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사랑과 이별
백면라살 수라아와 구양적, 모용쟁은 모두 일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 묘지에 눕힌 일속의 모습은 너무도 평온하고 고요해 보였다. 세 사람을 향한 그의 미소 띤 얼굴은 모든 속념에서 해탈되어 아무런 근심도 괴로움도 없어 보였다. 이제 그는 극락 세계에 이르러 더는 세속의 풍진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리라.
백면라살 수라아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적아, 이제 그만 저분을…… 묻어 드리자."
구양적과 모용쟁은 사부를 부축하여 한쪽으로 비켜서게 한 뒤 묻기 시작했다. 봉분을 한 뒤 구양적은 팻말을 세우기 위해 옆에 뒹구는 나무토막을 집어 들었다. 그가 팻말에 일속의 이름을 새기려 고 하자 백면라살이 말렸다.
"그분은 생전에 이름을 남기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돌아가셔서도 남이 자기를 두고 시끄럽게 구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야."
그녀의 어조는 너무나 담담해서 조금 전까지의 슬픔이나 고통의 기색은 흔적조차 없어 보였다.
무덤을 마저 정리하고 아홉 번 큰절을 한 뒤 구양적이 사부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백면라살 수라아는 생각을 더듬어 본 뒤 입을 열었다.
"적아, 너와 나는 이 중원에서 해야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동생을 잃어버렸으니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구양적은 그 동안 동생 일엔 마음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사부의 말에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대답했다.
"만일 사부님께서 나서신다면 저는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놈들의 무예가 어찌나 대단한지 저 혼자서는 당해 낼 수가 없었거든요."
백면라살이 말했다.
"난 그 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사부는 북강에서 가장 이름난 고수지. 악인으로 소문이 난데다 그 놈 스스로도 자기를 대악인이라고 자처하고 있느니라. 그 놈은 남들이 싫어하는 일만 저지르는 데, 동생이 그 놈들 손에 들어갔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구나."
모용쟁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난 정암에서 도망쳐 나오다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시 남쪽으로 간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사부님이나 정암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난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 사람들과 함께 북강에 가는 게 좋겠어. 만일 이들을 도와 구양봉을 찾게 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지.
"선배님, 저도 둘째 공자를 찾는 데 동행하면 안 될까요?"
백면라살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되고말고. 원한다면 함께 가자꾸나."
세 사람은 함께 북강을 향해 길을 떠났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가까스로 북강에 당도하여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유운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 사람은 몹시 기뻤다. 이제 유운장에만 가면 구양봉의 행방을 알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유운장에 당도한 그들은 멍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운장은 온통 폐허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담벽 하나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도처에 쥐들이 득실거렸으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세 사람은 반나절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 길을 걷다가 한 인가에 들러 물어 보니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라 했다.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유운장에서 불이 났는데, 피해가 어찌나 심했던지 장원 사람들이 거의 다 타 죽고 겨우 몇몇 사람만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장원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나쁜 짓만 일삼아 왔던지, 큰불이 나자 사람들은 가서 구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손뼉을 치면서 통쾌해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고 이제 그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그곳에 가끔 귀신이 나타났었다고 했다. 야밤 삼경이면 누군가가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귀신조차 머물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구양적이 다급해서 물었다.
"노인장, 작년에 이 부락에 한 서생이 왔던 일을 모르십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모르겠소. 그런 사람이 있었더라도 불에 타 죽었을 거요. 생각해 보시구려, 그 부락 사람들은 모두 무예에 능통한 사람들인데도 불에 타 죽었는데 서생이야 더 말할 게 있겠소? 죽은 게 틀림없소. 암 죽었고말고……."
구양적은 동생이 죽었으리라는 말을 듣자 눈물이 솟구쳤다.
"네가 죽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모용정은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위로했다.
"구양 오라버니, 동생이 꼭 죽었다고는 볼 수 없으니 너무 상심 마세요."
"그 앤 무예를 모르니 살아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오. 그 애가 무슨 수로 이런 상황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었겠소?"
구양적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쪽에 서 있던 백면라살 수라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적아, 울지 마라. 너나나나 고달픈 인생을 타고난 사람들 아니더냐? 그 애 역시 밤낮으로 고생만 하며 살아왔는데, 그게 어디 죽는 것보다 나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인생이란 그렇듯 덧없는 것, 너와 나도 함께 따라 죽으면 되는 일이다. 그 애가 며칠 먼저 저 세상에 갔기로 그게 무슨 슬퍼할 일이겠냐?"
구양적은 울음을 멈추고 멍청히 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적아, 우리가 그 앨 찾지 못할 바엔 다시 얼음 동굴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우리 둘이 그곳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죽는 게 시름을 놓는 일이다."
"사부님, 전 고생하며 그 애를 키우면서 일심으로 그 애가 우리 구양씨 가문을 빛내 주기를 바라 왔어요. 하지만 그 애가 이렇게 죽을 줄, 이 북강 노독물의 손에 죽을 줄을 어찌 알았겠어요?"
구양적이 절망스럽게 말했다. 백면라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적아, 내 짐작으로 너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앤 북강의 대악인 신독행의 손에 떨어져 이미 잘못된 것 같다. 그러니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좋겠다."
구양적은 여전히 비탄에 잠겨 헤어나지 못했다. 구양적은 백면라살 수라아에게 무예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얼음 동굴에서 사문의 독공을 배우다 보니 몸에 변이가 생겨 더는 당당한 사내 구실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몸에 번진 음독(陰毒)은 그의 육체뿐 아니라 성미까지도 달라지게 했다. 이 일은 구양적 자신은 물론 백면라살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와 백면라살 수라아는 정이 들 대로
들어, 그는 백면라살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장 가까운 애인이기도 했다. 정이 통할 때면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고 몇 날이고 그 차가운 얼음 동굴에서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만나던 날로부터 지금까지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었으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구양적은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 끝에 하루라도 빨리 동생을 장가들여 가업을 이어 나가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모용 낭자와 동생이 가까워지길 바랐던 것도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런 변을 만나 동생을 잃게 될 줄이야.
한참을 비탄에 잠겨 있던 구양적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을 따라 얼음 동굴로 가겠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며 강호의 인사들과도 교제를 끊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동생이 죽어 구양 가문의 대가 끊겼으니 제가 죽은 후 부모님을 만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가슴을 치며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백면라살 역시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구양 형제 두 사람이 중원에 들어와 재앙을 당한 것은 순전히 자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비통에 잠겨 있는 구양적을 바라보다가 문득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모용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용쟁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구양씨 가문에 후손이 없겠는가? 난 반드시 구양씨 가문에 대를 잇게 해 줄 테다. 내겐 대사막에서 몇십 년 살아오는 동안 모아 둔 재산도 좀 있다. 구양씨 가문에 후손이 생기게 된다면 재산을 내주어 그가 서역 사막에서 으뜸가는 부자로 살 수 있게 해 줄 테다.'
백면라살은 기인으로서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용쟁에게 말했다.
"모용 낭자, 내가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는데."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신데요?"
"적아, 내가 모용 낭자와 할말이 있으니 넌 자리를 좀 비켜 주렴."
백면라살이 담담한 얼굴로 구양적에게 말했다.
구양적이 자리를 피하고, 두 여인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용쟁은 백면라살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사뭇 긴장해서 바라보았다.
백면라살이 신중하려 애쓰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듣기로 그대는 정암에서 도망쳐 나왔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모용쟁은 머리를 끄덕였다.
백면라살이 탄식조로 말했다.
"구양씨 가문의 두 형제는 모두 훌륭한 자질을 타고난 사람들이야. 굳이 비교하자면 구양봉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구양봉이 중원에 들어와 늙은 독물 신독행의 손에 들어가 비명에 죽었으니 이렇게 애석할 수가 없군. 그래, 이젠 적이 혼자 남았는데 어떻게 살아 나갈지 걱정이야."
진지하게 듣고 있던 모용쟁이 의아한 듯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처리에는 매우 과단성이 있던데 지금은 뭘 저렇게 주저하는 거지?'
모용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어려워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백면라살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낭자는 과연 시원시원한 사람이로군. 그럼 솔직히 얘기하지. 낭자한테 한 가지 묻겠는데, 낭잔 우리 적이의 아내가 될 생각이 없나?"
모용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구양적의 사부가 자기한테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녀는 비록 구양적과 동행하여 대사막을 지나 중원으로 오는 동안 몇 달 간 함께 지내기는 하였지만 구양적과 인연을 맺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백면라살 수라아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우리 적이 정도면 괜찮은 성격이지. 난 그 애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 보아 아는데, 그 앤 말수는 적어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야. 그 앤 강호의 보통 사나이들과는 달라. 낭자만 좋다면 나는 두 사람을 혼인시킬 생각인데, 어떤가?"
모용쟁은 망설였다. 뜻하지 않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성격과는 달리 수줍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모용쟁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선배님, 저는 정암 문하의 사람이에요. 비록 출가한 몸은 아니어도 백타산군 임일천한테 잡혔을 땐 옥쇄(玉碎)하리라 작심했었어요. 다행히도 하늘이 돌보셨는지 구양 공자가 절 구해 주었지요. 하지만 요즘 들어 저는 자꾸만 생사니 인생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뜬구름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저는 정암에 돌아가 삭발하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칠까 해요."
백면라살 수라아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어린 나이에 벌써 속세를 등지고 살 생각을 품고 있다니. 이 애가 불가에 귀의한다면 꽃다운 나이에 아름다운 용모가 아깝지 않나.'
백면라살이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단지 우리 적이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낭자를 위한 것이기도 해. 낭자는 자기가 얼음누에의 한독(寒毒)을 받은 걸 알고 있나? 적이 말에 의하면 낭자는 일속을 구하려고 손끝으로 얼음누에를 쳐서 떨어뜨렸다면서? 낭잔 그 얼음누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를 거야. 손발이나 피부에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온몸에 독이 퍼지지. 남녀가 동시에 중독되
면 여자 쪽이 좀 늦게 발작하지만 정작 발작하면 더욱 심해져. 그것은 여자가 음(陰)에 속하므로 음독을 막아내지 못하는 까닭이야. 낭자가 만일 얼음누에에 닿았다면 즉시 약을 복용해야 해. 그러면 보름 사이에 천천히 회복될 수 있어. 낭자가 살아나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어. 한 가지는 대리 단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양지공을 배우는 것이지. 일양지공은 천하양강(天下陽剛)의 기
로서 이 공력을 닦으면 몸에 있는 독을 천천히 없앨 수 있어. 다른 한 가지는 적이와 가까이 하여 부부의 정을 맺는 것이야. 이렇게 하면 적이가 기혈로써 낭자를 도와 천천히 독을 제거해 줄 수 있지. 나는 여자니까 자연히 낭자와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이고, 적이는 사내니까 낭자와 인연을 맺어 낭자를 구할 수 있단 말야. 그 애는 인정도 있고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 분명 낭자를 도와줄
거야."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낭자한테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우리 적이한테 시집오는 게 좋아. 내가 방금 말한 운남 대리의 단씨들이 배우는 일양지공을 임잔 배울 수 없을 거야, 단씨들이 일양지공을 자기들 가족들에게만 전수하고 외전(外傳)하지 않기 때문이지. 뿐만 아니라 일양지공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사내들이야. 여인은 음에 속하는 탓에 그런 격렬한 무예를 배우기란 거의 불가능하거든."
모용쟁은 백면라살의 말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이렇게 죽고 만단 말인가? 옛날에 집에서 글을 읽고 시를 읊을 때는 시구가 그리는 아름다운 정경이 그림 같아 인간이 시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 강변에 쪽배 한 척이 떠 있고 그 위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지. 갓 성년이 된 듯 소년 티를 채 벗지 못한 모습으로 그는 배 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정기가 번뜩이는 두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는데,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어. 시 속의 아름다운 아가씨는 바로 나였거든.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내가 꿈꿔 왔던 그런 청년을 만나 보지도 못한 채 어찌 죽을 수 있겠어?'
백면라살 수라아가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내가 따져 보니 일속 스님이 잘못된 그 시각에 낭자도 독에 중독된 셈이니 반달 후면 발작이 일어나게 돼 있어. 일단 발작이 시작되면 10일 후에 다시 발작하는데, 그 다음엔 닷새 만에, 그 다음엔 3일 만에, 종국에는 하루에 세 번씩 발작하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끝에 숨이 끊어지게 되지."
들을수록 소름이 끼치는 얘기였다. 모용쟁은 몹시 놀라면서 한 편으론 반신반의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백면라살의 말은 사실이 아닐 거야. 자기의 제자를 위해 꾸며낸 말이 틀림없어. 나를 구양적에게 시집가게 하려고 저렇듯 무서운 말들을 꾸며 대는 거야.'
백면라살은 모용쟁의 마음을 읽은 듯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낭자 손의 소음심경맥(少陰心經脈)으로 시험해 봐. 내력이 소충(少衝), 신문(神門), 통리(通里), 삼혈로부터 심계로 흐르는데 기가 잘 통하는지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은 모용쟁을 더더욱 긴장시켰다. 모용쟁은 급히 백면라살이 하라는 대로 내력을 운행시켜 보았다. 처음에는 이상한 감각이 없었는데 청령(靑靈), 극전(極全)에 이르러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전신의 내력이 당장에 흩어져 다시 모이지 않았다. 모용쟁의 얼굴은 즉각 잿빛으로 변했다.
백면라살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모용쟁은 말문이 막혀 백면라살을 바라보았다. 구양적과 결혼하여 서역의 대사막에서 구양적의 무시무시한 사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죽기보다 싫었다. 모용쟁은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그녀는 체념한 듯 말했다.
"만일 구양 오라버니께서 원하신다면 전 선배님의 말씀대로 하겠어요."
구양적은 사부가 모용쟁과 무슨 말을 하는지 속으로 몹시 궁금했다. 지금껏 모든 일을 자기와 함께 처리해 오던 사부가 오늘은 어쩐 일로 모용쟁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사부가 모용쟁에게 사제간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모용쟁에게 떠날 것을 권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다면 구양적으로 하여금
직접 모용쟁과 작별하게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사부는 필경 매우 중요한 일을 놓고 모용쟁과 의논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윽고 백면라살이 함빡 웃음을 머금고 구양적에게로 왔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구양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어제만 같은데 이렇듯 자라서 어른이 된 것이 꿈만 같았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구양적이 대견했다.
"적아, 내가 이미 모용 낭자와 의논했다. 네가 원한다면 모용 낭자와 인연을 맺는 게 좋겠다. 네가 모용 낭자와 혼인하면 구양씨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고 제단의 향불도 꺼지지 않게 될 게 아니냐?"
구양적은 비로소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이 됐다. 그는 비록 사부를 존경하고는 있었으나 버럭 화가 났다.
"제가 언제 장가들고 싶다고 했습니까? 제가 모용 낭자한테 장가들고 싶다고 했냐구요!"
백면라살은 유난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적아, 너의 쓰린 마음을 난 누구보다 잘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문이 번성하고 대가 끊기지 않기를 바라지. 넌 구양씨 가문의 장자인데 너의 동생마저 죽지 않았느냐? 만일 네가 장가를 가지 않는다면 구양씨 가문의 선조들에게 죄스러운 일이 아니냐?"
구양적은 백면라살 수라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전 조상들께도 떳떳하고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게 살렵니다. 사부님께서 저더러 장가를 가라고 하시면 전 그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모용 낭자를 색시로 삼으라는 겁니까?"
백면라살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적아, 그럼 달리 보아 둔 처녀라도 있다는 거냐? 그렇다면 그 처녀를 만나 보도록 하자꾸나."
구양적은 대담하게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말씀드리지요. 제가 장가들려는 여인은 바로 사부님이십니다. 바로 백면라살 수라아입니다!"
백면라살은 순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후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구양적의 어깨를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적아, 넌 이제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하지만 어찌 자기 사부를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을 거다. 게다가 너의 사부가 무슨 좋은 물건이라고 이러느냐? 사람들이 이전에 날 백면라살이라고 불렀던 건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형편없이 변했는데 어디 볼 데가 있다고 그러는 거냐? 적아, 어리석은 생각일랑 말아라."
구양적이 고집스레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제게 장가들라 하면 전 장가를 들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사부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느 날 얼음 동굴의 추위 속에서 백면라살 수라아가 구양적을 꼭 끌어안은 후부터 두 사람의 정은 싹터 올랐다. 구양적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사부의 품에서 자라났다. 그는 그때부터 각박한 인정과 거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어머니의 품에서 느끼는 그런 포근함과 따사로움을 수라아에게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구양적이 이렇게 말하자 백면라살은 큰 위안을 받기는 했지만 가
슴이 쓰려 왔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적아, 나는 이제 여자라고 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이 세상엔 훌륭한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하필 나를 고를 게 뭐냐?"
사부를 바라보는 구양적의 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면라살이 말을 이었다.
"내가 중원에 있을 때 그 단씨 성을 가진 공자를 만났더랬다. 그 때 그 공자는 풍류남아였는데 그와 나는 첫눈에 정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며칠을 보냈는데, 그분은 내 성미가 좋지 않은 걸 모르고 있었지. 난 그분한테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는데, 어느 날 그분은 조용히 내 곁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 후 난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를 잊지 못한 채 급기야 병
이 나서 오늘날 이 꼴이 된 거지. 네가 날 처음 보았던 그 무렵부터 난 하루하루 나빠지고 있었던 거야. 적아, 넌 선녀와 같이 아름답던 시절의 내 모습은 본 일이 없어. 백면라살이란 이름이 괜히 얻어진 건 아니었단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의 감미로운 회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적아, 나도 널 좋아한다. 만일 내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내가 널 거절할 이유는 없다. 우린 자연히 함께할 것이고 누구도 우릴 갈라놓지 못할 거다. 나와 일속의 일은 이미 끝난 지 오래고, 나와 너 두 사람은 뜻깊은 한 쌍의 연인이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내 몰골로는 불가능하다. 네가 날 원한다 해도 내 쪽에서 원하지 않아. 난 이미 그 얼음 동굴로 돌아가기로 작심했다. 돌
아가자마자 동굴의 출입구를 막아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낼 생각이다. 그게 가장 현명한 처사야……."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가득 눈물이 괴었다.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조금만 일찍 만났더라면 이렇듯 가슴 아픈 일은 없었을 것을……."
그녀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조용히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그 삭수(溯水) 가에서
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았네
그녀의 머리칼은 치렁치렁하고
두 눈썹은 반달 같았네
그녀의 걸음걸이 가볍고
날씬한 그 자태 더욱 정답네
여인이 웃는 그 웃음
낯을 찡그려도 사랑스럽게
옥패(玉佩)를 끌러 내어
양인(良人)에게 드리네
착수는 유유히 흐르는데
그 속에서 음악이 들리는 듯
난 그이를 따르려니
한평생 갈라지지 않으리
하지만 해돋기를 기다려
풀었던 옷고름을 매노라
향차(香車) 떠나가매
기쁜 비 분분히 내리네
사람마다 날 노래하며
가인(佳人)을 얻었다 하네
졸지에 깨고 보니 꿈이요
몸 돌이키니 곁에 사람이 없네
하건만 그림자는 보이어
따라가려 해도 깊은 물이 앞을 막네
가슴이 터지게 부르고 불러도
그 사람은 이미 눈에 안 보이니
손에 쥔 그 옥패를
품속 깊이 간수할 뿐이어라…….
구양적은 시와 문장을 공부한 적은 없으나 사부가 읊은 시가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면라살이 읊은 것은 강에서 물려받은 옥패[江上玉佩]라는 제목의 옛이야기에서 따온 시였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한 풍류 공자가 강변에서 노닐다가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과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두 사람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 중 한 여인을 마음속으로 우러러 사모하게 되는데,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감히 그러지 못한다. 그런데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에게 방긋 웃어 보인다. 이 웃음이 어찌나 교태가 넘치는지, 그것을 본 공자는
삽시에 머리에서 삼혼(三塊)이 달아나고 발 밑으로 육백(六魄)이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는 급히 그 여인을 뒤쫓기 시작한다. 늘씬한 몸매에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교태스러운지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뒤쫓아가노라니 두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그를 흘깃 쳐다보는데 그 눈길에는 은근한 유혹의 빛
이 깃들어 있다.
그는 그 두 여인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말한다.
"소생은 강변에서 우연히 두 미인을 만나 보게 되었사온데, 무슨 큰 바람이 있는 건 아니고 다만 두 분께서 소생한테 자그마한 물건을 남겨 주시면 기념으로 삼고자 합니다. 소생이 늘그막에 그것을 가지고 자손들에게 자랑할까 해서지요. 내가 젊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만났는데 그들에게 이런 예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두 여인은 서로 마주보다가 붉은 옷을 입은 여인 쪽에서 입을 연다.
"언니, 자손들에게 자랑하겠다는데 언니가 저분한테 무엇인가 좀 드리지 그래?"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이 언니인 모양으로, 수줍음을 타는 그녀는 당장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모기만한 소리로 말한다.
"내가 무슨 물건을 드리겠니? 네가 드리려무나."
불은 옷을 입은 여인이 몸에 달고 있던 옥패를 풀어 공자에게 주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공자님께선 다정한 분이시니 밤에 주무실 때 가장 좋기는 이 옥……."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녀는 실언을 했다고 느꼈는지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을 끌고 얼른 달아나기 시작한다. 두 여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잠시 후 먼 곳에서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가졌던 옥패를
가생(佳生)한테 주었나니
그대 만일 날 생각하려거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노랫소리는 점점 약해졌으나 메아리가 되어 길게 울려 퍼진다.
백면라살은 이 시를 읊어 자기와 구양적 간의 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경중월수(鏡中月水) 중의 꽃이요, 강 위에서 옥패를 남겨 주었다는 것들은 허구로 꾸며 넣은 이야기로 무슨 대단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양적은 그녀의 운율 속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으므로 그녀에게 화답할 수가 없었다.
백면라살은 가볍게 탄식하며 막했다.
'걱아, 너의 마음을 알고 있다만 넌 구양씨 가문을 위해 꼭 아내를 얻어야 한다. 이 일만큼은 내 말을 듣는 게 좋아."
"사부님……."
구양적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백면라살이 가로챘다.
"적아, 네가 만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난 네 앞에서 죽을 작정이다. 명전 씨까지 죽었으니 난 이 세상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고는 없다. 내가 그냥 해 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구양적이 눈물을 흘리면서 비로소 대답했다.
"좋습니다, 사부님. 사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 쌍의 강호의 아들딸이 산기슭 나무 아래에서 사부인 백면라살의 주례하에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우선 하늘과 땅에 첫 절을 올리고, 두 번째 절은 부모님께, 그리고 마지막 절은 나에게 해라. 너희들은 오늘부터 부부간이니라. 모용 낭자는 하루 속히 완치되어 구양씨 가문의 대를 잇고, 두 사
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두 사람은 사부에게 절을 올렸다.
땅거미가 질 무렵 그들 세 사란은 일찌감치 여관에 들었다.
백면라살이 구양적에게 말했다.
"적아, 넌 이제 혼례를 치렀다. 강호의 아들딸들이야 워낙 이것 저것 따질 처지가 못 된다. 모용 낭자의 상태가 몹시 위급하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내 보기엔 너희들이 오늘 밤에 한 몸이 되는 게 좋겠다. 모용 낭자의 상처를 되도록 빨리 치료하는 일이 중하니라."
구양적과 모용쟁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밤이 깊었는데도 구양적은 여관 뜰에서 서성거리며 방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등잔불을 밝혀 놓은 두 방을 바라보았다. 방 하나에는 그의 사부가 들어 있다. 그와 가장 가까운 백면라살이. 오늘부터 그는 다시는 사부와 포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더는 사부의 구양적이 아니라 모용 낭자의 남편이며 구양씨 가문의 가장인 것이다. 하
지만 그는 얼음 동굴에서 뜨겁게 지냈던 일이며 10여 년 간 사부와 나눈 육친과도 같은 정에 사로잡혀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사부님께서 오늘 밤을 어찌 견디실까? 눈물이나 흘리시지 않을는지? 혹여 사부님께서 상심하여 돌아가시지는 않을지……."
구양적은 사부가 묵고 있는 방문을 슬며시 밀어 보았다. 문은 안으로 잠겨 열리지 않았다.
구양적이 소리쳤다.
"사부님, 문 좀 열어 보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에서 백면라살의 말이 들려 왔다.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어서 가거라, 너의 새 사람이 널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구양적은 문을 짓부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는 복잡한 심정으로 문 앞에 멍하니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백면라살은 사위가 잠잠하자 구양적이 간 줄 알고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구양적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당황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적아, 돌아가서 쉬려무나."
구양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백면라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방문을 닫은 뒤 구양적의 손을 잡고 모용쟁의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모용쟁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데도 고개를 들어 누가 들어오는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은 아주 작고 초라했다. 백면라살은 주인에게 오늘은 두 후배들의 특별한 날이니 방안을 깨끗이 해 달라고 미리 부탁해 두었었다. 그래서인지 방안은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객점 주인이 일부러 가져온 붉은 이불이 가져올 때 그대로 얌전히 놓여 있고 창턱엔 팔뚝만큼 굵은 초가 아름답게 타고 있었다.
백면라살은 모용쟁에게 다가갔다.
"모용 낭자, 낭자와 적이는 혼례를 치렀으니 오늘 밤을 기쁘게 보내야 해. 내가 적이한테 낭자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리 일러 두었으니 시름을 놓게."
방안의 분위기는 매우 싸늘했다. 구양적은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런 첫날밤을 맞이할 줄은 이제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사실 모용 낭자를, 사부에 대한 감정과는 다르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길에서 만난 여인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일 생각은 해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부터 모용쟁은 그의 아내가 되고 가장 가까운 사람
이 되는 것이다.
한편 모용쟁은 가슴이 타서 재가 될 지경이었다. 그녀가 꿈속에서 그리던 낭군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밤부터는 꼼짝없이 구양적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자 백면라살이 웃음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새 사람들이 신방에 들게 될 때에는 복남복녀(福男福女)들이 이부자리를 펴 드려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는 그 사람들이 없구나. 그러니 나라도 대신할 수밖에. 나는 비록 타고난 운명이 이렇지만, 너희들이 금슬 좋게 잘살 것을 축원한다."
말을 마친 뒤 백면라살은 신발과 버선을 차례로 벗기 시작했다. 한쌍의 유연하고 미끈한 다리가 드러났다. 순간 모용쟁과 구양적은 깜짝 놀랐다.
'백면라살 수라아가 저렇듯 아름다운 발을 가진 여인이었다니……."
모용쟁은 속으로 감탄했다.
만일 이 여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 신비스런 발만 본다면 사내가 아닌 같은 여자끼리라도 그 매력에 심취될 것 같았다.
'보아하니 구양 오라버니의 사부님은 이전엔 아주 절색이었겠어.'
구양적은 백면라살과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도 모용쟁과 마찬가지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사부님은 이런 발을 갖고 있었구나. 이렇게 훌륭한 발을 갖고 있었구나……."
백면라살은 웃음 어린 얼굴로 천천히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이불을 펴면서 노래를 불렀다.
붉은 비단 이불을 펴고
함께 기쁘게 잠자리에 드네
자손이 끊이지 말고 근심 걱정 사라지라
원앙침이라 원앙침
원앙침을 베고서
밤낮으로 즐겨 보세
사내도 탐이 났고
여인도 혼이 나갔는데
두 원앙, 생사를 같이하네.
백면라살은 정성들여 이불을 펴고 베개를 놓은 다음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또 휘장을 쳐 주면서 노래를 계속했다.
함께 기쁘게 침대에 들어
붉은 파도 일면
두 남녀 얼마나 기쁘랴
아름다운 머리 풀고 옷고름 끄르노라면
너와 나 상사(相思)가 예서 생겨나리.
이것은 혼례 때 집빈인(執賓人)이 부르는 희사(喜詞)였다. 이전에는 혼례를 할 때 언제나 희인(喜人)들을 신방에 끌어들였다. 이런 희사들은 각양각색이지만 하나같이 남녀간의 정사를 노래하고 기쁨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백면라살은 만면에 웃음을 담고 성의껏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노래 부르다 말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혼례는 못해 보았어. 이 희사들은 모두 내가 어렸을 때 혼례식에서 얻어들은 것들이야. 전부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흥이 날 때면 두어 마디 부르곤 하지."
그녀는 다시 서성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밤은 그대의 가장 멋진 시간
새 사람의 꿈이런가
살결은 눈과 같고 웃음은 꿀과 같구나
마음 황황하고 얼굴 뜨겁고
발걸음 비틀거리네
하고픈 말 안 하고 애무도 멈추었거니
그게 어디 급한 일이랴?
새 사람들 머리 풀어 폭포처럼 드리우고
배우자 앞에 머리 숙여 맹세를 다지누나
희촉(喜燭)은 타서 눈물이 되고
새옷 가지런히 벽에 걸렸는데
갑자기 방이 어두워지매
만음월강(漫淫月光)이 빛나누나.
이 노래는 계속될수록 그 내용이 점점 짓궂어지는데, 나중에는 속삭이듯 부르다가 슬슬 밖으로 나가 문을 가볍게 닫는다. 그리하여 사람과 노랫소리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백면라살이 그렇게 사라지고 나자 모용쟁과 구양적만이 남게 되었다. 침묵 속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붉은 초는 백면라살이 꺼 놓았고 방문도 백면라살이 잘 닫아 놓았으므로 더 이상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구양적이 속으로 생각했다.
'모용쟁은 훌륭한 처녀다. 그녀가 나한테 시집오자니 속으로 원통했을 거야. 만일 동생이 죽지 않았다면 동생과 혼인시켰을 텐데. 동생이 이 여자와 혼인하면 우리 구양 가문도 빛낼 수 있고 나도 사부님과 생사를 같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모용쟁은 그가 한참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자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끄러워져서 조심스럽게 신을 벗고 옷을 벗은 다음 이불을 들추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몸을 벽 쪽으로 향하고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그녀는 내심 걱정을 했었다. 옷을 벗을 때까지만 해도 구양적이 다가와 거칠게 굴까봐 두려웠는데 다행히도 그는 그녀가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앉아 어둠을 지켜 볼 뿐이었다.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당신…… 이렇게 돼도 괜찮겠소?"
모용쟁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으나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구양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당신은…… 마음이 내켜서 이러는 게 아니지?"
모용쟁은 역시 대답하지 않고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저이는 서역 대사막의 으뜸가는 고수 구양적이다. 저이는 거친 사나이이기는 하지만 백타산군 임일천과 같은 소인배는 아니구나. 저이는 여자를 생각해 줄 줄 아는 사내야……."
밤이 깊어 하늘에서는 반달이 숨박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름다운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다시 얼굴을 내밀곤 했다.
달빛 아래 한 여인이 나무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인 듯 서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웃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머리를 숙여 자기의 그림자를 굽어보더니 중얼거린다.
"수라아, 수라아. 넌 알고 있느냐? 네가 지금 어디에 백면라살다운 점이 남아 있단 말이냐? 다만 너의 그림자만이 저렇듯 매끈하고 사람 꼴을 하고 있구나! 그것말고 너에게서 뭐 볼 게 남았느냐, 뭐가 남았어?"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만나지 않으려고
몸 움직여 장삿길에 나섰다네
오늘 저녁은 어떤 저녁이기에
화촉등광이 이리 밝으뇨.
젊고 건강한 시절 얼마나 오래 가랴
귀밑머리 이젠 백발이 되었구나
반생을 귀신으로 살던 옛일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구나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12년 만에
또다시 님을 만나게 될 줄을
님을 석별한 한이 가시기도 전에
아들딸 졸지에 성례를 치르는구나
태연히 사부의 위엄 갖추어야지
아들딸 술판을 벌이누나
밤비에 봄부추 잘라다가
새로 부엌에서 요리를 하노라
주인이 열 잔이나 잔을 비웠네
열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니
감정이 지나치게 부풀어오른 탓일까
내일이면 산악에 가로막혀
세상일 두 쪽으로 갈라지리라.
장시를 한 번 읊노라니 무예를 연마할 때보다 힘이 배로 드는 듯 했다. 그녀는 두보(杜甫)와는 달리, 벗들이 서로 만난 뒤 후일이 망망한 데 대한 감상으로 이 시를 읊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잊기로 했다. 이제 과거는 일속을 따라 묻혀 버렸고 구양적과 모용쟁을 따라 날아가 버렸다.
그녀에겐 이제 껍질만이 남았을 뿐 모든 것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