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에서 온 편지
한영미
식탁 위 바나나에 번져 가는 반점이
우르르 몰려들던 눈동자 같다
예닐곱 살쯤의 집요한 목소리들이
송이채 치켜들고 원 달러, 원 달러를 외칠 때
가진 게 바나나밖에 없어서
껍질처럼 버려지는 게 두려워서
받쳐 든 손가락도 낮달처럼 휘어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무리가 더 다가와
물러진 어깨와 어깨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왜소하지만 감노랗게 다 자라 버린 눈빛이
금방이라도 가난과 분리돼
아무렇게나 짓이겨질 것만 같았다
동행의 도움으로 그 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낙담한 아이들은
물컹거리는 그늘 어딘가로 또 뛰어갔다
몸을 추스르는 사이
신발 한 쪽이 벗겨져 미끄덩거렸다
신발이 없다고 많이 울었다, 발이 없는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
쁘라사 잠브라노 앙헬 하이르라는
이름 긴 소년의 우편을 다시 읽어 본다
‘사랑하는 엄마’라고 배뚤거리게 쓴 커다란 글씨체에서
그 노란 입술들이 겹쳐진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소년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동안 잠시 따뜻했지만,
선택에서 제외된 아이들은 아직도
낯선 여행객 뒤를 쫓으며
휘고 슬픈 오후를 옮겨 다니고 있지 않을까
편지지에서 현기증 같은 바나나 냄새가 물씬 난다
사진 속 소년이 웃고 있다, 그 옆엔
상태 양호라는 문구가 또렷하게 찍혀 있다
*오스왈도 과야사민
한영미 | 2019년 『시산맥』으로 등단, 202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