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유가방가옥 수선화축제
2024년 04월 06일(토요일)
산행코스 : 서산 유기방
산행거리 :
주차장이 만차로 들어갈수 없어서 유기장가옥까지 걸어서 들어갑니다.
유기장가옥 매표소
서산 여미리 비자나무(충청남도 기념물 제17호)
비자나무
둘레246m, 높이 20m로 조선 숙종때 여미 출신인 이택이 1675년 제주도에서 비자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기방 가옥
여미간(餘美幹) 현판
서산지역 전통 양반가옥으로서 야산을 뒤로 하고 "U"자형으로 토담을 두른 후 동측에 사랑채공간과 서측에 안채공간을 토담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안채는 "ㅡ"자형으로 부엌, 방, 대청마루, 건넛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뒷마당에는 석축위로 장독대를 설치하여 장독마다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이채롭습니다. 안채 앞으로 원래 중문채가 있었다 하나 후대(0980년대)에 헐어내고 현재의 목조구택을 건축하였습니다.
행랑채는 안채 좌측에 위치해 있고 중앙칸에 협문을 달아 외부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굴뚝이 뒤로 흐르는 배루소위를 지나도록 설치한 기법이 눈여겨 볼만합니다.
사랑채는 "ㄴ"자형으로 둘문을 설치하여 필요시 사랑방에서 마루까지 한 공간으로 개방할 수 있도록하였고, 사랑채 앞에는 "ㄱ"자형 사랑채대문이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전형적인 전통양반가옥의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보존상태가 향호하여 조선후기 주책사의 학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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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묘 입구
선정묘
선정묘는 조선 정종의 4남 선성군(宣城君)과 배위 3명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입니다. 선성군의 사당은 본래 경기도 파주에 있었으나, 후손이 끊기면서 서산의 후손들이 그 제향을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동족 마을로, 처음 입향한 인물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낸 이창주(李昌冑, 1567~1648)입니다.
후손의 전언에 따르면 선성군의 신위는 파주에서 서울~수원~온양~예산~면천을 거쳐 옮겨졌으며, 곳곳에서 군인의 호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셔온 신위는 한동안 후손의 집에 임시로 보관되다가 1928년 선정묘를 건립하여 이안(移安)하였습니다.
승선문
사당과 외삼문으로 구성된 남향 건물이며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은 2단의 단을 조성한 위에 마룻바닥은 타일을 깔았고, 4각의 높은 초석에 둥근기둥을 세웠습니다.
화려한 다포 양식에 지붕은 양 측면에 방풍판[맞배지붕에서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붙여 댄 널빤지]을 대목(帶木)에 의지하여 붙이고, 판자와 판자 사이에 졸대(좁고 가늘게 쓰는 재료)를 덧대어 붙였습니다. 시설이 있는 맞배지붕입니다. 동측에 재실인 선미재(宣美齋)가 있습니다.
석불입상과 보호수 소나무가 보입니다.
수령 300년, 수고 : 25년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유형문화재 제132호)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방화된 양식을 보여줍니다. 1970년대에 현 위치에서 1km 쯤 떨어진 용장천에 묻혀 있던 것을 주민들이 발견하여 옮긴 것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냇가에서 5km 쯤 상류지역에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떠내려온 것이라 하지만 분명하지 않습니다.
불상은 화강암의 전면에 얼굴과 손등을 조각했으나 옆과 뒷면에는 거친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마모가 심합니다. 목은 부려졌던 것을 복원하였습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간략하고 형식적이며, 입체감이 있습니다.
(규모 : 불상높이 3.1m, 화강암)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