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내에서 자인 간 국도변에 위치한 계정숲은 구릉지에 남아있는 천연숲이다.
현재 숲은 이팝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의 낙엽수과 활엽수가 섞여 자라고 있다. 계정숲 안에는 한장군의 墓와 祠堂, 한장군놀이 전수회관이 있고, 조선시대의 전통 관아인 자인현청의 본관이 보존되어 있다.
과거 경산시 일대에 어떤 나무들이 울창하였는지 보여주는 자연유적지이다.
구계서원(龜溪書院)
안동군 월곡면 미질동에 위치해 있던 서원으로, 이 지역이 수몰되면서 1974년 10월에 영남대학교 민속원 내의 현위치로 이건되었다.
구계서원은 원래 강당 건물 뿐만 아니라 사당건물인 모현사와 일신재, 시습재와 같은 동재·서재 등을 갖추고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그후 1896년에 유림의 공론에 의해 강당만 건립되었다.
따라서 강당 건물인 독역재만 이건 대상이 되었다.
구계서원의 향사인물은 고려 말 유학자인 역동 우탁선생(1263∼1342)인데, 역동선생은 원(元)으로부터 정주학에 관한 서적을 들여와 독학으로 이를 체계화시켰다.
역동선생이 역학지선으로 숭앙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구계서원의 강당인 독역재는 석축대 위에 부정형 덤벙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건축하였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평 20평 규모의 건물로 팔작지붕을 덮었다.
이 건물은 중앙 대청 좌우익 협실로 구성되며 중앙대청은 정자 마루다.
좌우익 협실은 각 2칸으로 되어 있는데 좌우 양쪽의 구조가 같다. 동서재와 묘우, 그리고 진덕문은 2000년 12월에 중건된 것이다.
까치구멍집
까치구멍집은 1975년 6월에 안동군 월곡면 도목동에서 민속원으로 이건 복원되었다.
까치구멍집이라는 명칭은 가옥구조의 특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까치구멍집은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자연적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적응해 왔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까치구멍집이 주로 위치하는 경북 산간지역은 자연이 가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위험에 지극히 노출된 곳이다.
까치구멍집의 공간배치의 특이성은 가능한대로 가옥을 구성하는 모든 공간을 가옥내부의 주거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데서 비롯된다.
가옥구조를 이렇게 폐쇄적 공간으로 구성한 이유는 추위를 피하고 외부로부터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가옥구조가 이 정도로 밀폐되어 버리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환기의 문제이다.
까치구멍집에서는 매우 과학적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
공기의 환류작용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그것 중의 하나이다.
부엌과 외양간에서 나오는 더운 공기를 빼내기 위해서 지붕 용마루 양옆에 환기창을 뚫어 놓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까치집과 흡사하게 생겼다.
까치구멍집이라는 이름도 이 환기창의 모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입문과 대청의 문을 마주보게 위치시킨 것도 환기와 관련이 되어 있다.
쌍송정(雙松亭)
쌍송정은 1975년 봄에 경북 봉화군 북지리에서 현 위치로 옮겨왔다.
쌍송정의 주인은 조선조 중종 때 유학자였던 쌍송정 금혜(1399∼1484)이다.
금혜는 조선조 중종때 사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중생원시(中生員試)하고 학문을 즐겨하여 노후에는 봉화군 북지리에 복거하여 쌍송정을 구축하였다.
쌍송정은 창립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왔는데, 구기(舊記)가 없어 이전의 개·보수 상황은 살필 수 없지만 현존하고 있는 이광정이 쓴 향기(享記)를 보면 영조 23년(1747년)에 시역하여 2년에 걸쳐 보수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이후도 몇 차례 개·보수하였으나 건물의 구조나 양식은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어 조선조 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일휴당(日休堂)
일휴당은 원래 안동 예안 오천동에 있었던 건물로 1974년 봄에 현 위치로 옮겨왔다.
주인인 금응협(琴應夾)은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오천 7군자 중의 한 분으로 중종 21년(1526년)에 태어나서 선조 29년(1596년)에 돌아가신분이다.
금응협은 고려 명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금의(琴儀)의 후손으로 쌍송정의 주인인 금혜에게는 현손이 된다.
봉화 금씨는 대대로 학덕을 높이 쌓은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조에는 영남의 문벌가였다.
일휴당은 그 주인인 금응협에 의해 선조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전해내려 오는 당기(堂記) 또는 창립관계 문서가 없어 확실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일휴당(日休堂)" 현판은 건축할 당시의 것으로 퇴계이황이 제자인 금응협에게 써 준 것이라 한다.
이후 일휴당은 금씨 문중에서 관리되어 오다가 정조 11년(서기 1787년)에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일휴당은 이때 개축된 것이다.
경주맞배집
경주맞배집은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내에 형성된 취락지의 건물 중 하나로 1977년 5월에 현 위치로 이건해 왔다.
이 건물은 좌측으로부터, 퇴를 합한 넓은 부엌 1칸과 툇마루를 낸 안방, 대청, 건너방(사랑방)이 각 1칸 순으로 배열된 一字형 집이다.
그리고 부엌은 앞문과 뒷문이 판문으로 되어 있어 전후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경주 맞배집의 아름다움은 소박함과 간결한 맛에서 나온다.
홑처마에 처마의 끝만 가볍게 반전시킨 지붕이나 간결한 띠살문 형태의 방문이나 자연적인 굴곡을 그대로 살린 여러 가구의 모양새에서 맞배집의 아름다움이 표출된다.
경주 인왕동 고분군 이전복원지
여기에 이전 복원되어 있는 경주 인왕동 고분군은 1977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무덤들이다.
당시 조사에서는 항아리무덤 7기, 항아리돌덧널무덤 1기, 돌덧널무덤 9기, 돌무지 나무덧널무덤 10기 등 총 2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사례는 보기 드문 예라 이를 원상 그대로 복원하자는 의견이 많이 제기되었고, 현장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여서 이 중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적석목곽분 11기, 석곽분 8기를 영남대학교 안의 민속원에 이전 복원하게 된 것이다.
화산서당(花山書堂)
만회당 장경우가 1651년(효종 2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성곡리 화산 아래에 세운 건물이나, 사림의 여러 의견에 따라 헌종6년에 석적읍 중리로 옮겨 지었다.
이때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을 새로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 해체되어 강당과 양해청만 남아있었다.
2008년 12월 인동장씨 문중과 영남대학교가 화산서당 이건?복원을 위한 기증협약을 체결하고 2009년11월 영남대학교 민속촌내에 화산서당의 대문채와 강당을 준공하였다.
화산서당(花山書堂)
만회당 장경우가 1651년(효종 2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성곡리 화산 아래에 세운 건물이나, 사림의 여러 의견에 따라 헌종6년에 석적읍 중리로 옮겨 지었다.
이때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을 새로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 해체되어 강당과 양해청만 남아있었다.
2008년 12월 인동장씨 문중과 영남대학교가 화산서당 이건?복원을 위한 기증협약을 체결하고 2009년11월 영남대학교 민속촌내에 화산서당의 대문채와 강당을 준공하였다.
선본사 개요
팔공산 관봉(冠峯)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전통사찰로 소지왕 13년(491)에 극달대사(極達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인조 19년(1641)에 수총(秀聰)이 중창하였다.
1765년에 기성화상이 중수(重修)하였고, 운암화상이 삼수(三修), 낙허화상이 사수(四修), 월인화상이 오수(五修)하였다. 비구니 제희스님이 1985년에 극락전, 산신각, 요사체 등을 중수하였고, 1989년에는 종각과 요사체(僚舍體) 1동을 조성하였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431호인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인 삼층석탑이 있다.
선본사 사진
소재지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41
주요 문화재
- 선본사3층석탑(禪本寺3層石塔)
- 시대 : 통일신라
- 지정사항 : 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15호
- 지 정 일 : 1979. 1. 25
-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탑이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의 방형(方形)의 3층 탑신부(塔身部)를 건립하였는데, 상하기단에는 탱주(撑柱)와 우주(隅柱)가 새겨졌고, 탑신(塔身)에도 우주가 새겨져 있으며, 옥개석(屋蓋石)에는 5단 받침에 2단 괴임을 조각하였다.
1층 탑신에는 사리공(舍利孔)이 있었다.
도괴(倒壞)되었던 것을 1979년 복원하였다. 간결하고 장중한 아름다움을 지닌 큰 탑이다.
-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 시대 : 통일신라
- 지정사항 : 보물 제431호
- 지정일 : 196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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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관봉(冠峰:해발 850m)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대의 석불좌상이다.
머리는 소발(素髮)로 肉계가 뚜렷하며 상호(相好)는 둥글고 풍만하다.
결가부좌한 불상의 두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파악되며, 통견(通肩)한 법의는 유려한 의문(衣紋)으로 두 팔을 거쳐 양 무릎을 덮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미간에는 큼직한 백호(白毫)가 있다.
머리 위에는 두께 15㎝의 평평한 자연석 1매를 갓 모양으로 다듬어서 육계 위에 올려놓았는데 후대의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