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시누스가 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해설 중 “위로에는 여섯 가지 부분이 있다”는 내용을 네모 박스(문답 본문) 아래에 타붙 하였습니다. 어중강한 큐티보다 이러한 정통 교리의 해설과 그 속에 인용된 성경구절을 찾아서 읽는 것이 더 안전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
그 위로에는 어떤 부분들이 있는가?
이 위로에는 여섯 가지 부분이 있다.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요 그의 자녀들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는 것(고전 7:23).
2.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방식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것, 즉 그가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보상하신 것이라는 것(벧전 1:18; 요일 1:7).
3. 죄와 사망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받았다는 것.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실 뿐 아니라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하셔서, 죄와 사망과 사탄이 우리에게 권세를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다(히 2:14; 요일 3:8).
4. 우리의 화목과 구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 주고 사신 다른 모든 은택(恩)을 끊임없이 보존하신다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감찰하시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 자신의 손이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에게 있다면 매 순간마다 수천 번씩이라도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5. 우리의 모든 악들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것. 의인도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또한 양처럼 살육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데 협력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바꾸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6. 이 모든 큰 은택들과 영생에 대하여 충만한 깨달음과 확신이 있다는 것. 이런 확신은 첫째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셔서 참된 믿음과 회심을 이루시는 성령께서 이 모든 축복들이 진정 우리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증거해 주심으로써 얻어진다. 그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참된 믿음의 결과들에서 얻어진다. 곧, 참된 회개,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모든 계명들을 순종하고자 하는 확고한 목적 등을 우리 속에서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또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구원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 위로의 다른 모든 부분들의 토대(土臺)가 된다. 이것이 없는 다른 모든 위로는 이 세상의 삶의 유혹들 가운데서 그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 불만족스러운 위로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의 골자는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화목되었으므로,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구원받으며, 성령과 영생이 우리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라문답 해설』, pp.29~30.
첫댓글 맞습니다. 성경이 잘 읽히지 않을 때 어중간한 큐티도 잘 안 될 때 이렇게 요리문답과 인용된 성구를 보니 공부도 되고 은혜를 받습니다.
어중간한 큐티보다 낫다는 말씀에 무척이나 공감합니다~~
저도 많이 공감을 합니다.
일부 교회의 경우 성경공부 시간에 각자가 해당구절에 대한 소감과 해석을 발언하며 우매한 소리, 선을 넘는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바에는 객관적이고 안전한 교리문답을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주 공감합니다.
그리고 댓글 내용이 보이는 상황이 대강 추측됩니다.^^
예전에는 성령이 보증(保證)이 되신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요즘 교리를 조금씩 배울수록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임을 깨달아 갑니다. 우르시누스가 설명하고 골자를 짚어주니 이해도 잘되고 유익이 큽니다.
네, 아파르님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우리 믿음을 보증해 주는 분이시고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조명을 해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기도가 막힐 때 도우셔서 기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아멘!
아멘22
아멘~
바빙크나 벌코프처럼 짜임새 있는 조직신학이 나오기 몇 백년 전에 이미 우르시누스와 같은 분들이 정확한 교리와 신학을 정립해 놓은 것은... 어느 때 저에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말씀에서의
신묘막측한 주님의 일하심이 개혁주의 학자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닌가? 감탄을 합니다.
네, 저도 그 감탄에 공감을 합니다.
공감합니다33
가장 큰 위로는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 이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를 끝까지 보증하여 주시고 모든 하나님의 복을 얻게 되었다. 이것인 것 같습니다. 여섯 가지로 자세한 부연 설명한 것도 도움이 됩니다.
간결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