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임했다. 그러나 미국이 냉전시기부터 약소국, 특히 .. 주변국의 주권을 노골적으로 침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멕시코는 대표적인 케이스일 뿐이다. 역대 멕시코 대통령 3명이 미 CIA에 포섭된 협조자로 알려졌는데, 최근 미국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한 명이 늘어 4명이 됐다. 미국 좌파매체 <자코뱅>의 기사를 전한다.]
최근 공개된 미국의 기밀문서에서 멕시코의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전 대통령(1976-1982)이 취임 전 수년 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산’이었음이 드러났다. 지난 4월 공개된 '존 F. 케네디 암살사건' 관련 문서들에, 빌 스테비츠 요원이 동료들에게 이 정보를 공개한 내용이 있었다. 그는 포르티요가 “미국과 멕시코의 공동 전화도청 작전의 정보원이었으며, 멕시코 수도에서 수십 개의 회선에서 비밀리에 통화를 녹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CIA 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세부내용은 아직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사실이 폭로된 방식은 놀라웠다. 그러나 멕시코의 전 대통령이 미 정보당국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냉전시기의 미국-멕시코 관계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포르티요의 전임자 3명이 CIA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포르티요(1976~1982)는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1958-1964),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1964-1970), 루이스 에체베리아(1970-1976)에 이어 CIA와 관련 있는 연속 네 번째 대통령이다. 이들 4명 모두 멕시코에서 71년 동안 중단 없이 권력을 장악했던 제도혁명당(PRI) 소속이었다. .....(중략)
- 포르티요의 ‘더러운 전쟁’
특히 포르티요에 대해 권력층 엘리트는 일반적으로 반대파에 대한 그의 탄압을 경시하고, 포르티요 정권 시절의 물가 폭등과 외채 폭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냉철한 냉전투사이자 주요 인권범죄자인 매파였다.
포르티요는 1964년~1982년까지 좌파 반대자들과 무장 혁명조직을 상대로 ‘더러운 전쟁’을 벌인 (모두 CIA와 연관 있는) 대통령 3인방 중 하나다. 이 3명의 대통령 치하에서 멕시코의 군대와 DFS(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연방보안국), 준군사단체는 끔찍한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 보안당국 요원과 군인이 농민과 학생을 추적, 납치, 고문, 강간했다. 그들은 농촌지역을 공포에 떨게 하고 농작물을 파괴 했으며, 초법적 처형과 실종을 자행하는 등 무자비한 범죄를 저질렀다. 오늘날 많은 희생자들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안군이 많은 시신을 집단 무덤에 버리거나 군용기로 ‘죽음의 비행’을 해 태평양에 던져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에체베리아와 오르다스 전 대통령의 공포정치와 인권침해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포르티요가 더러운 전쟁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대부분 가려졌다. ..그러나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포르티요는 급진 무장세력과 좌파에 대한 증오를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는 또한 더러운 전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국가 보안기구의 전문화를 추진하고 사적인 악감정으로 국가탄압을 증폭시켰다. 최근 기밀해제된 문서로 인해 우연히 밝혀진 사실들은, 포르티요의 유산을 재조명하고 혁명가 탄압에서 그가 한 역할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 ‘냉전의 투사’ 포르티요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포르티요는 스페인 식민지시대부터 정치적, 학문적 엘리트 집안이던 가정에서 1920년에 태어났다. 포르티요는 자신이 귀족 가문에서 자랐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1945년 그는 PRI에 가입했지만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고, 수년간 변호사, 모교 교수로 일하며 멕시코 국립폴리테크닉대학에 재직했다. 그러다가 당시 대통령이 된 마테오스의 급부상에 영감을 받아 1960년 변호사 일을 중단하고 낮은 직책의 공무원이 된다. 이후 포르티요는 정치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오르다스 대통령의 비서실 차관 등 정부 고위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물론 이런 성과는 그의 어린 시절 친구로 그가 권력엘리트 클럽에 입성하도록 도와주고 그의 정치경력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체베리아 정권에서 그는 연방전기위원회 국장(1972)을 역임한 후, 재정 및 공공신용부 장관(1973-1975)을 지냈다.
포르티요는 다른 PRI 당원들과 마찬가지로 멕시코 냉전 정치의 특징인 이중잣대를 지녔다. 냉전이 한창일 때, 지배층은 멕시코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중남미의 군사정권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했다. 더러운 전쟁의 주역으로 유명한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조차 멕시코를 제3세계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멕시코는 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외치는 겉모습과 달리, 멕시코 정부는 중남미의 군사정권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기존 사회질서를 위협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자생적 운동을 탄압했다. 1940년~1982년까지 PRI 정권은 모렐로스 주의 농촌운동, 철도파업, 게레로에서 일어난 두 차례 무장운동, 1968년 학생운동, 도시게릴라 운동 등을 탄압했다.
1976년 포르티요는 어린 시절 친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취임 후 포르티요는 경기침체, 노동자의 불만,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싸움을 벌이는 도시게릴라 세력에 맞서 싸웠다.
- 개인적인 복수의 수단이 된 더러운 전쟁
<멕시코의 우리 식구: 윈스틴 스캇과 CIA의 숨겨진 역사>에서 저자 제퍼슨 모리는, 스캇의 지도 아래 멕시코에서 CIA의 전성기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미국의 반공 성전에서 멕시코가 얼마나 중심역할을 했는지 기록했다.
1940년대 후반,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과 미국은 멕시코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경쟁했고, 쿠바혁명 이후 그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미국은 멕시코시티에 있던 CIA지부를 가장 중요한 사무소 중 하나로 정하고 멕시코를 냉전의 격전지로 만들었다. 모리에 따르면 ‘멕시코시티는 미국, 소련, 쿠바, 멕시코 등 최소 4대 국가의 스파이들이 이권을 노리는 비엔나, 카사블랑카 같은 음모의 도시이자 첩보의 미로’가 됐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중남미 속에서 멕시코 정부는 자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과시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1970년대에 게릴라운동이 힘을 얻기 시작했을 때, 멕시코 정부는 게릴라운동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정보당국과 외교문서는 민주적 외관을 위협하는 무장 혁명단체의 성장에 대해 멕시코 정부가 걱정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보당국을 잘 알고 있던 에체베리아, 포르티요 전 대통령들은 멕시코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미국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70년대 농촌 및 도시 게릴라운동에 맞서 멕시코 국가보안당국의 모든 부서가 참여해 싸웠다. 멕시코 육군은 게레로 산맥에서 두 게릴라 조직에 맞서 악랄한 탄압을 자행했고, 가난한 농민공동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군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게릴라 공모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납치하고 성폭력을 저질렀다.
무자비한 미구엘 하로(일명 ‘엘 투르코’)가 지휘하는 약 200명의 정예부대인 '화이트 브리게이드'는 주로 도시에서 작전을 펼쳤다. 1976년 여름에 창설된 이 부대는 특히 가장 유명한 도시게릴라 조직인 ‘9월 23일의 코뮤니스타’(리가)를 공격했다. 경찰과 군인의 사망을 테러로 간주하는 DFS의 방침에 따라, 요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게릴라 조직원들을 소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물론 포르티요가 대선에 승리했을 때, 그는 특별한 동기가 없어도 더러운 전쟁에 힘껏 뛰어들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런데 1976년 8월, 대선 승리 한 달이 지나 '리가'는 포르티요의 여동생(마르가리타)의 납치를 시도했다. 리가는 기관총을 쏘며 멕시코시티 인근에서 마르가리타의 호위대를 가로챘다. 마르가리타는 살아남았지만, 경호원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르티요는 여동생의 납치 시도에 격분해, '화이트 브리게이드'에 '리가' 소탕을 명했다. 그때부터 게릴라운동 소탕의 성공기준은 ‘검거’가 아닌 ‘사살’이 됐다.
- 포르티요의 진정한 유산
그러나 포르티요는 전임자들처럼 멕시코의 민주적 외관을 유지해야 했다. 그는 니카라과의 소모자 대통령을 비난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산디니스타 혁명가들을 지지하는 등,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에 비해 온건한 외교정책을 펼쳤다. 또한 그는 1977년 선거정치 개혁과 1978년 사면법을 제정했다. 전자는 혁명적 좌파의 선거참여를 가능하게 했고, 후자는 다시 혁명 지하조직에 합류하지 않은 많은 게릴라 투사 출신들을 사면했다. 포르티요는 개혁 직후에도 리가가 조직을 해체하지 않은 것에 분노했고, 리가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개혁은 포르티요의 인권침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감추는 데는 성공했다. 실제로 에체베리아, 오르다스 전 대통령은 인권단체, 피해자, 전직 혁명가, 학자, 일반 시민의 쏟아지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오르다스가 사망했을 때, 국민은 그에게 1968년 학생 학살의 책임을 묻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에체베리아가 100세로 2022년 중반에 사망했을 때는 국민이 SNS에 서 그를 공격하며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멕시코 법원은 2009년 에체베리아가 학살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했다).
반면 2004년 포르티요의 사망은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언론은 포르티요의 처참한 경제정책, 특히 그가 1982년에 남긴 760억 달러의 대외부채와 215%의 인플레이션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인권침해는 거의 다루지도 않았다.
그러나 CIA가 포르티요를 괜히 정보원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CIA는 그가 급진좌파를 막고 멕시코 자본주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위협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이든 필요하면 할 냉전시대의 전사임을 알아봤다. 포르티요는 오르다스, 에체베리아처럼 CIA의 ‘우리 식구’였다.
원문; Jacobin: Declassified Documents Uncover Yet Another Mexican President’s CIA T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