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대한 상담적 접근
-고난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과 신학적 이해의 비교-
홍영택(강남대학교 신학부)
I.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는 경험 중의 하나가 고난의 경험일 것이다. 고난은 삶에 있어서 필연적인 요소인 것처럼 보인다. 목사에게, 상담자에게, 성도에게 삶의 문제를 들고 와서 대화를 요청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한가운데에 고난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할 때,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상담자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 고난의 의미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일은 상담의 전체 과정에 방향을 제시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본고는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해있는 과학적 낙관주의의 분명한 한계를 전제하고, 고난은 그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다 더 건설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본고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들을 먼저 살펴보고, 이를 신학적 이해와 비교하며 비판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목회상담에 있어서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건설적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목회상담으로 하여금 보다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II. 고난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
(1) 의료주의
램본(Bob Lambourne)은 치유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 근대 이전의 성직주의(clericalisation)와 대비되는 근대 이후의 의료주의(medicalisation)을 말한다. 성직주의란 치유를 영적, 종교적 방법에 의해서만 정의하는 것으로서, 과학적 방법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주술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료주의는 근대 이전의 세계가 인간의 문제와 이에 대한 치유를 주술의 범주 안에 두었다고 비판하면서 등장한 과학적 접근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의료주의는 치유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만이 타당하다고 보면서, 과학적 방법으로 고통과 증상을 제거하는 데 초점을 둔다. 과학주의(scientism)의 극단적 객관주의(objectivism)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문제가 객관화될 수 있고 과학과 기술의 원리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수반되는 결과는 사람이 과학과 기술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비인격화되는 것이다. 램본은 병원의 발전과정에서 호스피스(hospice)적 성격으로부터 공장(factory)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보면서 그 요인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대형병원들로부터 “치료불가능한, 죽어가는, 미친 환자”들이 제외되었다. 분명한 증상을 가진 치료가능한 환자들이 대형병원에 입원되며 그들을 다루는 의사들 - 예를 들면, 외과의사 - 이 가장 인정을 받고, 치료불가능한 환자들을 돌보는 공공진료 의사들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의료는 질병을 가진 사람에 대한 돌봄보다는 질병의 제거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둘째, 의사들이 건강에 대한 관념을 질병이 없는 것으로 보며, 고통을 측정가능한 기능 장애의 형태로 고립시켜 정의하고 이를 제거해버리려는 데 병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램본은 이러한 경향을 종교개혁과 관련시킨다. 고립된 개인의 신앙에 의한 의인(justification by faith), 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의한 내적 장애의 제거와 같은 종교개혁의 개인주의가 현재의 의료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경향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 결과로, 의료는 악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제거 외에는 구원의 관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돌봄에 있어서 증상의 제거와 수명의 연장만을 성공적인 치료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진료는 아무런 구원도 제공해줄 수 없는 것이다. 램본은 비인격적 기술에 의한 제거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성서적, 기독교적 전통과 의료적 관념을 비교한다. 넷째, 의료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윤리적 원리들에 대한 경멸이 팽배해 있다. 램본은 이에 대하여 교회가 일부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과학 이전의 우주관을 가지고 신체의 질병이나 고통에 대하여 부적절한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왔다고 보고, 그는 신학이 의료에 대해 적절한 윤리적 기준들을 제시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중세로부터 근대로 넘어오면서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정신질환에 대한 영적인(spiritual) 설명으로부터 심리학적(psychological) 설명으로의 전환이다. 중세에는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정신질환을 악령의 작용으로 해석하고 고통스러운 악령 추방을 그 치유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합리주의적, 경험주의적 사고의 등장과 함께 정신질환의 원인을 환자 자신의 내적 요인으로부터 찾으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메스머(Anton Mesmer), 샤르코(J. M. Charcot) 등을 거쳐 이러한 시도는 프로이드(S. Freud)에게 이르러 정신질환에 대한 정신역동적(psychodynamic) 접근으로서 꽃을 피우게 된다. 정신역동적 접근은 정신질환을 어떤 외부의 정신적 실재의 영향으로서가 아니라 개인 내면의 심리적 에너지들의 갈등으로서 해석하고 치유하고자 한다. 이는 근대의 의료가 질병에 대하여 주술적인 접근으로부터 과학적인 접근으로 전환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둘째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인도주의적 처우로의 변화이다. 이는 정신질환에 대한 시각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신질환자들은 악령의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로서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들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가두거나 쇠사슬로 묶어두는 것이 중세 시대의 관례였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에 서구 각국의 선각자들의 노력으로 정신질환자들에게서 쇠사슬이 풀려지고 그들을 위한 병원들이 세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환자에 대한 도덕적 설득, 환자에 대한 돌봄의 관계 제공 등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질환을 환자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보고 그 환자 개인에게 심리적 영향력을 제공함으로써 치유하고자 하는 근대 정신의학의 출현을 본다.
(2) 정신분석학과 행동주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은 근대 정신의학의 정점이자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장애를 순수하게 심리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치료하고자 하는 이론과 방법이 그에게서 최초로 집대성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인격(personality)을 철저하게 내면적인 심리적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관계로 보고, 사람의 행동은 이러한 내면적 심리 구조의 역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근대의 과학주의, 그리고 이에 입각해 있는 근대의 의료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의 진단과 치료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어떤 도덕적, 종교적 판단도 철저하게 배제하고 나름대로의 방법론에 따라 객관적으로 얻어진 임상 자료이다. 이 임상 자료는 어떤 윤리적인, 종교적인 평가도 배제된 채 순수하게 심리학적 언어로 묘사되며, 치료의 결과도 역시 심리학적 용어로 서술된다. 인격에 대한 과학적 이해 또는 심리학적 이해는, 위에서 언급된 성직주의에 의한 종교적 왜곡으로부터 정신의학을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것은 정신질환을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볼 수 있도록 선입견을 제거하고 정신질환자 개인을 독립적이 한 인격으로 존중하도록 이끈 중대한 전환이다. 그러나 위에서 병원이 공장으로 변모한 것과 관련하여 언급한 의료주의의 문제는 역시 프로이드의 정신의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기계론적 결정론에 이르게 되어 사람은 심리적 구조에 종속되어 버린다. 결국 정신분석의 대상은 환자의 인격적 총체라기보다는 환자 내면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심리적 구성물들이다. 환자의 문제는 내면적 심리적 구성물들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되며, 치료는 그 갈등의 해소이다. 내면적 갈 등의 윤리적, 종교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심리적 방어기제로 배제되며, 갈등의 해소가 치료의 유일한 목표이다.
심리적 갈등에 대한 과학적 환원주의(scientific reductionism)는 행동주의적(behavioristic) 접근에서 더 명백히 나타난다. 정신분석학이 환자를 치료하는 치료실에서 발전되었다면, 행동주의는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행동주의는 정신의학보다도 훨씬 더 과학적 방법론에 철저하다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구조조차도 실험실에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에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행동주의자들은 개인과 그의 환경 사이의 관찰될 수 있는 상호 작용만을 근거 자료로 사용하고자 한다. 개인의 인격, 다시 말하면, 개인의 행동 패턴은 눈에 보이는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조건지워진다. 따라서 행동의 병리는 환경에 의해 잘못 조건지워진 결과이다. 그러므로 행동의 병리를 고치려면 조건화(conditioning)를 다시 하여야 한다.
사람의 행동을 관찰될 수 있는 조건화의 결과로 보기 때문에, 행동주의는 환경적 결정론이라고 볼 수 있다. 행동의 장애는 잘못된 조건화 또는 잘못된 학습의 결과 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조건화 또는 학습이다. 증상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증상을 가진 개인의 주관적 의지나 결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증상이 어떻게 학습되고 조건화되었는지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즉 과학적 틀에 의해 관찰되고 검증될 수 있는 대상들만이 고려의 대상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개인은 행동주의적 치료방법이라는 수선소에 맡겨진 물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론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의 결과는, 오늘날 병원이 공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고난을 과학적으로 그 원인을 분석하여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고난을 제거하는 데는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고난을 인간의 삶에 통합시키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드와 융을 비롯한 정신역동적 심리학에서 신(神)적 신비를 찾고 있는 율라노프(Ann Ulanov & Barry Ulanov)는 정신역동적 심리학이 고난을 의미있게 긍정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들은 “신경증은 부정적이며 동시에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환자로 하여금 “고통의 통로를 추적하여 그 상처의 근원을 발견하고 치유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소환장을 발부한다.”
신경증환자는 그가 존재의 거짓된 방식으로 떨어졌음을 안다. 그의 신경증은 이 거짓 삶에 대항하는 하나의 항변이며, 그것이 그를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변화하도록 강요한다. 그의 신경증은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곳, 고통의 근원으로, 즉 컬버 바커(Culver Barker)가 `치명적 상처‘라고 부른 것으로 되돌아가도록 밀어붙여서 그 상처가 치유받을 수 있게 한다.
신경증환자의 거짓됨은 삶에서 불가피한 갈등이나 선택의 어려움을 회피하는 데 절대적 가치를 둔다는 데 있다. 이러한 면에서 신경증은 가치의 전도라고 율라노프는 말한다. 그들은 “신경증적 고통은 우리가 합법적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지불하는 대가”라는 융의 말을 인용하며, 정신분석이 삶의 혹독한 현실을 직면하도록 풀어주는 기술이라는 프로이드의 견해를 진술한다. 그들은 구원을 “신경증환자가 스스로 갇혀 있는 편협한 굴레들의 감옥을 열어주는 것”으로 표현한다. 신경증환자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거짓된 삶 속에서 안전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안전을 포기하고 진실 앞에 발가벗는 것을 택할 것인가. 구원은 거짓된 신경증적 삶에 의한 깊은 상처가 주는 고통을 의식적으로 감수하는 일을 포함한다.
신경증환자의 고통에 대해 해석하면서 율라노프는 두 가지 종류의 고통을 말한다. 하나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고통이고, 또 하나는 그 고통을 회피하려는 데서 온 신경증환자의 전도된 고통이다. 심층심리학은 주어진 고통을 회피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갈등인 신경증적 고통의 의미만을 진술할 뿐, 삶의 현실적 고통에 대해서는 단지 수용하거나 또는 적응해야 할 대상 이상으로는 그 의미를 진술하지 않는다. 즉 고통의 심리적 의미 이상을 진술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경증을 가치의 전도라고 말할 때에도 그 가치란 심리적 기능성의 가치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심리적 기능성에 가치의 기준을 둘 때 그것이 절대화될 우려가 있다. 그 예로서, 램본은 자아심리학(ego-psychology)의 경우를 들어 비판을 가한다. 자아심리학은 프로이트의 본능 심리학(id psychology)에서 한 심리적 기능으로 분류되는 자아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의 기능과 현상에 절대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아의 신격화(ego-divinisation-a-deux)에 빠져버렸다고 램본은 비판한다. 자아 심리학이 본능으로부터 자유한 자아를 주장함으로써 자유의지를 가진 기독교적 인간에 동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자아심리학은 `자아와의 관계 속에 있는 자아‘ (ego in relationship with ego)에 머물러버려 자아 자체를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져 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심리학의 자아 숭배적 경향을 비츠(P. C. Vitz)는 인본주의 심리학 전반에서 발견하고, 이 경향을 자아주의(selfism)라는 말로 표현한다. 비츠는 자아주의 심리학이 인격의 내적 및 외적 제한을 과소평가하고, 사람의 긍정적 가능성을 과대평가한다고 비판한다. 메이(R. May), 프롬(E. Fromm), 마슬로우(A. Maslow), 로저스(C. Rogers) 등의 인본주의적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내재적 선성(善性)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본성 깊이 잠재해 있는 공격성 성향의 파괴성을 경시하고 개인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나 집단적 통제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아 실현”(self-realization)의 무한한 가능성을 맹신하고, 고난이란 단지 인간이 환경을 통제하기 위한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실수나 부조리로 생각함으로써, 고난과 죽음의 내재적 의미를 간과한다고 비츠는 비판한다.
(3) 실존주의적 심리치료
고난 그 자체의 의미를 찾으려는 심리치료 이론이 철학에 바탕을 둔 실존주의적 접근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과학적 방법론에 바탕을 두고 심리적 현상에 관심을 국한하는 한에서는 기능적 접근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합리성이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믿고 20세기를 시작했던 서구인들은 세계 전쟁들의 폐허 속에서 허무와 절망을 대면하기 위한 실존주의 철학을 탄생시켰다. 크릴(D. F. Krill)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발견한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인격의 독특성에 대한 강조; 고난이 삶의 계속적인 과정 속에서 인격적 성장과 의미의 발견을 위해 필연적인 부분이라는 것; 자신과 삶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가장 진정한 방법으로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강조; 삶의 진정성에 대한 헌신(commitment). 기존의 심리치료에 대한 실존주의자들의 비판을 크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을 충동에 따르는 동물이나 학숩된 조건화의 사회적 동물로 보는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와 같은 생각들은 양자 모두, 실존주의자들이 인간의 존엄성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 즉 개인의 독특성의 절대적 가치를 거부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주관적 경험에 관계하는 방식을 통하여 그의 독특성을 발견한다........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정신분석학 이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동적인 힘들을 핑계로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도록 함으로써 종종 오용된다. 사회적인 학습 이론 역시 유사하게 사회적 힘들의 결정론에 의해 사람들을 눈감아줌으로써 오용될 수 있다.
실존주의자들이 볼 때, 인간의 인간됨은 삶에 대하여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서 독특하게 반응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개인의 자유, 또는 개인의 주관성(subjectivity)은 제한적인 상황들과 끊임없이 부딪치면서 의미를 만들어간다. 고통은 개인의 주관성이 삶의 제한들과 갈등하면서 개인이 불가피하게 경험하는 것으로서, 고통은 개인의 주관성이 자신의 독특성을 경험하고, 삶의 의미를 창출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도록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경험이다.
프랭클(V. Frankl)은 고통 속에서 고뇌하는 사람에게서 아무런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공리론적 윤리학에 대해 비판하면서, 고뇌에는 자체 속에 가치가 풍부하게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인간은 고뇌하는 한, 고통스러운 조건에 대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대면시키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주어진 조건과 자신을 동일화하여 현실과 대면하는 긴장감을 상실할 때 인간은 더 이상 고뇌하지 않는다. 인간은 고뇌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구별되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의 삶과 자신의 의미를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고뇌는 인간을 무감동 즉 심리적 응고에 대해서 지켜주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조건은 사람에게 고뇌에의 기회를 준다. 고뇌 속에서 사람은 의미를 창출하며, 이 의미야말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삶의 조건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부여한다. 프랭클은 고통과 절망의 극한 상황 속에서의 자신의 의미 체험을 통하여 의미요법(logotherapy)이라는 독특한 정신요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4) 구체적 사실로서의 심리학
프로이드(S. Freud) 이후 발전되어 온 현대의 정신의학 또는 심리치료는 사람의 정신 병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표방해 왔다. 도덕적 또는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심리 과정을 객관적으로 또는 현상학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정신 병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주관적 신념이나 편견으로 인한 왜곡을 줄이는 데 큰 공헌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심리치료적 접근은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심리적 역동이나 행동 학습 또는 가족관계적 영향 등 심리적 조건과 인과관계들을 추적함으로써,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보다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보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심리치료적 접근이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만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거기에는 객관적 사실만을 고려할 자료로 간주한다는 가치 판단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진정한 객관적 사실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도 역시 가치 판단이 요구된다. 심리치료자가 인간의 심리를 진단하고 처방하려 할 때, 그는 어떤 객관적 사실들을 근거로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간의 심리에 있어서 무엇이 궁극적이고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데 대한 어떤 가치 판단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담은 윤리적 과정(ethical process)이다 - 이는 인간에 관련된 모든 일(예를 들면, 수술)에 윤리적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약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상담은 거의 모든 종교의 종교적 개종이 윤리적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윤리적이다. 즉, 동기, 효과적 요소들, 목적되는 결과들, 결과들의 평가 등 모두가 필연적으로 일련의 윤리적 가치들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정신의학이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행동 및 행동 병리에 대하여 기본 가정들과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램본(Bob Lambourne)은 정신의학이 오늘날의 종교가 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정신의학적 기준들은 현대인들에게 도덕적 가학주의(moral sadism)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정신의학과 상담은 사람들에게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위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그 기준들에 못 미칠 때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과 불안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인간의 행동과 삶에 대한 기준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도덕적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램본은 정신의학과 상담의 핵심적 공헌은 그것이 사람들의 삶의 상황 속에 육화(incarnation)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드의 핵심적 공헌은 행동의 윤리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보고자 했다는 데에, 다시 말하면, 그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동의 방향이 우러나오도록 시도했다는 데에 있다고 램본은 말한다. 즉,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가르침은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 나온 현실 인식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램본이 볼 때, 정신의학의 커다란 오류는 그것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상황적 사실들이 궁극이전적(penultimate)이라는 것을 잊는 것이다. 정신의학이 자신이 추구하는 상황적 사실의 구체성과 특수성의 한계를 잊고 그것으로부터 인간 행동의 궁극적 규범을 만들어내려고 할 때, 그것은 궁극이전적 사실들로부터 궁극적 행동 규범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잘못된 결과를 야기한다.
III. 고난에 대한 신학적 이해
(1) 용어의 정의
고난의 문제는 전능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통치라는 전통적인 신학적 전제에서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어떻게 인간을 괴롭히는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신학은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왔다. 그것은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불리운다. “theodicy"란 말은 그리이스어에서 온 말로 `하나님‘이란 말과 `정의’란 말의 합성어이다. 이는 악이라고 하는 현실 앞에서 정의로운 하나님을 변증하는 신학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힉(John Hick)은 악을 잘못된 의도와 나쁜 경험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기독교 신학의 용어로 환언하면, 잘못된 의도는 죄(sin)라는 개념으로, 나쁜 경험은 고난(suffering)으로 표현된다. 신정론은 고통의 경험이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행동 즉 죄의 문제까지 포괄하여 악의 문제를 다룬다.
(2) 오덴의 목회적 해석
악과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 온 대답들을 정리하면서 오덴(T. C. Oden)은 그 대답들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다. 둘째, 하나님은 선하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죄악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인정하지 못할 때 다음과 같은 오류들이 발생한다고 오덴은 말한다. 첫째, 악의 어마어마한 위력 앞에서, 하나님이 악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둘째, 악의 지속적인 위협 앞에서, 선과 악의 이원론적인 입장에 빠진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한하는 것이다. 셋째, 악이 현실적으로 사람에게 주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즉, 악의 현실과 실체를 은폐하거나 축소시킨다. 이러한 세 가지 입장 모두 악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이 아니라고 오덴은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와 죄의 결과로서 고통을 허용하시지만, 직접적으로 고통을 의도하지 않으신다. 고통을 결과시킨 죄와 소외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치유와 구속의 은혜로 대응하신다. 둘째,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을 때, 그것의 남용의 가능성이 동반된다. 의지 없이 덕이 없으며, 자유의지에서 생기는 선은 그로부터 생기는 악보다 훨씬 크다. 셋째, 하나님이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낼 수 없다면 어떠한 악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아담의 타락은 더 큰 구속으로 이어지기 위해서이다. 넷째, 악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 전능한 하나님만이 다른 존재의 자유를 허용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전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타락과 죄의 가능성이 있는 피조물을 만들고 그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피조물이 자유를 남용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자기-결정을 허용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손실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다섯째, 고난은 쓴 약처럼 일시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길게는 사람을 정화시킨다. 고난을 통하여 양심이 일깨워지고 영적으로 강해지고 도덕적으로 고양되고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고난이 그 자체로서 선하지는 않지만 더 큰 선(도덕적 용기)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여섯째, 개인의 고난은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고 사회적으로 구속된다. 개인은 악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고통을 당한다. 사회적으로 편만한 악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희망을 품고 하나님의 커다란 구속의 계획을 신뢰할 수 있다. 일곱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의 견해로서, 악은 선의 결핍이다. 모든 존재는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선하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악은 선에 원천을 두고 있으며 선에 기생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선이 완전하지 않은 만큼 악한 것이다.
오덴은 위의 설명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말한다: 1. 악의 자연적 원인을 인정한다. 즉, 기적적인 해결만을 말하지 않는다. 2. 악과 고통의 주관적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3.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고통을 존재, 의미, 가치의 보다 큰 질서 안에 위치시킨다. 4. 기독교 신정론의 삼각형(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하심, 악과 고통의 현실)을 모두 인정한다.
이러한 신정론적 이해를 바탕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목회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지킬 것을 오덴은 권면한다: 1. 고통이나 악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는말을 해서는 안된다. 2. 어떻게 느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상황이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모색할 뿐이다. 3. 고통에 직면하도록 도운다. 4. 종말론적 희망을 갖는다. 즉, 역사를 넘어서는 섭리에 대한 희망을 지닌다.
(3) 고난의 적극적 의미
에머슨(James G. Emerson)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pain)과 그 고통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수용(suffering)을 구분한다. 에머슨은 사람이 그에게 닥치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고통에 대해 우리는 전적으로 무력한 것이 아니다. 그 고통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통에 대한 이 선택의 자유야말로 자유스러운 존재로서의 인간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 자유는 죄를 향한 가능성, 즉 악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죄 또는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내포한다. 그러므로 자유야말로 고난의 문제에 대한 열쇠이다. 인격적 존재, 책임적 존재로서의 사람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하나님은 죄와 고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역의 가능성으로서, 죄와 고통의 현실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부여받은 자유를 행사할 권리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머슨은,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왜 선한 사람에게 고통이 오는가?” 라고 질문하기보다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통에 대하여 자유를 포기한 상태를 죌레(Dorothee Solle)는 매저키즘(masochism)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새디즘(sadism)적 하나님 상(像)에 의해 그리스도교적 매저키즘(masochism)이 결과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에 의하면, 새디즘적 신학은 다음과 같이 전제한다: 1. 하나님은 모든 고난을 내리시는 전능하신 세계의 조정자이다; 2. 하나님의 행위는 공의롭다; 3. 모든 고난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고난을 주고 사람은 고난을 당한다. 하나님은 고난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 전능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고난에 대해 사람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고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학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자유를 상실한다. 그 사람은 무기력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의 정당함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무기력과 무의미성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무기력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이 실제 결과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으리라는 느낌”이며, 무의미성은 “결정 과정에서 최소한의 명확성마저도 상실하는 것”이다.
힉은 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기독교의 신학적 답변을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눈다. 하나는 아우구스티누스로 대변되는 다수파이고, 다른 하나는 이레네우스로 대변되는 소수파이다. 다수파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중세를 거쳐 오늘날의 신정통주의로 이어지는 신학적 주류를 대변한다. 반면, 소수파는 이레네우스로부터 쉴라이에르마허로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유형은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하나님이 선하시며, 그러므로 그에 의해 피조된 우주도 선하고; 2. 인간의 고난은 죄에 대한 형벌이며; 3.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선이 결과되도록 섭리하신다. 이러한 신학적 진술의 철학적 결론은 악을 비존재(non-being)으로 규정하여,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존재의 미학적 완전성(aesthetic perfection)을 옹호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유형에서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 사이의 관계가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비인격적으로 진술되고 있다고 힉은 비판한다. 하나님의 선함은 주로 무한한 창조성에 의해 표현되고 피조된 인간은 거대한 존재 세계의 한 부분으로 묘사된다. 형이상학적인 창조 원리가 강조되는 가운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는 뒤로 숨어버린다. 인간의 죄 역시 형이상학적 개연성(metaphysical contingency)으로 설명됨으로써 죄인의 인격성은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 유형은 하나님의 주권적 정의를 변호하는 데 강조점을 둠으로써, 위에서 죌레에 의해 언급된 새디즘적 신학으로 기울게 된다.
힉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보는 것처럼 인격적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치유하고 가르치고 용서하는 하나님-사람 사이의 관계가 기독교 신정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육신(Incarnation)의 빛으로 보면, 악은 우주의 완성을 위해 인격적 삶을 포함하는 우주의 미학적 완전성에 필요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fellowship)를 높여주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서만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기독교 신정론은 전체로서의 자연에가 아니라 도덕적 인격에 중심이 두어져야 하며, 그것의 지배적 원리는 미학적이기보다는 윤리적이어야 한다.
힉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이해에 대비하여 이레네우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람이 제한적으로 완전하게 창조되고 나서 그 자신의 완전성을 철저히 파괴하고 죄와 고통 속으로 빠져버렸다는 교리 대신에, 이레네우스는 사람이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피조물로 창조되어 도덕적 발달과 성장을 거쳐 결국 그의 창조주에 의해 의도된 완전에 도달하여야 할 존재라고 말한다. 아담의 타락을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에서는 아주 해롭고 파멸적인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히 망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레네우스는 그것을 악의로 가득차 있고 영속적인 죄책감을 동반하는 어른의 범죄라고 보기보다는, 인류의 유아 시절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서 연약함과 미성숙에 기인한 이해할만한 과실로서 이해한다. 삶의 고난을 아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 대신에, 이레네우스는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우리의 세계가 사람이 완전, 즉 그를 위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의 성취를 향하여 발달하도록 하나님이 지은 환경이라고 이해한다.
사람은 창조적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을 갖는다. 사람의 타락, 다시 말하면, 도덕적 불완전은 의도적인 죄악의 결과라기보다는 도덕적 성숙과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출발점이다. 고난은 사람이 자유를 행사하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도덕적 성숙을 향하여 가는 끊임없는 실패와 학습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난은 피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껴안고 씨름하며 지나가야 할 과정이다.
죌레는 고난의 현실을 사랑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하여 고난은 진정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무한한 능력의 상징”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여기에서 사랑은“<하나님에 대한> 사랑, 완결된 존재로서 우리 위에 계신 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만물이 되시는 분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고난-나의 삼분법적인 도식 속에서 고통 속에 있는 나는 피동적인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저 위에서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 속에 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고통 속에 있는 나는 곧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이다. 고난의 현실을 끌어안고 무한히 사랑할 때,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죌레는 고난에 대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기독교적 신비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에서 고난을 긍정할 수 있으며, 고난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긍정되고 사랑받는 전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이 ”하나님“이다. 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신뢰 속에서 우리는 고난의 현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긍정과 사랑 속에서 신정론적 질문은 자연히 극복된다. 고통은 회피되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의 본질이 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는 방식이 된다. 고통은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는 통로가 된다.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열정적 사랑이 어떠한 형태의 고난보다도 강할 수 있다. 고난 가운데서도 파괴되지 않는 나의 강함이 고난을 만드는 존재를 무력하게 만든다.
죌레는 타울러와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적 경험 속에서 세 단계를 발견한다. 첫째 단계는 유한성을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소유의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이다. 이는 유한성에 대한 고착이다. 둘째 단계는 해탈의 단계로서, 소유한 사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즉, 자기를 비우고 고난을 받아들이게 된다. 셋째 단계는 “하나님의 고난”으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자유를 막고 있던 “자기” 또는 “소유”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다.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4) 구원의 위기로서의 고난
램본(Lambourne)은 질병/치유의 상황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위기 상황으로 해석하였다.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며, 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바른 응답을 구하신다고 본다. 사람의 바른 응답이 요청되는 가운데 질병의 상황은 구원을 향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질병의 위기는 구원의 위기이다. 의사와 간호사가 병자를 만나러 갈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병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신비를 보고 받기 위해 간다고 램본은 말한다.
삶의 위기 속에서 구원 사건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램본은 이렇게 말한다: (1) 위기 또는 질병의 발생; (2) 양심, 성직자, 현인 등을 통해 이 위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잘못된 관계의 증상임을 하나님이 선포하심; (3) 하나님이 사람의 응답, 즉 회개, 통찰,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 등을 요구하시며, 바른 응답은 하나님과의 성숙된 관계에 이르게 하고 잘못된 응답은 소외와 파괴에 이르게 할 것임을 분명히 하심; (4) 바른 응답에 의해서 현재의 위기 또는 질병이 즉시 사라지지 않을 지는 모르나, 바른 응답은 언제나 우주적 혼란을 줄이고 역사를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구원을 향해 움직여 가도록 함.
결국 질병을 비롯한 삶의 위기들은 하나님이 구원을 향해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우리가 이 부르심에 대해 바르게 응답할 때 질병은 우리에게 구원의 계기가 된다. 램본은 치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치유는 위기에 대해 한 집단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적으로 적절한 응답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치유는 질병 자체가 낫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며, 우리가 어떠한 응답을 하는가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즉, 위기는 보다 높은 품격의 삶을 위한 기회이며, 보다 높은 품격의 삶은 신체, 정신, 영의 전인적 내용을 포함한다.
위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질명/치유의 상황은 환자 및 그의 의료인들에게 한정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교우, 친지 등 그 위기에 관련 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관계되어 구원의 상황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은 병자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증인들을 위해서도 구원의 위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자에게 자비의 행위로써 응답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배척으로서 이미 심판받은 것이다.
(4) 고통의 작업
에머슨(J. G. Emerson)은 고통에 대한 창조적 수용과 대처의 과정을 고통의 작업(suffering work)이라고 불렀다. 그는 고통의 작업을 “고통의 상황을 통과하여 치유의 순간에 이르기 위하여 행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우리의 삶에 들어온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여 그것이 우리의 부분 - 우리의 건강하고 살아있는 존재의 부분 - 이 되게 하는 일.” 에머슨은 고난의 이러한 창조적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 긍정이 치유에 있어서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독특한 공헌이라고 말한다. 고통의 작업에 관련된 성서의 기사들에 있어서 그는 다음 세 가지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들이라고 말한다: 1. 문제의 발견 - 고통의 작업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의 발견; 2. 과제의 발견: 고통의 의미를 표현하고 고통의 작업을 진전시키는 상징의 발견; 3. 창조적 결과: 창조적 삶의 능력을 가져오는 과정. 에머슨은 한 예로서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분석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과정에서 만년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은혜의 결정체였다. 그런데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게 된 아브라함에게는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쌓아 온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개념, 제사에 대한 개념, 가족 관계에 대한 신뢰 등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의 죽음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그에게 명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창 22:2) 그러나 그러한 메시지는 누구나 쉽게 실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한 메시지는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들려진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 향한 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이렇게 문제를 발견했다고 해서 문제에 대한 고통의 작업의 방향이 쉽게 정해지는 것 또한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 번제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다. 왜 이삭의 죽음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제물이라는 형태로 요구했을까? 이것은 아브라함이 발견해야 하는 고통의 작업의 과제를 상징한다.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3 일 간의 여행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혹독한 고통의 작업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기도와 묵상과 순종의 긴 고통의 작업 끝에도 하나님의 명령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그는 아들 이삭을 단 위에 묶고 칼을 든다. 바로 그 때에야 하나님의 새로운 음성이 들려 온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12절) 아브라함에게 숫양이 눈에 띈다. 아브라함은 “그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앞으로 그 관계를 표현할 창조적인 방식을 알려주는 상징을 그 숫양에게서 발견한다.” 에머슨은 아브라함의 고통의 작업을 이렇게 요약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고통은 여러 차원에서 나타난다. 한 차원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죽여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 다른 차원은 그가 신앙에 있어서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질문에 관련된다. 신앙을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 결과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전보다 더 깊게 이해되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은 이제 새롭게 확장된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다.
에머슨은 아브라함의 이 이야기 속에서 고통의 작업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을 발견한다. 그것은 순종이다. 에머슨은 순종을 자기포기의 은사(gift of surrender)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내어맡기는 능력(ability to let go)이다. “우리가 자기포기를 하는 만큼 우리는 고통의 작업이 우리를 치유하도록 허용한다.” 아브라함은 많은 자손을 가지려는 야심,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그의 기존의 관념 등을 포기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가 갖고 있던 삶에 대한 이해와 기대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롬 4:3)고 로마서 기자는 표현한다.
IV. 사례 연구
24세의 대학생이 목회자의 소개를 받고 목회상담센터를 찾아왔다. 그는 대인관계의 문제로 인해 상담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입에서 심하게 냄새가 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늘 피해를 입고 있다고 말했다. 자기가 입을 열면 주변 사람들이 냄새로 인해 고개를 돌리거나 코를 막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두렵고 사람들과 가능하면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에 그의 담임선생님이 매우 깔끔한 여선생님이었는데, 그 분이 자신을 냄새나고 더럽다고 여러번 야단친 일 이후로 자기는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심하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남자로서 제대로 성숙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심하게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와 같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던 것과 같았고 아버지는 자녀들의 말을 듣지 않고 늘 무시했다고 하였다. 목회상담자는 상담을 진행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인격적인 존중과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데서 온 대인관계의 부적응과 열등감이 입에서 냄새난다는 관념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였다. 아버지와의 관계 방식의 변화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상담이 진행됨에 따라 내담자는 조금씩 건설적인 방향으로 가정, 학교, 교회에 적응해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3년여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한 때는 기도원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열광적인 신앙에 몰입하기도 하였었다. 상담을 받으러 왔을 당시에는 부모와 함께 지역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등 교회 생활에 열심을 갖고 있었다. 상담 중 그는 왜 자기에게 이런 어려움이 왔는지를 종종 물었다.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는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대답을 표현하고자 이런 질문을 하는 것같았다. 그가 갖고 있던 결론은, 이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제대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또 하나의 숨겨져 있는 기대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큰 일을 하게 하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목회상담자는 이런 문제가 대두될 때에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또 그가 경험하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올지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단지 그 어려움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 어려움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왜 자기에게 이런 어려움이 왔는가‘라고 물을 때에, 그는 고통의 현실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삶을 하나님이 섭리한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 질문 속에는 고통의 현실에 대한 분노,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만일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면 그 이유 또는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의문 또한 담겨 있다.
목회상담자가 그의 이러한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였던 것은 이 질문이 적절하지 않다거나 또는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목회상담자는 이 질문이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필요한 질문이라고 본다. 목회상담자가 상담의 초기 단계에서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였던 것은, 상담의 초기 단계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건설적 대답을 요구한다기보다는 감정의 분출인 경우가 많으므로 그 감정을 표현하도록 이끌고 받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치우쳐 있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 문제를 깊이 다루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먼저 신뢰관계를 만들어가고 시급한 과제들에 대한 현실적 해결방안을 모색해가면서, 이 문제는 단계적으로 다루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목회상담자는 우선 내담자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담자는 아버지를 향해 깊은 분노를 갖고 있고 아버지의 말과 행동에 대해 불만과 분노감을 느끼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목회상담자는 그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감정을 실제로 아버지에게 표현하도록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목회상담자는 정직과 진실에 충실하도록 내담자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정직하게 느끼고 진실하게 표현하는 삶을 살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왜곡하도록 만들었다고 목회상담자는 설명하였다. 그리고, 목회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정직하게 느끼고 표현하는 행동을 통하여 자신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새로운 `가르침‘을 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담자는 전능한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관념과 자신이 경험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사이에서 어떤 설명을 갖고 싶어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통의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어떤 이유를 찾고자 하는 욕구의 산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전능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과 고통의 현실 사이의 모순을 없애고 싶은 욕구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저기에 있는‘ 하나님이 `여기에 있는’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의 현실을 주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만든 목적을 나름대로 갖고 있고, 그 목적의 설정 과정에서 내담자 자신은 별로 참여하지 않는다. 내담자는 단지 하나님이 스스로 갖고 있는 생각을 알아내려고 애쓸 뿐이다. 결국 내담자는 하나님의 일방적 행동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러한 피동성은 죌레가 말하는 새디즘적 신학과 관련을 갖고 있다.
내담자와 목회상담자 사이에 장기간 대립되었던 문제 중의 하나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긍정의 문제였다. 내담자는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어하였다. 입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므로 그는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 속으로 도망가고 싶어하였다. “배타러 가고 싶다”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세상과 단절되어서 엄청난 노동만이 생활의 전부인 어선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의 대면을 요구하는 목회상담자에게 그는 그럴 필요없이 떠나고 싶다고 반복하여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목회상담자는 배타러 가는 것은 그의 자유이지만 거기에 가도 지금 여기의 문제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목회상담자의 말에 대해 갸우뚱하면서도 상담자의 확신있는 태도에 의해 설득되곤 하였다.
내담자는 하나님-고난-나의 삼분법적인 도식 속에서 하나님과 고난을 분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난과 나도 분리하였다. 그는 고난의 현장을 떠나면 고난을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비해 목회상담자는 그가 있는 곳에 고난이 있고 고난이 있는 곳에 그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난과 그는 하나인 것이다. 고난을 끌어안고 고난 속에서 어떤 해결이 나오지 않으면 진정한 해결은 없는 것이다. 고난과 나를 분리하는 내담자의 태도는 다른 한 편으로 고난과 하나님을 분리하는 태도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분리는 고난을 객체화시킨다.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객체화시키는 새디즘적 신학은 또한 나로부터 고난을 객체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고난 속에 현존하지 않는 하나님은 고난 속에 현존하지 않는 나를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고난에 대하여 대면할 용기를 포기하고 고난 속에 피동적으로 안주하거나 또는 고난으로부터 회피하려 하게 된다.
내담자의 회피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피동적인 태도에 대하여 목회상담자는 정직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목회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권면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감정에 대하여 정직하게 대면하도록 도우려 하였다. “배타러” 가려 하는 근본적인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 입의 냄새 때문에 사람들을 회피하는 행동의 근본적인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조심스럽게 탐색하였다. 내담자는 점차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의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람들과 대면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입의 냄새라는 형태로 전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목회상담자의 생각에 아주 천천히, 장기간에 걸쳐서 동의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은 자신 속에 내재화된 아버지상에 대한 미움이라는 사실을 내담자는 또한 깨닫기 시작하였다. 고통의 핵심에 대한 이러한 그의 자각은 그의 생활의 변화로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아르바이트를 하여 약간의 용돈을 벌기 시작하였고, 교회에서도 교사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진로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입의 냄새에 대한 두려움이 실은 사람들과 대면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라는 생각을 내담자가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서 목회상담자는 그에게 지금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입의 냄새에다가 고통의 이유를 전가할 수 없을 때에 내담자는 자신의 깊은 문제에 대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눈 앞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비난 대신에 자신 안의 내재화된 아버지 모습을 문제삼게 되는 것도 내담자에게는 더욱 힘든 것이 될지 모른다고 목회상담자는 예상하였다. 상담의 초기 단계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왜?”라고 물었을 때 상담자는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기를 피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그의 질문은 감정적인 분출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점차 문제의 핵심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다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질문 속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 성찰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회상담자는 이에 대한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상담 초기부터 상담의 핵심 주제였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목회상담자는 아버지와의 관계 변화의 시도는 자신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이며 또한 내담자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이기도 함을 강조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정직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함으로 인하여 내담자가 현재의 왜곡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며 죄임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러한 삶을 살게 된 데에는 그의 부모 세대의 잘못된 양육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진정으로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의 부모 세대로부터 왜곡되게 전수받은 것을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의 자녀에게 되물려 준 것이아니냐고 그에게 말하였다. 여기에서 원죄에 근접한 개념을 다루면서 목회상담자가 의도한 것은,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동정적 이해를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가지고 있는 책임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지금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죄와 고통은 계속될 것이 아니냐고 그에게 도전하였다. 이는 그의 안에 내면화된 아버지 모습에 대한 고통스런 대면을 계속해야 한다는 목회상담자의 권면이었다.
목회상담자는 내담자가 아버지에 대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정직하게 표현하기를 계속적으로 권면하였다. 그 목적은 우선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에 정직하고 또 그 표현에 솔직하도록 함으로써 그에게 있어서 내적, 관계적 일치성(congruence)을 회복하게 하려 함이었다. 두 번째의 목적은 그와 아버지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하고 직설적이 되게 하려 함이었다. 내담자의 감정과 생각들은 억압되고 위장되어 있었고, 그와 아버지의 관계 역시 위장되어 있었다. 그와 아버지가 서로와의 관계에 있어서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그의 치유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과제라고 목회상담자는 평가하였다. 이 과정은 내담자에게 매우 고통스럽고 커다란 용기가 요청되는 과제였다. 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또한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직설적으로 증오와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아버지에게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불행과 고통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에게 반박하고 화내고 들으려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목회상담자는 아버지를 만나 그의 감정적 표출을 받아주고 이해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아버지는 점차 아들의 주장을 말없이 듣게 되었고 아들에게 보다 수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이 상당한 기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 가정에 긍정적인 사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내담자의 둘째 누나는 그 가정의 또 하나의 골치거리였다. 내담자의 보고에 의하면, 자라면서 그녀는 잘난체하기를 잘하였고 내담자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부어 깊은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잘난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실이 없어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수 년동안 그냥 집에서 놀면서 용돈만 축내며 신경질만 부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어려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중매로 `훌륭한 인격‘ - 내담자의 보고에 의하면 그녀의 못된 성질에 걸맞지 않는 - 의 남편과 결혼을 하게까지 되었다. 또한 내담자의 남동생은 지방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서울의 좋은 대학의 편입시험에 합격하는 일이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한편 내담자는 목회상담자와 만나기 시작할 즈음에 이미 상당 기간 동안 비정상적인 행동과 생활 양식으로 인해 그의 부모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있었는데, 위의 긍정적인 일들과 아울러서 그의 생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많이 발전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가정에 경사들이 겹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내담자의 보고에 의하면, 이러한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할 특별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다. 목회상담자는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무슨 요인 때문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주관적인 평가일 수밖에 없지만, 내담자와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위장되고 억압되어 왔던 문제들에 대하여 정직한 대면이 이루어지는 고통스런 과정이 이 가정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질병과 치유에 대한 램본의 해석에 의하면, 우리의 삶의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잘못된 관계의 증상이며, 하나님은 이에 대한 사람의 회개와 바로잡음을 요구하신다. 사람의 바른 응답은 하나님과의 성숙된 관계에 이르게 하며, 우주적 혼란을 줄이고 인간의 구원을 향해 이끌어간다. 내담자와 아버지가 위장되고 억압된 관계로부터 정직하고 진실한 관계로 전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그 가정 전체에게 혼란으로부터 구원을 향하게 하는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램본의 관점에 의하면, 질병/치유의 상황은 환자 및 그의 치료자들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교우, 친지 등 그 위기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며, 이 모든 사람들이 관계되어 구원의 상황을 형성한다. 내담자와 아버지의 관계의 변화는 그들이 속한 가족 및 기타 공동체 전체와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관계 변화가, 언뜻 볼 때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내담자와 그의 아버지가 보다 진실한 관계로의 변화를 위하여 커다란 고통을 감수한 것이 바로 그 가정의 구원의 한 계기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의 문제 또는 위기가 잘못된 관계의 증상이라고 한다면, 그 고난에 대해 진실하게 대면하여 관계 회복을 향하려고 할 때에 커다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 고통을 감수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구원의 계기를 이루는 것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야 53:5)
내담자와의 상담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관계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입에서 나는 냄새의 문제였다. 이 문제는 내담자로 하여금 상담하러 오게끔 만든 직접적인 이유였다. 처음부터 목회상담자는 그의 입에서 그가 걱정하는 만큼 비정상적일 정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을 지적하려 할 때마다 그는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목회상담자는 이를 성급하게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기로 하고 먼저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상담을 진행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버지와의 관계 변화와 아울러 그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남에 따라, 그는 입의 냄새에 대한 두려움은 실은 그의 내면의 불안의 반영이라는 생각에 조금씩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입의 냄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대인 관계의 장애도 조금씩 완화되었다. 이 상태에서 목회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입의 냄새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도전하였다. 내담자는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율법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작은 일에도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도덕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목회상담자는 내담자가 입의 냄새 때문에 교회학교 교사로서 학생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소극적인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처음에는 입의 냄새로 인해 타인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사람들을 피하는 것은 자신의 입의 냄새로 인해 멸시를 받을까봐 그러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피하는 것이 사랑의 행위인가라고 상담자는 물었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입의 냄새로 인해 멸시를 받더라도 타인들을 위해 그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상담자는 물었다. 그는 이에 대해 시인하면서도 당혹스러워하였다.
목회상담자가 이렇게 도전한 것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내담자는 자신에 대하여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내담자가 입의 냄새로 인해 대인관계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실은 타인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열등감 또는 자학 때문이라고 상담자는 판단하고 있었다. 내담자가 본인이 열등하다고 느끼는 자신을 위장하려 했기 때문에 입의 냄새라는 문제를 장애로 선택했다고 상담자는 판단하였다. 그 위장을 벗기고, 열등하다고 느끼는 자신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 보일 수 있을 때, 대인 관계의 불안감을 극복하고 입의 냄새의 문제도 사라지리라고 상담자는 생각하였다. 이것이 목회상담자가 위와 같이 내담자에게 도전한 첫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도덕주의적인 태도로 인하여 그가 멸시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감수할 수 있는 동기가 유발될지 모른다는 기대였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타인을 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생각이 될 것이라고 상담자는 예상하였다. 내담자는 과연 자신의 이기성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 힘들어하였다.
목회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멸시를 받을지 모르더라도 위험을 감수하도록 도전했을 때, 내담자는 상담자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자신이 해왔던 생각을 이같이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입의 냄새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내가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목회상담자는 그가 스스로의 진실 때문에 오는 수치를 감수할 수 없으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목회상담자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치가 없었다면 부활의 영광이 없었을 것이라고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죌레는 달콤한 그리스도와 쓰디쓴 그리스도를 대비시킨다. 달콤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려 하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새디즘의 하나님으로서, 저 위에서 무관심한 부동의 하나님이다. 이는 죄의 극복 없는 자기애의 모습을 낳는다. 쓰디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길을 상징한다. 죄의 현실로 인한 고통, 불행, 수치에 대면하는 것이다.
에머슨의 고통의 작업의 도식으로 내담자의 이 경우를 분석한다면, 그가 겪는 대인 관계의 장애는 그의 문제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문제에 대해 직면하는 대신에,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후에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발견하려는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가 입의 냄새로써 그의 내적인 문제를 위장하고 있는 것은 그의 고난의 작업의 과제를 상징한다. 실제로는 없으나 그가 상정하고 있는 입의 냄새는, 그가 자라난 가정에서 그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가졌던 강압과 위장의 냄새일 것이고, 그가 현재 정직하게 그의 내면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썩고 있는 냄새일 것이다. 그 냄새는 위장의 냄새이다. 그 위장을 벗기는 것이 그가 고통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목회상담자가 그로 하여금 수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라고 권면하는 것은 단순히 진실하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진실을 위장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경험 속에서 그의 내면 안에 창조적 사건이 일어날 것을 목회상담자는 기대하였다. 즉, 내담자가 자신의 수치를 숨기고 위장하면서 잊었던 그의 내면의 창조성이 회복되고 그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그의 잠재적 능력들이 표출될 것을 목회상담자는 기대하였다. 이것이 고통의 작업의 창조적 과정이다.
목회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내보이도록 도전하였을 때, 내담자에게 그것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매우 힘든 도전이었다. 그러나 목회상담자와의 오랜 상담을 하는 동안에 가졌던 긍정적 경험들, 그리고 상담 관계를 통해서 그가 갖게 된 목회상담자에게 향한 깊은 신뢰감은 일단 그로 하여금 목회상담자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오랜 관계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그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목회상담자가 내담자의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면서 진실로 인한 수치의 감수를, 그리고 타인들을 위한 위험의 감수를 요구함으로써, 내담자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말했을 때, 그는 더욱 목회상담자에게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는 타인들을 위해 자신이 멸시받을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면, 입의 냄새가 나더라도 타인들과의 관계를 회피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고통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입의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불안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파트-타임 직장을 다니고 있다. 이제 집을 떠나 직장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다. “배타러” 떠날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진정 떠나야 할 시간을 맞이한 것이다.
V. 결론
본고는 램본이 언급한 의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램본이 비판한 또 하나의 극단인 성직주의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의료주의를 과학적 환원주의라고 말한다면, 성직주의는 초자연적 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의료주의가 고통과 치유를 순수하게 자연적 관점에서 보려 했다면, 성직주의는 초자연적 관점에서만 보려했다고 할 수 있다. 성직주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판단이나 기준을 교회의 테두리 안에 한정시키고 교회의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려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이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은 교회 또는 성직의 주권을 옹호하는 것과 평행을 이룬다. 종교개혁의 개인주의는 성직주의적 집단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직주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경험을 “타락”으로 규정하고 도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거룩함을 삶의 경험으로부터 일탈시킴으로써 인간으로하여금 고난에 대해 무기력하게 만든다. 성직주의는 모든 것을 종교 의식에 환원시키고 우리의 삶의 구체적 특수성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다. 이러한 성직주의의 주술적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근대의 계몽주의는 결과적으로 의료주의를 낳았다. 그러나 의료주의는 구체적 특수성에 대한 과학적 자료에 모든 것을 환원시킴으로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삶에 대한 통전적 접근을 상실하고 말았다. 성직주의는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차원에 눈을 감은 반면, 과학주의적 환원은 공리론적으로 계측될 수 없는 하나님의 차원을 배제해버렸다. 성직주의는 새디즘적 하나님을 산출하고, 의료주의는 기계적 인간을 산출하였다. 전자는 전능한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인간이 자유를 상실하고 무기력에 빠지게 만들었다. 후자는 모든 책임을 인간에게 환원시켜 초월적 차원을 잃어버림으로써, 고난을 품을 수 없는 기계적 인간을 만들었다.
이레네우스적 접근에서처럼 인간의 경험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하고자 하며 거룩함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적극적 자유에 궁극적 가치를 둘 때, 성직주의의 벽은 허물어지고 교회에 대한 의료주의의 경계심 역시 풀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정신학, 해석학, 실존주의 등에서 이러한 방향을 발견할 수 있다. 목회상담자는 성직주의와 의료주의의 중간에서 신학자의 역할과 과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과학자들에게는 신학적 가치를 대변해야 하며, 신학자들에게는 구체적 사실들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과학적 사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경험 - 에 대한 신뢰와 경계를 동시에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