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12.
전라남도 47명, 태어나서 1등을 처음해보았다. 31세의 나이로 큰아이를 낳고, 큰아이 3세에 00면에 첫발령지로 출근을 했다.
세상을 다 얻은듯했으나 출근길 1개월만에 내가 맨끝임을 인지했다. 첫업무는 제증명과 민방위다. 1개월은 업무를 몰라서 사무실 여자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했다. 출근하면 선배들 일준비를 먼저 준비해주고 제증명 금고빼는일부터 시작했다. 가끔 민원이없을때는 공익요원과 벽치기 짤짤이를 하면서 심심함을 달랬던것같다
1년 정도 주민등록, 제증명과 민방위업무를 뒤로하고 복지업무를 2년차 시작한다. 노인의날 업무, 기초수급업무 다양한 복지업무를 접하게 된다. 이때 전남도 면접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떻게 공무원을 입사하게되었고, 사회복지는 뭐라생각하는가를 물었던것같다. 나는 공무원을 들어오기위해 사회복지자격증을 취득했고 복지는 잘 모르지만 일을 하게되면 자연히 터득하게 될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나에게 적응하기 힘들거라고 했다. 복지는 공무원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이해할수없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조금씩 느낄수있었다. 복지는 공무원이 아니였다. 첫 자극은 낫을 가지고온 할아버지엿다. 00마을 기초수급자였는데 아주 잘 사는 노인이었다. 부양가족인 딸의 소득과 재산초과로 기초수급이 중지된 노인이었다. 중지된다음날 낫을 숨겨서 면사무소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숨고 도망가기바빴다. 그때도 00면에 복지는 2명을 근무하고 있었다.
두번째 자극은 사이비목사님이 정신장애인 여성과 컨테이너박스에서 살고있다는 제보로, 경찰서, 소방서, 면사무소 복지팀 출동이었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그곳에서 나의 역할은 그 정신장애인 여성의 치마를 입혀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노리개로밖에 취급되지않은 정신장애인 여자와 정신장애를 치료한답시고 데리고 광양의 컨테이너에 살고있는 미친 사이비목사는 본능에 가까운삶을 살고있는 짐승만도 못하는 삶을 살고있는 미친이들이었다. 우린 정신장애여성을 광양우리들병원에 입소시키고 돌아왔다. 이 역할이 나에겐 두번째자극이었다. 그리고 복지에대한 환상은 완전 접었다.
세번째 자극은 0촌마을 전입온 부산나이트클럽 종사자부부이다. 이 부부는 섬진강의 다슬기를 잡아서 생활을 하고있었다. 자녀들이 3명이나 되어서 생활고가 만만찮게 보였다. 한번은 만취상태로 전화해서 도와주지않는다고 칼을 들고 전임자를 공격했다. 전임자는 도망가기 바빴고 나는 112에 전화하기 바빴다. 나이트클럽 종사자부부는 그곳생활을 접고 시골로 전입을 했었다. 그러나 시골생활도 만만치않아 자녀들을 양육하기에는 생활비도 빠듯할정도였다. 그래서 아마 정부지원을 받고자 술마시고 우리에게 공격을 한것같았다. 10년이 지난 후 다시 그00면으로 전보되어 가보니 그분은 이장단 협의회장이 되어있었고 현재 섬진강주변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때의 장면이 눈앞에 선하게 비쳐졌다
네번째 자극은 노인의날 행사준비를 할때였다. 2005년 둘째아이 임신으로 만삭된몸으로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계속 입덧을 심하게 하면서 무대주변에 계속 토하고 다니면서 행사를 준비했다. 그때는 부녀회보다 농가주부가 훨씬 활동을 많이할때이다 그래서 나는 농가주부 대표에게 노인의날 상을 추천했다. 열심히 활동한 이에게 상을 추천했지만 나에게 날아온 화살은 정00이의 옷을 벗긴다는 말이었다. 그때당시 나는 이해할수없었다. 당연히 열심히 활동한사람에게 상을 추천햇고 노인의날 밥을 해준 사람에게 상을 주었는데 왜 새마을에서 노발대발하는지 이해할수없었다. 시간이 지나니 옷을 벗긴다는 말은 공무원을 그만두게 한다는 말이었고, 노발대발 하는 이유는 새마을이라는 대표단체가 있는데 왜 농협에서 주관하는 농가주부한테 상이 돌아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10년이 지난 후 다시 그 00면으로 가보니 그분이 제일먼저 나에게 나타나셨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고00이라고 기초연금 중지시키지 마라는 내용을 말씀을 하셨던것같다. 나는 그럴자격도 없는데 그분생각은 아직도 10년전 나에게 했던 행동을 기억하셔서 내가 00면으로 전보하니 그분도 그때의 나에게했던 공격이 떠오르는듯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은 중증장애인 자녀를 집에서 돌보고계시는 안타까운 분이셨다. 집안이 힘이드니 세상모든일이 좋게 보이진않으셨을듯하다. 그후로는 그분과의 오해는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고스란히 나에게 남아있다.
복지는 나에게 늘 힘든 업무였다. 어려운사람을 진정으로 대해야하고 사람을 상대해야하는 업무이기에 눈높이를 맞추지않으면 일하기가 힘든 업무였다. 그래도 담당마을 출장을 가거나 기분조은 목사님을 만나면 나에게 힘이되고 나를 지지해주신 분이 계셨다, 내가 가장기억에 남는일도 나를 사랑해주신 목사님이셨다.
정00목사님과 사모님
잊을수없는 두분이시다. 이분들은 청년사역을 하시면서 00면의 아동은 다 케어하셨던 두분이시다. 유치원과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아동들은 이분들의 손을 거치지않은 사람이 없을정도였다. 지금도 순천시내 내적치유로 삶이 어려운 가정 회복하기 힘든 상처투성이가족을 깊이 케어하신다. 나의상처도 이분들덕분에 많이 사라지지않았나 하는 생각을 많이해본다. 00면 떠오르면 이두분을 잊을수없다,
감리교회 목사님 현재 나이는 50대 초반이지만, 20년전에는 30대로 혈기왕성한 나이에 청년사역을 하셨다. 순천대앞에서 청년카페도 크게 운영하셔서 그곳아이들이 사회적경험을 그 까페에서 처음 했었던것같다.
과거 20년전 한부모가정이 있었다. 아빠는 한달에 한번 오고 자녀들만 산골깊숙히 살고잇는 한부모가족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늘 남학생 아이들이 방안가득있었고 옆집에는 홀애비가 살고잇어서 늘 그집만가면 맘이 무거웠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로 생각난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남자아이가 살고있는집인데 아빠는 한달에 한번 방문한다, 덤프트럭 운전을해서 전국으로 운송업을 하신분이라 집안아이들은 늘 방치된채 남매만 살고있었다. 나도 뭘모를 초임에 아이안전이 걱정이 되었는데 목사님부부도 이 가정이 위태로웠나보다. 이 둘을 목사님집에서 양육을 했다. 그러던중 여자아이가 도벽이있어 사모님 신혼예물을 가지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래도 어린 사모님은 찾으려하지않으시고 어린아이들사역을 계속 하고계셨다. 20여년간 어린이집 운영 지역아동센터 운영하다가, 현재는 노인센터를 운영하고 계신다.
이들부부의 사역과 이들부부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20년간 정말 크다.
이런분들이 사회 곳곳에 소리도 나지않게 조용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잇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내척치유를 통해서 살아움직이게 도와주시고, 어려운학생들 장학금을 꾸준히 주어서 사회적 성인으로 자랄수있게 도와주시고 배고픈아이 도시락을 무상으로 배달해주고 부모가 없는아이 축구로 세상시름잊게 해주시고 나는 세상살면서 이분들이 살아있는 하나님같았다
세상엔 도움을 받는사람보다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많다는걸 이곳에서 알게되었고 이런고마운사람들이 읍면동별로 계시다는걸 가는곳마다 발견할수있었다. 지금 내가 근무하는곳도 소리없는 천사들이 참 많다. 조건없는 도움을 주신분들이 정말많아서 순천이라는 동네는 작지만 강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