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 선 조
◆ 선조의 즉위
즉위초의 평화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 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 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였다.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유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윤원형등
을 삭훈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 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을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
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했다. 사림의 분당 사태가 조정을 혼란시키자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그 후 이이 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그러던 중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은 별 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그 때 좌의정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 을 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되었다.이 사건으로 서인의 세력은 실각하게 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실각한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과 남인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삭탈관직 당한 서인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 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과격파인 전자를 북인, 온건파인 후자를 남인이라 했다.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의 발발야인들은 1583년과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탕개가 주동이 된 이 반란으로 한 때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의
관할권이 완전히 장악당하자 조정은 온성부사 신립과 첨사 신상절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다. 한 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 을 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이듬 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통신부사 김성 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 게 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 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 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 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여 보 름 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했고,5월 2일에는 한양
을 함락시켰다. 이 후 개성,평양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양(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을 남겨놓은 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
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 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고,이 때
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1593년 4월에 한성을 수복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1597년에 정유재란
이 발생했지만,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신권정치의 구현명종 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행위를 선조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 적인 당파 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 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분히
혼란상을 야기시켰고,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선조가 구상했 던 당파 중심의 신권 정치는 근대적 정치 형태인 의회 정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붕당정치의 바른 이해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당쟁,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 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김씨,풍양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쟁발발 이전상황임진왜란이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국이 조선을
침범한 사건을 말하며,1차를 임진왜란, 2차를 정 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1,2차를 합쳐 통상 임진왜란이라고 한다.이 사건을 일본에서
는 분로 쿠, 케이초의 역' 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만력의 역'이라고 부른다.'대륙
정복'이라는 구호를 내건 도요토미는 1589년 대마도주에게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서로 수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하려는 목적은 서로 힘을 합쳐 명을 치자는 것이었다.그래서
대마도 주는 가신들을 보내어 서로 통호할 것을 청하였다,이 제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선조는 찬탈시역한 나라의 사신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하지만 정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숙의한 결과 관례대로 사신을 받기로 함에 따라
선조는 일본의 수교문을 받게 되는데,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보서(사신의
서찰)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을 보류했다.그리고 이듬해 수로가
좋지 않다 는 이유로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마도주 가신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이 후 몇 번에 걸쳐 일본은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1589년 9월경에 여러차례 논란 을 거친끝에 일본의 실정과 도요
토미 의 저의를 동시에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0월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해 이 결정은 다시 지연되었고,11월 중순
쯤에 겨우 통신사 일행을 선정했는데,통신정 사는 황윤길,부사는 김성일,서장관에는
허성으로 결정되었다.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3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통신사로 갔다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일본 정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조정은
한동안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박을 벌여야 했다. 서인인 통신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침략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동인인 김성일
은 침입할 조짐이 없었을뿐 아니라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하였고,김성일을 수행하였던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자당의 인물을 비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전쟁설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성을쌓는 등 전쟁에 대한 방비를 하던 것마저 각 도에 명을 내려 중단시켰다.
이 후 선위사 오억령은'일 본이 다음해에 조선의 땅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한다'
는 보고를 하기도 했지만 묵살당하고 도리어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왜인들이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어 왜관이 텅 비게되자
그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을 감지하고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을
전라감사,윤선각을 충청 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 한편으로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에,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때늦은 조치였다.
전쟁의 발발조선이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로 인하여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전무했던
것에 비해 일본은 오랜 전쟁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술,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서양에서 건너온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하고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일본의 20여만 병력은 모두 아홉 개의 부대로 나뉘어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당시 일 본의 총 병력이 30여 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
병력의 3분의 2가 조선 침략에 투입된 셈이었다. 나머지 병력 중 약 10만여 명은
도요토미의 지휘아래 나고야에 머물러 있었으며,3만여 명은 교토를 수비하고 있었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수도 한양을 내주고 말았다.
이 후 6월에 평양을 내주 고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했다.조선은 전라도 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하지만 전라도 지역의
수군만큼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은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완전히 차단되고 있었다.거기에다 6월 이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
들의 활약과 명나라가 보낸 원군으로 전세는 조금씩 역전되고 있었다.
이듬 해 2월 평양성을 회복하고,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4월에 마침내 한양
을 탈환했다.이 때 한성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강원도와 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 위쪽의 서생포에서 진주아 래 쪽의 웅천까지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일본은 화의를 진행시키는 한편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을 함락
시켰다.이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 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등이
전사하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편 명은 일본의 화의 제의를 일단 수용하고 심유경을 도요토미에게 보내 2, 3년간
교섭을 진행시켰다.
화의 진행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무역허가
증명서인 감합인을 복원할것,조선 8 도 중 4도를 할양할 것,조선 왕자 및 대신12인을
인질로 보낼것 등 네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잡아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명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을 내세워
명의 허락을 얻어냈다. 이에 1596년 명은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도장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분개하면서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략을 꾀하였다. 이 때문에 심유경은 명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몇 년간 지속되던 화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1597년 1월 15일 일본은 다시 15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입해왔다. 이것이 정유
재란이다. 일본군이 다시 침략 하자 명나라의 원군도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고 조선
땅은 또 한 번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한 때 임금이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동안 방비책을 마련한 조선군과 명군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군은 충청도를
넘지 못하다가 이듬해 8월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철군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겨우 퇴로를 열어 11월에 완전 패퇴했다.
이로써 6년 7개월간의 조. 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영향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을 거듭하던 사회가 이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가 극심해진다.
전화에 따른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어170만
결이던 농토가 54만결로 줄어들었다.그래서 난 중에는 국가 재정 마련책의 일환으로
납속책을 시행하게 되었다.이 납속책은 소정의 곡물이나 돈을 받고 납속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의 시행으로 임진왜란 동안 많은 향리,
서얼, 천민,노비등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전공을 세운 사람
에게는 신분에 상관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었기에 조선사회는 신분
제약이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져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
지기도 했고, 전란 중에 조정에 불평을 품고 내란을 획책하는 사례도 있었다.
1594년의 송유진의 난, 1596년의 이몽학의 난이 당시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반란
사건으로 일반 민중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의 소실도 엄청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 미술품 등이 없어지거나 약탈당했다. 또 역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하지만 전란이 꼭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전란의 영향으로 그동안 소흘하게 다루어졌던 국방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타민족과의 갈등을 통해 애국심이 고취되기도 했다.
또한 병제를 재편하고 무기의 개량에 착수했 으며 병술을 개혁했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지방에도 예비군인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는 종래의 주무기인 활,창,검등의 무기와 총통,완구,화전등의 화기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일본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조총을 제조
하여 실전용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곳에 관우묘가 세워
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편 일본도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오랫동안의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 생활을 피폐해져 있었으 며,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끌고간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로 도자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약탈해간 조선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거기에다 포로
로 끌고간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특히 '퇴계집'등 중요한 서적들을 가져가 일본 문화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병했던 명은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고,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그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치
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
이었다.
조선은 비록 일본의 침 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이
지속되었지만,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힘이 커지고 양반 중심의 정부의 힘이 약화되는
현상을 낳았다.
- simdook0515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