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 - 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
1. 머리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 양쪽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보기 드문 다작가이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유학자에게서는 보기 드문 풍부한 경험이 바탕이 되고 있다. 정약용은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관료로 활동하면서 당시 시대적 문제들에 대하여 폭넓은 식견과 경험을 쌓았는데, 정약용을 깊이 신임하였던 정조正祖의 정치적 문제의식은 경세론經世論에 한 토대가 되고 있다. 정약용은 서학書學과 서교西敎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이른바 성호좌파星湖左派와 학문적으로 깊이 교류하였는데, 서학에 대한 개념적 성찰은 주자학의 이론구조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모기령毛奇齡(1623~1713), 서건학徐乾學(1631~1694), 염약거閻若璩(1636~1704) 등 여러 청대 경학자經學者들의 경설經說에 대하여 독서하고 토론하였는데, 이 경험은 자신이 수립한 새로운 경학經學에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 지적知的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풍부한 경험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탓에 정약용의 경학과 경세론에 대한 견해들은 매우 다양한 시각 속에서 연구되어 왔다. 연구사를 돌이켜보면, 경세론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연구되던 것이 경학에 대한 연구와 과학사와 연관한 연구로 영역이 확대되어 왔다. 본 논문에서 이들 연구사를 모두 소개하는 것은 필자의 역량상 너무 벅찬 일이다. 이제 다산학에 대한 최근 연구성과들을 전기傳記, 철학사상哲學思想, 경학經學, 예학禮學, 경세론經世論 등으로 영역을 구분해서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과제들을 전망해 보고자 한다.
2. 정약용의 저술과 전기에 대한 연구
정약용은 회갑을 맞이하여 쓴 자신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일생 동안 써온 글들을 1차 정리하였다. 이후 1836년 별세할 때까지 정약용은 이전의 글을 보완하거나 또는 염씨고문상서소증초閻氏古文尙書疏證抄 등과 같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저작들이 정약용 사후 어떻게 보전되었고, 어떻게 필사되고, 유포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 정약용이 생전에 정리하였을 여유당집與猶堂集 원고原稿의 소재는 불분명하며, 규장각소장본, 장서각소장본 등 몇 가지 필사본과 1934년에서 1938년에 걸쳐 재편집해서 간행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76책)와, 그 뒤 다산학회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5책) 등이 전하고 있다. 아직 개인이 소장하고 있거나 각 도서관에 소장된 관련 자료들이 전면적으로 조사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김영호金泳鎬 등에 의해 필사본과 활자본에 대한 대조연구가 제시되었고, 최근에는 조성을趙誠乙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집중본集中本)에 근거하여 시詩와 문文을 연대별로 고증하고 재배치하는 연구를 제시하였다. 현재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정약용의 저작 전체에 대한 정본定本과 역주譯註의 편찬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조성을趙誠乙, 김문식金文植 등 일부 학자들은 신조선사본이나 필사본의 체제 대신에 「자찬묘지명」에 정리된 정약용의 편제에 따라 경집經集, 문집文集, 잡찬雜簒의 체제로 새롭게 재편하는 것이 정약용의 원래 의도에 부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필사본들에 대하여 종합적이고 세밀한 조사를 벌여, 가능한 한 정약용이 생전에 정리한 원고의 형태와 사후 추가된 유고들이 정리되고 필사된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정약용의 전기에 대한 연구는 역시 「자찬묘지명」을 비롯하여 정약용이 자신의 글들 속에서 말한 것과 현손玄孫 규영奎英이 편찬한 사암선생년보俟菴先生年譜가 기본 자료가 된다. 정약용의 생애는 성호좌파星湖左派와 교류한 시기, 관료생활 시기, 유배시기, 해배시기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생애와 학문활동의 전반적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송재소宋載邵, 박석무朴錫武, 금장태琴章泰 등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규명되었다. 최근에는 유배시기와 해배시기 정약용의 활동에 대한 미시적 연구들이 새롭게 제시되어 학문활동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다산경학연구회에서는 해배 후 정약용이 이재의李載毅, 김매순金邁淳, 김기서金基敘, 신작申綽, 홍석주洪奭周, 홍현주洪顯周 등과 교류한 내용을 이들의 문집에 남은 자료들을 전부 찾아내 번역하였다. 이것은 정약용의 학문활동을 구체적으로 해명해 줄 뿐 아니라 정약용과 교류한 인물들이 정약용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정약용에 대하여 좀 더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임형택林熒澤, 진재교陳在敎 등은 정약용이 유배시기에 강진 주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교육한 내용을 밝혔는데,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 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약용의 저술 작업에 보조하거나 참여한 내용을 밝혔다. 진재교陳在敎는 윤정기尹廷琦, 황상黃裳 등이 정약용의 영향을 받아 성취한 문학과 학문활동을 밝혔는데, 이러한 성과들은 정약용의 저술이 이루어진 과정과 정약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들, 즉 다산학단茶山學團의 실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미시적 연구들은 더욱 진행될 필요가 있다. 권철신權哲身, 이기양李基讓 등 성호좌파星湖左派와 관련한 자료들이 거의 남지 않아 정약용이 쓴 묘지명과 단편적 기록으로부터 소급해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정약용이 성호좌파를 비롯한 성호의 제자그룹과 교류한 내용에 관해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관료시절, 규장각 등을 통해 정약용이 당시 지식인들과 교류한 내용과, 학문적 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해명해야 한다. 이를테면, 서유구徐有榘를 비롯하여 정조의 경사강의經史講議에 함께 참여하였던 인물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이나 견해와 대비하여 정약용의 입장을 분석하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정약용의 학문 형성과정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성호의 제자그룹과 규장각 시절 정조正祖를 비롯한 당시 관료지식인들의 학문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3. 철학사상
철학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다산학에 대한 연구는 이기론과 심성론에 대한 정약용의 철학적 성찰들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에 주요한 관심이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사회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철학적 측면에서도 내재적 발전의 경로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잠재된 목적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먼저 정약용 사상의 전체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에 관련해서 보면, 북한과 남한의 연구자 사이에 공통성과 함께 일정한 차이가 있다. 실학파와 정다산(1955), 정다산의 생애와 저작년보(1956), 정다산연구(1962),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1974) 등 북한에서 나온 주요 연구서들은 정약용의 철학사상을 민족적 자주사상과 애국주의로 특징지우면서 근대성의 측면에서 재해석하려는 고심을 보여 준다. 가령, 최익한崔益翰은 정약용의 ‘신아구방新我舊邦’이 지향한 사회는 민주제도와 공상적 사회주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정성철은 17세기를 봉건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파악하고, 실학을 계급모순이 증대되면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사회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성철은 사상이 계급의 이해를 반영한다는 계급론에 입각하여 실학자들이 진보적이기는 하지만 양반계층으로서 갖는 한계 때문에 그리고 생산력과 기술수준의 제약 때문에 봉건유교 자체를 반대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고 해석하였다. 정성철은 실학이 탐구방법으로서 실사구시를 사물일반에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용적으로 실용의 학문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성리학과 구분되는 성격이 있다고 파악하였다. 정성철은 실학을 초기(17세기~18세기 상반기), 중기(18세기 후반기~19세기 상반기), 말기(19세기 후반기)로 구분하고, 초기에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중기에 북학파와 정약용을, 말기에 이규경李圭景과 최한기崔漢綺를 배치하였다. 정성철의 저서는 성리학 이론과 경학적 문제들, 그리고 예학에 대한 실학자들의 연구를 다루지 못함으로써 균형을 잃고 있는데, 이 부분은 이후에도 별다른 연구가 없어 북한 학계의 취약한 결함으로 남는다.
남한에서 60~70년대 실학에 대한 연구는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주체의식을 실학의 학문적 정체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정약용의 철학사상에 대하여 그 전체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개신유학改新儒學(천관우千寬宇, 이을호李乙浩), 수사학적洙泗學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체계(이을호李乙浩), 반주자학反朱子學 또는 탈성리학脫性理學(윤사순尹絲淳),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이우성李佑成) 등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80년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정약용 서거 150주년을 즈음해서 간행된 정다산丁茶山 연구硏究의 현황現況(1985)을 비롯한 일련의 다산학 연구서들은 그 사정을 잘 보여 준다.
90년대 이후에도 성리학의 이론틀 자체를 정약용이 붕괴시키거나 해체시키고 새로운 이론틀을 구성하였다는 시각에서 해명함으로써, 형이상학의 부분에서도 정약용을 반주자학 내지 탈주자학으로 해석하는 연구시각은 지속되었다. 유초하柳初夏는 정약용이 이理의 실재성과 주재主宰 기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의식과 물리적 존재들의 실재성만 인정하였으며,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물리적 존재의 근거를 기氣로서의 태극에, 그리고 정신의 존재 근거를 상제上帝에 두는 이론체계를 재구성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정약용이 이理와 같은 보편관념의 실재를 부인하는 점에서 관념론을 벗어나 있지만, 한편으로 정신의 실재를 주장하는 점에서 유물론과도 다른 입장으로서 일종의 심물이원론心物二元論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심신이원론의 주류적 형태가 관념과 의식을 존재론적으로 통합하거나 동일시하여 개념실재론적 성향을 지니는 데 반해, 정약용의 사유방식은 가톨릭 신앙체계나 서양철학의 심신이원론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이론적 특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리고 성리학을 지양하고 새로운 종합체계를 건설해 낸 측면에서는 근대성을 지향하는 발전적 면모를 보이는 반면, 정신을 성립시키는 근원자로서 상제를 도입한 것은 종래의 선험적 도덕형이상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측면이라고 해석하였다.
한형조韓亨祚는 인간을 자연과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주희朱熹의 철학적 체계를 정약용이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새로운 철학적 구성을 제시하였다고 해석하였다. 한형조韓亨祚는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매개로 한 주희朱熹의 인간관은 선천적 차등성에 관한 결정론의 입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자 한 맹자의 인간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정약용이 비판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그리고 정약용이 기氣 개념을 보편적 생성의 질료로 설정한 주희의 시각에서 벗어나 본래의 의미였던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생명력으로 환원시키고, 그로부터 자연의 결정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연과 대자적으로 만나는 존재로서 인간을 위치지우는 새로운 인간관을 구성하였다고 본다. 한형조韓亨祚는 정약용의 이러한 재구성작업을 주희의 성리학체계에 대한 패러다임적 변화로 해석하면서, 그러한 작업이 유학 내부의 전통, 특히 경학적 전통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학의 영향에 무게중심을 두려는 시각은 지나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최근의 논문에서도 서학의 영향이 컸지만, 이황李滉 이후 이익李瀷을 거쳐 정약용에 이르는 학풍 자체에 서학을 흡수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상적 친연성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그리고 정약용의 사상적 위치를 최한기崔漢綺에 이르러 완성되는 실학으로 전환시키면서 그 토대를 마련한, 즉 이학理學에서 기학氣學으로 이행하는 도정의 과도기에 배치한다.
유초하의 연구에서 서양철학의 전통과 연관해서 정약용의 형이상학을 해명한 것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정약용의 사유체계가 주자학이나 또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이분적 사유에 기초한 서양의 형이상학과도 다른 독특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실학의 정체성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서학의 영향 속에 수립된 것으로 정약용의 형이상학 체계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하여 일정한 반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자칫하면 거꾸로 오리엔탈리즘의 편향에 빠질 수도 있다. 또한 유물론과 관념론의 이분 속에 관념과 의식을 통합하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해석 자체도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활동 또는 정신의 자기독립적 실재성 여부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과 관념의 실재성 여부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서양철학에서 서로 교차되면서도 동시에 구분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전자에 대한 논의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견해차이가 생겨나고 후자에 대한 논의에서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의 견해차이가 발생한다. 레닌은 보편논쟁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만, 유명론자가 반드시 유물론자가 되지는 않는다. 가령 보편관념의 실재성을 부인한 오컴William Ockham은 개별사물과 정신의 실재성을 부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神은 세계를 창조하였고 수호하는 궁극적 존재라고 믿었다. 정약용의 사유에 대해서도 이理와 같은 보편관념에 대해서는 유명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신과 물리적 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
유초하와 한형조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아쉬움은 이기론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개념체계에 집중해서 논의하고 있을 뿐, 인륜 내지 예론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유교의 담론에서 이理 개념은 그 내용으로서 효제孝弟와 항상 불상리不相離의 수반관계에 있다. 정약용은 리의 실재성을 부인하지만, 이理라는 개념으로 주희가 추상화시킨 구체적 인륜성으로서 효제를 부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전망의 근거로 삼는다. 명덕明德을 효제자孝弟慈로 해석하는 문법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문법은 공자와 맹자를 적극적으로 계승하려는 주희의 문제의식과 연속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기론理氣論의 개념체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정약용의 문제의식과 사유내용을 반주자학으로 나아가 근대지향적 성격의 사유로 해석하는 것은 늘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수준의 담론에 머무르는 한계를 갖게 된다.
이기론과 심성론에 관련하여 정약용이 도입하는 기호嗜好, 자주지권自主之權 등 새로운 개념들이나 이理를 원리나 주재자의 위상에서 실천적 덕목에 대한 명칭名稱의 위상으로 재해석할 때 사용하는 논리적 방식들은 정약용의 철학적 사유들이 매우 창의적임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런 사유가 어떻게 정약용에게서 나올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명은 명확치 않다. 이와 관련하여 정약용의 철학사상의 성립 배경으로 서학西學과 서교西敎의 영향에 대한 논의가 연구자들의 관심이 되어 왔다. 최익한崔益翰은 천주교와 서학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대응하였음을 밝히면서, 교敎로서 수용한 정약종丁若鐘, 황사영, 홍교만, 최창현 등과 달리 이익李瀷,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은 학學으로서 수용한 입장이라고 재해석하였다. 그는 특히 이벽李檗 등의 영향으로 정약용이 초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신앙은 버리고 과학과 기술만을 섭취하였다고 보았다. 금장태는 실학자들의 서학의 수용 방식은 유학의 전통을 재조명하는 자기발견의 과정에서 서학을 수용하는 능동적 과정이었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경우 천주교 교리 구조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반영하여 유교 이념을 재해석함으로써 유교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천주교의 신앙여부에 초점을 두는 연구들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반면, 최석우崔奭祐는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가졌으며, 사상적으로 상제, 태극, 음양, 인성론 등 주요 개념들에서 천주교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하면서, 서학을 직접 옹호하거나 신앙한 것은 아니라는 금장태 시각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다.
서학에 대한 정약용의 수용방식에 대한 상반된 해석은 9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강재언姜在彦은 정약용의 사상과 서학의 관련성에 대하여 재론하였는데, 일본이 서교와 서학을 구분하여 서교를 배척하면서도 서학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였던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집권층에서 서교로 몰아 서학까지 함께 배척하는 바람에 1801년 이후 서양 연구의 공백시기를 초래하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상제 관념과 인성론 부분에서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효제孝弟를 인륜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천주교와 양립할 수 없는 점이라고, 즉 서학적 측면에서 수용하는 것이지 서교의 측면에서 수용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김상홍金相洪 역시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론을 반박하였는데, 1878년(26세) 무렵부터 4~5년간 천주교를 신앙하였다가 1791년(30세) 이후로 완전히 절연하였다는 해석을 제기하였다. 한편, 이동환李東歡은 정약용의 ‘상제上帝’ 개념이 도입되는 배경에 관해 천주교의 영향설을 비판하고 이황李滉 이후 남인학파의 사상적 전통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동환李東歡은 이후에 퇴계학통이 갖고 있는 도학의 종교성을 매개로 해서 서학의 수용과 함께 도입된 것으로 해석하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동환의 시각은 이광호李光虎, 금장태 등의 경우에서도 재론되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강재언과 김상홍 등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옥희金玉姬는 한국천주교사상사 2 :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1991)를 통해서, 그리고 최석우崔奭祐 등 관련 전공자들이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 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1993)을 통해서 정치적 탄압 때문에 일시적으로 배교하였다가 결국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최기복崔基福은 다불뤼의 조선순교사비망기朝鮮殉敎史備忘記의 기록을 근거로 삼아 정약용이 쓴 묘지명들의 내용을 배교와 신앙회복의 과정과 연관해서 해석하였다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금장태는 정약용의 중용강의가 신앙생활에 젖었을 때의 저작인데, 이때의 입장이 뒤에 매씨상서평을 저술하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는 개인적 신앙의 유무 여부보다 유교이념에 천주교의 교리를 흡수하여 재해석하는 새로운 경전 해석방식을 수립한 것에 정약용 사상의 특성이 있으며, 철학사적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다산의 유학사상과 서학사상」). 김옥희金玉姬는 심경밀험心經密驗에 나타난 상제에 대한 인식과 기호론적嗜好論的 인성론을 분석하면서 인성에 대한 정약용의 기본 구도는 상제를 대면하는 의식과 타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 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해석하여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였다. 대체적으로 친서학적 해석의 시각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정약용의 개인적 신앙을 전제하여 정약용의 저술들에 담긴 문제의식을 천주교리와 연관해서 해석하는 일면성의 시각이다. 이 일면성의 시각은 경학과 경세론에 관련하여 동아시아 역사에서 문제되어 왔던 주제들에 관한 정약용의 문제의식을 간과하거나 아니면 주변적 위치에 서게 만든다. 하여튼, 천주교 신앙과 관련하여 정약용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상반된 시각은 이미 일제시기부터 존재하였지만,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팽팽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스팔라틴Christopher A. Spalatin, S.J.은 마테오리치의 저술들 가운데 에픽테투스의 글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고증하는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그 요약본을 「Matteo Ricci’s Use of Epictetus」(1975)로 간행하였다. 마테오리치는 유교와 유사한 성찰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스토아학파, 특히 에픽테투스의 저서들을 이용하여 유학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는 바벨탑 사건 이전에 인류가 천주에 대하여 가졌던 신앙의 흔적이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한 단서가 된다는 것과, 스토아학파처럼 윤리적 층차에서 신을 이해하고 있는 이교도들에게는 그들이 갖고 있는 사유를 전면적으로 개정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향상시켜 종교적 층차에서 신앙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것 등 예수회 교단의 신학적 전망이 기초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전파방식의 내용에 대하여 종교적 층차가 아닌 학문적 층차에서 자세히 분석하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한편, 마테오리치의 저술들을 번역한 바 있는 송영배宋榮培는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정약용의 저술들에 나타나는 개념체계 사이에 이를테면, 실체와 속성의 구분을 통해 이理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방식, 물체와 정신의 구분, 이성능력과 자유의지를 도덕의 기반으로 설정하는 것 등의 측면에서 구조적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동일성을 근거로 정약용이 천주교의 내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본다. 그는 정약용이 천주실의의 개념체계를 수용하여 이루고자 한 것은 명상적이고 관념적인 성리학의 학설을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학설로 전환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하였다.
정약용이 서학의 수용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사유체계를 수립하는 계기는 성호좌파와 교류를 통해 형성된다. 그런데 그 영향의 문맥은 기존 연구에서 자세히 분석되어 있지 않다. 가령 이理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천주실의의 논의에 대한 반응은 안정복安鼎福에게서도 발견된다. 또한 성호좌파가 리의 실체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서학西學뿐 아니라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적극적 수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약용이 리의 실체성을 부정하면서 대신 구체적인 덕목으로 효孝, 제弟, 자慈를 강조하는 것, 중용中庸의 미발未發 개념에 대한 주희朱熹 해석을 부인하는 것 등은 서학보다는 양명학의 수용을 통해 유학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던 성호좌파로부터 계승된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철학사상이 성립하는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서학과 더불어 명청대 사상사적 변화에 대한 성호학파의 대응방식이 정약용에게 미친 영향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4. 경학
정약용의 경학經學에 대한 연구는 경세론經世論에 대한 연구와 병행해서 함께 진행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미흡한 부분이다. 정약용의 경학 관련 저술은 육경사서六經四書 전반에 걸쳐 있어 매우 방대하다. 이 때문에 전 분야를 통관해서 해명하는 연구는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다. 사서四書에 대한 정약용의 저서들은 번역되어 있지만, 삼경三經에 대한 저서들은 현재 번역 중이거나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이다. 60~70년대 이 분야 연구를 선도하였던 이는 이을호李乙浩이었는데, 그는 정약용의 경학체계를 ‘수사학적洙泗學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체계’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시각에 대하여 이지형李篪衡 등은 정약용이 이경증경以經證經의 탐구방법을 통해 경전의 문맥을 해명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지만, 그것이 수사학洙泗學으로 복귀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진유교先秦儒敎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의 실학적 경학을 수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취한 것이라고 반론하였다. 정일균鄭一均 역시 사서四書에 대한 정약용의 경학을 총체적으로 분석하면서 정약용이 경학적 해석방식을 이용하여 실천적 윤리를 확보해 내는 독자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고 해석하였다. 김영호金暎鎬, 김문식金文植 등은 정약용이 경전 주석에서 주희朱熹의 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한송겸채漢宋兼采, 한송절충漢宋折衷 등의 입장을 취하고 있고, 자의字義와 고증考證을 중시하면서도 자신의 경세적經世的 문제의식을 경학經學 속에 반영시키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현재의 연구에서 연구자들이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인식은 정약용이 경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경전의 고증적 재해석을 넘어서서 경세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근거지우려는 학문적 노력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세론의 문제의식이 경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 다산학 연구에서 여전히 좀 더 세밀하게 해명되어야 할 주요한 과제이다. 이것은 정약용의 경학사상을 그의 경세론과 연계하여 정합적으로 조명하는 것에서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중국과 일본의 경학과의 비교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사상적 관심과 입장의 동이同異를 드러내는 한 가지는 정치와 경제 등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경학 속에 어떻게 반영시켜 학문적으로 성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염약거閻若璩, 모기령毛奇齡, 서건학徐乾學 등 명청대明淸代 중국 유학자뿐 아니라 이토오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등 일본 고학파古學派 유학자의 연구들을 광범위하게 섭렵하고 있어, 이들 견해에 대하여 정약용이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자신의 경학체계에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먼저 청대 경학자와 정약용 사이의 관련양상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주요한 연구과제는 모기령毛奇齡에 대한 정약용의 이해방식이다. 모기령은 다양한 경학적 저술뿐 아니라 양명학을 지지하면서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주자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다. 정약용 역시 그의 경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약용은 곳곳에서 모기령의 고증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의 상관성은 현재 연구자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심경호는 시경에 관련하여 정약용이 풍자諷刺와 풍간諷諫으로 풍風의 의미를 해석하여 주희朱熹의 음시설淫詩說을 비판하는 점에서 모기령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데, 이아二雅와 국풍國風의 풍간諷諫 방식을 정언正言과 미유微喩로 구분하는 등 풍간설諷諫說을 적극적으로 논리화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신원봉은 이른바 정약용의 역리사법易理四法 가운데 추이推移, 물상物象, 호체互體 등의 개념 수립이나 서괘전序卦傳에 대한 이해방식은 모기령의 역학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신원봉이나 심경호 모두 괘卦의 해석이나 시詩의 해석에서 정약용이 구체적으로 모기령의 설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러한 영향설에 대하여 모기령과 정약용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한 연구도 있다. 가령 김영우金永友는 신원봉의 견해에 대해 반론하면서, 정약용은 역학 이론의 수립에 자연세계와 경세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데 반해, 모기령은 고증을 근거로 순수하게 역리易理의 측면에서 역학이론을 수립한다고 대비한다. 즉 정약용은 주역이 주대周代에 와서 복서卜書로부터 경서經書로 그 의미가 새롭게 변화하였다고 인식하면서, 복서卜書이면서도 한편으로 주대 성왕의 정치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에 대한 해석체계를 수립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모기령은 오역설五易說을 통해 작괘作卦와 연역演易을 역리易理의 측면에서 해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지만, 정약용은 추이推移 등 역론易論을 통해 역리易理의 차원에서 해명하면서 한편으로 자연세계와 정치영역을 아우르는 자신의 세계관을 담아내는 일에 주안점을 둔다고 해석한다. 그는 그 일례로 추이론推移論에서 벽괘辟卦-자연의 근본적 시간, 연괘衍卦-자연의 근본적 시간에 의해 지배를 받는 만물의 관계로 설정하는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교郊(수괘需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의 의미를 교제郊祭라는 주대의 정치행위에서 그 뜻을 읽어 내는 등 개별적인 괘의 해석에서도 경세적 의미를 접목시켜 해석함을 지적한다.
김영우의 연구는 정약용과 청대 경학자의 관련 양상에 관해 연구를 심화시키는 방안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개념의 단순 비교보다는 개념을 사용하는 작자의 의도와 방식을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청대 경학자의 문제의식과 정약용의 문제의식이 함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우의 연구에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모기령에 대한 정약용의 독서에서 정약용의 주관심은 모기령의 설을 비판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모기령에 대한 비판을 이용하여 주희의 역학체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희의 역설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는 정치적 환경에서 주희를 비판하였던 모기령을 역으로 비판하면서 한편으로 주희의 역설을 대체하는 이중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기령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약용의 서술방식에 말려들어서 모기령에 대한 비판이 정약용의 주된 목적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점 역시 정약용의 경학론에서 늘 주의해야 하는 문제로 생각된다.
경세적 문제의식이 정약용의 경학 연구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90년대 이후 새로운 진전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상서尙書에 대한 해석에서 특히 그렇다.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을 통해 정약용은 모기령이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寃詞에서 고문상서를 옹호한 것을 비판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대우모大禹謨」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중심으로 선진유학先秦儒學의 정신을 계승하려던 주희의 이론적 근거를 전복시킨 것이었다. 이렇게 주희의 신념을 무너뜨린 뒤 상서의 중심 논지와 더불어 선진유학의 주안점을 어디에 두려고 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김문식金文植은 정조正祖가 경전 가운데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상서 「고요모皐陶謨」], 용인用人과 이재理財[대학大學] 등의 개념을 유교의 주요 이념으로 새롭게 부각시켜 정치에서 군주의 통치행위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경세학의 이론화를 시도하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정조正祖의 생전에 이론화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조正祖 자신도 여전히 수덕修德에 초점을 두고 경전을 해석하는 학풍 속에 있다고 보았다. 김문식은 정조가 단초를 연 경세론의 새로운 이론화를 정약용이 수립하여 제시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경세유표에 반영된 육향제六鄕制를 분석하였는데, 서울과 지방이 분리된 서울 중심의 개혁안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도시 중심의 그리고 상공업 중심의 사회로 변화해 가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여 그 변화를 진전시키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김문식 등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재조명된 것처럼, 지인知人-관인官人, 안민安民-혜민惠民의 개념은 정약용이 정조로부터 계발을 받아 주희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대체하는 새로운 유학이념으로 내세운 것으로, 군주의 능동적 정치행위를 부각시키고, 정치적 도덕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 현실의 차원에서 유능한 정부를 구성하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성격이 왕권강화라는 측면에서 해석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다소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시경의 핵심 기능을 군주에 대한 비판과 계몽에 있다고 해석하는 측면만 보더라도 정약용의 경학에 깃든 경세적 문제의식은 단순하지 않다. 향후 각 부분에서 좀더 세밀한 재조명을 통해 정약용 경학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편 일본 고학파古學波와의 관련 양상은 금장태, 김언종, 김영호, 하우봉河宇鳳 등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김언종과 김영호 등은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와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의 영향이 담긴 구절들을 고증적으로 밝혔고, 하우봉은 거꾸로 정약용이 이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을 분석하면서 양자의 사상적 차이를 밝혔다. 하우봉은 양자가 주자학을 비판하고 선진 고학古學을 지향한 점은 같지만, 오규 소라이를 비롯한 고학파가 주자학 자체를 거부하였던 것에 반해 정약용은 한학이나 청학과 대비하여 주자학의 의리義理 관념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점에서, 양자 모두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중시하지만, 오규 소라이가 차등적 인성론을 긍정한 반면 정약용은 평등적 인간관을 주장한 점에서, 그리고 정약용이 오규 소라이의 민民에 대한 인식을 우민愚民관으로 비판하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보았다.
금장태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관해 다산茶山과 오규 소라이荻生徂倈의 해석을 비교하여 양자의 경학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는 두 학자가 모두 주희의 편장 구분과 해석방식을 비판하고 경전의 본래 취지를 복원하고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결합시켜 독자적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용에 관련해서 볼 때, 정약용의 입장은 이념의 현실적 실현을 위한 바탕으로서 내면적 덕성의 확립을 중시하고, 인격 형성을 위해 정감적이고 신앙적 태도를 중시하는 형태인 반면, 오규 소라이의 경우는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예악이 사회적 법질서의 근거라고 보고 예악의 외재적外在的 규범질서를 실현하는 것에 주된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대학에 관련해서 볼 때, 태학太學의 의례와 제도를 중시하면서 그것을 통해 대학의 중심적 의미를 읽어 내는 점에서 정약용과 오규 소라이는 공통점을 보이지만, 정약용의 경우 치국治國의 도리를 대학의 중심 주제로 여기면서도 수덕修德과 치도治道를 병립시켜, 심체心體에 대한 관념적 수양이 아닌 구체적 실천[行事]을 통해 확립하는 것을 추구하는 반면, 오규 소라이는 군주가 양로의례養老儀禮를 통해 효제자孝弟慈의 덕을 드러내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으로 대학을 이해하면서 군주가 예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이는 치도治道보다는 치술적治術的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기존 연구는 고학파와 관련하여 정약용의 경학사상을 조명하는 시야를 넓혀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모두 일본 고학파의 경학론에 대한 체계적 독법이 부재하여, 심층적 비교연구에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향후 동아시아 사상사의 문맥이 다층적으로 밝혀지는 연구로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5. 예학
다산학의 연구에서 가장 늦게 시작되었고 미흡하게 다루어진 영역은 예학禮學 관련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다른 저술 못지않게 예학에 대한 전문적인 저술들을 상당히 남기고 있다. 가령 예서禮書에 대한 주석註釋적 연구로 단궁잠오檀弓箴誤를,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한 경학적 연구硏究로 상례사전喪禮四箋과 제례고정祭禮考定을, 상례사전喪禮四箋에 대한 보완이면서 동시에 복제服制문제가 논의되었던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사례들을 경학적 측면에서 천착한 것으로 상례외편喪禮外篇을 각각 남기고 있다. 이들 저작들 전체를 재조명하는 연구는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예학에 대한 연구는 예송禮訟과 예설禮說의 두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전자는 주로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과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 등을 중심으로, 후자는 주로 상례사전喪禮四箋과 제례고정祭禮考定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국가의 전례, 이를테면 추숭追崇이나 상복喪服 등, 이른바 예송禮訟에 대한 연구는 논쟁에 참여하는 세력들의 견해와 그 견해에 반영된 정치적 입장을 재조명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어 왔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일부 역사, 철학전공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예제禮制에 담긴 유교의 철학적 원리를 토대로 예송에 반영된 정치적 입장을 재해석하는 연구로 진전되었다. 이봉규李俸珪는 친친親親과 존존尊尊의 두 이념이 예제 구성의 기본 원리로 작용하는데 이들 두 요소를 예제에 반영시키는 방식에 따라 예제의 정치적 성격이 달라진다는 시각을 제시하고, 역대의 전례논쟁은 곧 이들 두 이념을 현실정치에 반영시키는 것을 두고 상이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세력들이 벌인 논쟁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경우 적통嫡統보다 종통宗統을 우선시하고, 군주에 대한 상복喪服에서 참쇠설斬衰說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존존尊尊을 보다 우선시하는 입장이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윤휴尹鑴와 마찬가지로 왕권강화王權强化를 정당화하는 입장이라고 해석하였다. 최진덕崔進德은 부父-유학적儒學的 측면, 군주君主-근대적近代的 측면, 상제-종교적宗敎的 측면 등 세 요소가 정약용의 사유 속에 착종되어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친친親親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론 일반에서도 질質보다 문文을, 화和보다 엄嚴의 측면을, 친친親親보다 존존尊尊의 원리를 우선시하는데, 그러한 입장은 방례邦禮에서 더욱 두드러진다고 본다. 그는 정약용의 예론이 절대군주론과 같은 근대성을 지향하면서도, 그 안에 종법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정당화의 이념을 함께 포함함으로써 서로 파열을 일으키는 사유의 분열을 보여 준다고 해석한다.
한편 김상준金相俊은 예송을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재해석하고 윤휴尹鑴와 정약용의 입장이 근대 주권론의 단초를 보여 준다고 해석한다. 그는 예송에서 윤휴와 정약용이 군주에 대한 참최삼년복을 정당화할 때 의례儀禮가 아닌 주례의 ‘천왕을 위해서는 참최를 한다’[爲天王斬]는 규정에서 군주복제의 근거를 세움으로써 본질적으로는 존존尊尊주의에 서서 가례와 왕조례를 분리시키는 동일한 입장이라고 본다. 그는 윤휴尹鑴와 정약용의 입장이 군주의 주권으로부터 적통嫡統 내지 장서長庶의 친족적 구속력을 배제함으로써 군주의 주권에서 사적이고 친족적 성격을 탈색시키는 대신 공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강화하며, 나아가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군주권의 위상을 확립하는 노선에 선다고 본다. 그는 윤휴와 정약용 사이에서 발견되는 상제 관념을 군주의 신성에 대한 강조와 맞물려 있다고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시각을 정당화한다. 즉 윤휴와 정약용은 이理 개념 대신 고대의 상제 관념을 복원시키고 있는데, 이는 ‘내면화된 도덕적 규제자이자 유교적 왕권신수설의 근거’가 되며, 이理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무위지치無爲之治의 군주 대신에 상제의 의지를 구현하는 능동적 성군으로서 군주의 위상을 강화하여, 세속군주가 신성의 중심이 되는 정치신학을 수립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김상준金相俊의 해석은 예송에 대한 견해라는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윤휴와 정약용의 예론을 ‘탈성리학-근대지향’이라는 문법으로 경학이나 경세론과 일관성 있게 해석할 수 있는 독법을 제공한다. 그러나 김상준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어 보인다. 가령, 윤휴의 신모설臣母說이나 정약용의 상제上帝 관념은 군주권에 신성성을 부여하기 위한 문맥에서 등장하지도 이용되지도 않는다. 또한 왕권신수설은 교황체제와 국왕권 사이의 대립이 문제되는 유럽사회의 특수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교황체제와 같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학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것으로 인류사의 보편적 현상이 아니다. 친친親親과 존존尊尊의 두 이념은 인륜성人倫性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발견되는 가족과 국가의 연속성은 이 인륜성에 기초한 이념을 모든 인간집단에 실현시키는 예禮를 통해 수립된다. 여기에 동아시아 사회구성 내지 국가 관념의 개성이 담겨 있다. 이들 특성을 비교사적 시각에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그 점을 고려하지 않고 친친親親과 존존尊尊을 친족윤리와 정치윤리로 이분하여 규정하는 방식은 가족 또는 친족의 영역[oikos]-사적인 영역, 국가의 영역[polis]-공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서구정치사의 관념을 암묵적으로 반영하여 유교를 이해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한 형태가 되기 쉽다.
한편, 왕권강화의 입장에서 정약용의 예론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반론이 최근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장동우張東宇는 복제일반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분석하면서, 정약용이 친친의 원리를 우선시하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정약용의 예학론이 근본적으로 고례의 회복을 통해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곧 법가의 영향을 받아 존존尊尊의 원리를 우선시하는 한대漢代 이후의 예학을 비판 극복하고 친친親親을 중심으로 하는 공맹孔孟의 입장을 회복하려는 문제의식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장동우는 그 사례로 상기喪期의 구분 자체를 철저히 친친의 원리에 입각하여 해석하고 있는 점, 입후立後에 있어서 적서嫡庶의 차별을 완화시켜 서자의 승계를 친친의 원리를 끌어들여서 정당화하는 점 등을 든다. 박종천朴鍾天은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약용이 친친親親에 근거한 친속親屬과 존존尊尊에 근거한 군통君統을 엄격히 분리하여 두 측면이 서로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양자의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당화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즉 추숭론자에 대해서는 군주의 생부에 대한 사은私恩의 실현을 위해 군통君統을 침해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나아가 추숭반대론자에 대해서는 반대로 군통君統을 위해 사은私恩의 실현을 침해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약용이 생부에 대한 부父의 호칭과 별묘別廟를 통해 사은私恩을 실현하고 동시에 종묘에서는 군통君統에 따르고 추숭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박종천朴鍾天은 정약용이 친속親屬과 군통君統을 분리하여 양자를 서로 침해시키지 않음으로써 친친親親과 존존尊尊의 두 이념을 모두 실현하려는 것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왕권강화론의 측면과 동시에 군주권의 사적 남용을 막고자 하는 측면을 아울러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장동우와 박종천의 연구는 예학의 측면에서 볼 때, 정약용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식이 아닌 맹자적 의미에서 왕정王政을 실현하기 위한 유교적 이념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해석은 정약용의 예론에 대한 기존 연구가 경세론 등 타 분야에서 왕권강화 내지 근대성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연구경향에 따라 일면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정약용의 예론이 국가운영과 관련하여 어떤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정약용의 특정한 저작에 국한된 연구를 벗어나 저작 전체에 걸친 세밀한 분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앞으로 연구자들의 한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각종 의례儀禮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분석한 연구들 역시 90년대 들어와 새롭게 진전되었는데, 유권종劉權鐘, 금장태琴章泰, 팽림彭林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권종은 정약용의 상례사전喪禮四 箋 가운데 「상의광喪儀匡」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당쟁의 극복과 왕정의 실현, 천주교에 대한 대처의식, 현실문제 해결의 기반으로서 인륜의 실천을 확립하는 것 등이 예학에 대한 정약용의 기본적 문제의식이라고 보았다. 유권종은 정약용이 귀신의 관념을 무형無形한 영명성靈明性에 기반하여 설명하면서, 한편으로 목주木主, 혼백魂帛 등 구체적 형상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다의적多義的 귀신 관념과 행례의절行禮儀節을 비판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정약용의 귀신관념을 기독교의 신 관념과의 연관성을 통해 설명하는 시각을 배제하였다. 이는 정약용의 사상을 천주교의 수용과 연관해서 해석하려는 입장들에 대한 반론의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경전에 나타난 귀신 관념을 복원하려는 정약용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정약용의 신 관념 자체가 고대 경전의 신 관념과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금장태는 정약용의 예설 가운데, 사직제社稷祭와 체제禘祭에 대한 정약용의 해석을 재조명하였다. 그는 정약용이 사직제와 체제에 대하여 음양론陰陽論이나 참위론讖緯論을 이용해 해석하는 추연鄒衍, 여불위呂不韋, 정현鄭玄 등의 시각을 비판하면서, 두 제사의 본래 형태와 원초적 의미를 고증적으로 규명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세밀하게 분석하였다. 금장태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사직제와 체제에 대한 정약용의 시각이 갖는 종교적 의미에 주목한다. 정약용은 왕조가 바뀌었더라도 인간이 지난 왕조에서 섬기던 신의 사당을 철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금장태는 이것이 곧 신의 초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고 해석한다. 또한 정약용이 사물을 신격화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제사대상을 상제上帝의 신좌臣佐로서 천신天神과 인귀人鬼의 체제로 이해하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는데, 이는 전통적 입장에서 벗어나 신 개념에 대한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정약용이 추구하는 바는 한대 이후 음양오행설과 참위설에 의해 변질된 제사의 종교적 신성성神聖性을 확보하는 데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금장태의 해석은 전통적 경학사에서 사직제와 체제사에 관련해 문제 삼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정약용의 시각이 경학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금장태의 연구는 동아시아 경학사의 흐름 속에서 정약용의 제사론이 갖는 의미를 해명하는 것에 소홀하고 있다. 이러한 독법은 정약용의 예론을 연구하는 대다수 논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독법이 정약용의 예론이 갖는 독창성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 될 뿐, 동아시아 사상사 내지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사상을 살피는 작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일국사적 시각 안에서 폐쇄적 이해를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금장태의 연구에서 지적한 정약용의 새로운 신관은 어떻게 수립된 것일까? 금장태는 이 점에 대하여 해당 논문에서는 명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정약용의 천天과 상제上帝에 대한 해명에서 천주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약용이 제사 대상과 관련해서 上帝를 보좌하는 천신天神의 일종으로 지시地示를 재해석하는 것에는 유일신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은 성호좌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천주교의 신 관념이 토대가 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약용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하여 서교西敎의 신 개념에 대하여 갖고 있는 자신의 성찰을 정면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신유옥사辛酉獄事로 당한 가문의 피해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정약용은 자신의 신 개념이 어떤 문맥 속에서 수립된 것인지에 관해서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는 아무런 해명 없이 자연스럽게 상제上帝를 창조주로 나머지 천신지시天神地示를 상제에 대한 신좌臣佐로서 위계지우는 독법을 제시할 뿐이다. 정약용의 이런 발언들을 통해 금장태는 정약용의 신관이 전통적 문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독창성을 보여 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반대로 정약용의 독법은 서교의 영향에 휘말려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애써 구축해 온 인문적 성찰들을 정당하게 사고하지 못하는 사상사의 굴절로도 읽힐 수 있다.
왜냐하면, 정약용의 경학적 기술들에 산견되는 신 관념은 자세하게 검토하는 고증적 작업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서교를 객관화하여 정면으로 탐구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유 속에 침잠된 신 관념을 암묵적이며 간접적인 형태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동아시의 전통에 대해서는 사상의 측면에서보다는 고증의 측면에서 다룸으로써 동아시아 사상사의 문제의식들이 고증을 통한 반증작업 속에 함몰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예론에 나타난 신 관념을 다룰 때에도 경학사적 문제의식 속에서 살펴보면서, 그의 입장이 갖는 사상사적 의미들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예학을 청대 예학과 비교하는 연구는 중국인 예학 연구자 팽림에 의해 부분적이지만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세기 청대 예학의 경향과 대비하여 정약용 예학의 특성을 검토하고, 제례와 상례를 중심으로 정약용의 예설 내용을 구체적으로 재조명하였다. 팽림은 먼저 청대 예학의 학풍이 이학理學에 대한 반성反省과 대체代替를 지향하는 의식에서 제기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능정감凌廷堪의 경우를 들어 이理 개념보다 예禮 개념에 유학의 본령을 두고자 하는 기풍이 청대에 일어남으로써 송대의 이학理學 중심의 학문풍조를 대체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예학이 연구되었음을 지적한다. 그에 비하여 정약용의 예학은 일정 정도 주희 성리학설 중에 내포된 예학사상의 연속이며, 학술적 측면에 그 가치가 있다고 본다.
팽림의 이 평가는 부분적으로만 의미가 있다. 정약용의 학문이 일정 정도 주희 사상의 연속이라는 인식은 정약용의 발언을 표면적으로 이해할 때 가능하지만, 그의 저술 전 체계에 담긴 문제의식을 두고 보면 합당하지 않다. 정약용은 주희의 사상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표면상으로는 주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저술들 전체는 주희의 사상에 기반이 되는 주요한 이론을 근본적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이론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기령毛奇齡, 서건학徐乾學 등 청대 학자들의 업적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담겨 있다.
팽림의 논문에서 새로운 것은 정현鄭玄의 예학에 대하여 청대 예학자와 정약용이 시각을 달리하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팽림은 임칙서林則徐, 호배휘胡培翬, 손이양孫詒讓 등 청대 예학자들이 정현의 주를 존숭하는 것과 달리 정약용은 정현의 주에 대하여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상당 부분 가차없이 비판하고, 나아가 정현 주에 따라 부연, 해설한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음을 특징으로 지적한다. 팽림은 정약용의 상례사전喪禮四箋이 정현의 주에 대한 비판과 교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히면서, 상례사전의 체제는 바로 정현의 주를 긍정하고 보완하는 체제로 짜여진 호배휘胡培翬의 의례정의儀禮正義와 상반된다고 평가한다.
팽림은 정약용의 예학 관련 경전 연구가 경문의 내용을 경전들 사이의 문맥을 이용하여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판본과 교감, 또는 문자에 대한 음훈音訓과 훈고訓詁의 측면에서 연구한 것은 매우 적다고 지적하면서, 후자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청대 예학의 한 흐름, 고염무, 호배휘 등의 경우와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팽림의 이 지적은 정약용의 예학에 있어서 관련 경전 연구에 대한 문제의식을 은연중에 엿볼 수 있게 한다. 정약용의 작업은 예학 경전 자체에 대한 고증적 연구보다, 선진 제도의 정합적 해명에 초점이 있으며, 그것은 국제國制 개혁에 대한 근거와 청사진을 세우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팽림은 정약용의 육향제에 대한 설명에서 그 내용만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쳤지만, 육향제가 국제개혁에서 수도권에 대한 인구의 재배치와 연관해 근거로 활용되고 있음을 선행연구들이 밝힌 바 있다. 향후 예학의 측면에서 다산학을 연구할 때, 정약용의 경학사상에 기반이 되고 있는 경세적 문제의식을 자세히 드러내는 연구를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6. 경세론
정약용의 경세론經世論에 대한 연구는 초기부터 조선후기 시대의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 그리고 성리학에 대비된 실학의 특성에 대한 논의와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사회는 17세기부터 봉건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하여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내부적으로 성장해간다는 역사인식 위에서 정약용의 경세론은 그러한 사회변화에 대하여 근대지향적 개혁론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되었다. 1980년 중반 정약용 서거 150주년(1986)을 즈음하여 정약용 연구를 정리해 보려는 학계의 노력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정다산연구丁茶山硏究의 현황現況(1985), 정다산丁茶山과 그 시대時代(1986), 다산학茶山學의 탐구探究(1990) 등으로 간행되었다. 이들 공동 연구 결과는 대체로 정약용의 경세론을 근대지향적 개혁론으로 파악하면서도 양반 특권층의 수탈을 방지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보완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가령, 정석종鄭奭鍾은 계층적 이해관계를 수반한 당파적 대립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이용하여,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대토지소유자 및 특권상인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론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해가는 상황으로 파악하고, 정약용의 입장은 노론세력에 맞서 왕권강화를 추구하는 정조正祖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1990년 한 학자의 정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다산茶山의 정치경제政治經濟 사상思想에서도 연속되었다. 김태영金泰永은 정약용의 경세론을 왕정론으로 특징지우면서 자립-자영농적 생산관계에 기초한 국가-공동체적 소유 형태의 개혁을 추구하고 그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왕권을 지향하였다는 해석을 제기하였다. 강만길姜萬吉은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을 왕유론(국가적 소유)으로 규정하면서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개혁론을 추구한 점에서 유형원柳馨遠의 공전론과 연속적이지만, 양반층 등 비농업인구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점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강화와 재정의 집중화를 강력하게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학계의 반론이 제기되면서 정약용의 경세론에 대한 연구에서도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었는데 이영훈李榮薰과 김태영金泰永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봉건사회 해체론에 대한 반론으로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이영훈李榮薰 등은 토지소유와 경작방식에 대한 실증적 재검토를 시도하였는데, 이영훈은 조선사회의 경우 지주-전호의 봉건적 생산방식이 18세기에 와서 안정적으로 확립된다고 보고, 17-18세기를 조선이 소농에 기반하여 봉건적 체제를 확립하는 시기로 파악하였다. 그는 이런 시각에 입각하여 정약용의 경세론을 전면적으로 다시 해석하였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김문식金文植의 시각을 수용하면서 정약용의 저술들 사이에 보이는 부정합적 주장들을, 시기에 따른 사상적 변화와 사상 내부에 여러 층위를 가진 논리구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그 문맥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경학체계에서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의 중요성을 깨닫는 1811년(상서지원록의 저술시기)을 전후해서 사상적 변화가 있었으며, 그의 인간론은 1813년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의 저술을 통해 정립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경학적 인식을 토대로 일표이서一表二書의 경세론이 제시된다고 보았다. 이영훈은 정약용이 지인과 안민 개념을 주축으로 성리학에서 추구된 무위無爲의 조화적 세계로부터 작위적 정치세계로 전환시켰고, 군주의 정치적 역할을 중심에 세웠다고 해석하였다. 그는 정약용이 증산增産을 위한 토지분배와 수취의 형평[均稅賦]을 위한 조법助法과 구부법九賦法을 정전제正田制의 본질로 파악하면서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 실행 가능한 개혁의 최대안으로 균세적 개혁안을 주장하였다고 보았다. 이영훈李榮薰은 경세유표가 시대적 한계에 구애되지 않는 근본적 개혁책을 제시한 것이라면, 목민심 서는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개혁안으로서 경세유표에 대한 보완이라고 보면서, 신분의 엄격한 구분을 주장하는 변등론辨等論과 노비제의 옹호를 현실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이해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개혁안이 추구하는 체제는 결국 절대주의 체제의 형태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의 경세론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 관련하여 단계적 개혁론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조성을趙誠乙의 견해에 대한 반론이자, 정약용의 개혁론 자체로부터 근대지향적 성격을 읽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정약용의 서로 충돌하는 다층의 인식들로부터 근대의 징후를 발견하려는 확장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훈은 이런 관점에서 실학이 근대적 사유라기보다는 조선후기 근세近世 소농사회小農社會의 개성적 자기인식의 체계라고 파악한다. 그는 정약용의 경우 근대지향적 사유와 봉건적 사유가 일정한 긴장을 이루면서 복합되어 있다고 보고, 그것이 바로 그가 경험한 19세기 사회의 복합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가령 그는 주희나 성리학자, 심지어 이익까지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을 인륜人倫이라는 틀 속에 하나로 통합하였던 것에 반해, 정약용은 천속과 그로부터 파생된 의합, 그리고 족류 등으로 인간관계를 구분하고, 도덕주의적 왕정론 대신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작위적 왕정론을 주장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인仁을 근간으로 하는 동심원적 도덕주의를 부정하고 이미 분열하는 19세기 사회를 작위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새로운 인륜人倫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사유는 아니지만 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징후를 담고 있다고 재해석한다.
‘실학實學-근대지향적近代指向的 사유思惟’의 시각에 대한 또 다른 대안으로 왕정론王政論을 통한 독법讀法이 김태영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실학도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實現을 지향志向하는 왕정론王政論이라는 점에서 성리학性理學과 공통적이라고 여기면서도, 성리학의 왕정론이 주자학에 입각하여 군주의 치심治心을 강조하는 성학聖學의 형태인 반면, 실학의 왕정론은 고제古制에 입각하여 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하는 국가개혁론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구분하였다. 김태영은 실학이 근대의 실현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대적 사유와 연관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학의 본면목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실학의 국가개혁론이 개인의 욕구를 인정하고 경쟁을 유도하는 측면이 있지만 개인의 사욕과 자유방임체제를 지향하는 성격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오히려 공公을 앞세우는 국가공동체 중심의 사유라는 점에서 근대적 사유와 방향을 달리한다고 본다.(223쪽) 그럼에도 김태영은 여전히 조선후기=중세해체론의 시대구분법에 입각하여 있다. 그는 실학의 개혁론이 유교의 이념에 근거하여 당시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길을 추구하였지만, 당시 개혁안의 근본성 때문에 기득권층에 의해 수용되지 못하였고, 동시에 조선후기 사회가 유교 이념과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됨으로써 실현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고 본다.
김태영은 이런 시각에 입각해서 정약용의 경세론을 국가체제의 전반적 개혁을 위한 왕정론으로 재해석한다. 그는 성리학이 표방하는 정치방식인 재상위임통치론宰相委任統治論은 세조 이후로 훈척과 결탁하는 파행적 체제로 변질되었고, 정약용이 처한 시대에 이르면 벌열 재상으로부터 현리縣吏에 이르기까지 다극적 농단체제로 심화된 중세 해체기의 말폐로 전락되었다고 본다. 그는 정약용이 고문상서의 위작고증을 통해 상서尙書, 「주관周官」에 근거한 재상위임통치론을 비판하고, 사회적 실현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인간관에 기초하여 전제권력이 아닌 공권력으로서의 왕권을 재확립하여 군주가 개혁의 중심에 서는 새로운 통치론을 제기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정약용의 왕정론은 한국의 중세 해체기 통치론의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그 형태는 고경古經에 근거하여 왕권의 본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사익 추구의 할거적 농단에 대한 처방으로써 공익을 실현하는 공권력으로 왕권을 재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약용 자신의 문제의식과 상관없이 중세를 지양하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영훈과 김태영의 해석방식은 자본주의 맹아 사상 또는 근대지향적 사상으로 정약용의 경세론을 직접 결부시키는 김용섭金容燮 등의 해석방식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의 관점은 적어도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을 정당화하는 문제의식을 벗어나 있으며, 실학의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에서도 여전히 성리학의 경세론-중세적 통치론-재상 중심의 정치론 대 실학(특히 정약용)의 경세론-중세 지양의 전면적 개혁론-작위적 왕정론이라는 해석구조를 제기하고 있어, 결국 근대이행과 연관된 의미로서 해석하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속과 의합에 대한 정약용의 논의는 주희의 논의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천속天屬-친친親親-혈연血緣-부자父子, 의합義合-존존尊尊-신분身分-군신君臣’의 두 원리는 본래 하나로 통합되는 관계가 아니며, 제도 속에서 어느 것을 우선시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에 관해서 동아시아 역사에서 늘 문제가 된다. 정약용의 논의는 오히려 성리학과 실학의 연속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성리학의 왕정론-치심治心 위주의 성학론聖學論, 실학의 왕정론-제도개혁을 통한 국가개혁론’이라는 틀로 이해하는 김태영의 경우에도 성리학과 실학은 근대적 사유가 아니라는 점에서만 동일할 뿐 매우 대칭적 시각에서 읽히는 문제가 있다. 이영훈의 연구는 정약용의 사상을 자연自然-도덕道德에서 작위作爲-탈도덕脫道德 이라는 구도에서 읽고자 하는, 그럼으로써 근대와 연관을 지어 해석하려는 문제의식에서, 김태영의 경우는 조선후기=봉건사회 해체론이라는 시대구분에 대한 인식과 연계하여 실학의 의미를 드러내면서, 성리학은 오직 그 실학을 조망하는 틀 속에서 대칭적으로 읽음으로써 편향성을 유발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自然과 작위作爲의 대비를 통해 다산의 근대성을 읽는 방식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일본 근세사회가 근대로 이행하는 내재적 논리를 설명하고자 하였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독법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마루야마는 주자학朱子學과 조래학徂徠學이 봉건적 지배관계 그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절대시하는 논리적 과정에서는 상반된다고 해석한다. 그 차이를 마루야마는 자연自然과 작위作爲라는 개념으로 특징 지운다. 주자학의 경우는 봉건질서가 천리와 본성으로 자연화 되어 그 가치의 이데아적 성격이 그것의 제작자나 실행자, 즉 인격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반면, 조래학徂徠學의 경우는 무너져 가는 봉건사회의 복원을 추구하였지만, 그 근본 질서를 안민安民이라는 목적의식을 갖고 성인이 제작한 것으로 해석하는 점에서, 그리고 작위作爲는 각 시대의 개국군주開國君主들에 의해 시기마다 주체적으로 실천되는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주체적 작위성이 이데아로서의 자연성自然性보다 우선한다고 본다. 마루야마는 유럽이 근대로 접어들 무렵 옥캄, 캘빈, 데카르트 등에서 발견되는 신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이 절대군주라는 정치적 인격의 표상을 정치체제에서 가능하게 하였던 것처럼, 성인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자연적 질서로서가 아닌 성인이 작위한 산물로서 근본 규범을 정당화하는 소라이의 문제의식이 곧 근대로 이행하는 내재적 논리를 제공하였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마루야마의 해석에는 흔히 지적되고 있듯이 유럽의 역사 해석에 비추어 일본의 역사과정을 해명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깊이 무자각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유교의 역사에서 보면, 주자학의 성립과 전개는 사대부 계층이 정치적 주체로 활동하는 역사적 환경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주자학의 이념은 정치권력에 대한 사대부의 문제의식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을 “국가적=교회적 생활통일체”로서의 정치체제에 대한 유럽사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차원에서 대비하는 것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사대부가 수행한 정치적 역할을 간과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사대부들의 정치적 문제의식을 근대와 대비된 봉건질서로만 해석하는 일면적 시각을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시각을 따를 때, <주자학=봉건질서의 옹호논리 대 실학=봉건질서의 해체 내지 변혁의 논리> 라는 대칭적 이분법에 빠지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동아시아 내부에서도 유교 지식인이 활동하는 정치적 환경 자체가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과거제도가 부재한 상태에서, 정책의 조언자로서 또는 문서 작성자로서 기능하는 오규 소라이와 과거출신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국정에 참여한 바 있는 정약용 사이에는 정치에 참여하는 구조적 환경에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정치와 관련하여 유교를 대면하는 문제의식에서도 차이를 낳는다. 정약용은 군주의 능동적인 활동을 긍정하는 점에서 군주의 작위作爲를 중시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이념으로서의 예제禮制보다 그 이념의 제작자로서 성인聖人을 강조하는 전환을 보이지 않으며, 나아가 후대 군주의 역할을 절대군주와 같은 위상으로 제고하는 것에 대한 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왕권강화론의 시각에서 다산의 군주론을 평가할 때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경세론의 측면에서 다산학에 대한 연구를 동아시아사회가 근대로 어떻게 이행하였는가에 대한 연구와 긴밀히 연관해서 연구하는 방식은 새로운 보완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연구들은 은연중에 성리학의 성격에 대하여 성학聖學 내지 심성론心性論의 측면에서만 이해하는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으며, 또한 실학자들에게 보이는 비근대적 요소들 이를테면 예학禮學에 관련한 사상들을 간과하거나 부수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는 향후의 연구에서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근대이행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인간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전망 속에서 동아시아 지성사의 전개를 재해석하는 연구시각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
7. 맺음말 : 연구방향에 대해
다산학에 대한 연구는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상 언급한 주제들 이외에도 수양론修養論, 행정론行政論, 기술론技術論, 역사학歷史學 등 본 논문에서 다루지 못한 연구들이 매우 많다.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는대로 보완하기로 한다. 이제 이상 논의한 것을 토대로 향후 다산학 연구의 심화를 위해 시급한 과제로 여겨지는 문제들을 간단히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첫째, 정약용 저술에 대한 정본定本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정약용의 저술이 간행되고 전수된 과정, 현재 존재하는 판본들에 대하여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본을 이용한 역주譯註가 필요하다.
둘째, 정약용의 학문적 연원을 상세하게 밝혀야 한다. 학문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정약용이 영향을 받고 있는 요소들은 매우 복잡하다. 성호좌파의 사상, 서학과 서교, 정조正祖와의 관계, 청대 고증학考證學과 일본 고학파古學派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사의 조류들, 중앙관료와 지방관료로서의 정치적 경험, 북학파를 비롯한 국내의 사상적 조류 등 다양한 요소들이 정약용의 저술 속에 깃들어 있다. 이들 요소에 대한 기존 연구는 다소 평면적이다. 다산학의 연구는 이제 이들 각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연구로 진전시켜야 한다. 어느 일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다산의 복합적인 문제의식을 단순화시켜 해석함으로써 연구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이지만, 정약용의 의도와 고민을 간과하게 만든다. 이런 폐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차를 함께 고려할 수 있는 학제간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셋째, 연구시각을 확장하기 위하여 동아시아 사상사의 흐름과 연관해서 정약용의 사상을 재조명해야 한다. 기존 연구의 대부분은 조선후기 역사의 전개과정에 초점을 두어 정약용의 사상을 재조명하였는데, 그 결과 연구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왕왕 정약용 사상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연구에 치우치는 일국사적一國史的 해석을 야기시켰다. 다산학에 대한 연구는 이제 동아시아 사상사의 흐름 속에 나아가 세계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동아시아 지식인의 대응 속에서 상대화시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외연구자들과 공동연구 또는 비교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경세론에 관련된 연구성과들에서 보듯이, 다산학에 대한 연구는 동아시아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역사과정에 대한 연구와 깊이 연관해서 연구되어 왔다. 여기에는 동아시아가 향후 역사 속에서 어떤 인간 공동체를 실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을 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 속에서 시험되고 20세기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여러 정치체제들은 매우 불완전한 대안에 불과하다. 특정한 경로의 역사발전론에 대한 집착이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세계체제는 더 이상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경제-군사적 패권의 추구를 인권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해 온 근대의 행로에 휘말렸던 우리의 연구사는 이제 이들 주어진 대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수천 년의 역사적 경험이 자산으로 주어져 있다. 우리는 이들 자산을 이용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수립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거꾸로 향후 역사에서 인간이 실현해야 할 공동체에 대한 우리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과거의 유산을 생산적으로 재해석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