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어린 시절
1-20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천사의 증거와 찬송
[1-5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약혼한] [아내](전통사본--Byz A it vg 등)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때와 장소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온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때이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역사상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물이며 주전 2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다. 총독 구레뇨는 두 번 수리아 총독직을 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주전 10-7년경이고, 두 번째는 주후 6-9년이었다. 가이사 황제의 칙령은 구레뇨가 처음 총독이었을 때 내려졌던 것 같다.
마태복음 2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헤롯 대왕(주전 40-4년)의 죽음 이전이며, 그가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인 것,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신 것(눅 3:23), 디베료 가이사(주후 14-37)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에(눅 3: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 등을 볼 때, 그의 탄생은 주전 4~6년경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고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마 1:16, 20)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해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아내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그 여자의 남편’(마 1:19), 마리아를 ‘그의 아내’(마 1:20, 24)라고 표현했다. 마리아의 태 안에는 성령으로 잉태된(마 1:18; 눅 1:35) 아기가 다 자라 해산할 날이 되었다.
[6-7절]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톤 휘온 아우테스 톤 프로토토콘)[그 여자의 맏아들]을 낳아 강보[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올라갔을 때(마 2:1, 8, 16)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았고 포대기로 싸서 구유(소나 말의 먹이통)에 뉘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요한복음 1:1,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成肉身)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그는 자신을 심히 낮추셨다.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 즉 소나 말의 먹이통에 누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매우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는 세상에서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고 대속(代贖) 제물로 죽임을 당하기 위해 오셨다.
본문은 예수님을 ‘그 여자의 맏아들’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한 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음을 나타낸다. 전통사본 마태복음 1:25에도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가복음 6:3의 증거대로, 예수께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 남동생들과 여동생들이 있었다. 마리아가 평생 처녀이었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다. 천주교회는 이 외에도 마리아가 평생 죄가 없었고 승천하였고 죄인들의 중보자요 기도를 들으시는 자라고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잘못된 교리들이다.
[8-12절]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주의 천사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한 소식을 증거했다. 역사상 주의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종종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없다고 해서 사두개인처럼(행 23:8) 천사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주의 천사는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곁에 섰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 목자들이 그 천사를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을 때,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은 과연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크게 기뻐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그는 구주이시며 그리스도 주이시다.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그가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이심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낼 참 선지자, 참 제사장, 참 왕으로 오셨다. ‘주’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목자들은 가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증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를 통해 구주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고 또 증표까지 주셔서 그들로 구주 탄생의 소식을 믿게 하셨다.
[13-14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天軍)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BDAG)로다](전통본문)2) 하니라.
목자들은 홀연히 하늘에서 수많은 천군들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천사들의 찬송은 가사가 분명하였고 은혜롭고 아름다웠다. 그 찬송의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위에는 평화, 사람들 가운데서는 은혜로다”라는 것이었다. ‘지극히 높은 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이다(고후 12:2). 그 곳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또 땅 위에서는 평화와, 사람들 가운데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은혜와 평화는 구원의 원인과 그 결과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죄로 인해 심령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과 경제적 궁핍으로 평안을 잃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참 평안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장차 천국에서 충만한 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상당한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린다(요 14:27; 빌 4:4).
[15-20절]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 밤에 천사의 증거와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고 목자들이 그 천사가 말한 것을 확인하였고 그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알려 주었고 목자들은 하나님께 찬송하며 돌아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외양간에서 탄생하셨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셨고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하셨다. 그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마 20:28). 그는 자신을 비어 종의 모양을 가지셨고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5-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죄인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10절,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구주께서는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시는 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복된 일은 없다. 바로 이 일을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 사는 자들에게 은혜와 평안이다.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의 은혜의 결과는 평안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21-39절, 할례를 받으심, 시므온의 찬송, 안나의 감사
[21절] 할례할 8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로(창 17:10-11) 죄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한다. 할례 받은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다(갈 5:3). 예수께서는 죄 없으신 자이시며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며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구주이시다.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潔禮)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결례의 날은 레위기 12장의 규정대로 남자아이의 경우 출산 후 7일과 33일, 합하여 40일이 지난 날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함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율법대로 첫 남자아이를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고자 했던 경건한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경건하고 복된 가정에서 출생케 하셨다. 오늘날도 성경말씀대로 행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산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레 12:8).
그들이 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하려 한 것을 보면, 그들은 가난한 자들이었다. 여인의 자녀 출산 후 정결 의식의 일반적 제물은 번제물로 어린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이었으나,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가정에 출생하셨다. 부요하신 자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고후 8:9). 우리는 가난해지신 그를 통해 천국의 상속과 하나님 자녀 됨의 회복과 영생의 복을 얻었다.
[25-27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예수님을] 데리고 오는지라.
당시 부패된 종교 환경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자가 있었다. 사람이 항상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었다.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당시에 우선 로마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지 모르나, 그것은 그런 육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또한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회복,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임함을 의미할 것이다. 천국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 위로가 될 것이다.
시므온은 또한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성령께서는 그 위에 계셨고 또 그에게 죽기 전에 ‘주의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특별한 지시를 주셨다. ‘주의 그리스도’는 ‘주께서 보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참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그리스도이시며 시므온은 그를 보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의식을 위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 그를 만났다.
[28-33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요셉과 그의 모친](전통본문)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라운 증거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즉 ‘하나님의 구원’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사함이며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이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지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실 것이다(요 1:29). 그는 세상 모든 족속의 구주가 되실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바이기도 했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34-35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라는 말은 ‘넘어지고 일어섬을 위하며’라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떤 이들은 그를 믿어 구원을 얻고 어떤 이들은 그를 믿지 않아 멸망을 당함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되신다.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라는 말과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예수께서 당하실 고난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의 심히 악함이 잘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악의 극치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면, 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그토록 처참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는가! 사람은 참으로 심히 죄악되고 악한 존재이다!
[36-38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라는 여선지자는 나이가 매우 많았다. 그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었다. 15세쯤 결혼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는 당시에 아마 106세쯤(15+7+84) 되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마침 이때 나아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예루살렘에서](전통본문)3) 구속(救贖)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 종교적으로 부패했던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39절]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예수님의 탄생 사건에 관련해,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에 증거된 두 가지 사실들을 생략하고 있다. 첫째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이고, 둘째는 애굽으로의 피난 생활이다. 이 두 사건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결 예식을 행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본절(39절)의 중간 즈음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그 두 사건을 생략하였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독자적으로 자료들을 선택하고 저술하며 증거하였다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구주이시며 “이방 나라들을 비추는 빛”(눅 2:32)이시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믿었고 의지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 구원을 얻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엡 1:4)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그의 탄생은 만민에게 기쁜 소식이며 우리는 이 소식을 만민에게 전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인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 즉 죄사함이며 또한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이제 죄를 멀리하고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며 경건한 성도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셋째로, 구주 예수께서는 영광의 천국을 떠나 이 낮고 비천한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마구간에서 출생하셨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 소년 목수로 출생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으셨다. 부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다(고후 8:9).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겸비하심을 본받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40-52절, 예수님의 어린 시절
[40절] 아기가 자라며 [심령이](전통본문)4)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본문의 내용은 네 가지이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은 자라셨다. 그것은 몸의 성장을 가리킨다. 연약한 아기의 몸은 점점 소년의 몸으로 튼튼하게 자라셨다. 인간 예수님의 몸은 우리와 같이 자라셨다.
둘째로, 아기 예수님은 심령으로 강해지셨다. 아기 예수님은 몸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도 강하고 튼튼해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은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셨다. 아기 예수님의 심령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강해지셨다고 보인다.
셋째로, 아기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예수께서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요 1:14).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특히 지혜와 능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아기 예수님은 그의 신성(神性)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충만하셨을 것이다.
넷째로, 아기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셨다. 인간적 측면에서, 그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실 만한 자이셨다. 그에게는 원죄의 죄성(罪性)과 연약성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어린 아기들에게도 때때로 보이는 불만과 저항심 같은 것이 없으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히 그 위에 계셨다.
[41-47절]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요셉과 그 모친](전통본문)5)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랍비]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 1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다(출 23:17). 요셉과 마리아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부모의 품에 안겨서 혹은 조금 자라서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것이다. 그는 아기 때부터 경건 훈련을 받으신 셈이다.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요셉과 그 모친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으며 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소년 예수님은 선생(랍비)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계셨고 듣는 자들은 다 그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 확실히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지혜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서 엿보였다.
소년 예수님이 그 삼일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그가 어디에서 음식을 드셨고 어디에서 밤에 주무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이 본문은 삼일 후 요셉과 그 모친이 예수님을 발견한 것이 그가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때이었고 선생들이 다 소년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47절의 ‘지혜’라는 원어(쉬네시스)는 ‘총명’이라는 뜻이며 40절과 52절의 ‘지혜’라는 말(소피아)과 비슷하다. 예수께서는 아기 때에도 지혜가 충만하셨고 소년 시절에도 지혜와 총명이 뛰어나셨다. 그것은 다 그의 감추인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48-50절] 그 부모가[그들이]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무) 있어야 될[일들에 관계해야 할](KJV, NKJV)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마리아는 예수께 ‘네 아버지와 내가’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신가?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실제의 부친이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 예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그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라는 원문에는 ‘집’이라는 말(오이코스)은 없고 남성 혹은 중성 복수정관사(토이스)만 있다. 생략된 명사는 단수명사인 ‘성전’이나 ‘집’보다 복수명사인 ‘일들’(에르고이스)이 더 가능해 보인다. 이 구절은 옛날 영어성경(KJV)의 번역대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내 아버지의 집’이든지 ‘내 아버지의 일’이든지 간에 ‘내 아버지의’라는 말이 요셉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것은 그의 신성(神性)에 대한 소년 예수님의 증거이다. 소년 예수님이 열두 살 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이한 사실이다. 또 그는 열두 살 때에 벌써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 그 후 삼십 세가 되시기까지 그는 성경 연구와 기도로 그의 사명을 준비하셨을 것이다. 그의 인성(人性)에 감추인 그의 신성(神性)의 신비, 즉 그의 인성과 그의 신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결합될 수 있으셨는지 그 신비는 참으로 크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은 단지 한 인간이 아니시고, 단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셉과 그의 모친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메트 아우톤)[그들과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엔 휘포타쏘메노스 미완료과거시제와 현재분사)[계속 순종하셨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께서는 어린 시절을 갈릴리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어린 시절을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보내시며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계속 순종하시며 섬기셨다.
소년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계속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친히 지키셨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하였다(출 20:12). 조물주이신 그가 피조물에게 순종하셨다. 그러나 물론 인성에 있어서 그러하셨다. 소년 예수님의 순종은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 같은 오늘 시대를 위한 좋은 모범이 된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자녀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들도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계명을 순종하는 자로 키워야 한다.
[52절] 예수는[예수께서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절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에 대한 증거이다. 그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 지혜가 자라셨다. 사람의 지정의(知情意)는 그의 영혼의 활동이다. 예수님의 신성은 본래부터 지식과 지혜가 충만하시지만(40절), 그의 인성의 지혜는 자라셨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의 기능들의 성장과 함께 그의 지혜도 자라셨다고 보인다.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향 속에서 자라셨다고 보인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 키가 자라셨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계셨다. 그의 몸은 어린아이에서 십대의 소년으로, 20대의 청년으로, 그리고 30세의 성인이 되도록 자라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대로, 예수께서는 죄 없는 인격, 흠과 결함이 없는 인격, 곧 이상적 인격이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이셨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고 사람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본문은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의 신성(神性)에 관해, 예수께서는 아기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셨다. 또 그는 열두 살 되셨을 때 자신을 찾았던 그의 모친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에 관계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시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친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요셉도 그 모친 마리아도 소년 예수님의 말을 깨닫지 못했었다. 단지 마리아는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해두었다.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해야 한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단지 사람에 불과하셨다면, 그는 우리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죄인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속죄제물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없다. 그의 신성(神性)은 그가 평생 죄 없으신 사람이 되게 도우셨고, 또 그의 신성(神性)은 한 분이신 그가 많은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구주가 되실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 한 사람의 가치는 인류 전체의 가치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인성(人性)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몸과 키가 자라셨고, 심령이 강해지셨고 지혜도 자라셨다. 또 그의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그는 성장하실수록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하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본받아야 한다. 또 우리 자녀들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예수님처럼 심령이 강해져야 한다. 특히 경건과 도덕성에 있어서 그래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점점 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거룩하고 흠 없는 인격으로 자라감으로써 하나님에게와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우리는 경건 훈련을 힘쓰고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본받아 흠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고, 또 우리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대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들의 정상적 신앙생활이며 구원의 현재적 단계인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