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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진_KSL_#0216(삿5:1-31)_240223
[단락구성] - 아래와 같이 3단락으로 구성
05:01-12 –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서문 및 승전가 전반부
05:13-22 –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중반부
05:23-31 –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후반부 및 드보라의 40년 사역기사의 종결
제 1단락:
05:01-12 –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서문 및 승전가 전반부
5: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On that day Deborah and Barak son of Abinoam sang this song:
그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이 노래를 불렸습니다.
본 장은 하솔 왕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를 진멸함으로 그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벗어나게 한 전쟁에 앞장선 드보라가 노래를 지어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는 부분으로 홍해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체험한 직후 모세가 노래를 지어 여호와를 찬송했던 것 (출15:1-18) 과 유사하다. 그런데 노래를 지어 부른 시점을 나타내는 ‘이 날에’에 해당하는 ‘빠욤 하후’는 ‘바로 그 날에’ 란 뜻이다(원어 설명은 4:23절 참조).
그런데 여기서 ‘드보라와 ... 바락이’ 함께 노래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락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화답송의 형식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과거 모세의 노래와 마찬가지로(출15:1-18) 아마 당시에도 바락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드보라의 노래에 화답하였음이 분명하다.
5: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2 “That the leaders took the lead in Israel,
that the people offered themselves willingly,
bless the Lord!
이스라엘에서 그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끌었고 그 백성들이 기꺼이 그들 자신들을 바쳤습니다. 여호와여 축복하소서!
▶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 That the leaders took the lead in Israel
. 한글 개역 성경은 ‘삐프로아(פְּרָעוֹת֙)’를 그를 영솔하였고’로 번역하였으나, 원어 성경에는 ‘그를’ 이라고 번역할 만한 대응어가 나오지 않는다.
▶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문자적 의미는 ‘백성이 자원하여 스스로를 드릴 때 (KJV, NIV, when the people willingly offered themselves)’이다. ‘빼히트낫데브(הִתְנַדֵּ֖ב)’는 ‘자원하다’ (출35:21), ‘즐거이 드리다’(대상29:17) 란 뜻을 가진 동사 ”נָדַב(nā ·ḏǎḇ) “ 나다브가 어원이다. 나다브’ 는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 의사로 하나님께 봉사하거나 제물을 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드보라가 백성의 헌신을 강조하여 노래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스라의 군대는 철병거 구백 승으로 중무장하고 있었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창과 방패와 같은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8절 설명 참조).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전력상 그 싸움은 도저히 승리할 가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믿음 안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즐거이 드리는 마음으로 그 전쟁에 임했던 것이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믿는 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싸움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엠 6: 12) 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고후 10:4) 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살전5:8) 쓰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세로 영적 전쟁을 싸워 나가야 한다.
5: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3 Hear, O ye kings; give ear, O ye princes; I, even I, will sing unto the Lord; I will sing praise to the Lord God of Israel.
왕들이여,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너희 백관들이여,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기서 ‘너희 왕들아’로 번역된 ‘멜라킴(מְלָכִ֔ים)’은 ‘왕’을 뜻하는 명사 ‘멜레크(מֶלֶךְ)’ 의 복수형으로서, 드보라의 노래를 현장에서 듣고 있는 왕들이 아니라 불특정한 세상의 일반 왕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방백(통치자)들아’에 해당하는 ‘로제님(רֹֽזְנִ֑ים)은 ‘관원’(시 2:2), ‘주권자’(잠31:4), ‘귀인’(사40:23)으로도 번역되는 ‘라잔(רָזַן)’의 복수형, 이 단어는 대개 ‘왕’을 뜻하는 ‘멜레크(מֶלֶךְ)’와 함께 쓰여 세상의 모든 통치자를 가리킬 때가 많다(시2:2, 잠8:15 ; 합1:10).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멜레크’ 와 함께 이스라엘의 왕이나 방백이 아닌 이방의 모든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은 홍해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출 15:14-16)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님의 놀라운 일들을 듣고서 두려움에 떨며 낙담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의 참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은 영광을 얻을 것이다(출 14:4).
▶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노래할 것이요’ 에 해당하는 ‘아쉬라(אָשִׁ֔ירָה)’는 노래하다’ 란 뜻의 동사 쉬르( )’
의 인칭 단수 연장형 (cohortative) 으로 그는 ‘나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라(Let me sing)’는 간접 명령을 나타내거나 ‘나는 기필코 노래할 것이다(1 will sing)’라는 주어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어떻게 해석하든 본문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드보라의 영적 상태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찬송하리로다’ 로 번역된 ‘아잠메르(אֲזַמֵּ֕ר)’의 기본형인 ‘자마르(זָמַר)는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시33:2; 71:22; 98:5; 147:7; 149:3). 따라서 드보라와 바락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러 가지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했음을 알 수 있다(출 15:20 ; 삼하 6:5).
한편 본문은 앞의 나 곧 내가 여호와를 할 요’와 상 평행을 이루고 있지만 그 의미는 한층 강화된 종합적 평행법(synthetic parallelism)이 사용되고 있다. 종합적 평행법이란 두 번째 시구(詩句)가 앞의 첫번째 시구를 완성시키거나 보완하는 시행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일걷는다. 여기서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보완, 완성되었다. 이는 ‘여호와’가 특별히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5: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4 “Lord, when you went out from Seir,
when you marched from the region of Edom,
the earth trembled
and the heavens dropped,
yes, the clouds dropped water.
주여, 당신이 세일로부터 나오시고 에돔지역에서부터 행진하였을 때, 땅이 진동하였으며 하늘이 떨어뜨렸고, 구름이 물을 떨어뜨렸습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본절은 과거 출애굽의 여정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던 여호와의 권능을 노래하고 있다.
‘세일(세이르)’은 이어 나오는 에돔 땅을 가리키는 동의어이다(창36:30).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에돔을 지날 때(민20:14-21, 신 2:1,8)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세일’이나 ‘에돔’은 광야 여정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본문은 분명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신 33:2) 라고 회상한 모세의 백성에 대한 마지막 축복의 말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후에 다윗이 노래한 시편에서 그 시상(詩想)이 이어지고 있는데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시68:7) 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본문의 ‘세일’ 과 ‘에돔’ 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여년 거닐었던 ‘광야’ 전체를 상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또한 하늘이 떨어뜨렸고, 또한 구름이 물을 떨어뜨렸다’이다. ‘새어서’로 번역된 ‘나타푸’와 ‘내렸나이다’로 번역된 ‘나테푸’는 동일한 단어이지만 엑센트의 위치 때문에 두번째 자음인 ‘테트’ 밑의 모음만 다르게 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비가 매우 많이 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시내산을 비롯해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동안에 비와 관련된 사건의 기록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문은 아마도 드보라가 시스라와의 싸움에서 있었던 (21절) 기손강 전투를 염두에 두고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5: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5 The mountains quaked before the Lord,
even Sinai before the Lord, the God of Israel.
산들은 여호와앞에 진동하였고, 시내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습니다.
▶ 본절 전체를 직역하면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흘러내렸고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다.
KJV는 “~진동하다”는 뜻의 “נָזְל֖וּ”(노즐루)를 “melted”, 즉 “녹았다”로 번역하였다.
드보라는 여호와의 출현으로 인하여(4절) 산들이 마치 ‘물처럼 흘러내렸다’ 고 말하고 있는데, 본절에서 특별히 시내산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와의 강립으로 인한 지진과 같은 큰 진동(출19:18) 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이것은 시스라와 바락의 기손강 전투 당시 큰 비로 인하여 산의 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흙탕물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시어 (詩語)의 중의법 (重意法)적 표현을 통해 드보라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생동감 있게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5: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6 “In the days of Shamgar, son of Anath,
in the days of Jael, the highways were abandoned,
and travelers kept to the byways.
아낙의 아들, 삼갈의 날에 그리고 야엘의 날에는 대로들이 비었다. 그리고 여행하는 자들이 우회로를 이용하였습니다.
▶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족속과 하솔 왕 야빈의 압제를 받던 억압의 시대를 말한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난제를 가져다 준다. 하나는 블레셋 사람 600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 삼갈의 시대를 압제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스라를 죽인 헤벨의 아내 야엘을 사사 삼갈과 동퉁한 지위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첫번째 과제를 해결하자면 삼갈의 시대적, 공간적 활약 범위를 이해해야 한다. 삼갈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인 왼손잡이 사사인 에훗 이후에 일어난 사사였다 (3:31). 그리고 하솔 왕 야빈의 학대를 받았던 것도 에훗이 죽은 이후였다 (4:1). 따라서 삼갈의 시대는 사사 에훗의 팔십 년 태평의 통치기간 (3:30) 이후인 동시에 야빈의 압제에 있던 시대였다. 비록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지만 (3:31) 그의 구원이 이스라엘 전역에 미쳤다고 볼 수는 없다. 블레셋은 가나안 남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활동한 민족이었고, 따라서 삼갈의 구원은 국지적(局地的)이었던 것이다. 삼갈의 활약 당시 가나안 북부 지역은 아직도 야빈의 압제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성경의 진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사 통치기간을 묘사하는 규범적인 진술인 ~년 동안 태평했다’ (3:11,30; 5:31; 8:28) , 혹은 ‘사사가 된 지 ~년이라’ (10:2, 3; 12:7, 9, 10, 14; 16:31)란 문구가 삼갈의 경우에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활약이 단발적이었음을 반증한다. 이처럼 삼갈의 활약이 국지적이고 단발적이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삼갈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은 구체적으로 야빈의 학대를 받았던 20년의 기간(4:3)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번째 과제인 야엘의 언급 역시도 첫번째 해답에서 그 해결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삼갈은 비록 사사로 인정되었지만 그 활약은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 사건에 국한되고 있다. 야엘의 활약은 이러한 그의 활약에 충분히 견줄 만한 것이었다. 즉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인 (4:21)은 블레셋인 600명을 죽인 것과 충분히 견줄 만한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드보라의 예언처럼 (4:9) 시스라를 죽이는 것은 그 전쟁에서 가장 큰 영광을 얻을 만한 중대한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 대로가 비었고
본문을 직역하면 ‘길들이 그쳤다’ 이다. ‘비었고’로 번역된 ‘호들루(חָדְל֖וּ)’의 원형인
‘하달(חָדַל)’은 ‘끊어지다’(창18:11), ‘그치다’ (출7:34) , ‘그만두다’ (렘40:4) 란 뜻을 지닌 동사로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중지하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대로’ 라는 단수의 의미로 번역된 ‘오라호트(אֳרָח֑וֹת)’는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 지역의 대상(隊商, 캐러밴)이나 장거리 여행객들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는 ‘오라흐 (אֹרַח)’의 복수형으로 하나의 길이 아니라 이스라엘 주요 지역에 걸쳐 나 있는 ‘큰 길들’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큰 길들이 그 원래의 활용 목적인 여행이나 상거래에 더 이상 이용되지 못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방의 압제하에서 대로상의 약탈과 폭행이 만연되어 법질서가 파괴되고 경제마저 핍절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오솔길로 다녔도다
‘소로(小路)’의 ‘소(小)’에 해당하는 ‘아칼르칼로트’는 ‘구부리다’ (합1:4) 란 뜻의 동사 ‘아칼 bplJ)’에서 유래하여 ‘굽은’ (시125:5)이란 뜻을 갖는 형용사 ‘아칼르칼’ 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오라호트 아칼르칼로트’는 ‘꼬불꼬불한 길들’ 을 뜻하는 말이며, 행인들이 약탈과 폭력을 피해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러한 길들로 다녔다는 것은 무법천지가 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5: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7 The villagers ceased in Israel;
they ceased to be until I arose;
I, Deborah, arose as a mother in Israel.
이스라엘 안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끊어졌습니다. 그들은 내가 일어설 때까지 끊어졌으니, 나, 드로바라 이스라엘 어머니로서 일어설 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마을의 주민들이 그친 이유는 그 마을에 성곽이 없어서 외세의 침략과 약탈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성곽이 있는 요새화된 강한 성읍이나 다른 피난처로 피난갔던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내의 작은 마을들이 사실상 폐허처럼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황무하고 텅빈 시골들을 보면서 드보라는 이스라엘을 위해 사사로 일어섰던 것이다.
▶ 나 드보라가 일어나
‘내가 일어나다’ 란 의미로 번역된 ‘솩카므티’ 는 ‘일어서다’ 란 뜻을 가진 동사 ‘쿰’ 의 완료형 1인칭 단수형과 관계사 아쉐르’의 단축형이 결합된 관계사구이다. 따라서
‘솩카므티’는 한글 개역 성경에서 ‘되었도다’로 번역된 전치사 ‘아드’를 수식한다. 한편 ‘쿰’ 동사는 본문에서 신체적 운동을 의미하는 ‘일어서다’의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단호하게 행동을 착수한다는 의미 (창35:1, 3;19 :14; 수 7:13 ; 시82:8)로 쓰였다.
▶ 이스라엘의 어미가
드보라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미’로 일컫고 있다. 이는 드보라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깊이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욥이 자신을 ‘빈궁한 자의 아비’ (욥29:16) 라고 일컬었던 것처럼 드보라는 그 자신이 이스라엘을 그 고통과 환난에서 구원하여 지켜 줄 보호자가 됨을 나타내기 위해 ‘이스라엘의 어미’ 란 표현을 쓴 것이다. 여기서 ‘아비’ 란 말 대신에 ‘어미 (엠)’ 란 말을 쓴 것은 드보라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5: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8 When new gods were chosen,
then war was in the gates.
Was shield or spear to be seen
among forty thousand in Israel?
새로운 神들이 선택되어 졌을 때, 그때 전쟁이 성문에 있었는데 이스라엘에서 4만 명 가운데 방패와 창이 보였는가?
▶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본문은 왜 이스라엘이 이방의 압제를 받아야만 했는지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무리가..... 택하였으므로’로 번역된 ‘이브하르(יִבְחַר֙)’는 ‘선택하다’(사56:4)란 뜻을 가진 동사 ‘빠하르(בָּחוּר)’의 미완료 인칭 단수형으로 ‘그(이스라엘)가 선택했다’란 뜻이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예리하게 살피다’란 의미와 더불어 ‘신중하게 잘 생각해서 선택하다’란 의미를 포함한다. 따라서 ‘새 신들(חֲדָשִׁ֔ים אֱלֹהִ֣ים 엘로힘 하다쉽-)’을 ‘택하였다’ 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만을 요구할 뿐 육신적 삶에 기쁨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들의 육체적 정욕을 제어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육신적 삶에 만족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가나안의 우상들을 신중히 비교 · 검토해 보고 나서 의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눈앞의 순간적인 이익을 따라 가나안의 새로운 우상들을 섭겼다는 말이다(신32:17, 삿2:12,17).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은 본문의 주어를 ‘무리’ 로 번역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 무리만이 우상 숭배의 범죄에 빠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원어 성경은 본문의 주어를 3인칭 단수로 표기함으로써 새 신들을 택한 주체가 절의 ‘이스라엘’ 임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 숭배의 범죄에 빠졌음을 고발하고 있는 이러한 표현은 ‘이스라엘 자손’ 이 악을 행하였다는 4:1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본문은 이스라엘 중에 방패와 창을 보고자 하여도 전혀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방패(마겐)’와 ‘창(로마흐)’이라는 표현은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提兪法)적 표현으로서, 단지 방패와 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무기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적들이 병기를 다 가져갔기 때문에 아무런 무기도 없음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에서 말하는 ‘사만 명’은 시스라와의 전투에 참여했던 ‘일만 명’(4:6, 10)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일만 명’으로 그 수를 한정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시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만 명이나 되는 대군(7:3과 비교해 보라)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사만 명’ 이란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가운데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모든 군사의 대략적인 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그 ‘사만 명’ 중에 ‘일만 명’ 만을 동원하셨던 것이다(4:6, 10).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9 My heart goes out to the commanders of Israel
who offered themselves willingly among the people.
Bless the Lord.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에게 가는데 그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다. 주님을 찬양하라
▶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히브리어 לְ(레)가 영어로는 to에 해당되는데 그 뜻은 ‘~에게’, ~을 향하여 (KJV, toward)’란 뜻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인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사모함’으로 번역하였다. 마음이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에게 향하였다는 말은 곧 드보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로부터 마음이 떠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헌신이 남달랐기 때문에, 즉 병력과 무기의 크나큰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향한 그들의 헌신과 열심이 지극했기 때문에 드보라는 그들에게 마음이 갔던 것이다. ‘그들이…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에 대해서는 2절 설명을 보라.
5:10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0 “Tell of it, you who ride on white donkeys,
you who sit on rich carpets (saddle blankets)
and you who walk by the way.
하얀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풍성한 카펫(양탄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것에 대해서 말하라
▶ 본문 역시 8절과 마찬가지로 제유법이 쓰여 본문의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말한다. 나귀를 타는 것 자체가 귀족들의 여행 수단이었지만(창22:3, 민22:22, 삿10:4, 슥9:9) ‘흰 나귀들(אֲתֹנ֨וֹת צְחֹר֜וֹת)’은 당시 매우 귀하고 값 비쌌기 때문에 흰 나귀를 탄다는 것은 곧 지도층과 최상류층을 의미한다.
그리고 ‘귀한 화문석(빗딘)’ 즉 귀한 카페 트들 (RSV . LB, rich carpets)’ 에 앉는다는 것은 부자들과 중상류층을 의미한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길에 행하는 자들(흘레케)’은 일반 서민들과 하류층을 의미한다. 따라서 드보라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선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전파할지어다 - 시후 - שִֽׂיחוּ׃
‘시후’의 기본형인 ‘시아흐(שִׂיחַ)’는 주로 ‘묵상하다’(시119: 15), ‘말하다’ (대상16:9) 로 번역되는 동사이다. 하지만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되풀이하다’, ‘숙고하다’ 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하나님의 사역 (시77:12, 145:5)과 하나님의 말씀(시119:15, 23, 28, 148) 에 대한 ‘조용한 묵상’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거나 하나님의 일들을 ‘크게 반복하여 말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시105:2). 여기서는 사실상 이러한 두 가지의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크게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깊이 묵상하라’는 의미가 담겨진 것이다.
5: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At the sound of those who divide flocks among the watering places,
There they shall recount the righteous deeds of the Lord,
The righteous deeds for His peasantry in Israel.
Then the people of the Lord went down to the gates.
가축 떼를 나누는 자들의 소리가 나는 곳에서 물 긷는 장소 가운데
그 곳에서 그들은 주님의 의로운 행위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그의 농민을 위한 의로운 행위.
그 때에 주의 백성이 성문으로 내려갔습니다.
▶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 메하체침(מְחַֽצְצִ֗ים) - 가축 떼를 나누는 자
영어 번역 성경들 중 NASB는‘(가축 떼)를 나누는 자들 (those who divide flocks) 로 번역해서 원문에 충실했다. 그리고 게세니우스 (Gesenius) 사전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자들’ 로 해석하며 (those who divide (booty)), 할러데이 (Holladay) 사전은 ‘(물을) 분배하는 자들’로 해석했다. BDB 사전도 ‘하차츠’를 ‘나누다 (divide)', ‘두 개로 자르다 (cut in two)’ 는 의미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글 개역 성경을 비롯해서 여러 개의 영어 번역 성경들이 ‘하차츠( חָצַץ)’(~여러 갈래로 분리된)를 이와는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메하체침’을 RSV는 ‘악사들의 (of musicians)’로, NIV는 ‘노래하는 자들의 (of singers)’ 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KJV는 한글개역 성경과 같이 ‘활 쏘는 자들 (archers)’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고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으로 번역된 ‘믹콜(מִקּ֣וֹל)’(at)은 소리’ (창 3:10), ‘음성’ (창27:22), ‘목소리’ (민7:89) 란 뜻의 ‘콜(קּ֣וֹל)’에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민(מִן)’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전치사 ‘민’은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에서 멀리 떨어진’이란 공간적 분리(分離)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하지 않다’ 란 의미를 갖는다. 즉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압제하면서 (4:3) 그들에게서 가축 떼를 약탈하였던 자들로부터 들려 오던 웅성거리는 소리와 그 가축 떼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란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완전히 진멸되어 (4:24) 그들의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 물 긷는 곳에서도
직역하면 ‘물을 걷는 곳들 사이에서, 거기에서’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거기(there)’ 란 뜻을 나타내는 ‘솸’(שָׁ֤ם)에 대한 번역을 생략했다. ‘물 긷는 곳’으로 번역된
‘마쉬압빔(מַשְׁאַבִּ֔ים)’은 ‘우물’을 뜻하는 ‘마쉬아브(מַשְׁאָב) ’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이는 한 지역의 우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의 우물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 지역의 우물은 보통 마을 어귀에 있었던 까닭에(요 4:5-8, 28 참조) . 야빈의 압제하에 있을 때에는 마음 놓고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갈 수 없었다.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우물들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역시 노략한 가축 떼에게 물을 먹이면서 웅성거리던 그들의 소리와 시끄럽게 울어대던 가축 떼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물들에 마음껏 물을 길으러 가도 되므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을 칭술하라는 것이다.
▶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여기서 전하라는 뜻보다는 기본형인 ‘타나(תָּנָה)’는 ‘자세히 말하다 (KJV, rehearse;
NIV, recite)’, ‘되풀이 하여 말하다(RSV, repeat)’란 뜻이다. 구원의 목적을 성취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자세히, 그리고 되풀이하여 전파하고 기념하라는 의미가 담겨진 것이다.
▶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직역하면 ‘이스라엘에 있는 그의 마을 주민들을 향한(KJV, toward the inhabitants of his villages in Israel)’이란 뜻이다. ‘그의 ... 다스리시는’ 으로 번역된
‘피르조노(פְּרָזוֹן)’(dwellers in the open country)는 7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곽없는 촌락에 거하는 주민들’을 뜻하는 ‘페라존’에 남성 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은 형태이다.
대적의 압제와 약탈 때문에 성곽이 없는 촌락에서는 더 이상 안전하게 살 수 없어서 집과 마을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7절 설명 참조) 그 주민들이 이제 그들을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로 인하여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드보라는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라고 계속해서 노래한다.
5: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2 “Awake, awake, Deborah!
Awake, awake, break out in a song!
Arise, Barak, lead away your captives,
O son of Abinoam
깨어라, 깨어라 드보라!
깨어라, 깨어라, 노래하여라!
일어나라, 바락이여, 너의 포로들을 끌고 가라,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 깰지어다 깰지어다
기본형인 ‘우르(עוּר)’는 방심하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경계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 동사는 특히 영적 각성과 관계되어 자주 등장한다(사 52:1, 슥4:1). 그리고 사역형 (Hiphil)으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시다’ (대하36:22, 스1:1)는 뜻으로도 등장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앞에서 영적으로 깨어 그의 의로우심과 영광을 노래할 것을 드보라는 스스로에게 촉구할 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듣는 모든 백성들의 영적 각성을 또한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본절에서는 ‘우리’ 를 네 번이나 사용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전달한다.
▶ 일어날지어다 – 쿰(ק֥וּם)
‘쿰’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4:14을 보라. 드보라는 바락에게 여호와께서 그의 손에 붙이신 시스라를 대항해 나가 싸울 것을 명할 때에도 ‘일어나라(쿰)’고 했다(4:14).
그리고 이제 다시 한 번 ‘일어날지어다 라고 외친다. 첫 번째가 단순한 전투의 숭리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 두 번째의 외침은 포로들을 끌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가는 완전한 승리를 위한 것이었다. 포로들을 끌고 개선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동안 억압과 학대로 시달려 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와 감격, 그리고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목소리를.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시 68:34, 35).
제 2단락:
05:13-22 –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중반부
5: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3 Then down marched the remnant of the noble;
the people of the Lord marched down for me against the mighty.
그리고는 남은 귀족들이 행군하여 내려왔고
주님의 백성들은 나를 위해 강한 자를 대적하기 위해서 내려왔도다
▶ 그 때에
’그때’란 시스라의 군대와 싸움을 시작하는 때를 가리킨다. 드보라는 여기서 적과 싸우기 위해 산지에서 내려온 용감한 백성들의 모습을 설명하고(14, 15a절), 그녀를 위하여 친히 강림하신 여호와의 사역을 찬양한다 (20, 21절), 비록 모든 백성이 압제자들에 대항해서 다 같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백성 중에 남아 있는 귀인들과 용감한 백성들만이 싸움에 나섰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헌신하는 마음으로 순종한 그들의 행동은 칭송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지파의 백성들은 당연히 질책을 받기에 마땅한 것이었다 (15b-17절)
▶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주어에 대해 살펴보면 한글 개역 성경이나 KJV, 그리고 Keil & Delitzsch 등은 ‘백성’을 뜻하는 ‘암’과 ‘여호와(예흐와)’ 사이에서 문장을 분리시켜 뒤의 문장 주어를 ‘여호와’로 보고 있지만 다른 많은 주석가들이나 다른 영역본들 RSV, NIV, LB, NASB) 은 ‘귀인과’에 해당하는 레앗디림(אַדִּירִ֖ים)’과 ‘백성’에 해당하는 ‘암(עָ֑ם)’을 분리시켜 뒷문장의 주어를 ‘암 예흐와’ 즉 ‘여호와의 백성 (the people of the Lord)’으로 보고 있다 (RSV ; Then down marched the remnant of the noble ; the people of the Lord marched down .. -).
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어지는 내용이 하나님의 강림이나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거처에서 싸움터로 내려와 드보라를 도운 지파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5: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4Some came from Ephraim, whose roots were in Amalek;
Benjamin was with the people who followed you.
From Makir captains came down,
from Zebulun those who bear a commander’s staff.
에브라임 사람 가운데는 아말렉에 뿌리를 둔 사람도 있습니다.
베냐민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마길에서 대장들이 내려왔습니다. 스불론에서 지휘관의 지팡이를 지는 자들이 내려왔습니다.
▶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본절로부터 18절까지는 기손강 전투에 참가한 지파와 참가하지 않은 지파의 상반된 태도에 대하여 다룬다.
즉 이 전쟁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1절) 에브라임(14절), 베냐민(1절), 마길로 표현된 므낫세(14절), 잇사갈(1절)지파가 참전한 반면
르우벤(1절), 갓, 단, 아셀(1절) 지파는 참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본문은 ‘그들의 뿌리가 아말렉에 (있다)’란 뜻이다. ‘뿌리박힌 자요’로 번역된 ‘쇼르솸( שָׁרְשׁ)’은 ‘뿌리(root)’(신29:18) 를 뜻한다.
여기서 ‘뿌리’란 ‘삶의 근거지’ 를 의미한다. 즉 전쟁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
이 이전에 아말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의 사람들(12:15) 이었다는 말이다.
▶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너 다음에 베냐민은 네 백성 중에’ 란 뜻이다. ‘그 다음에’로 번역된 ‘아하레카’는 ‘~후에’, ‘~다음에’, ‘~뒤에’란 뜻의 전치사 ‘아하르’에 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서 ‘너 다음에’, ‘네 뒤에’라는 뜻이다. 여기서 ‘너’는 에브라임을 가리키며, 따라서 ‘아하레카’는 ‘에브라임 다음에’란 뜻이다. 이 말은 ‘너(에브라임)를 따라서(RSV, following you)란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로 번역된 ‘빠아마메카’는 ‘백성’을 뜻하는 ‘암’에 ‘~안에’, ‘~중에’란 뜻의 전치사 ‘빼(그)’와 역시 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도 대명사 접미어는 역시 ‘에브라임’ 을 가리킨다. 베냐민이 에브라임 내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곧 베냐민 지파에서는 소수의 병력만 참가하여 군대 편성상 에브라임 지파에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
▶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원어성경에는 ‘내려왔도다’에 해당하는 ‘야레두’가 이미 앞의 문장에서 나왔기 때문에 생략되어 있다. ‘대장군의’로 번역된 ‘쏘페르’는 ‘계산하다’(레15:13), ‘조사하다’(대하 2:17), ‘계수하다’(사 22:10)란 뜻을 가진 통사 ‘싸파르’의 분사형으로 ‘계수하는 자’ (사 33:18) 혹은 ‘서기관’(삼하8:17)을 뜻한다. 왕정 시대에 있어서 ‘쏘페르’는 계산이나 기록 등의 업무를 맡은 단순한 사무원이 아니었다. ‘쏘페르’ 곧 ‘서기관’은 왕실에서 중요한 요직이었음이 분명하다(삼하8:17, 20:25, 왕상4:3, 왕하12:10,11, 사36:3), 게다가 이들은 ‘국민을 초모(招幕)하는일’, 곧 ‘군사를 모집 하는’일까지 맡았었다(왕하 25:19, 렘52:25), 그리고 보다 초기에 는 ‘쏘페르’가 궁정이나 군대에서의 고위관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KJV는 ‘문필가(the writer)’로 번역하였지만, 이런 의미를 반영하여 다른 영어 번역본들은 ‘사령관(RSV, the marshal ; NIV, a commander)으로 번역하였다.
5: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5The princes of Issachar were with Deborah;
yes, Issachar was with Barak,
sent under his command into the valley.
In the districts of Reuben
there was much searching of heart.
잇사갈의 왕자들이 드보라와 함께 있었습니다;
예, 잇사갈은 바락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계곡으로 보내졌습니다.
르우벤 지역에서 심장을 찾는 일이 많았습니다.
▶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방백들이’로 번역된 ‘웨사라이’는 ‘군대 장관’(창21:22), ‘군장’(삼상17:55), ‘방백’(대하12:5) 등으로 번역되는 ‘사르’의 복수 연계형에 접속사 ‘와우’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방백(사르)은 14절에서 언급된 ‘다스리는 자들’, ‘대장군’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했다’는 것이 다. 전쟁터에서 싸움을 직접 지휘한 군대의 총지휘관은 분명 바락이었다(4:12,15,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백들은 드보라와 함께하였다. 이는 그들이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하나님의 사사인 드보라를 인정했음을 다시 말해 하나님을 그들의 지휘관으로 인정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드보라를 위해, 즉 하나님을 위해 싸운 ‘여호와의 군대’ 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 지휘관을 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지휘관인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논란이 많으나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하였고, 그래서 잇사갈은 그와 같이 바락과도 함께하여 바락을 쫓아 골짜기로 보내졌다’고 번역된다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 가운데 일만의 군사를 소집했고 그 군사들은 그를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올라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전쟁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락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드보라는 잇사갈 지파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였는지를 보여 준다. 잇사갈의 방백들은 바락과 함께하기 이전에 드보라와 함께하였다. 그리고 드보라와 함께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그녀의 명령에 의해 바락을 따라 보내졌던 것이다. 결국 잇사갈은 하나님의 사사 드보라와 함께하고, 그녀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음을 본문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여러 개의) 시뱃가에’ 란 뜻이다. ‘르우벤 시뱃가(펠락고트 레우벤)’ 는 대체로 시내가 많았던 요단 동편의 르우벤 지파의 지경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즉 이 말은 르우벤 지파를 뜻한다.
그리고 ‘결심이 있었도다’ 로 번역된 ‘히크케’는 ‘새기다’(사49:16), 그리다’(겔4:1), ‘법규를 제정한다’(사10:1)란 뜻을 지닌 ‘하카크’ 동사에서 나온 명사 ‘헤케크’의 복수 연
계형인데 이 말은 ‘결의’, ‘의논’ 등을 뜻한다. 한글 개역 성경이 번역을 생략한 ‘레브’는 ‘마음’이란 뜻으로 ‘히크케 레브’는 ‘마음의 결의’, ‘마음의 의논’이란 뜻이다. 여기서 ‘마음의 큰 결의 (께돌립 히크케 레브)’란 말은 르우벤 지파가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한 큰 논의와 참여의 결의가 있었음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불참을 결정하고 자기 생활에 안주해 버린(16절) 안일함과 무책임을 역설적으로 강력하게 질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5: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Why did you sit still among the sheepfolds,
to hear the whistling for the flocks?
Among the clans of Reuben
there were great searchings of heart.
왜 양의 우리 사이에 가만히 앉아 계셨나요,
양떼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를 들리네요?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이는 ‘어찌하여 네가 양떼들의 울음 소리를 듣기 위하여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 있느냐’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본문을 목가적(收歌的)이고 평화로운 삶을 설명하는 것처럼 번역했지만, 본문은 단지 목축을 하는 일상 생활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본문은 목가적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질책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생업에만 매달려 있음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5: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7 Gilead stayed beyond the Jordan;
and Dan, why did he stay with the ships?
Asher sat still at the coast of the sea,
staying by his landings.
리어드는 요단 강 너머에 머물렀고;
그리고 단은 왜 배들에 머무름은 왜 그런건가?
아셀은 바다 연안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자기의 항구에 머물도다
▶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길르앗(낄르아드)’은 마길의 아들이며 므낫세의 손자로서 길르앗 족속의 조상을 가리키거나(민26:29, 30, 수17:1, 대상2:21, 23), 요단 동편의 야르묵강과 아르논강 사이에 위치한 지방으로서 이 지방을 차지한 갓지파(민32:1-32) 혹은 그 중심 성읍인 길르앗을 지칭하는 용어로 혼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 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앞에서 르우벤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거주하며“로 번역된 솨켄’은 움직이던 것이 한 곳에 이르러 머무르거나(민9:17, 출 24:16) 쉬기 위해 장막을 치고 거주하는 것(창9:27, 사33:16)을 의미하는 동사 ‘솨칸(שָׁכֵ֔ן)’의 완료 기본형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주하였다(또는 머물렀다)’는 의미이다. 이는 기손강 전투의 때에 길르앗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 생활의 안정만을 위해 그들의 처소에 눌러앉아 있었다는데 대한 드보라의 책망이다.
▶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머무름은’에 해당하는 ‘야구르’는 ‘우거하다’(창35:27), ‘객이 되다’(시105:23), ‘머물다’(창21:23)란 뜻을 지닌 동사 ‘꾸르(גּוּר)’의 미완료형으로 ‘그(단)가 머물렀다’란 뜻이다. 그런데 이 어근은 ‘혈족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살다’란 의미를 지니는 말로 ‘잠시 동안의 체류’를 내포하는 말이다. 이로 보아 ‘배에 머물렀다(야구르 오니요트)’ 란 말은 단순히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았다는 설명이기보다는 다른 나라에 가서 상거래를 하였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르우벤이 양떼를 치는 일상 생활에 안주했던 (16 절 설명 참조)과 마찬가지로 단 역시 하나님을 위한 싸움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 의 생업에만 매달렸음을 보여 준다.
▶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해변’에 해당하는 호프 얌밈’은 ‘해변’ 즉 지중해의 해변을 말하는데, 창49:13이 말하는 것처럼 ‘배 매는 해변’ 즉 고깃배를 정박해 두는 내포(內浦)나 작은 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기 시뱃가에’에서 ‘시내’ 에 해당하는 ‘미프라츠’ 역시 ‘선창(RSV. landings)’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아셀 역시 항구에서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5: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18 Zebulun is a people who risked their lives to the death;
Naphtali, too, on the heights of the field.
스불론은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쓴 백성들입니다;
납달리도 들판의 높은 곳에 있습니다.
▶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직역하면 ‘그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모욕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생명을 모욕했다’는 말은 스불론이 얼마나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웠는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말이다. 마치 자기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죽기 위해 불 속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헌신적으로 전쟁에 임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자기들의 안전과 생업에만 매달려 전쟁은 나 몰라라 하고 자기들의 처소에 안일하게 계속 머물러 있었던 르우벤, 길르앗, 단, 그리고 아셀 지파의 태도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모집된(딤후2:3)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적 싸움을 위해서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빌 1:20) 하고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빌1:28) 군사가 되어야 한다.
▶ 들의 높은 곳에서
납달리 지파가 거주하던 게네사렛(갈릴리) 호수 북서쪽의 산악 지역(수19:32-39)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일만 명의 군사가 집결했던 다볼산을 가리킨다(4:6, 12).
5:19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19 “The kings came, they fought;
then fought the kings of Canaan,
at Taanach, by the waters of Megiddo;
they got no spoils of silver.
"왕들이 와서 싸웠습니다; 가나안의 왕들과 싸웠고,
므깃도 시냇가의 다아낙에서, 은을 탈취하지 못했습니다.
▶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열왕’으로 번역된 ‘멜라컴’은 ‘왕’을 의미하는 ‘멜레크’의 복수형으로서 ‘여러 왕들’을 뜻한다. 열왕이 와서 이스라엘과 싸웠는데 그 열왕은 다름아닌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었다. 이는 하솔 왕 야빈을 중심으로 북부 가나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군을 시스라가 지휘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4:2, 수11:1-9 참조)
▶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텔 엘 무테셀림(Tell el-Mutesellim)’에 해당하는 ‘므깃도(메깃도)’는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32km, 예닌(Jenin)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에스드렐론 서남쪽 끝에 자리 잡은 전략상 요충지였다. 그리고 ‘다아낙’은 므깃도 동남쪽 9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었다. 기손강의 하류 부근에 위치했던 ‘므깃도’와 ‘다아낙’은 가나안 정복시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지만(수12:7, 21; 17:11) 가나안 사람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하였다(삿1 :27). 그러므로 본문은 기손강 상류 즉 스불론과 납달리와 잇사갈 지파가 모두 만나는 경계점이었던 다볼산(4:6 설명 참조)에서 싸움이 시작되어 기손강 하류의 므낫세 지파 경내에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탈취하지’로 번역된 ‘빼차’는 ‘이익을 얻다’(욥27:8), ‘탐내다’(잠1:19)란 뜻의 동사 ‘빠차’에서 나온 명사로 ‘불의한 이익(창18:21), ‘탈취물 (미4:13), ‘탐욕 (시119:36)등을 뜻하는 말이다. 이 어근은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방법으로 얻은 이득’ 을 뜻한다. 그리고 ‘돈을’에 해당하는 ‘케째프’는 기본적으로 ‘은(銀)’ (창 45:22)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돈’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여기서 ‘케째프’가 관사 없이 단수로 쓰였기 때문에 ‘하나의 은’, ‘하나의 돈’ 을 뜻하고 있다. 한편 ‘못하였도다’에 해당하는 ‘로 라카후’에서 ‘로’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어이고 ‘라카후’는 ‘취하다’(창 2:22)란 뜻의 동사 ‘라카흐’ 의 인칭 복수형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들이 한 푼의 탈취물도 결코 취하지 못하였다’ 란 뜻이다. 이는 기손강 전투 이전까 지의 상황과 그 이후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기손강 전투 이전까지 지난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는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마음껏 약탈했었다(4:3). 그러나 이제 벌어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탈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의해 진멸당하고 말았다 (4:24),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고 만 것이다.
5: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0 From heaven the stars fought,
from their courses they fought against Sisera
하늘로부터 별들이 싸웠고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부터 시스라와 싸웠다.
▶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그 다니는 길에서’로 번역된 ‘멈메썰로탐’은 ‘수축하다’(시68:4), ‘돋우다’(사57:14), ‘쌓다’ (렘50:26)란 뜻을 지닌 동사 ‘쌀랄’ 에서 유래하여 수축하여 쌓아올린 ‘대로’ (민 20:19), ‘큰 길’(20:31)을 의미하는 ‘메썰라’의 복수형에 전치사’이 결합된 전치사구로서 ‘그들의 대로(大路) 에서부터’란 뜻이다. 이것은 ‘하늘에서부터( 좌마임)’란 말을 동의적 평행 대구법을 사용하여 다시 한 번 설명하는 말이다. 그리고 본문 전체는 바람과 벼락 및 폭풍우와 같은 일기의 변화를 통해 여호와께서 시스라의 군대와 싸우시(4:14 설명 참조)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늘(쇠마임)’에 계신 여호와께서 (신26:15 ; 왕상 8:30 ; 욥22:12) 그가 창조하시고 분정하신(창1:16, 신4:19) 별들의 운행과 일기의 변화를 통해 그 백성의 싸움을 도우셨던 것이다.
5: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1 The Kishon River swept them away—
that ancient torrent, the Kishon.
March on with courage, my soul!
기손강이 그들을 휩쓸어 갔습니다
그 고대의 급류, 키숀.
용기를 내라, 내 영혼아!
▶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직역하면 ‘그들을 쓸어 버렸다 (KJV' RSV' NIV' LB, swept them away)’ 란 뜻이다. 기본형인 ‘까라프’ 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단어지만 고대 방언들은 그 뜻이 ‘쓸어 버리다’ 임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원어 성경은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보다는 훨씬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는 기손강이 심한 폭우로 일순간에 범람하여 가나안 동맹군을 한 번에 휩쓸어 버렸다는 과장법적 표현이다. ‘기손강’에 대 해서는 4:7 설명을 보라.
▶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다른 영어 번역본들은 ‘진군하라, 내 영혼아, 힘차게 (RSV, March on, my soul, with might; NIV, March on, my soul, be strong; LB, March on, my soul, with strength)’라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본문은 ‘내 영혼이 대적을 밟아 진멸시켰다’란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기손강을 통하여 대적들을 휩쓸었으니 자, 이제 내 영혼아, (그리고 너희 이스라엘아) 힘차게 진군하라’ 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5: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2 “Then loud beat the horses’ hoofs
with the galloping, galloping of his steeds.
그리고 나서 큰 소리로 말발굽을 두드려라
그의 말을 타고 질주하며.
▶ 군마가 빨리 달리니
‘군마(群馬)’로 번역된 ‘압비라이우’는 ‘강한’ (용 24:22), ‘힘센’(렘47:3)이란 뜻의 형용
사 ‘압비르’의 복수형에 ‘말’을 받는 대명사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그것(말)의 강한 자들이란 뜻이며 이는 말을 탄 기병들, 혹은 병거를 탄 시스라의 정예 군사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 기병들이 적군의 기병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추격하는 이스라엘의 마병도 함께 언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는 당시 방패와 창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던 (8절 설명 참조) 이스라엘 군대가 기병을 보유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볼산에 집결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을 설명한 장면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4:10의 ‘그를 따라’란 말은 ‘도보로’ (4:15) 란 말과 통일한 말로 바락이 걸어서 산을 올라갔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공격할 때도 ‘그 발을 쫓아’ (1 절) 공격했다는 기사로 보아 이스라엘에 기병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제 3단락:
05:23-31 –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후반부 및 드보라의 40년 사역기사의 종결
5: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23 “Curse Meroz, says the angel of the Lord,
curse its inhabitants thoroughly,
because they did not come to the help of the Lord,
to the help of the Lord against the mighty.
메로스를 저주라하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셨다.
그 주민들을 철저히 저주할 것은
그들이 주님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도와 힘있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 하시도다
본절은 드보라가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메로스를 저주해야 한다는 것은 드보라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대변하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성경에서 ‘메로스(메로즈)’는 오직 이곳에서만 동장하는 지명이므로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혹자는 사마리아 북방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메루스(Merrus) 일 것으로 추정하고, 또 혹자는 다볼산 남방에 위 치 한 ‘게프르 무스르(Kefr Musr) 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원어 성경을 보면 짧은 본문에 ‘저주하다’ 란 뜻의 동사 ‘아라르’ 가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메로스의 거민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그 전쟁에 참여해서 여호와를 도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데 대하여 강력하게 저주하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본문은 메로스의 거민들에 대한 저주를 알리는 것 외에도 이어지는 야엘에 대한 축복을 대조적으로 강조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5: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Most blessed of women be Jael,
the wife of Heber the Kenite,
of tent-dwelling women most blessed
여자들 중에 가장 축복받는 자는 야엘이고, 즉 케나 사람 헤벨의 아내,
장막에 있는 여인들중에 가장 축복을 받았다.
▶ 본문을 직역하면 ‘(그녀는)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다. 그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다’이다.
당시 여인들에 있어서는 ‘장막 안에서’ 가사를 돌보는 것이 주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앉아서 사사 직분을 행했던 드보라 (4:4, 5)를 제외한다면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란말은 곧 ‘이스라엘의 모든 여자들보다’란 뜻이다. 이는 드보라의 예언처럼 (4:9) 참으로 영광 중의 영광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여인에 대한 축복이 한 성읍의 모든 거민들에 대한 저주(23절)에 바로 뒤이어 나와 대조되면서 야엘의 영광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겐 사람 헤벨’ 에 대해서는 4:11 설명을 참조하라.
5: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5 He asked for water and she gave him milk;
she brought him curds in a noble’s bowl.
그가 물을 달라고 요청해서 그녀는 그에게 우유를 주었는데, 그녀는 귀한 그릇에 엉긴 우유를 주었습니다.
▶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영긴 젖’ 으로 번역된 ‘헤므아’ 는 우유나 염소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음료로서 당시 고급음식 에 속했다. KJV는 ‘버터 (butter)’로 번역했고, NIV는 ‘굳어진 우유 (curdled milk)’, NASB와 RSV는 ‘커드(curds;굳어진 우유와 같음)’로 번역했다. 그러나 4:19에서 ‘내게 ... 마시우라’, ‘그에게 마시우고’에 해당되는 원어는 ‘쇠카’로서 물이나 음료수와 같은 액체를 마시는 (to drink)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므로, 본문의 ‘영긴 젖’, 즉 헤므는 우유를 발효시켜 고체 상태가 되기 전의 요구르트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본문은 야엘이 시스라를 극진하게 대접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시스라의 긴장을 풀려는 야옐의 지략이었다.
5: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6 She sent her hand to the tent peg
and her right hand to the workmen’s mallet;
she struck Sisera;
she crushed his head;
she shattered and pierced his temple.
그녀는 장막 말뚝에 그녀의 손을 댔으며
오른손으로 일꾼들의 방망이을 잡고;
그녀는 시세라를 공격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그녀는 그의 관자놀이를 산산조각 내고 뚫었습니다.
▶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직역하면 그녀의 손…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이다. 본절은 4:21 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와는 달리 양손의 쓰임을 정확히 묘사하는 동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드보라가 야엘의 행동을 마치 현장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은 가날픈 여인의 용기 있는 행위를 칭송하는 한편, 전쟁을 회피한 자들을 더욱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5: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7 Between her feet
he sank, he fell, he lay still;
between her feet
he sank, he fell;
where he sank,
there he fell—dead.
그녀의 발 사이
그는 가라앉고, 넘어지고,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녀의 발 사이에
그는 가라앉았고, 넘어졌습니다;
그가 가라앉은 곳에서,
그는 거기서 넘어졌습니다. 사망했습니다.
▶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야엘은 시스라가 죽는 과정을 세 장면으로 나누어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원어성경을 보면 접속사 ‘와우(')’로 각 동사들을 연결하지 않고 세 개의 동사를 완료형으로 나란히 기술함으로써 마치 느린 그림(slow motion)을 보는 이 각 장면을 뚜렷하게 강조하여 생생한 현장의 느낌을 더해 주고 있다. 더욱이 본절에는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에 해당하는 ‘카라 나팔’이 본문 외에도 두 번이나 더 언급되고 있다. 즉 시스라의 죽는 과정의 느린 그림을 두 번이나 더 반복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최후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5: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8 “Out of the window she peered,
the mother of Sisera wailed through the lattice:
‘Why is his chariot so long in coming?
Why tarry the hoofbeats of his chariot?
창밖을 보니 시스라의 어머니가 유심히 보고 있었다. 창살을 통하여 울부짖었다.
왜 그의 전차가 오는데 오래 걸리나? 그의 전차의 걸음이 왜 늦어지는가?
▶ 바라보며
‘바라보며’로 번역된 ‘니쉬케파’는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향하여 내려다보는 것을 묘사하는(민23:28) 동사 ‘솨카프’의 단순 재귀완료 여성형이다. 따라서 시스라의 어미는 멀리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건물의 높은 곳에 올라가 창살을 부여잡고 창문을 통해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轉首苦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쟁에 나간 자식이 늦게 돌아오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어미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맛두아’는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란 뜻의 의문 부사이다. 본절은 히브리 시의 특정인 평행법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동의적 평행법(synonymous parallelism) 이 사용되고 있다. 즉 통일한 의미의 문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스라의 어미의 불안함과 초조함을 더욱 부각시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5: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29 Her wisest princesses answer,
indeed, she answers herself,
그녀의 가장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녀도 스스로 대답하였습니다.
▶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그…시녀들이’로 번역된 ‘사로테하’는 ‘왕비’(왕상11:3), ‘귀부인’(에1:18), ‘공주’(애1:1)등으로 번역되는 ‘사라’의 복수형에 여성 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그녀의 귀부인들’ 이란 뜻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시녀’라고 번역했지만 ‘사라’는 방백이나 장관 동을 의미하는 명사 ‘사르’의 여성형으로서 귀족이나 왕족의 귀부인’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문은 가나안 동맹국 가운데 하나인 하로셋 (4:2 셜명 참조)의 군주였던 시스라의 어미와 함께 전쟁에 나간 남편들을 기다리던 귀부인들 및 기타 상류층의 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러한 귀부인들은 분명 다른 일반 서민층의 아낙네들보다는 지혜로웠을 것이다. 본문에서 드보라는 마치 이러한 점을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녀들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는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지혜는 어리석은 결론 (30절)에 도달할 뿐이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1 :20)
5: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0 ‘Have they not found and divided the spoil?—
A womb or two for every man;
spoil of dyed materials for Sisera,
spoil of dyed materials embroidered,
two pieces of dyed work embroidered for the neck as spoil?’
'그들은 노략물을 발견하고 나누지 못하였습니까?
사람마다 한 두 개의 처녀를 얻지 않았습니까?
시세라는 채색옷을 노략하였으니 수놓아진 채색 옷이니 노략한 자의 목에 장식하리로다
▶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본문은 ‘전쟁에 승리했는데 당연히 전리품을 찾아서 그것을 분배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시스라가 늦게 오는 것은 전쟁이 길어지거나 어떤 나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쟁에 숭리한 결과 얻은 풍성한 약탈물을 나누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장정들이 처녀들을 노략물로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노예로 삼는다는 말이 아니라 아내나 첩을 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신21:10-14 참조) 더 나아가 이러한 표현에는 이스라엘의 처녀들을 성적 (性的) 노리개로 삼는다는 의미까지 내포된 듯하다. 또한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철저한 승리를 드러내는 말이다. 더욱이 전투에 참여한 시스라의 군사들이 모두 한두 처녀를 얻는다는 것은 그 승리가 기손강 전투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에까지 확전되어 큰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바람이었을 뿐 실상은 정반대였다 (4:24).
▶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이러한 수놓은 채색옷은 왕이나 상류층이 입었던(시45:14, 겔26:16) 매우 귀한 옷이었다. 따라서 ‘수놓은 채색옷’ 을 노략물로 얻는다는 것은 시스라가 가장 귀한 옷감을 전리품으로 취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최고 지휘관과 그밖의 방백들을 사로잡거나 죽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승전보를 기다리는 이 여인들의 기 대와 소망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시스라가 채색옷을 노략하기는커녕 비참하게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4:21; 5:26, 27).
5: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31 “Thus let all Your enemies perish, O Lord;
But let those who love Him be like the rising of the sun in its might.”
And the land was undisturbed for forty years.
그러므로 주님, 당신의 모든 적들이 멸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힘으로 해가 뜨는 것과 같게 하소서."
그리고 이 땅은 40년 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본문은 원수에 대한 드보라 개인의 사적인 감정을 표출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백성의 안전과 평안이란 측면에서 드보라는 단지 ‘여호와의 대적들’이 망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압제하면서 시스라와 야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그릇된 사상과 왜곡된 가치관과 우상 숭배의 종교적 관습 동을 따르라고 강요했을 것이다. 마치 일제 치하 36년 통안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나라에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시스라와 야빈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를 분리시키는 세력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그의 나라의 확장을 저해하는 세력이 망하게 되며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는가?
▶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해를 돋게 하시는 것처럼 그를 사
랑하는 자들 역시 찬란하게 떠올라서 지속적으로 번영해 나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 땅이 ... 태평하였더라’에 대해서는 3:11, 3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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