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위치: 아프리카중앙
인구: 13,772,569명 (2023년 추계)
수도: 키갈리
면적 26,338.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르완다 공화국 (Republic of Rwanda)
기후: 열대성기후
민족 구성: 후투족(84%), 투치족(15%), 트와족
언어: 영어,킨야르완다어,프랑스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로마가톨릭(57%), 개신교(26%), 그리스도 재림교
화폐: 르완다 프랑 (Fr)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50
GDP: USD 9,944,000,000
인구밀도: 479명/㎢
전압: 220~230V / 50Hz
도메인: .rw
르완다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아프리카 중동부, 적도 이남의 내륙에 있는 공화국. 수도는 키갈리이며, 서쪽에 콩고 민주공화국과 키부 호, 북쪽에 우간다, 동쪽에 탄자니아, 남쪽에 부룬디가 인접해 있다. 역사적으로 소수 투치족이 다수 후투족을 지배해오며 반목하였고, 1990년 이후 르완다 내전이 일어나 5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자유기업 경제체제의 개발도상국으로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의 증가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자연환경
르완다는 해발 1,500m 이상의 고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나일-콩고 분수계의 일부를 이룬다. 서쪽 끝에 면적 약 2,700㎢의 키부 호가 있다. 키부 호의 물을 남쪽으로 끌어내고 있는 루지지 강이 콩고 민주공화국과 서쪽 국경을 이루며, 동쪽으로는 높은 고원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카게라 강(탄자니아와의 동쪽 국경을 이룸)의 낮은 늪지대 평원으로 이어진다. 남동쪽에는 수많은 호수가 사발 모양의 거대한 와지(窪地)에 흩어져 있으며, 북서쪽에는 비룽가 산맥의 화산 봉우리들이 솟아 있는데, 그 가운데 카리심비 산(4,507m)이 가장 높다(콩고-나일 분수령, 카리심비 산). 고도가 높기 때문에 평균 기온은 낮은 편이며(21℃), 건기(6∼8월)에는 연평균강수량(1,140㎜)의 1/20 정도밖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 국토의 2/5가 경작지이며 1/5은 목초지로, 염소·소·양 등을 많이 기른다. 서쪽에는 산이 많아 국토의 1/10 가량이 수목으로 뒤덮여 있으며, 더 높은 북서쪽 화산지대에는 대나무숲이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나무가 우거지거나(북동쪽) 풀이 있는 초원지대이다. 르완다에는 코끼리, 사자, 고릴라, 침팬지, 물소, 여러 종류의 영양, 사마귀멧돼지, 얼룩말 등 야생동물이 많다. 북동쪽의 카게라 국립공원과 무투라 금렵지에서는 희귀하고 큰 천산갑(개미핥기의 일종)을 비롯해 여러 종의 야생동물들을 보호하고 있다. 북서쪽에 위치한 화산(Volcanoes) 국립공원은 마운틴고릴라가 서식하는 몇 안되는 보호구에 속한다. 주요광물자원은 주석과 텅스텐이며 토탄, 콜롬보-탄탈석, 녹주석, 금도 매장되어 있다. 키부 호 근처에서는 천연 가스가 나온다.
국민
르완다에는 뚜렷한 3개의 인종집단이 있다.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후투족, 나일 원주민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투치족, 그리고 피그미 계통의 트와족이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모두 르완다어(키냐르완다어)를 사용하며, 공통의 사회구조와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르완다 사회는 소수의 투치족이 지주와 소 사육자로서 귀족계급을 이루고, 다수의 후투족이 영세농으로서 이에 종속되어 있는 형태를 보였다. 후투족은 투치족에게 노예와 같이 종속되어 가축떼를 돌보거나 플랜틴·수수·얌 등을 경작해야 했다(→ 봉신).
르완다 왕국의 통치체제는 피라미드형의 직계제로, 최고 통치자 므와미(mwami)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투치족 부족장들과 군사 대장들이 지배계급을 이루었다. 므와미는 이들을 통해 왕국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교대로 후투족의 지역농업집단을 지배하며 그들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트와족은 전통적으로 사냥과 도제업에 종사했다.
투치족은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하기 직전까지 지배권을 유지했으나 이후 후투족이 정권을 잡고 투치족에게서 땅을 빼앗았다. 많은 투치족이 인근 나라로 피해갔고, 후투족이 르완다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1994년 중반 투치족이 이끄는 르완다 애국전선(Rwandan Patriotic Front/RPF)이 무력으로 르완다를 장악했다. RPF의 승리 이후 200만 명 정도의 난민이 인근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도피했는데, 그 대다수가 후투족이었다.
르완다의 연간 인구 성장률은 적도 아프리카의 평균 수준으로, 2010년대 평균 인구성장률은 2%대를 유지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인구는 1,377만 2,569명으로 추산되며, 인구밀도는 525명/km²이다. 인구의 40%가 15세 미만이며, 인구의 29.78%가 도시지역에 거주한다. 평균기대수명은 68세이다.
언어
르완다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다. 프랑스어의 사용이 명목적인 것이지만 국제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프랑코포니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데다가 대외활동을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 등 영어권 동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펼치고 있어서 프랑코포니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실제로 르완다에선 프랑스어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 언어이다.
문화
르완다인의 문화에는 옛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수단은 음악으로 탄생·결혼·죽음·추수·사냥과 관계되는 의식에 노래와 춤이 따르고 북과 루룽가라는 현악기를 연주한다. 또한 구전문학이 풍부하며, 이는 신화·민간설화·속담·시 등으로 되어 있다. 대표적인 전통예술로 옷감짜기와 바구니만들기가 있으며 바구니에 나타나는 표현력과 기술로 그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알 수 있다. 부타레에 있는 르완다 국립박물관에서 전통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역사
르완다 원주민은 질그릇을 만들고 사냥을 하면서 살던 피그미의 일족인 트와족이지만 예로부터 후투족이 지배적인 인종집단이었다.
후투족이 언제 르완다에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4세기초 투치족이 나타날 즈음에는 이미 정착이 이루어져 있었다. 가축을 기르고 살던 투치족은 우수한 군사기술과 토지와 가축을 빌려주는 대가로 농경민인 후투족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5세기에 투치족의 지도자 루간주 브윔바가 키갈리 근처에 왕국을 세웠다. 현재의 르완다 중부 지방은 16세기에 병합되었으며, 변경의 후투족 공동체들은 17세기 므와미였던 루간주 은도리에 의해 정복되었다.
이 왕국의 경계는 19세기말 르완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되는 키게리 르와부기리에 의해 마무리되었으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집권적 군부조직을 갖춘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독일은 1890년부터 르완다를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으나 간섭을 하지는 않았다. 그후 1916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점령하자, 국제연맹은 1923년 루안다-우룬디를 벨기에의 위임통치령으로 인정했다.
그러다 1959년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므와미 키게리 5세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르완다는 1961년 1월에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그 이듬해 독립했다.
독립 후 많은 투치족들이 르완다에서 강제로 쫓겨났고, 1963년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르완다에 살던 투치족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사태로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던 투치족들이 분노해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새로운 정부는 부족 간에 적대감을 없애겠다는 공약을 했다.
새로운 헌법(1978)은 정부 정상화의 초석이 되었으며, 1981년에 치른 선거로 르완다는 1973년 군사 쿠데타 이후 선거로 세운 입법기관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세계 시장에서 커피 가격이 하락하고 심각한 가뭄으로 흉작이 들면서 르완다의 경제는 급격히 나빠졌다. 1990년 10월 RPF가 우간다로부터 침입해왔다. RPF의 대부분은 1960년대와 1973년에 인종간의 폭력을 피해 빠져나갔던 투치족이었다. 1992년 정부와 RPF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고, 1993년 8월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루샤 조약은 1993년말까지 RPF의 구성원들을 포함한 범과도정부의 구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후투족 지도자들은 권력분배를 거절했고, 과도정부는 수립되지 않았다. 19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대통령인 키프리엔 은타리아미라가 요격에 의한 비행기 추락으로 키갈리 근처에서 살해되었다. 이는 권력분배에 반대해온 르완다 대통령 경호대의 소행으로 추정되었다.
그 이튿날인 4월 7일 대통령직을 대행하던 수상을 비롯해 많은 온건파 후투족 정치가들이 살해되었고, 그후 수개월간에 걸쳐 군대와 대통령 경호대, 극단적인 후투족 민병대가 적어도 20∼50만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는데, 그 대부분이 투치족이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RPF가 군사행동을 재개하자 후투족과 투치족 가릴 것 없이 수만 명이 인접한 외국으로 도피했다. RPF가 전투중지를 발표하고 승리를 선언한 7월말까지 발생한 난민의 수는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으며, 이들 중 반 이상이 콩고 민주공화국에 있었다. 이들 난민 대다수는 1996년 말, 1997년 초에 르완다로 돌아왔다.
종교
인구의 2/3가 그리스도교도(대부분 로마 가톨릭)이며, 나머지 인구는 이슬람교와 전통신앙을 따른다. 약 89%가 후투족, 그 이외는 투치족이다. 82%가 기독교, 그 이외는 토착 종교 등이다.
르완다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한국은 1963년 3월에 르완다와 수교하고 1972년 8월에 주 르완다 대사관을 개설한 이래, 1975년 5월에 대사관을 폐쇄했다가 1987년 9월에 재개설했으며 1990년 11월에 이를 다시 폐쇄, 그 관할업무를 주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으로 이관했다. 이후 2011년 5월에 주 탄자니아 대한민국 대사관 키갈리 분관을 설치했으며 2012년 2월에 주 르완다 대한민국 대사관을 재개설했다.
르완다는 2009년 3월에 주 대한민국 대사관을 개설했다. 그간 한국은 몇 차례에 걸쳐 소규모 원조를 제공된 바 있다. 2000년 이후 양국 주요 인사의 교류가 활발해져 르완다는 2005년 10월에 무리간데 외교부장관, 2008년 5월 및 2014년 10월에 카가메 대통령이 방한했고 한국은 2006년 5월에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 2013년 1월에 김성환 외교통상부장관, 2014년 1월에 박병석 국회부의장이 방문했다.
한편 르완다는 북한과 1972년 4월에 수교했으며 1975년 8월에 주 르완다 대사관을 설치하고 양국 간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1992년에 재정적 문제로 공관을 폐쇄하고 주 우간다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르완다의 대한국 수출액은 2020년 기준 200만 달러, 수입액은 1,2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인쇄부품, 섬유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면역물품, 내연기관, 고등어 등이다. 한국은 르완다에 1987년부터 2016년까지 정부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로 9,360만 달러를 지원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경제과학기술협정(2006년 7월 발효), 해외봉사단사업에 관한 협정(2010년 2월 발효), 투자보장협정(2013년 2월 발효), 개발협력기본협정(201년 8월 발효),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차관협정(2014년 11월 발효)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르완다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파견되어 여러 분야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0년 기준 르완다에는 190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르완다 수도인 키갈리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228명의 르완다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