 역사를 뛰어넘는 역사를 가진 인종은 앞으로도 세상에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아래에 소개하는 사라진 번국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 2. 番国 (分类周代诸侯国): 番国,作潘、鄱,己姓,遠古時代祝融八姓之一的昆吾之後,与楚國同源。西周及其以前的番國應在河南温縣附近。西周末年南遷到淮河上游,今河南信阳一帶;春秋早期以后,又東遷到河南固始、淮濱地區。西周中晚期,番國貴族就世代在周王室任要職,比如《詩·小雅·十月之什》的“番維司徒”。番氏也嫁女於周…, 번국(番国)은 판(潘)과 포(鄱), 기성(己姓)으로, 고대 축융(祝融)의 팔성(八姓) 중 하나인 기성 풍(豊)이 곤오(昆吾)에서 살기 시작한 인종인데, 초국(楚國)의 인종과 뿌리가 같다고 알려졌다. 서주(西周)에 속하기 이전의 번국은 허난성(河南省) 원현(温縣) 근처에 있었다. 서주말(西周末)에는 남천(南遷)하여 화이허(淮河) 상류, 지금의 허난(河南) 신양(信阳) 일대로 옮겼고, 춘추초기(春秋早期) 이후에는 동천(東遷)하여, 허난(河南) 구시(固始)와 화이빈(淮濱) 지역으로 옮겼다. 서주 중후반(西周中晚期)에 번국 귀족(番國貴族)들은 대대로 주 왕실(周王室)의 요직을 맡았는데, 예를 들면 '「시·소아·시월(詩·小雅·十月之什)」에 기록된 번유사도(番維司徒, 번족의 관직이 사도라는 뜻)와 같은 것이었다. 번씨는 주왕실(周王室)에 시집 갔다. (노중평의 주, 번조선 왕실의 천도(遷都) 코스는 허난성의 온현(溫縣)에서 시작하여 서주말에는 남천(南遷)하여 회허강(淮河) 상류에 정착하였고, 춘추 초기에는 동천(東遷)하여, 허난(河南) 구시(固始)와 화이빈(淮濱) 지역으로 옮겼다. 이 코스는 마한(馬韓)에 속하게 되는 인종의 이동 코스가 된다고 볼 수 있는 이동 코스이다. 마한에 속하게 되는 인종 중에서 백제인(百濟人)들의 이동 코스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온현은 백제의 초대왕 온조(溫祚)의 탄생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온조의 조(祚)는 그의 집안이 제관(祭官)의 집안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의 집안이 번조선에서 제관의 집안이었다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 2. 온조의 집안이 마지막으로 이동한 곳이 고시(固始)다.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백제의 국도를 고마(固麻)라고 했다고 했는데, 고마의 근원이 고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시는 멸망한 번조선, 즉 번국의 마지막 국도였다고 볼 수 있다.)느낌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