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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ino-Japanese War
This guide provides an overview of materials related to the Sino-Japanese War of 1937-1945 in different languages and formats held across several reading rooms at the Library of Congress. There is a particular focus on books, newspapers, periodicals, and special collections from the Chinese collection and Japanese collection that are accessible in the Asian Reading Room. Other relevant materials are located in the Library's over 20 reading rooms and research centers that provide space and guidance for users to interact with additional items based on subject (e.g., law) or format (e.g., maps, photographs, motion pictures). For specific questions or assistance using the Library's resources, use the Ask a Librarian service to contact a reference librarian.
Women in rifle practice. 1937-1945. From the series "China at War".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The Sino-Japanese War (1937-1945) was one of the most destructive conflicts of World War II. It began with 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 of July 7, 1937, and ended with Japan's surrender on September 2, 1945. This war marked the culmination of growing Japanese aggression toward China since an earlier Sino-Japanese War (1894-1895). With half of China ruined, 20 million Chinese (military and non-military) dead, and 480,000 Japanese soldiers killed on Chinese soil, the eight-year conflict was one of the bloodiest in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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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盧溝橋, 베이징 교외)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1945년 9월 2일의 일본 항복(법적으로는 1972년 9월 29일의 중일공동성명)까지 계속된 중일간의 전면전쟁이다.
1931년 9월 18일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한 경우 일본에서는 ‘15년 전쟁’ 혹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혹은 ‘제2차 중일전쟁’ 이라고 한다. 노구교사건 후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성립하였지만 일본정부는 사건을 중국측의 계획적 무력항일이라고 단정하고 총공세를 개시하여 8월 상해에 전투병력을 확대하였다. 일본측은 당초 이 전쟁을 ‘북지(北支)사변’이라고 하였지만 후에 ‘지나(支那)사변’으로 개칭하였다. 정식의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개시후 대(對)미국ㆍ영국전쟁과 지나사변을 포함하여 ‘대동아(大東亞)전쟁’으로 호칭하였다. 일본의 군사행동확대는 중국문제를 일거에 유리하게 해결하려는 호기를 노린 일본의 야심과 우세한 군사력의 일격으로 중국측을 단기간에 굴복시킬 수 있다는 오산에 기초하였다. 중국측은 항전준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예상에 반하여 항일의 전의를 굳히고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여 항일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12월의 남경점령 후 일본군은 10만을 넘는 중국 군민을 참살하는 남경학살사건을 일으켜 국제여론의 비난을 초래하여 중국민중의 항일의식을 더욱 고양시켰다. 주화(駐華) 독일 대사 트라우트만의 중개에 의한 ‘화평공작(和平工作)’을 일본측은 1938년 1월 단행하여 ‘국민정부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제1차 근위(近衛)성명을 발표하고, 협상에 의한 해결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일본이 옹립한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의 괴뢰정권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일본군 점령지는 주요도시와 철도연변의 ‘점과 선’에 그쳤으며, 배후의 광대한 농촌지대에서는 중국 공산당군을 중심으로 하는 유격전이 전개되었다. 1938년 10월의 무한(武漢) 점령 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통일전선 내의 국공(國共) 양군의 대립이 격화하여 분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본은 국민정부 내의 대일 타협파에 대한 ‘화평공작’을 활성화시키고, 왕조명(汪兆銘) 등은 국민정부로부터 탈락하여 일본 점령하의 남경에 1940년 3월 ‘남경정부`를 수립하였으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독일ㆍ일본ㆍ이탈리아 3국 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미일협상 중에 일본군의 중국철수를 요구한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1941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다. 일본군은 三光 작전 등의 잔악한 행위로 중국의 대항전력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45년 110만의 병력을 중국에 남기고 항복하였다. 이로 인한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중국국민의 사상자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2.노구교 사건
중일전쟁은 이른바 노구교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1937년 7월 7일 북경 서남 교외의 노구교, 일명 마르코폴로 브릿지 근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본군은 근처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었다. 발포가 어느 쪽에서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했지만 일본은 이 총격을 일본에 대한 중국의 도발행위로 간주하고 즉각 보복공격을 퍼부었으며 일본정부는 중국정부에게 사죄 및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만일 이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중일전쟁의 폭발점이 되었던 노구교일본의 관동군은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침략의 빌미로 이용했다. 사진은 노구교를 경비하는 중국 병사.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구교 사건 이후 몇 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현지에서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내각회의를 열어 이 사건을 중국이 계획적으로 일본에 무력 대항한 것으로 단정하고 중대결정을 했다는 발표를 했다. 그 중대결정이라는 것은 곧 전쟁이었다.
스틸웰 소장, 송미령과 장개석장개석과 아내 송미령, 미국 스틸웰 소장.
3,남경대학살
일본군의 남경 장악, 대학살이 일어나다
일본 내의 군대들이 속속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8월 13일에는 상해로 전쟁이 확대되었다. 1937년 8월 15일 일본의 고노에 내각은 '지나군(중국군)의 폭력을 응징하여 남경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에 이르렀다'고 발표하여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른바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남경에 입성하는 일본군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하여 정치 · 군사적으로 큰 우위를 점했다.
중일 양국의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으며 11월에 일본군은 국민정부의 수도이자 중국의 중요거점인 남경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여 만인 12월 13일이었다. 국민정부가 떠나간 남경에는 전쟁의 화를 피해 각지에서 모여든 난민과 주민들이 무방비상태로 남게 되었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이 장악한 남경에서는 이때부터 약 2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과 강간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잔학행위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만행은 거기에 가담했던 일본군인, 그것을 목격한 일본인 종군기자,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생생한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이었다.
남경대학살국민정부가 떠나간 남경의 난민과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
4. 만주사변과 만주국
중국에 대한 일본 제국의 21개조 요구안에 대해 중국은 그 조약의 폐기 또는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 제국의 후원을 받았던 봉천파 친일 군벌 장쭤린이 1928년 일본군에 의해 열차안에서 폭사당한 후, 아들 장쉐량은 반일 운동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장쉐량은 국민당의 장제스와 손을 잡았는데, 당시 일본 제국은 대륙에서 완전한 식민지를 얻는 한편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근거지로 삼기 위해 만주 지배를 획책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봉천 교외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를 폭파해놓고, 이것을 '중국군의 행동'이라 몰아붙여 이를 구실삼아 만주를 침략한다. 그 다음날 일본군은 펑톈, 장춘, 잉커우를 점령한 데 이어 21일에는 지린까지 진격했다. 이때 일본군의 병력은 14,0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도 압록강을 넘어 북진했다.
한편, 이무렵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는 제3차 공산군 토벌작전에 나선 상태여서 군대를 북상시킬 수 없었으므로 일본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신병치료를 하고 있던 장쉐량은 장제스의 밀령에 따라 전보로 전군에 무저항 철수를 명령했다.(이때 장쉐량 휘하의 중국군 병력은 약 22만 명이었다.) 일본군은 1932년 2월 만주 전역을 거의 점령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중국은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부저항'정책을 택하면서 외교적인 수단으로 만주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장제스는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재해주기를 희망하여 만주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9월 30일 터키에서 철수한 국제연맹은 일본군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일본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듬해, 일본 제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만주는 일본 제국의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 역할 등을 하게 되었고, 일본인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적극적으로 중국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4]
이후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소규모 전투가 몇 차례 있었으나, 1933년 5월 25일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 제국에 정전을 요청했고, 5월 31일 톈진의 외항인 탕구(塘沽, 당고)에서 중국이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 정전협정에는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둔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이는 곧 만주국이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난징 국민정부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광대한 만주 땅의 구석구석에까지 일본의 지배력이 미칠 수는 없었으므로 만주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항일 무장활동이 계속됐다.
5. 2차 중일전쟁
The Second Sino-Japanese War was the war fought between the Republic of China and the Empire of Japan from 1937 to 1945 as part of World War II. It is often regarded as the beginning of World War II in Asia. It was the largest Asian war in the 20th century[25] and has been described as "the Asian Holocaust", in reference to the scale of Japanese war crimes against Chinese civilians.[26][27][28] It is known in Japan as the Second China–Japan War, and in China as the Chinese War of Resistance against Japanese Aggression.
On 18 September 1931, the Japanese staged a false flag event known as the Mukden Incident, a pretext they fabricated to justify their invasion of Manchuria. This is sometimes marked as the beginning of the war.[29][30] From 1931 to 1937, China and Japan engaged in skirmishes in mainland China. Japan achieved major victories, capturing Beijing and Shanghai by 1937. Despite having fought each other in the Chinese Civil War since 1927, the Communists and Nationalists formed the Second United Front in late 1936 to resist the Japanese invasion together.
Tensions escalated after what would become the first battle of the war - the Marco Polo Bridge incident on 7 July 1937, in which the Japanese and Chinese opened fire upon each other after a Japanese soldier went missing. This prompted a full-scale Japanese invasion of the rest of China. This incident is widely regarded as the start of the Second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theater of World War II.[31]
The Japanese captured the Chinese capital of Nanjing in 1937, which led to the Nanjing Massacre, also known as the Rape of Nanjing. After failing to stop the Japanese in the Battle of Wuhan, the Chinese central government relocated to Chongqing in the Chinese interior. Following the Sino-Soviet Non-Aggression Pact, material support bolstered the Republic of China Army and Air Force.
By 1939, after Chinese victories in Changsha and Guangxi, and with Japan's lines of communications stretched deep into the Chinese interior, the war reached a stalemate. The Japanese were unable to defeat Chinese Communist Party (CCP) forces in Shaanxi, who waged a campaign of sabotage and guerrilla warfare. In November 1939, Chinese nationalist forces launched a large scale winter offensive, and in August 1940, CCP forces launched an offensive in central China.
In December 1941, Japan launched its surprise attack on Pearl Harbor and declared war on the United States. The US increased aid to China: the Lend-Lease act gave China a total of $1.6 billion (equivalent to $20 billion in 2023).[32] With Burma cut off, the US Army Air Forces airlifted material over the Himalayas. In 1944, Japan launched Operation Ichi-Go, the invasion of Henan and Changsha. In 1945, the Chinese Expeditionary Force resumed its advance in Burma and completed the Ledo Road linking India to China. China launched large counteroffensives in South China and repulsed a failed Japanese invasion of West Hunan and recaptured Japanese occupied regions of Guangxi.
Japan formally surrendered on 2 September 1945, following the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Soviet declaration of war and subsequent invasions of Manchukuo and Korea. The war resulted in the deaths of around 20 million people, mostly civilians. China was recognized as one of the Big Four Allies, regained all territories lost, and became one of the five permanent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33][34] The Chinese Civil War resumed in 1946, ending with a communist victory, which establishe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Names
In China, the war is most commonly known as the "War of Resistance against Japanese Aggression" (simplified Chinese: 抗日战争; traditional Chinese: 抗日戰爭), and shortened to "Resistance against Japanese Aggression" (Chinese: 抗日) or the "War of Resistance" (simplified Chinese: 抗战; traditional Chinese: 抗戰). It was also called the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simplified Chinese: 八年抗战; traditional Chinese: 八年抗戰), but in 2017 the Chinese Ministry of Education issued a directive stating that textbooks were to refer to the war as the "Fourteen Years' War of Resistance" (simplified Chinese: 十四年抗战; traditional Chinese: 十四年抗戰), reflecting a focus on the broader conflict with Japan going back to the 1931 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35] According to historian Rana Mitter, historians in China are unhappy with the blanket revision, and (despite sustained tensions) the Republic of China did not consider itself to be in an ongoing war with Japan over these six years.[36][need quotation to verify] It is also referred to as part of the "Global Anti-Fascist War".
In Japan, nowadays, the name "Japan–China War" (Japanese: 日中戦争, romanized: Nitchū Sensō) is most commonly used because of its perceived objectivity. When the invasion of China proper began in earnest in July 1937 near Beijing, the government of Japan used "The North China Incident" (Japanese: 北支事變/華北事變, romanized: Hokushi Jihen/Kahoku Jihen), and with the outbreak of the Battle of Shanghai the following month, it was changed to "The China Incident" (Japanese: 支那事變, romanized: Shina Jihen).
The word "incident" (Japanese: 事變, romanized: jihen) was used by Japan, as neither country had made a formal declaration of war. From the Japanese perspective, localizing these conflicts was beneficial in preventing intervention from other nations, particularly the United Kingdom and the United States, which were its primary source of petroleum and steel respectively. A formal expression of these conflicts would potentially lead to American embargo in accordance with the Neutrality Acts of the 1930s.[37] In addition, due to China's fractured political status, Japan often claimed that China was no longer a recognizable political entity on which war could be decl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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