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과 박동규 평론가와의 교감
1970년대 말, 월간 시전문지 『心象』이 주최하는 해변시인학교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박동규(朴東奎) 평론가를 만났다. 그는 박목월 대시인의 장남이기 전에 핸섬한 외모와 박식한 문학이론으로 특강을 하면 참가자들이 매료되는 정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박목월 시인이 창간한『心象』지에 신인상 투고를 준비하던 중이라서 더욱 관심 깊게 청강하고 참가 시인들과의 토론 그리고 해변시인학교 생활에도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보기 좋게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 당시에 시전문지로『心象』이외에『詩文學』『現代詩學』이 있었고 종합 문학지로『現代文學』『月刊文學』『文學思想』등이 있었는데도 그렇게『心象』만 고집했던 것은 아마도 박목월 시인에 대한 마력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목월 시인은 타계(1978년)했지만 나의 고집은 오로지 『心象』이었다.
그 후 그는 카나다 교환교수로 나가 있는 동안 신인상 심사가 몇 년간 중단되어 나의 등단도 늦어지고 말았다. 그가 돌아와 신인상 시상식에 참석차 심상사에 들려서 정식 인사를 나누었고 시상식은 목월 시인 원효로 자택에서 있었다. 심사위원은 황금찬, 김광림 시인었으며 목월 시인 사모님 유익순 여사와 목월 시인 제자들인 허영자, 유안진, 이건청, 신규호, 유승우, 오세영, 신달자 시인 등 그리고 축하차 참석한 강우식, 정진규, 성춘복, 전재수, 이수화 시인, 『心象』선배인 김성춘, 이명수, 한광구, 권택명, 권달웅, 윤강로, 이상호 시인 등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박동규 교수는 심상사의 가장 큰 업적인 해변시인학교를 한해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시 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했다. 이것이 올해로 30회째를 맞아 한국시단사에 기록될만한 일이다. 그는 나를 『心象』상임편집위원으로 지명하여 한 달에 한 번씩 편집회의를 하고 술도 한 잔씩 나누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해변시인학교에서는 담임시인을 맡아서 그를 도왔다.
내가 한국예총에 근무하면서 그를 전국 순회 청소년 강연회의 연사로 초빙하여 함께 다닌 일이 있다. 그가 [TV문화가 산책]과 아침마당에 출연하는 유명인사이지만 그의 구수한 입담도 청중을 몰입하게 했다. 어느 해 여름, 경남 김해에서 강연이 예정되어 그와 나는 비행기로 떠났다. 왠일이냐. 폭우와 태풍 때문에 김해공항에 착륙을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김해에서는 문예회관 대강당에 가득 메운 청중들이 그의 유명한 강연을 기다리다가 실망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주최측에서는 이를 수습하느라 한바탕 고역을 치루었다.
또 2000년 8월에는 심상사와 재미시인협회 공동 주최 세미나가 미국 LA에서 개최되어 그와 함께 참석하여 그곳 ‘라디오 코리아’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시낭송을 한 후, 우리는 라스베가스로 여행을 떠났다. 하루 종일 샌버나디노 산맥을 넘고 열사의 모하비 사막을 달려 콜로라도 강변 휴양도시 레플린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그랜드 캐년과 후버댐을 거쳐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라스베가스는 카지노의 도시다운 휘황한 네온에 눈이 아찔해 질뿐이었다.
나는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는 원효로 목월댁으로 세배를 갔다. 거기에는 목월 선생 사모님 유익순 여사가 아들 문규, 남규와 동명이 고모와 함께 목월 문하생과 많은 시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덕담과 회고담으로 웃음꽃이 피었고 떡국과 술이 나왔다. 더러는 2층에서 고스톱을 하는지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하루가 끝날 즈음에는 박교수와 몇몇은 맥주집 ‘오투’나 ‘맥켄치킨’에서 뒷풀이를 하고 헤어졌다.
그후 유익순 사모님께서는 시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노환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내 근무처가 대학로라 가까워서 매일 문병을 갔다. 시인도 죽고 시인의 아내도 이 세상을 떠난다는 어쩌면 허무감 같은 것을 사모님은 내 두 손을 꼭 잡고 모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울음이 쏟아졌다. 사모님도 우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사모님이 운명하실 때 나는 직장의 일로 외국 출장을 가서 끝내 사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49잿날에 목월 선생님과 함께 용인공원묘원에 잠든 묘소를 찾아서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던 일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
이런 일로 그는 나에게 항상 고마움을 전해 왔다.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리는 심상시창작교실에 나를 특강 강사로 부르는가 하면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과 수원 삼성반도체 주부대학에 강사로 추천하는 등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늘 고마운 일이다.
그도 서울대 교수를 정년퇴임해야 했다. 그의 ‘정년퇴임문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벌써 박동규 교수님이 정년이라니.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순리를 어쩌랴. 서초구민회관 심상창작교실에 부르고 <심상>편집회의에, 무슨 백일장 심사에, 안면도 청노루의 집에 불러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의 학문과 지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그의 덕망과 지혜를 따리가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미진한 나를 “어이, 송배 형. 어때? 별일 없지?” 앞으로도 그 손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고와 서울대를 나온 문학박사이며 서울대 교수였다. 1962년에 『現代文學』에 문학평론 「카오스의 질서화 작용」과「언어 . 성격 . 행동」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고 『한국 현대소설의 성격 연구』『현대 소설의 이해』『전후 대표작 분석』『글쓰기를 두려워 말라』는 저서와 수필집『별을 밟고 오는 영혼』『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언젠가 나에게 ‘어이 송배 형. T.S 엘리엇이란 친구 있잖아. 그 친구가 말이야. 시의 세계로 들어온 철학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 그런가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 의미하에서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했거든. 사실 요즘 시에는 철학이 없어. 어떻게 생각해?’라는 평론가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있었다.
나는 그저 멍멍하게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시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요즘 시인들의 처절한 고뇌 혹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자기의 독백 차원을 탈피하고 새로운 가치관의 세계 탐색이 요구되는 시적 진실을 나에게도 주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댓글 80년대 초 유익순 여사님의 초대로 원효로 2층 집에서 차를 정성스레 따라주셔던 모습이
아련하게 생각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