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예수의 탄생과 할례의식 관련기사 및 유년 시절의 성전 방문 사건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1-4:13까지의 예수의 공생애 개시 이전 사건들에 대한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앞의 제 1장에서 시작되어 본장까지 계속된 예수의 탄생 및 유년시절 기사의 종결부분이다.
저자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救主)되시는 사실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예수께서 죄로부터 유일하게 결백한 완전한 인자(son of man)로서 죄에 오염된 우리 모든 불완전한 인간들을 위하여 그 죄 값을 대신 치루어 희생하사 우리를 창조 당시의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 기사에는 전반적으로 완전한 인자로서의 예수와 그와 대조된 불완전한 인간과 그들이 처한 사회 ․종교적 상황에 대한 관심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유년시절의 에피스드(episode) 하나를 보도한 본장에서도 한 유일한 그리고 완전한 인자로서의 예수의 모습과 그헤 대한 불완전한 인간의 반응 또는 그로인해 불완전한 인간이 갖는 소망 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의 내용은 다음처럼 전개된다. 먼저 1-7절은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탄생한 소위 성탄(Nativity) 기사이다. 다음 8-20절은 천사들의 찬양과 천사들이 전한 예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의 아기 예수 경배 사건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다. 21-24절은 아기 예수께서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식을 받은 사실을, 25-39절은 아기 예수의 할례식에 즈음하여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 노래와 증언이 주어진 사실을 보도한다. 마지막 단락인 40-52절은 사복음서 전체 중에서도 유일한 예수의 유년 시절의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 예수께서 소년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參拜)하다 오는 도중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전 역사와 우주의 구원자(救援者)로 오신 아기 예수께서 한 초라한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난 사건과 이에 즈음하여 있은 천군 천사들의 찬양 및 초라한 목자들의 아기 예수 경배에 대한 본장 전반부 1-20절의 성탄기사는 우리에게 아기 예수가 우리의 구주(救主)이심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더불어 실로 그분의 겸손과 사랑(빌 2:5-8)에 대한 끝없는 구속사적 감동과 감사를 자아내게 한다. 아기 예수는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을 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셨으나 다만 태초부터 세워진 우리 죄인을 위한 구속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셨다. 이처럼 자신을 비하시켜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나아가 그 탄생과정에서도 보통의 인간보다도 못하게 노중(路中)에서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이것은 먼저는 세상을 구하러 유일하게도 죄로부터 순결한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히 4:15)를 죄 많은 인간들이 무시하고 경시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역으로는 예수께서 그 얼마나 크신 겸손과 사랑으로 세상을 위한 구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천군 천사들의 등장과 찬양 그리고 베들레헴 들 밖에서 양 치던 목자들을 향한 예수 탄생에 대한 소식 전파는 먼저는 이제 갓 태어나신 예수가 죄로 인해 근본적으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회복시킬(엡 2:14) 위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구약에서 거듭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로서 오신 구주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특히 14절의 말씀이 이를 강력히 증거하고 있다. 또한 이 소식 이 밤잠도 못자면서 양떼를 치던 가난하고 초라한 목자들에게 처음 전해진 것은 결국 예수님이 주실 구원이 영적으로 가난하여 자신의 죄와 초라함을 깨달은 자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보여준다.
본장 중반부 21-39절의 생후 8일 만에 행해진 아기 예수의 할례식과 이에 즈음하여 성전에서 행해진 시므온과 안나의 찬양과 증언도 전반부와 병행하여 갓 태어난 아기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the Saviour)이심을 증언하고 그를 사모하여 구원의 은총을 입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드린 찬양이었다.
이스라엘 남자 아기들의 할례식은 몸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그 아이가 하나님의 선민(選民)의 일원이 됨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드리는 아기 예수에게 시므온과 안나는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 곧 이방인까지 포함한 만민 중에서 택한 자들을 구원(救援)하여 참 이스라엘로 만들 구주이심을 중언하고 찬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있었던 천군 천사들의 찬양이 아기 예수의 구주이심에 대한 하늘의 증언이 찬양이었다면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과 찬양은 아기 예수의 구주이심에 대한 땅의 증언과 찬양 이었다 하겠다.
한편 앞서도 언급된바 완전한 인간으로서 불완전한 우리의 구주가 되신 예수의 측면을 강조한 누가의 독특한 관점은 사복음서 중에서도 아기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탄생 과정에 대하여 가장 자세한 보도를 하고 있는 제 1,2장 곳곳에서 전반적으로 발견된다. 이런 저자 누가의 의도는 사복음서 전체 중에서도 유일하게 예수의 유년 시절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 본장 후반부의 40-52절에 나타난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방문 사건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저자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는 공생애를 개시하시기까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며 아기로 태어나 장정으로 성장하며 인간의 희노애락을 접하는 등 평범한 인생의 길을 걸으셨지만 동시에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성자(聖子)요 구주(救主)로서의 신분과 사역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단락은 물론 본장 전체를 통해서 결국 주님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창조 당시의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원형을 상실한 우리 죄인을 위하여 그 죄 값을 치루어 구원을 주시고자 죄에 오염되지 않은 유일하고도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존재와 신분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께서 우리를 창조 당시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어 구원을 주신 것을 거듭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롬 8:19-21).
외울 말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예수의 탄생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천사들의 찬양과 목자들의 경배
8 ○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아기 예수의 할례
21 ○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시므온의 예언 활동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안나의 예언 활동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소년 예수의 성전 방문시의 사건
41 ○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1-7 아기 예수의 비천한 탄생의 특징
1. 가난하고 비천한 탄생
2. 거치하실 곳도 없는 탄생
3. 어두움 속에서의 적막한 탄생
4. 짐승의 잠자리에서의 초라한 탄생
5.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의 탄생
지도-2:4 요셉과 마리아의 베들레헴 여행로
도표-2:1-7 아기 예수의 비천한 탄생의 특징
1. 가난하고 비천한 탄생
2. 거취하실 곳도 없는 탄생
3. 어둠 속에서의 적막한 탄생
4. 짐승의 잠자리에서의 초라한 탄생
5.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의 탄생
난제 해설-2:1-7 예수 탄생 연도
예수께서 정확히 몇 년에 탄생하셨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증거에 따라 탄생 연도를 추정하늘 것뿐이다. 성경에 제시된, 보다 정확히는 누가가 제시한 예수 탄생 연도의 증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증거를 중심으로 예수 탄생 연도를 살펴보자.
1. 탄생 연도에 관한 두 증거
① 인구조사(人口調査) 당시 로마제국은 매 14년마다 한 번씩 제국 전체에 걸쳐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정확한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A.D. 7년경에 로마 제국 전체에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행 5:37에서 누가가 언급한 인구조사도 이때의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매 14년 주기로 계산할 때 B.C. 7년경에 인구조사가 또 한번 실시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예수께서 B.C. 7년에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눅 3:23에 따르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가 30세쯤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B.C. 7년에 30년을 더하면 예수께서는 약 A.D. 23년경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의 유대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기간(A.D. 26-36년)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빌라도의 통치 기간과 맞추기 위해서는 예수가 B.C. 6-4년경에 탄생했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 탄생 시에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본문의 기록은 어떻게 이해해아 하는가? 그것은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인구조사 명령은 B.C. 7년에 내려졌으되 그것이 팔레스틴 땅에 실시된 것은 선포된 지 1년이나 2년 후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제국 전체에서 동시에 인구조사가 실시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로마의 인구조사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던 유대 지역 같은 곳에서 늘 연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볼 때 예수 탄생 연도는 B.C. 6-4년 사이 쯤일 것이다. 이는 헤롯 대왕(B.C. 37-4)이 그의 통치 말기에 유아 학살 사건을 일으킨 것과도 어느 정도 일치할 뿐만 아니라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주장한 B.C. 4년과도 일치한다.
② 수리아 총독 구레뇨의 임기-혹자의 주장에 따르면 구레뇨(Quirinus)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었던 것은 A.D. 6-9년이라고 한다. 그래서 누가가 본문에서 A.D. 7년에 실시된 인구조사를 예수 탄생 당시의 인구조사와 혼동하여 잘못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구레뇨는 수리아 총독을 두 번 지냈으며, 그 중 첫 번째 임기는 B.C. 12-2년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구레뇨가 총독이었을 때 호적을 실시했다는 누가의 증거는 결코 틀리지 않는다.
2. 의의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탄생 연도를 대략 B.C. 6-4년경, 좀 더 정확히는 B.C. 5c 말에서 4c 초경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오늘날 예수의 탄생을 역사적인 사실로 보기보다 세속 신화로 보는 사람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혹 초대 교회 시대의 영지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탄생하신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참 진리인 것이다.
보감-2:6-20 예수가 탄생하신 날에 성도가 해야할 일
1. 동방 박사와 같이 예수께 예물 드림(마 2:11)
2. 천사 가브리엘과 같이 예수를 전파함(눅 1:28-35)
3. 마리아와 같이 예수께 경배함(눅 1:46)
4. 목자와 같이 예수를 열심히 찾음(눅 2:16)
5. 시므온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눅 2:28-35)
6. 안나와 같이 예수를 사랑함(눅 2:37,38)
7.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를 증거함(요 1:15)
보감-2:10 성도에게 기쁨 주시는 자로서의 예수
근 거
1. 구원자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구원시켜 참 자유를 주심(갈 5:1)
2. 대속자 우리의 죄를 대속하사 다시 정죄 받지 않게 하심(롬 8:1,2)
3. 평강의 왕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롬 5:1)
4. 의사 육체와 영혼의 병을 모두 깨끗케 하심(마 9:12)
5. 생명의 양식 영적 양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참 생명을 주심(요 6:35)
6. 세상이 빛 죄로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춰주심(요 1:9; 9:5)
7. 안내자 우리를 진실되고 복된 삶으로 인도하심(미 2:13)
도표-2:8-14,28-32 본서의 다섯 편의 노래들
1.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찬양(1:39-45)
2. 하나님께 대한 마리아의 찬양(1:46-56)
3. 하나님께 대한 사가랴의 찬양(1:57-77)
4. 아기 예수께 대한 천사들의 찬양(2:8-14)
5. 하나님께 대한 시므온의 찬양(2:28-32)
지리배경-2:4, 베들레헴
1. 명칭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 베들레헴(Bethlehem)은 '떡집'이라는 뜻으로 이 지방 일대의 토지가 비옥함을 상징하는 말인데, 구약에서 40회, 신약에서 8회 언급되었다. 이 베들레헴의 본래 이름은 풍성하다는 뜻의 '에브라다'이었고(룻 4:11; 미 5:2), 스불론에 있는 동명의 성읍과 구별하기 위해 '유다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렀다(삿 17:7).
2. 위치
베들레헴은 사해 서쪽, 예루살렘 남쪽 8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본장 지도 참조). 이곳은 예루살렘과 헤브론 및 네게브(Negev)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 가까이에 있다.
3. 관련 기사 내 용
1. 살마가 건설한 내용(대상 2:51)
2.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장사된 곳(창 35:16-20)
3. 사사 시대 당시 베들레헴 출신 레위인이 미가의 집 제사장 됨(삿 17:7-13)
4. 나오미의 고향, 룻이 시모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옴(룻 1:1,19,22)
5. 다윗의 고향이며, 그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는 곳(삼상 16:1-13)
6. 왕정 초기 블레셋 영채가 있던 곳(삼하 23:14,15)
7. 르호보암이 견고한 요새를 건축함(대하 11:5-6)
8. 그다랴의 살인자들이 피난한 곳(렘 41:27)
9. 메시야 탄생이 예언, 성취된 곳(미 5:2; 눅 2:1-7)
10. 헤롯의 유아 학살이 일어남(마 2:16-18)
11.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모친 헬레내가 교회 건축
4. 영적 교훈
베들레헴은 비록 작은 성읍이었지만 세상 죄를 대속하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깊은 곳이다. 하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나사렛으로부터 이곳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미 예언된 대로(미 5:2)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경륜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도표-2:40-52 유년 시절의 예수에 대한 10대 기사
1. 신체적으로 온전하게 성장하심(40,52절)
2. 정신적으로 지혜가 충만해 지심(40,52절)
3. 영적으로도 은혜 충만하게 성장하심(40,52절)
4. 부모의 신실한 신앙을 배우며 성장하심(40-42절)
5. 구약 규례를 배우고 순종하며 성장하심(41,42절)
6. 율법 선생들과 토론할 정도로 성경 지식이 풍부하심(46절)
7.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심이 많으심(46절)
8.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릴 때부터 깨닫고 계심(49절)
9.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며 섬기심(51절)
10.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사랑받으심(52절)
원어연구- 2:38, 감사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안도몰로게이토'로서 원형인 '안도몰로게오마이'의 미완료 형태로 쓰였다. 그리고 '안도몰로게오마이'는 전치사 '안티'와 동사 '호몰로게오'의 합성 어이다.
먼저 전치사 '안티'는 '~에 일치하다'(In correspendence to) 또는 ~를 위하여'(for)라는 뜻을 갖고 있다(눅 11:11; 히 12:2). 다음으로 동사 '호몰로게오'는 '~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호모스'와 '말씀'을 뜻하는 '로고스'의 합성어로서 '~에 일치하는 것' 또는 '~에 합당한 것을 말하다'(마 7:23; 요 1:20), '고백하다'(행 24:14), '증거하다'(딤전 6:12; 히 11:13)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 적합한 것을 말하다',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고 공개 적으로 고백하며 증거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미완료형 동사가 쓰였을 때는 어떤 행위를 계속해서 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본절에 쓰인 미완료형 동사 '안도몰로게이토'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계속해서 말하며,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증거하였다'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본절에 나오는 안나가 어떠한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또 '감사'(感謝)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에 합당한 것, 곧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과 의에 적합한 것을 계속해서 말하며,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사실들을 지속적으로 증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고 말한 것에도 바로 이와 같은 감사의 참 의미가 반영된 것이다.
2:1-7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본서 저자는 예수께서 흠 없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심을 전개함에 있어서 서론적으로 1장에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 예언과 세례인 요한의 탄생을 서술한데 이어 본장 에서는 본격적으로 예수 탄생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 탄생 기사는 마태복음과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기록은 내용과 관점에 있어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다윗 왕가의 족보를 소개하고(마 1:1-17), 동방 박사의 경배를 받으신 것(마 2:11)과 헤롯의 살해 음모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신 것(마 2:13-18) 등을 언급하여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백성들이 배척했음을 보여 준다. 반면에 누가는 말구유에서 나신 예수의 모습(1-7절)과 예수의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천사의 찬송과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계층이었던 목자들의 경배(8-20절)를 언급함으로써 본디 제 2위 하나님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낮고 천한 자리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온 세상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신 즉 인자(人子)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 하에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A.D. 14)는 로마 제국의 전역에 걸쳐 호적 조사를 명령했는데(1,2절) 이는 로마 속주에 대해 세금을 원활히 징수하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였다. 하여튼 당시 호적은 모두 그들의 출생지에서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과 그의 정혼녀 마리아도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고(3-5절). 때 마침 산달이 가까웠던 마리아는 호적하기 위해 물려든 사람들로 붐빈 베들레헴에서 방을 빌리지 못하고 허름한 마굿간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아이를 낳기에 이른 것이다(6,7절).
이러한 본문을 통해 본서 저자인 누가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여 부각시키고 있다. 첫째로 누가는 이방인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아구스도가 인구 조사를 행한 역사적 사건과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연관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실재성(實在性)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아구스도의 인구 조사는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미 5:2)을 성취하기 위해서 당시의 통치자인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여 호적령을 내리도록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배경과 작은 성읍 베들레헴 더구나 말구유에서 태어난 사실을 강조하여 하나님이시지만 비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인자(人子)로 오신 메시야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절망적이고 비천한 처지에 놓인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체휼(體恤)하셨으므로 우리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아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히 4:15,16).
2:1 이 때에.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시간 부사로 어느 특정한 때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앞뒤의 문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눅 1:39 주석 참조). 그러나 굳이 이때를 규명하자면 B.C. 5년 경이 될 것이다. 가이사 아구스도, 제정 로마시대의 최초의 황제로 B.C. 27-A.D. 14년까지 로마를 통치한 자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로 그의 외중조인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양자가 된 이후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Gaius Julius Caesar)로 개명하게 된다. 한편 그는 로마 시민전쟁으로 무질서해진 로마의 질서를 바로 잡은 공적이 인정되어 B.C. 27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숭고한 자', '존귀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 (Caesar Augustus)라 불리었고, 이후 이 말은 황제에 대한 하나의 칭호가 되어 그 뒤를 계승한 여러 황제들에게도 사용되었다(행 25:21,25). '아구스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아구스도는 로마의 속주에 대해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고 질서를 바로 잡기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본절의 인구조사도 그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하여튼 그는 그의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으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Hendriksen).
영을 내려. - 여기서 '영'(도그마)은 '생각하다'(도케오)에서 파생된 말로 이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왕의 포고령'을 가리켰으나 후에는 교회가 선포한 신조나 교리를 나타내는 말로 전용되었다. 한편 로마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가이사 아구스도 때에는 인구 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2절에 나타나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된 것도 A.D. 7년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본절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이 자주 학자들에 의해 문제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다수의 파피루스 문서와 몇몇의 비문에 의하면 '아구스도' 이후로 인구 조사가 정기적으로 실시되어 약 2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의 기록에도 인구 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본서의 수신자가 로마의 고관(눅 1:3 주석 참조)이었음을 감안할 때 본절의 역사적 신빙성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천하로. - '천하'(오이쿠메네)라는 말은 '거주지'라는 뜻으로. 고대 헬라 사람들은 이 말을 이방인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 로마 시대에는 로마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행 11:28; 17:6).
호적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그라페스다이'의 원형 '아포그라포'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라는 뜻으로 인구 조사를 의미한다. 이 인구 조사 때는 이름, 직업, 재산, 가족 관계 등을 기록했는데, 이는 세금 징수에 그 목적이 있었다.
2:2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 여기서도 누가의 기록에 대해 많은 비판이 있다. 그것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던 시기(A.D. 7년)와 예수의 출생 시기(B.C. 5~4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와 람제이(Ramsay)가 발굴한 비문에 의하면 '구레뇨'는 예수의 출생을 전후해서 수리아의 총독을 두 번 지낸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인구 조사는 구레 뇨가 수리아의 총독으로 처음 재직하고 있던 B.C. 5~4년 경에 한 번 있었고, 또한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두번째 봉직했던 A.D. 7년 경에도 또 한 번 있었던 것이다. 전자는 본절에 나타난 인구 조사를 가리키고, 후자는 행 5:37에 나타난다.
첫 번 한 것이라. - 아구스토에 의한 인구 조사가 주기적으로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다.
2:3 모든 사람이‥‥돌아가매. - 모든 사람들이 호적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야하는 이유는 호적 조사가 각 가문별로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애굽의 수많은 파피루스 문서와 A.D. 104년 애굽의 총독이었던 막시무스(Maximus)의 칙령에 의하면 가문별로 호적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진 관례였다(Robertson. Hendriksen).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본바 대로이다(눅 1:27 주석 참조). 누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요셉이 다윗의 자손임을 밝힘으로써 예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 - 눅 1:26 주석 참조.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남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하며 나사렛에서는 약 1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혹자는 이곳을 나사렛에서 북서쪽으로 11km쯤 떨어진 스블론 지파의 작은 마을(수 19:15)과 동일시하기도 하나(Klausner) 전혀 무시를 당하고 있다. 호적하기 위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온 요셉과 마리아의 여정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한편 베들레헴이 '다윗의 동네'로 불리운 것은 그곳이 다윗이 나서 성장한 곳이기 때문이다(삼상 16:1).
2:5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12살 이상의 여인들도 모두 납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들도 당연히 호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반드시 그들 자신이 호적 하러 갈 필요는 없었다. 대개는 집안의 가장이 가족을 대신해 호적하러 갔다 그런데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 하러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사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보통의 사람에게 힘든 여행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달에 이른 임부(姙婦)에게는 무척 힘든 여행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함께 가지 않아도 될 일을 산달이 가까운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 하러간 요셉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짐작컨대 마리아가 처녀 잉태로 인하여 동네 사람들에 의해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한 요셉의 배려일 가능성이 크다(Hendriksen).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미 5:2의 예언, 곧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결과였다. 한편 누가는 마리아와 요셉이 이미 동거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마 1:24) 마리아를 요셉의 아내라 부르지 않고 정혼자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한 고로(마 1:25) 그와 같이 부른 듯하다. 결국 누가는 여기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할 것이다.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호적 하러 갔던 당시 그녀는 아마도 임신 9개월이 지난 때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잉태 되었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퀴오' 는 '임신하다'라는 의미의 '퀴오'에서 나온 말로 '아이를 밴'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신약 성경에는 본절에만 나오는 의학 용어이다(Robertson).
2:6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베들레헴에 도착할 때에 마리아는 이미 만삭 상태였다(Marshall). 한편 여기서 '날이 찼다'는 표현은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났다는 말로, 이는 비록 예수께서 초자연적으로 잉태되기는 하셨으나 모든 출생 과정과 성장 과정은 보통의 사람과 같았음을 증거해 준다. 한편 성탄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현재 우리가 지키는 12월 25일은 2세기부터 시작하여 6세기에 확정된 서방 교회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며 그에 반해,
동방 교회의 전통에 충실한 희랍 정교회와 아르메니안 교회는 1월 6일로 지킨다. 예수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마 2:1 주석과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2:7 맏아들을 낳아. -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 이외에 다른 아이는 낳지 않고 동정을 지켰다고 주장한다(Childers). 하지만 본절을 통해 볼 때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에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성경의 여러 증거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마 12:46,47; 13:55; 막 3:31; 요 2:12).
강보로 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파르가노센'은 의료 행위에 자주 사용되었던 의학 용어이다. 성경에는 본절과 12절에만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어린 아이의 손발을 가지런히 한 다음 부드러운 천으로 몸을 싸는 것을 가리킨다(Rebertson). 한편 여기서 강보는 사방 약 Im 크기의 천을 말한다.
구유에 뉘었으니. - 구유에(엔 파트네)는 '구유 안에'라는 뜻으로 아기 예수께서 말이나 소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놓아 둔 여물통에 누우셨음을 보여 준다. 즉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구유에서 시작된 것이다. 실로 비할 데 없는 자기 비하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빌 2:6-8).
사관에. - 사관(카탈뤼마)은 막 14:14과 눅 22:11에서 '객실' 혹은 '다락방'으로 번역된 말과 같은 말로, 일반적으로 대상들의 숙소(Caravanserai)를 가리킨다. 이 숙소는 안뜰을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건축되었는데, 안뜰 한쪽에는 나귀와 약대, 소와 염소를 위한 외양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가 탄생한 것이다. 한편 베들레헴의 사관에 방이 없었던 이유에 대해 혹자는 인구 조사를 담당할 정부 관리들이나 군인들이 이미 방을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Hendrikson)호적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붐볐던 까닭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Bengel, Robertson).
2:8-20 천사의 찬양과 목자의 경배
앞단락(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신 배경과 말구유에서의 탄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자(人子)로 오셨음을 강조했다. 이제 본문은 천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고(8-14절) 이어서 목자들이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모습(15-20절)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예수의 신분과 그의 본질적 사역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먼저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 소식을 증거하는 천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복음' 그 자체로서, '구주'(Saviour)가 되시고 동시에 '그리스도'(Christ), 주'(Lord)이시다(11절). 특히 14절에서 천사들이 부른 노래는 본서에 나오는 다섯 편의 노래 중 네 번째 노래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준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죄악의 권세에서 벗어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땅에서는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여(엡 2:16)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한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골 1:20).
다음은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의 모습과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계층이었던 목자들의 경배를 통해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낮고 천한 자리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온 세상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실 인자(人子)이셨다. 특히 본서의 저자 누가는 메시야의 비하된 모습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멸시받던 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눅 3:11; 4:18; 6:20; 16:22).
한편 우리는 이러한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겸비하신 모습을 통하여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소외되고 억눌린 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교훈 받게 된다(마 16:24; 막 10:21; 눅 9:23). 또한 메시야 탄생 소식은 가장 먼저 목자들에게 전해졌는데 이들은 천사들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여 메시야를 처음으로 목격하는 감격을 누렸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목자들과 같은 순수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8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매우 천시되던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탄생 소식이 그들에게 맨 처음 전해졌다는 것은 앞으로 예수의 복음 사역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천대받은 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여튼 예수 탄생의 첫 목격자가 목자라는 것은 세상 죄를 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요 1:29). 또 인류의 참 목자로 오신 예수의 신분을 보다 뚜렷이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요 10:11).
양떼를 지키더니. - '지키더니'(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퓔라쏘)의 복수 현재 능동태로 이는 목자들이 양떼를 교대로 지켰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팔레스틴에서 야외 방목은 보통 3월에서 11월 사이에만 한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탄생 시기가 현재의 12월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록 겨울철이라 할지라도 성전에 봉헌될 양은 방목했을 뿐만 아니라 날씨가 온화할 때는 일반 양들도 야외에서 방목했다는 기록에 비추어 본절이 현재의 12월 성탄절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Farrar, Bruce, Plummer, Edersheim).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 본서에 나타난 천사의 세 번째 출현 장면이다. 이 천사 역시 앞서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장일 것으로 추측되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한편 여기서 '곁에 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스테 아우토이스'는 '걸어와서 곁에 섰다'는 뜻으로, 동작의 시초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쓰였는데, 이는 천사의 출현이 갑작스러운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주의 영광. -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세키나'의 영광으로(출 24:16; 왕상 8:10. 영광의 구름). 목자들에게 이러한 영광이 두루 비취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하여 특별한 은총을 입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세키나'에 대하여는 신 12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 구약 시대에는 죄로 더럽혀진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출 33:18-20), 따라서 목자들이 두려워하며 떨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은혜를 받았다.
2:10 천사가 이르되‥‥너희에게 전하노라. - 천사는 먼저 목자들을 안심시키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가장 복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한다. 여기서 '백성'은 이스라엘을 뜻한다(Willson).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을 메시야 대망 가운데 살아온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야 배척은 결국 이방 세계에까지 복음이 미치게 했다(롬 11:30).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은 온 인류에게 미친 큰 기쁨의 소식이었다.
좋은 소식. - '좋은 소식'이란 곧 복음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본래는 일반적으로 여러 종류의 좋은 소식 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누가와 바울의 영향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었다.
2:11 다윗의 동네. - 메시야께서 나시리라고 예언된 베들레헴(미 5:2)을 가리키는 말로(4절 주석 참조). 여기서 '베들레헴' 대신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다윗에게 약속된 예언(삼하 7:12-16)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베들레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리 배경을 참조하라.
구주‥‥그리스도 주. - 메시야를 가리키는 삼중적 표현으로, 이처럼 세 명칭이 한꺼번에 쓰인 것은 이 곳 뿐이다. 그만큼 메시야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에서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구주'(소테르)라는 말은 누가와 바울만이 자주 사용했던 단어로,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라는 입장에서 사용한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인류 구속의 사명을 수행할 예수의 직능적 명칭이다. 마 1:1 주석 참조. 그리고 '주'(퀴리오스)라는 말은 본래 단순한 존칭으로. 사용된 말이었으나 유대인들이 경외심 때문에 부르기를 꺼려했던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한 말로, 여기서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 준다(롬 1:4). 요 13장 자료 노트 참조.
2:12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자신들이 전한 메시지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표적을 알려주고 말을 마친다. 여기서 표적이 '강보에 싸여 있는 아이'가 아니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갓 태어난 다른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 가운데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는 오직 예수 하나 뿐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께서 매우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예수께서 섬김 받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심을 부각시키고 있다. 누가복음이 복음서 중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돌아보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적 기사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표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들에게 심판의 예비적 경고와 부딪치는 돌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외양간의 구유 위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Bruce).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영광된 모습만을 생각했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상태로 있었다.
2: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분의 권능을 찬송하는 것이 천사들이 해야 할 사명이었다. 그와 같이 천사들은 세상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아기 예수의 탄생하심을 찬송하고 있다. 여기서 '천군'(스트라티아스)은 일단의 병사를 의미하는 군사 용어였으나 여기서는 하늘의 친사군(天使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늘에는 천천만만의 천군이 있다(단 7:10; 마 26:53; 계 5:11). 그러한 하늘의 군대가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기 인해 천사와 함께 온 세상을 채우는 찬양을 부른 것이다. 이처럼 하늘의 군대는 지상의 전투하는 군대와는 달리, 평화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군대이다(Bengel).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천사들이 예수의 탄생을 찬양하는 노래의 첫 부분으로 여기서 천사들은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임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의 노래와 같이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다 같이 완성되고,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요 1:14; 고후 1:27).
땅에서는‥‥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천사들의 찬양 두 번째 부분으로, 천사들은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일임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의 선하신 은총을 입은 자들'이란 뜻으로(Morris, Childers)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의 탄생이 '평화'가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장벽이 제거되어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서 오는 진정한 안식과 안정을 실감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불화가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4-18). 한편 본절에서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본래 전쟁 당사국 간의 강화 조약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것이 점차 안정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고 성경에 도입되면서는 '구원' 또는 메시야의 도래와 관계되는 모든 축복을 총망라하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Marshall), 하여튼 천사의 찬양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것이 질서 정연한 세 대구(對句)로 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지극히 높은 곳과 땅', '하나님과 사람들', '영광과 평화'가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서로 상응되는 두 관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밀접한 인과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 천사들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마친 후에 목자들의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여기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수직 상승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의 처소인 하늘나라는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누가는 천사들의 사라짐을 보다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여튼 이런 사실에 대해서 자세히 표현하려고 한 것은 누가의 저작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 천사들이 떠나자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말을 사실 그대로 믿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 이루어진 일을 보기로 결정했다. 특별히 여기서 '이제'( 데)라는 말은 강조를 위한 접두어로, '즉시'. '지체하지 말고'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목자들의 결정이 얼마나 신속한 것이었는가를 잘 가르쳐 준다. 실로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말을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메시야의 나심을 보고자 하는데 촌각도 지체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목자들은
양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길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참 목자가 되시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어린 양이신 예수의 탄생을 보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 금 최초로 그리스도를 목격하는 축복을 받게 했다. 그와 같이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가장 우선되는 생활이 요구된다.
2:16 찾아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뉴란'은 '반복', '강렬'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나'와 '찾다'를 의미하는 '휴리스코'의 합성어로 '끊임없이 탐색하여 찾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2:17 천사가‥‥말한 것을 고하니. - 목자들은 천사의 전한 바대로 아기 예수께서 구유에 누워 계심을 보게 되자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말한 모든 것(10-12절)을 고했다. 여기서 목자들이 고한 대상은 1차적으로는 아기 예수의 육친이었던 마리아와 요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베들레헴 거민들과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최초로 복음의 소식을 들은 자들이었고 인간들 가운데 최초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한 자들이었다. 이처럼 복음의 기쁜 소식은 그것을 들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2:18 기이히 여기되. -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기이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이야기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또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눅 1:63-65에서 세례인 요한의 출생에 대한 예언을 천사로부터 전해 듣고 그것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가랴는 하나님을 찬양했던 반면 주위 사람들은 이를 기이히 여긴 것과 같다. 한편 여기서 '기이히 여기되'(에다우마산)라는 말은 곧 '이상하게 여기다', '놀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다우마조'에서 파생한 것으로, 이 말은 흔히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에 대한 외경스러운 감동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2:19 마리아는‥‥지키어 생각하니라. - 여기서 '지키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테레이'는 '함께'를 의미하는 '쉰'과 '지키다', '굳게 붙잡다'를 의미하는 '테레오'의 합성어 '쉰테레오'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마음이 깊히 간직하여 지키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생각하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발루사'는 역시 '함께'를 의미하는 '쉰'과 '던지다', '두다'라는 의미의 '발로'의 합성어 '쉼발로'의 현재 분사형으로, 마음에 되새기며 숙고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들은 마리아가 예수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와 목자들의 말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 말들을 자세히 헤아려보며 이후 전개되는 사실들과 비교하는 등,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를 따라 아기 예수를 양육했음을 보여 준다(51절).
2:20 목자가‥‥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목자들은 천사의 전해 준 바가 사실임을 친히 목도하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고 그들의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물론 그들의 마음만은 이전과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하여튼 목자들은 구주가 태어난 열악한 환경에 실망하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이 모든 일이 천사가 전한 그대로임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믿음을 보였다. 이처럼 그 어떤 환경도 우리의 믿음을 침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없다. 본절에서 살펴본 목자의 행동과 같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의 마음을 더욱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2:21-39 성전에서의 예언
앞단락(13-20절)에서는 천사가 메시야의 탄생 소식을 목자에게 전하고 목자들이 주를 경배하며 찬송한 사실을 통해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실 자임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요셉과 마리아가 결례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경건한 노인 시므온과 안나를 성전에서 만나 메시야의 예언을 듣게 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은 예수의 할례(21절), 결례를 행함(22-24절), 시므온의 노래(25-35절), 안나의 예언(36-38절)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시므온과 안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확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규례에 따라 할례(창 17:12)와 헌신례(출 13:12; 민 18:15,16)를 받으셨고 모친 마리아도 결례(潔禮) 정결 의식을 지켰다(레 12:1-8). 사실 이러한 율법에 따른 의식은 죄인된 인간에게나 적용되는 것으로 죄가 없으시고 흠 없으신 예수님께는 소용이 없는 것인데 굳이 이것을 지키신 것은 친히 율법 아래 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심을 통해(마 5:17) 율법의 올무 아래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던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롬 8:1-11).
한편 메시야를 대망(待望)하던 시므온과 안나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의 도래가 바로 지금 성취되었음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먼저 시므온의 고별 노래(Nunc Dimittis)는 본서에 기록된 인자로 오신 메시야를 찬양하는 다섯 편의 노래 중 마지막 것이다. 그 내용은 메시야를 만난 기쁨(29절), 만인의 구세주되신 메시야(30-32절), 메시야의 영접과 박해(34,35a절). 메시야를 통해 모든 것이 드러남(35b절)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예언은 예수께서 만인의 구세주가 되신 사실과 배척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어 심판하실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또 시므온이 예언한 후 경건한 여인 안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이 다시 확증된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 순종하셨던 것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겸손하게 자기 비하하셨던 사랑과 은혜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둘째, 시므온이나 안나는 성전에서 메시야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즉. 시므온은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성령 충만한 자였다. 안나 역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메시야 도래를 준비하던 자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자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계획을 더욱 확실하게 알리신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신실한 믿음과 성실한 삶의 모습을 지닐 때 하나님께 귀히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2:21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 난지 제 팔 일째 되는 날에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그 백성들의 관례를 좇아 할례를 받으셨다. 이는 세례인 요한의 경우와 동일했다(눅 1:59 주석 참조). 한편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심은 그가 육체로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또 율법 아래에서 난 유대인이란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하시는 것이었다(갈 4:4).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 예수께서는 난지 제 8일이 되자 할례를 받으심과 아울러 비로소 천사가 고지한대로(마 1:21; 눅 1:31) '예수'라 불려졌다. 본래 유대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그 부모의 특권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이 이미 지어져 천사에 의해 고지되었다는 것은 그 이름이 신적 기원을 가지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심을 의미한다. 한편 '예수'의 이름과 관련해서는 마 1:2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22 결례의 날이 차매. - 여기서 '결례의 날'이란 아이를 낳음으로 부정하게 된 산모들이 정결 의식을 행하는 날을 의미한다. 율법은 자녀를 낳은 산모는 누구든지 부정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일정 기간(남아 40일, 여아 80일) 동안 외출 및 성전 예배를 일체 금지시켰고, 산모는 이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정결 예식을 통해 부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레 12:7-8). 이 정결 예식 때에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표시였으며, 속죄제는 부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혹자는 산모가 정결례를 위하여 성전에 올라갈 때는 황소를 탔다고 한다(Edersheim). 이에 대하여는 레 15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그들의'(아우톤)이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본절을 '유대인의 결례의 날'로 이해하는가 하면(Edersheim) 또 다른 이들은 '요셉과 마리아의 결례의 날'로 이해한다(Godet, Meyer, Plummer).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결례는 오직 산모만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누가가 마리아의 결례와 장자였던 예수의 봉헌 의식(23절)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Marshall).
2:23 율법에 쓴 바‥‥아기를 주께 드리고. - 율법은 이스라엘에서 난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하고 있다(출 13:12). 이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당시 하나님의 장자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위하여는 레위 지파 전체가 거룩하게 판별되었으므로(민 3:12),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가 별도로 하나님께 바쳐질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속하는 속전을 5세겔씩 바치고 예물을 드려 자신이 봉헌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다(민 3:47). 그와 같이 예수께서도 요셉과 마리아의 장자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예수께서 대속의 속전을 드려야 할 아무런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속전을 드리신 것은 장차 그가 중보자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 '태를 연 남자', 곧 '장자'를 의미한다.
2:24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 여기서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둘은 마리아의 정결 예식에 사용될 예물이었다. 그런데 본래 해산한 여인이 정결 예식 때 드리는 예물은 번제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제로 비둘기 한 마리였다(레 12:6). 다만 매우 극빈하여 어린 양을 번제로 바칠 수 없는 경우에는 비둘기로 드릴 수 있었다(레 12:8).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시므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므온이 유명한 랍비로서 산헤드린의 의장이었던 힐렐의 아들이요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행 5:34)의 아버지라고 하나(Spence) 이러한 주장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한 시므온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었던 사람이지만 본절에서 밝힌 시므온은 매우 나이 많은 노인으로(26-29절), 시간상 불일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가 기록한 시므온이라는 이름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었던 것을 기억할때, 그는 단순히 나이가 많고 경건하여 명망이 높았던 사람으로,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사람일 것으로 여겨진다.
의롭고 경건하여. - 여기서 '의롭고'(디카이오스)라는 표현은 율법에 충실한 시므온의 외적 생활을 묘사하는 말이며, '경건하여'(율라베스)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누가만이 사용하는 단어로서 (행 2:5; 8:2; 22:12), '신중한', '조심성 많은'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시므온의 내적인 성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유했음을 묘사한 말이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 메시야의 대망을 염원하는 시므온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야의 오심으로부터 기대되는 축복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 명칭은 당시 암울하던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종교 의식이나 일상생활 가운데 자주 사용되었던 말이다(사 40:1; 49:13; 66:13).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 시므온은 경건한 사람인 동시에 메시야의 탄생에 관해 영감을 받은 사람이었다. 한편 본절은 시므온이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하심 이전에 있었던 일이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오순절 강림 후에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 인도하심을 받은 것과 같이 구약시대의 경건한 성도들도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를 느끼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Hendriksen).
2:26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 여기서 '주'는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유대인들이 '여호와'라는 명칭 대신에 사용했던 하나님의 대명사이다. 따라서 '주의 그리스도'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 곧 '메시야'에 대한 별칭이다(시 2:2). 즉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여기서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논'은 '달리다', '지시하다'라는 의미의 '크레마티조'의 완료 분사형으로,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 응답으로 지시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즉 시므온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갈망하며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2:27 성령의 감동으로. - 문자적으로 '성령 안에서',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란 뜻이다. 이는 시므온이 성전에 들어간 것이 자신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랐음을 보여 주는 말로, 시므온에게 감동을 주는 성령의 연속적인 역사가 강조되고 있다.
성전. - 눅 1:9의 '성소'와는 달리 성전 구내, 곧 '성전 뜰'을 가리키는 말이다(Plummer, Robertson).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 여기서 '율법의 전례'는 산모를 위한 결례의 제사와 관련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례를 가리킨다.
2:28 하나님을 찬송하여. -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 아가 예수의 헌신례를 위하여 예수를 안고 성전으로 들어오자마자 그 아기가 바로 그가 대망했던 메시야이신 것을 알았다. 물론 그가 메시야를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았음에 분명하다. 하여튼 그는 성령의 계시하심대로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의 오심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아기 예수를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찬송의 내용은 29-32절에 나타난다. 한편 이러한
시므온의 찬송은 마리아의 찬송(눅 1:46-55)이나 사가랴의 찬송(눅 1:68-79)과 비교해 볼 때, 찬양의 미적 표현은 약하지만 구체적인 신학적 진리를 중심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2:29 주재여. - '주재'(데스포테스) 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무려 749번이나 쓰인 '종의 주인'을 의미하는 '주'(퀴리오스)라는 말과는 달리 신약성경에서 10번 밖에 쓰이지 않은 단어로, 이말은 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권과 비할 바 없는 권능'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행 4:24 ; 계 6:10). 이를 통해 볼 때 시므온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경건한 인물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 시므온은 죽기 전에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직접 목격한 시므온은 모든 것으로부터 평안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놓아주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오'는 종의 해방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로(Meyer) 때로는 오랜 임무에서 놓이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말이다(Plummer). 하여튼 시므온은 이 말을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음에 분명한데, 실로 성도의 죽음은 죄로 찌든 육신의 노예 상태에서와 일생의 긴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여기서 '주의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원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영적인 통찰력으로 앞으로 일어날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미리 본 것이 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그 자체였다(요 14:6). 그러한 의미에서 시므온은 현재 구원을 목격한 것이다. 실로 시므온은 예수를 그의 품에 안음으로써 구원을 손으로 만지고 자기의 것으로 소유한 것이었다(요일 1:1).
2:31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임을 노래한 것으로, 이는 시므온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야관을 초월하여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유대인을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죄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온 인류를 구원할 구주로 바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전절(31절)과 함께 복음의 세계적 확장과 구원의 보편성을 노래한 구절이다. 특별히 여기서 '빛'은 전혀 소망이 없이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가져 다 주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방'은 인종적으로는 비 유대인들을(롬 16:4; 엡 3:1), 도덕적으로는 불신자들(고전 5:1; 벧전 2:12)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종과 신분의 장벽을 뛰어 넘어 온 세계에 전파됨으로 모든 민족들이 구원 얻게 될 것을 시사한다(요 1:9).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 여기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방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즉 이방에게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빛'과 같은 형태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광'의 형태이다.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나라들보다 이스라엘을 축복하셨다는 증거가 되며(시 147:19,20; 롬 3:1, 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함은 물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죄악을 범하므로 그 영광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2:33 그 부모가‥‥기이히 여기더라. - 요셉과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 엘리사벳,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인데도 시므온의 말을 이상하게 여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시므온이 아기 예수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예언했기 때문이 아니라 천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아기 예수에 대한 증거들이 일치되고, 그 예언의 내용이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 시므온이 축복한 것은 아기 예수가 아닌 요셉과 마리아였다. 그가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하면서도 아기 예수를 축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인데, 그 이유는 어떤 사람도 감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축복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Spence, Marshall).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세움을 입었고. - 사 8:14; 28:16의 반영으로, 예수께서 그를 배척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되고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주가 되실 것이라는 말이다(Farrar).
비방을 받는 표적. - 여기서 '비방을 받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틸레고메논'은 '반대하여', '대항하여'를 의미하는 '안티' 와 '말하다'를 의미하는 '레고'의 합성어 '안틸레고'('거절하다', '비방하다')의 현재 수동태 분사로, 비방의 상태가 계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예언과 같이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멸시를 당하셨으며 그의 가르침은 시종일관 패역하고 방탕한 자들에 의해 비방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다(눅 4:28,29; 요 6:41; 8:13; 행 28:22).
2:35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으로 장차 마리아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서 '칼'(롬파이아)은 70인역에서 골리앗의 칼(삼상 17:51)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것으로, 보통 발칸 반도 동부에 있던 고대 로마 트라키아(Thracia)인들이 차고 다니던 큰칼을 가리킨다(Robertson). 결국 이러한 칼로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 것인지 분명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 34절 끝부분에 연결되는 구절로 그리스도의 사명이 언급되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드러내려함이니라'(아포칼뤼프도신)는 말은 '베일이 벗겨지다'의 뜻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 속의 생각이 밝히 드러나 의인과 악인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최종적으로는 구원과 심판이 각각 임하게 될 것을 보여 주는 계시사적(啓示吏的) 표현이다.
2:36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 본절과 다음 절은 예수를 증거했던 여선지자 안나의 신분과 삶의 배경 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시므온(25-35절)의 경우와는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안나는 아셀 지파 출신의 바누엘의 딸이었는데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개명된 뒤 그곳에 붙인 이름인 '브니엘'(창 32:30)의 헬라어 음역으로,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또한 '안나'는 사사이자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삼상 1:2의 헬라어 음역으로, '은혜', 또는 '호의'의 뜻을 갖고 있다.
선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티스'는 본절과 계 2:20에만 나오는 단어로 보통 여선지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2:37 과부된 지 팔십 사년이라. - 직역하면 '84세까지 과부로 지냈더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는 그 의미가 다른데 한글 개역 성경은 안나가 과부가 된 햇수만 84년이라는 오해를 낳을 우려가 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대로 하면 안나는 현재 나이가 84세가 되며 그녀 는 남편과 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하다가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까지 줄곧 과부로 지낸 것이 된다. 만일 당시 조혼의 관습대로 그녀가 15세 전후에 결혼했다면 그녀는 약 60여년을 과부로 지내며,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전을 위해 봉사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38 하나님께 감사하고. - 여기서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는 '상대하여'(안티)와 '고백한다'(호몰로게오)의 합성어 '안도몰로게오'의 미완료 중간태로 '서로 동의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안나가 성령의 지시로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되자 반사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한 것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 - 예루살렘은 정치 ․ 종교 ․ 사회 ․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중심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구속이란 이스라엘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절의 '모든 사람'이란 이스라엘의 구원과 메시야를 대망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즉 안나는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을 그가 만나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증거했던 것이다. 말하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랄레이'는 미완료 시제로, 이는 안나가 예수에 대해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증거했음을 시사한다.
2:39 모든 일을 필하고‥‥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요셉과 마리아가 마치 예수에 대한 봉헌 및 마리아의 결례를 마치고 곧바로 나사렛으로 돌아간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마 2:1-21에 나타난 동방 박사들의 방문, 애굽으로의 도피, 헤롯의 어린아이 학살 사건, 애굽에서의 나사렛 귀향 사건 등의 기록이 생략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 혹자는 누가가 이에 대한 자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Plummer). 하지만 누가가 마리아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본서 곳곳의 기록(19,51절)은 누가가 동방박사들의 방문이나 예수의 애굽 도피 사건을 알았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가 이 사실을 생략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의 저작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누가는 성경을 기록할 때, 한 가지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서에는 예언의 성취로서 유대인의 땅에서 행해진 예수의 사역을 밀도 있게 언급하고,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 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복음의 세계적 전파를 기술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그에 따른 애굽 피신 등은 그의 이러한 저작 의도에 부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예수의 애굽 피신은 다 같이 복음의 이방 전파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는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와 그에 따른 예수의 애굽 피신 사건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마태와 마가가 복음서 기록에 있어 이방 땅인 애굽(마 2:13-15), 두로(마 15:21-28; 막 7:24-30),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 막 8:27), 데가볼리(마 4:25; 막 5:20), 가다라(마 8:28-34; 막 5:1-17) 지방에서의 예수의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취급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러한 사실들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는 데서도 입증된다(Hendriksen).
2:40-52 예수의 어린 시절
앞 단락(21-39절)에서는 요셉, 마리아와 예수님이 율법대로 할례, 결례, 헌신례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올라간 것과 시므온과 안나의 예언 기록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의 본질 등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년 시절의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4복음서 중 유일하게 본서에만 언급된 것이다. 이는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이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어린 시절보다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인자(人子)로서의 메시야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가 여느 인간들과 같은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하여 이미 그가 메시야로서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를 찾으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 선생들과 토론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46,47절). 예수님의 지혜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신적(神的)일 능력이다. 이런 신적인 지혜와 능력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중에 나타난 말씀 선포나 해석을 볼 때에 더욱 확실히 나타난다.
둘째는 모친이 왜 찾도록 만들었냐고 책망할 때에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나타난다(48,49절)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지칭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이미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최초의 언급이 다(마 11:25; 막 14:36; 눅 22:29; 23:46; 요 5:17), 한편 예수께서는 메시야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도 완전하여 부모에게 순종하는 도리를 다하셨다(51절). 그래서 누가는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의 착실하고 모범된 성장을 평가하고 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자(人子)로서 조화롭게 성장해 나가셨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신앙적으로 주님 앞에서 믿음의 도리를 다할 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여 균형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요일 4:20,21).
2:40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 - 예수의 유년기 모습을 묘사한 구절로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도덕과 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성장하셨음을 보여 준다. 특별히 여기서 '자라며'( 에위크사넨)는 '기르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욱사노'( )의 미완료 직설법이며, '강하여지고'(에크라타이우토)는 '강해지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크라타이오'의 미완료 중간태이다. 따라서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말은 예수의 육체적 성장을 나타내는 말로 그가 점차 자라는 동안 매우 원기 왕성하고 활동적인 어린이로 강하게 성장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충족하며'(플레루메논)는 현재 수동태 분사형으로 이는 예수의 지혜가 충족되어 가는 과정이 육체적 성장에 보조를 맞추어 점진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의 성장 과정이 매우 정상적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말은 예수의 영적 성장을 보여 주는 말로, 결국 본절은 예수께서 육체적, 지적. 도덕적, 영적으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균형되게, 그리고 인간의 유전이나 후천적 결함, 흑은 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셨음을 나타내 준다(Hendrik.fen, Robertson).
2:41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매년 세 번씩(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예루살렘 성전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야했다(출 23:14-17; 신 16:16). 그러나 포로 시대 이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팔레스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만큼은 원칙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의 절기에 관하여는 신 서론 특별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본래 율
법은 남자들에게만 이스라엘 3대 절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도록 명령하고 있으나 후에 랍비 힐렐(Millet)이 여자들도 유월절 예식에 참석할 것을 가르치면서 여자들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하여튼 요셉과 마리아가 해마다 계속하여 유월절 절기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경건한 생활을 잘 보여 준다.
2:42 예수께서 열 두 살 될 때에‥‥올라갔다가. - 유대인의 어린이 교육은 엄격히 수행되었는데, 6세가 되면 쉐마(Shema. 신 6:4-9)나 시편 중 중요한 구절을 암송하였고(쉐마에 대해서는 신 6장 자료노트, '쉐마 본문 이해'를 보다 참조), 10세부터는 율법의 해석인 미쉬나(Mishina)를 배우며(미쉬나에 대해서는 막 7장 연구자료. '장로들의 유전' 참조), 13세가 되면 소위 '율법의 아들'(Bar Mitzvah)이 되어 회당(Synagogue)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율법을 본격적으로 배우며 지키게 된다. 한편 탈무드의 구전이나 미쉬나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소년들은 13세가 되기 1, 2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미리 올라가 '율법의 아들'이 되었을 때에 취해야 할 행동들을 배웠다고 한다(Morris). 본절에서 예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 유월절 절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2:43 그 날들을 마치고. - '그 날들'은 유월절 행사 기간인 니산월 14-21일까지의 7일 간을 가리킨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유월절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오래 머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겨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과 마리아가 '그 날들을 마쳤다'고 한 것은 그들의 경건한 신앙과 종교적 열성을 능히 짐작케 하는 것이다.
아이 예수는‥‥이를 알지 못하고. - 당시 열두 살의 나이는 어린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월절 기간 동안 예수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때가 언제인지도 잘 알았을 것이다. 특별히 본절의 '아이'(파이스)는 40절의 '아기'(파이디온)와는 구별되는 말로 '소년'을 가리키는데, 이는 예수께서 혼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셨음을 의미한다. 하여튼 유월절 행사가 끝났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귀향길에 올랐으나 예수는 그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고 요셉과 마리아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부모가 아이의 행적을 몰랐다는 것이 매우 의아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 유월절 행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던 까닭에 귀향길에 오를 때는 한 고향을 단위로 무리를 지어 이동했으며 이 때 아이와 여자들은 앞에, 남자들은 뒤에서 이동했으므로 아이가 어느 행렬에 끼여 여행하리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여행 길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2:44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 유월절을 마치고 귀향길에 오른 행렬은 밤이 되면 각자 가족을 중심으로 모여 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행렬 중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찾았으나 만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찾되'(아네제툰)는 미완료 능동태로 어느 일정 기간을 계속해서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을 의미한다.
2:45 찾으면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나타낸다.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여기서 '사흘 후에' 라는 것은 '사흘째 되던 날'을 가리킨다. 첫째, 날은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가 귀향 행렬에 없는 것도 모른 채 예루살렘을 떠난 하루 동안의 여행이었고, 둘째 날은 예수를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셋째 날에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찾은 것이다. 이로써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와 같이 인생이 예수를 잃어버리는 기간은 허송세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를
잃은 자들은 속히 예수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성전'은 성전 구내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예수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아니므로 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 선생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들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성전경내에는 세 개의 회당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방인의 뜰의 문 곁에 있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인을 위한 뜰의 입구에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안 뜰의 동남부에 있었다. 이 가운데 랍비들은 대체로 안 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했다고 한다(Spence, Lang).
이때 랍비는 그의 좌석에 앉고, 가르침을 받는 생도들은 땅바닥에 앉아 랍비들의 강론을 들었는데 예수도 바로 그 생도들과 같이 땅 바닥에 앉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문답을 통한 교육은 운대 인들이 흔히 잘 사용하던 방법으로 학생들의 흥미를 야기시키고 명확한 답을 얻게 하는데 큰 효과를 거두는 교수 방법 중의 하나이다. 하여튼 예수는 선생들과 더불어 여러 주제를 놓고 토론한 듯하다. 외경 로마 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이때 율법을 비롯해 철학, 자연 과학 등 여러 방면의 문제를 토의했다고 적고 있다.
2:47 듣는 자가‥‥기이히 여기더라. - 예수는 날카로운 지성과 영적인 깊이를 바탕으로 랍비들의 질문들에 차분히 답변을 함으로써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특별히 여기서 '기이히 여기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시탄토'( )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다'는 의미의 동사 '에크시스테미'의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 사람들의 매우 놀란 상태가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 예수를 찾았을 때에 그 모든 분위기를 보고 요셉과 마리아는 몹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세플라게산'은 '내려치다', '때려서 내어 몰다'라는 의미의 '에크플레쏘'( )의 제 2부정 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이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가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는 장면을 보고 심히 큰 충격을 받을 만큼 놀랐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가 비범한 인물이 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처음 경험했던 것 같다.
아이야 어찌하여‥‥너를 찾았노라. - 이렇게 말하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예수에 대한 부모로서의 염려와 약간의 분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마리아의 이러한 태도에는 예수의 비범성을 직접 목격하고 당황하는 모습도 포함되어 있을 것은 분명하다.
2:49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 마리아의 책망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말은 부모들이 자신을 찾아 헤맨 이유에 대한 의아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부모들이 자신이 있을만한 유일한 곳이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는 본절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의의를 분명하게 나타내신다.
내 아버지 집에‥‥알지 못하셨나이까. - '내 아버지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일은 여러 곳에서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리아가 책망한 이유는 예수가 한 일 때문이 아니고 그가 있었던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내 아버지 집'으로 번역(R.S.V)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이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가 어려서부터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계속해서 가르친 신학적 주제에 나타나 있다(마 11:25-27; 눅 10:21,22).
2:50 양친이‥‥깨닫지 못하더라. - 예수의 양친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예수의 구주되심을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 인식하고 있던 것을 보여주는데, 특히 그들이 아들 예수가 자신을 메시야로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2:51 예수께서‥‥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성전에서 잠시 자신의 참 모습을 보이신 후에 예수는 주저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는데. 여기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엔 휘포타쏘메노스 아우토이스)는 말은 미완료 수동태로서 이는 예수의 순종이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나사렛에 머무시는 동안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지녔음을 나타내 준다.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 여기서 '두니라'(디에테레이)는 말은 '철저히 지키다' . '엄격히 지키다'라는 의미의 '디아테레오'의 미완료형으로, 이 말은 마리아가 이전에 예수에 대한 천사와 여러 사람들의 예언을 생각함과 동시에 예수의 언행을 계속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52 예수는‥‥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이것은 40절의 반복된 말씀이며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성장이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균형 잡힌 성장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갔다'는 표현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음을 의미하는데, 참으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셨으면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완전한 인자(人子)로서 성장하셨음을 나타내 준다.
연구자료
안나-대망 중에 예수를 만난 여선지자
1. 인적 사항
① 안나는 '은총'이라는 뜻.
② 아셀 지파 바누신의 딸(눅 2:36),
③ 예루살렘의 여선지자(눅 2:36).
④ 결혼 후 7년 만에 과부가 됨(눅 2:37,38).
2. 시대적 배경
B.C. 1세기경 유대가 헬라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 시대를 지내다가 다시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 들어가는(B.C. 63년) 등 급격한 역사적 혼란을 겪던 시기의 인물, 이 당시는 암울한
정치적 ․ 종교적 현실로 인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이 크게 무르익던
때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구약 성경의 예언과는 달리 이스라엘을
적국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며 궁극적으로는 온 열방 위에 군림할 나라로 만들어 줄 정치적
메시야였다. 그러나 안나와 같은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바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할 메시야를 기대하였다.
3. 주요 생애
예수 대면 이전 | ||
출생 | - | |
결혼 | - | 눅 2:36 |
남편과의 사별 | - | 눅 2:36 |
성전에서 봉사하며 메시야를 대망함 | - | 눅 2:37 |
예수 대면 이후 | ||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남 | 84세, B.C. 4년 | 눅 2:38 |
아기 예수에 대한 소식을 전파함 | 〃 | 눅 2:38 |
죽음 | - |
4. 성품
① 독신 생활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긴 것으로 보아 자신의 처한 형편에 감사하며, 일관성 있고 강한 믿음을 소유한 자(눅 2:37).
② 성전에서 생활하는 동안 금식과 기도로 일관한 것으로 보아 금욕과 절제의 생활을 한 자(눅2:37).
③ 평생 동안 메시야 강림을 대망한 것으로 보아 끈기 있는 신앙을 소유한 자(눅 2:37,38).
④ 늙어서까지 선지자로서 성전에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으로 보아 사명감이 투철한자(눅 2:37).
⑤ 성전에 들어온 아기 예수를 구세주로 알아본 것을 볼 때 영적 깨달음이 뛰어난 자(눅 2:38).
5. 구속사적 지위
① 평생 동안 헌신과 인내로 주의 강림을 대망한 자(눅 2:37).
② 구세주의 강림을 알린 최초의 여선지자(눅 2:38).
6. 평가 및 교훈
① 안나는 남편과 사별 후 수십 년 간을 독신으로 살면서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처한 형편이 어려워도 끝까지 주의 강림에 대한 소망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눅 2:37,38).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도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 닥쳐오든지 주의 재림과 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을 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살전 1:3).
② 평생 동안 헌신과 인내로 주의 강림을 대망한 안나는 결국 메시야를 만나는 영광을 얻었다(눅2:38).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우리 성도들 역시 안나처럼 경건과 헌신의 삶을 살 때에 영광중에 재림의 주를 만나며, 아울러 우리에게 예비된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것이다(살전 5:23; 딤후 4:8).
③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아기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눅 2:37,38). 이처럼 늘 깨어서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골 1:9)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할 것이다(골 2:2). 이에 우리도 안나와 같이 늘 깨어 기도함으로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대로 행하는 복된 자들이 되어야겠다.
④ 안나는 84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더욱이 늙도록 충실히 자신의 직무를 잘 감당하다가 주를 만나는 복을 누렸다(눅 2:37,38). 이처럼 주께서 허락하신 사명을 귀하게 여기고 충실히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맡겨진 사명은 무엇인가?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 귀한 줄 알아 늙도록 충성할 각오로 힘써 일하고 있는가?
⑤ 여선지 안나의 모습은 노년기에 접한 성도들의 신앙의 모범이 된다. 실로 자신의 형편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초지일관 진지하고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안나의 삶은 얼마나 존경스럽고 홈모할 만한가! 이같이 성도는 노년기에도 힘이 닿는 한 경건히 주의 일에 몰두하며, 찬송을 부르고 자식들에게 본을 보이며, 남을 위로하는 신실한 믿음 생활에 힘써야 하겠다.
7. 핵심 성구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