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내 심장이 뛰었던 세 가지 이유
윤선애
나의 스무 살은 순수했고, 촌스러웠고, 뾰족했고, 강렬했다. 두근두근! 스무 살 내 심장이 기억하는 이야기를 여기에 꺼내 보려 한다.
<첫 번째 이유>
“따르릉~”
“여보세요, 5동 201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3동 201호예요.”
“앗!(대학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녕하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랑 관리 동 앞 벤치에서 맥주나 한잔하실래요?”
2004년 봄,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방팅’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기숙사가 남자 동과 여자 동으로 구분되었고, 방마다 기숙사 방끼리만 연결되는 전화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각 방의 전화번호는 동과 호수를 나타내는 네 자리의 숫자였다. 예를 들어 1동의 101호는 1101번이고 2동의 301호는 2301번이었다. ‘방팅’은 기숙사의 방 전화번호를 이용한 미팅의 일종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밥까지 먹고 난 한가한 시간이면 방 전화가 울리곤 했다.
방팅 전화 소식에 우리 방 안의 공기가 들떴다. 마침 놀러 와 있던 다른 방 친구 두 명도 함께 들떠서, 이 놀라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함께 논의했다.
원래 내 룸메이트인 3학년 언니는 ‘다 늙어서’ 방팅에 나가기 쪽팔린다고 했고, 다른 언니는 남자친구와 200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방팅은 우리 방의 1학년 둘에 놀러 온 친구 둘을 포함하여 1학년 네 명이 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옷 중, 편해 보이면서도 가장 화사한 옷을 무심한 듯 챙겨 입고 기숙사 현관 앞에서 만났다.
올망졸망 비슷비슷한 키에 화장기 없는 순한 얼굴, 고등학생을 벗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네 명의 스무 살 새내기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지 못한 채, 한껏 도도한 표정 속에 설레는 마음을 숨기고 기숙사 관리 동으로 향했다.
그날 밤, 관리 동 앞 벤치의 공기와 풍경과 소리가 아직도 내게 생생하다. 선선한 바람, 해질녘의 보랏빛 하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등 뒤에서 들리던 비닐봉지 바스락거리던 소리, 맥주병 부딪치는 소리, 목소리 굵은 남자들이 긴장한 듯 웅얼대던 소리….
그날 그 벤치에서 서로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중 나와 제일 이야기가 잘 통했던 오빠와 캔모아에서 둘이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설렜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는 키가 컸고 피부가 깨끗한 사람이었다. 다정하면서도 진중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그를 보며, 정말 어른 같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데이트를 끝내고 각자의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석 달 뒤 군대에 갈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뭔가 굉장히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네며 ‘아,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멋지고 다정한 남자와의 ‘못다 이룬 로맨스’. 스무 살의 내 심장이 뛰었던 첫 번째 이유다. 통속적이고 뻔해서 더 애틋한 내 첫 번째 두근거림이었다.
<두 번째 이유>
그 후 나는 극을 창작하고 공연하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사건들을 공부하고 토론했다. 우리는 학습하고 토론한 내용을 가지고 극본을 공동 창작해 공연을 연습했다. 그렇게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일 법한 공터면 어디든 우리의 공연 무대가 되었다.
우리는 극본을 창작할 때, 반드시 그래야 하는 사람들처럼 더 날카롭게 대립하고 싸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공연할 극을 연습할 때,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연습 과정을 지켜보던 선배들의 독설이 이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한 명씩 돌아가며 울었던 기억도 난다.
그날도 우리는 사선으로 내리는 눈보라에 뺨을 얻어맞아 가며 극 연습을 했다. 연습이 끝나고 근처 실내 포장마차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물론 술을 한잔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뒤풀이 과정이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따뜻한 제육볶음 한 점을 집어 입안에 넣으면, 방금까지 힘들고 추웠던 연습이 마치 즐거운 옛 추억이 되어버린 듯싶었다. 매콤하고 달콤하고 고소한 제육볶음을 씹고 있는 그때,
“와, 선애 옷 예쁘다. 글래머인 줄 오늘 알았네.”
연습을 보러 온 선배 중 하나가 내게 칭찬이랍시고 던진 말이었다. 잠시 이게 무슨 말일까 싶어 멍했다. 그리고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존경하고 동경했던 선배가 나를 한 사람의 동료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슴 큰 여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펑펑 울자, 선배는 매우 당황해서 다시 말했다.
“아 왜 울어. 너 몸매 예쁘다고 칭찬한 거야. 울지 마.”
나는 주변에 누가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선배에게 쏘아댔다.
“방금 한 말 사과하세요. 성희롱이에요, 그거.”
내 말을 듣고 당황한 선배는 오히려 화를 냈고, 나는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선배에게 더 버릇없이 따졌다.
“저는 방금 너무 기분이 나빴고, 선배가 나를 배우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배는 잠시 가만히 생각하다가 내게 사과했고, 다음 날 우리는 따로 밥을 먹으며 완전히 화해했다. 선배와는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웃으며 지내는데, 선배는 그때 알아봤었다고 한다. 내가 ‘돌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는 확실히 ‘돌아이’ 같았다. 지금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일에도 분노하며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싸우고 울고 화해하고 웃어야 할 일들이 참 많았다.
아마도 스무 살의 내 심장이 너무 순수해서였겠지. 이젠 심장이 무뎌져서 화가 나는 일도 거의 없는 요즘, 나는 사소한 일에도 미친 듯 뛰던 그 심장이 가끔 그립다.
<세 번째 이유>
“밥 먹으면서 누가 그릇 긁는 소리를 내!”
“길 다니면서 군것질하지 마라.”
아빠는 예의와 도덕을 중시하고 술을 좋아하시지만, 가무를 즐기시진 않았고, 시끄럽게 노는 것을 싫어하셨다. 아빠 친구들 사이에선 ‘할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고지식하고 자기만의 철학이 강했다.
아빠는 술을 많이 마시고 잔 다음 날에도 아침 6시면 당연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분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자신의 철학이 강했기에, 자식들도 그러한 자세로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는 점이다.
남동생은 ‘보글보글’이나 ‘철권’ 같은 게임이 하고 싶어 몰래 오락실에 가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아빠는 회초리는 물론이고 집안 분위기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무섭게 화를 내셨다.
나와 내 여동생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부득부득 아빠와 대립할 일을 만드는 막둥이 동생도, 그만한 일로 애를 죽일 듯이 잡는 아빠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통제에서 벗어난 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주말마다 아빠는 아침 7시면 내게 전화를 하셨다.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자? 이런 늑대 같은!”
아빠는 평소 욕은 하지 않으셨지만, ‘늑대 같은~’, ‘정신 빠진~’과 같은 말로 본인의 심기 불편함을 표현하셨다.
나는 휴대폰 액정에 아빠가 뜰 때마다 ‘늑대 같은!’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받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나의 요즘 생활을 잘 알지도 못하는 아빠가 변하지 않는 시대의 잣대로, 변하고 있는 나를 재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단절을 선택했다.
대학생이 되고 난 후 첫 명절을 맞이했을 때였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이유를 대고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아빠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고, 아빠를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도록 나는 집에 가지 않았고, 아빠와 소통을 거부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답답하고 헛헛해서 아무나 잡고 대화하고 싶었다. 당시 가장 의지하고 좋아하는 언니에게 전화해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
나는 아빠의 고지식함과 답답함에 대해 토로했다.
“언니, 진짜 우리 아빠는 너무 옛날 사람이야. 우리 아빠 친구들도 ‘할배’라고 부른다고. 대화하면 너무 답답해져. 내 상황도 모르면서 왜 자기주장만 하는지 모르겠어. 언니는 그런 적 없어?”
언니는 내 말을 다 들어 주고 내 투정을 온전히 받아 주었다.
“왜 없어. 많지. 그런데 나는 가족한텐 자존심 안 세워. 맞출 수 있는 건 맞추고, 안 되겠으면 말하지. 그런데 내가 자존심 세우며 말하면 서로 이해를 할 수가 없더라. 적어도 가족은 자존심 내려놓고 대할 수 있어야지. 아빠가 널 이해 못 하면, 네가 이해하면 되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마냥 ‘쿨’해 보이고 자유로워 보였던 언니가 저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너무 맞는 말이었다. ‘내가 맞고 아빠가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내 자존심만 세우고 있었구나. 나는 다음 날 아빠에게 전화했다.
“뭔 일이냐?”
“뭔 일은 무슨. 그냥 아빠 생각이 나서.”
아빠는 당황하셨다. 다정한 말도 아니고 내가 그냥 툭 던진 한마디에 당황하시면서도 좋아하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빠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니 우리의 관계도 바뀌었다. 아빠는 여전히 고지식하셨지만, 가끔 본인의 속 이야기를 하시기도 했고 심지어는 ‘너희 어릴 때 내가 너무 엄해서 미안했다.’라고 사과하기도 하셨다. 나는 20년 동안 아빠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모습이 더 많았다.
아빠와 나 사이에 놓은 벽을 무너뜨리자 여러 생각이 밀려왔다. 사실 내가 닫혀 있던 거였구나. 언제든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있구나! 어느덧 내 심장에서 뾰족한 가시를 빼고 두근두근 따뜻한 온기로 아빠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따뜻한 심장으로 아빠를 대하자, 아빠와 나의 새로운 관계도 활짝 열렸다.
나의 스무 살은, 설레고 싶은 나이였다.
지나가는 낙엽에도 웃거나 울거나 분노할 수 있는 나이였고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을 온 심장으로 배운 나이였다. 아직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이불 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무 살의 나는 누가 뭐래도 참 매력적이었다. 지금도 강렬하게 뛰었던 내 스무 살 심장이 간직한 추억들을 가끔 꺼내본다.
윤선애
대치동을 비롯한 주요 학원가에서 중고등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10년 정도 일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시를 감성적으로 대하는 것이 신기하다.’라는 학생의 말에 충격을 받아, 국어 학습서를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편집자로 일한지 8년 만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출판사를 만들겠다는 오랜 꿈을 실현하려고 한다.
주제문: 지나가는 낙엽에도 설레고 웃고 울고 분노했던 강렬한 나의 스무 살에 대한 이야기.
첫댓글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오 방팅!!! 너무 재미있었겠어요!!!
이렇게 감성적인 글을 쓰시는 분이 미처 표출하지 못하고 사셨다니... 오랜 꿈 꼭 이뤄내시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