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트(Daath)-지식(Knowledge)
천상의 삼각형과 그 아래 세피로트 사이에 놓인 일종의 심연(Abyss)인 동시에, 호크마와 비나의 합일에 의해 발생한 일종의 다리이다. 크로울리가 스톤 3 카드에 그렸던 정사면체처럼 다트1)는 천상의 삼각형의 아래쪽 대칭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생명나무에서의 중앙기둥은 예소드 안에 잠들어있는 쿤달리니를 일깨워서 우리의 의식이 상승할 때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로이고, 다트는 거기서 준비가 된 사람만 그 문을 통과해서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지기이자 베일이다. 천상의 삼각형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고도로 추상적인 잠재력과 같지만 실제로 현현되지 않은 상태이다. 창조주와 그들에 의한 피조물 간의 거대한 차이와 분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깨달음으로 다른 차원에 있는 의식 상태라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또한 다트는 고위 자아(Higher Self)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한계지점이기도 하다. 다이온 포춘도 ‘쿤달리니’라고도 불리는 위대한 뱀이 머리를 치켜들고 상승하다가 다트에 도달하게 되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추게 된다고 했다. 다트는 ‘생성(becoming)의 세피라’ 혹은 ‘의식의 새벽’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트는 ‘자각’(perception), ‘이해’(apprehension), ‘깨달음’이라고 간주된다. 우리의 의식이 유래한 곳은 케테르의 영적인 정수로부터이고 그것이 다트의 변성 상태를 거쳐서 심연을 가로질러서 티페레트의 깨어있는 의식을 거쳐서 인격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과는 반대로 중앙기둥 위의 ‘화살의 경로’를 통해서 여러 차원들을 거슬러 오를 때에는 다트를 통과해야 하고 그곳은 일종의 소우주가 대우주와 만나는 ‘접촉점’이다.
1) 히브리어로 ‘다트’(דעת)는 지식, 재능, 통찰이라는 뜻이 있고 ‘땀’이라는 뜻도 있다.
2) 무한자로부터 10 개의 세피로트가 발출되었고 비록 케테르가 기원이지만
그것들이 모두 하나를 이룬다는 의미와 함께 그 개수 안에 다트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11은 아니라고 했다.
카발리스트들은 케테르도 일종의 심연이고 다트 또한 심연이기 때문에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케테르가 존재하면 다트가 존재할 수 없고
만약에 다트가 존재하면 케테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로버트 왕이 인용한 웨스트코트의 번역 ‘형언할 수 없는’은
‘- 없이’(without)를 의미하는 ‘벨리’(בלי)와 ‘무엇’ 혹은 ‘어느 것’을 의미하는 ‘마’(מה)로 이루어진 ‘벨리마’(בלימה)이다.
욥기 26:7에서는 ‘무’(無) 혹은 ‘공’(空)으로 번역되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10 개의 세피로트(Ten ineffable Sefirot)로 웨스트코트는 번역했지만
아리예 카플란은 ‘무(無)의’ 혹은 ‘무(nothingness)로부터의’ 10 개의 세피로트라고 번역했다.
가장 높은 원형계인 아칠루트도 무(無)라고 불린다.
따라서 ‘아칠루트(무)로부터의 세피로트’라는 번역이 더 일리가 있다.
다트는 생명나무 도표에서 표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세피라’로도 불린다. 게다가 카발라의 교리에서 다트는 세피라가 아니다. 세페르 예치라에서는 “‘10’은 형언할 수 없는 세피로트의 수로써, ‘10’이지만 ‘9’는 아니고 ‘10’이지만 ‘11’은 아니다.”2) ‘다트’라고 불리는 그것을 경험하려면 심연을 가로지르는 것이 필요하다. 심연은 천상의 삼각형과 그 아래 모든 세피로트 간의 거대한 심연이다. 심연과 관련된 중요한 사상은, 천상의 삼각형과 그 아래 7 개 세피로트 사이에는 필연적이고 명확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잠재적인 ‘큰 얼굴’과 실제적인 ‘작은 얼굴’, 둘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영역이기도 하다. 케테르, 호크마, 비나는 완전히 추상적이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수준에 있다. 호크마의 힘은, 비나가 꾼 꿈(medetation)의 형상들에 의해서 심연을 건너서 헤세드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원형계인 창조주와 창조계 이하의 피조물 사이의 거대한 분리가 사실상 심연이다. 아주 깊은 골짜기(심연)에 의해서 잠재력인 천상의 삼각형은 그들의 실현인 하위의 세피로트와 분리되어 있지만 다트에 의해서 둘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있다. 보통은 한 번의 탄생(Incarnation)에서 갖게 되는 인격과 수많은 육화들을 거쳐서 인격이 반영되는 것을 인도하는 고위 자아(Higher Self), 이 둘을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개별 자아의 구성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고위 자아를 통제하고 인도하는 훨씬 더 순수한 형태의 에너지가 있다.
우선, 앗시야에서는 우리의 ‘육체’(Material Body)가 있고, 그 다음 예치라에서 ‘의식적인 마음’(Conscious Mind)에 상응한 ‘인격’(Personality)이 있다. 그 다음 브리야에서 ‘무의식’인 ‘고위 자아’(Higher Self)가 있고, 마지막으로 아칠루트에서 ‘본질적인 영’(Essential Spirit)인 ‘태초의 생의 불꽃’(Primal Life Spark)이 있다. 하나의 생명나무에서, ‘본질적인 영’은 케테르에 상응한다. 매번의 육화에서 인격을 보호하는 능력이 강조되어 ‘거룩한 수호천사’(Holy Guardian Angel)로도 불리는 ‘고위 자아’는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에 상응한다. 매번 독특한 육화마다 새롭게 창조되는 인격은 네짜흐와 호드, 예소드에 상응한다. 이것은 통상적인 깨어 있는 우리의 의식에 상응하는데, 고위 자아와 곧바로 접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것이 입문 의식들이나 명상 작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육체는 말쿠트에 상응한다. 인격의 구성요소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면 티페레트의 빛이 아래에 있는 자아의 거룩한 궁전으로 내려올 수 있고, 의식의 새로운 수준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거룩한 수호천사를 인식(Knowledge)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아데프투스 시기’(Adepthood) 또는 ‘깨달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심연 너머의 ‘본질적인 영’을 향한 더 위대한 입문으로 인도할 내면적인 진리에 대한 첫 경험이다. 다트, 즉 심연을 통과한다는 것은, 열망했었던 아데프투스의 힘을 의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압도적이며 고독한 경험이라고 묘사된다. 세피로트가 지그재그로 연속적으로 발출되는 ‘불타는 검의 경로’에서는 비나와 헤세드를 서로 연결해주는 경로가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신과의 합일을 열망하는 아데프투스는, 두려움이나 타인의 도움없이 다트를 향해서 스스로 이행하면서 심연을 건너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