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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세대가 함께 하는 노년
심플 라이프 桃姐(Tao jie, A Simple Life)
한 때 홍콩감독 쉬안화(허안화 許鞍華 An Hui, 1947년- )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나는 <반생연 半生緣 Eighteen Springs: Half Life Fate>(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절망한 적이 없다. 서극 Hark Tsui, 담가명 Patrick Tam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쉬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멜로드라마 세 편-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客途秋恨 객도추한 Autumnal Lament In Exile>(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맏며느리 중심으로 그린 <여인 사십 女人, 四十 Summer Snow 혹은 Woman, Forty>(1995), 매염방 Anita Mui의 연기로 영원히 기억될 <男人, 四十 남인 사십 July Rhapsody>(2002)만으로도 그가 영화 세상에 남긴 선물/성취는 이미 넘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쉬안화가 마지막 연출작으로 생각했던 2011년 작 <심플 라이프>는 평단과 대중의 높은 찬사를 얻어, 쉬안화로 하여금 은퇴 심경을 번복하게 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국내에는 제 1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심플 라이프>는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제48회 금마장영화제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수상 등 23개의 트로피와 9개 후보 지명을 기록했고, 2012년 84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의 홍콩 영화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2011년 홍콩 최고 화제, 흥행작이란 ‘씁쓸한’ 영광도 안았다.
‘씁쓸한’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은 진지함과 흥행성을 두루 안배할 수 있는 재능 많은 쉬안화가 은퇴를 결심했었고 <심플 라이프>의 성공 덕분에 다시 이를 번복했다는, 영화계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 그 첫째다. 두 번째로는 <심플 라이프>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현대 사회, 가정, 개인의 입장과 심정을 이보다 더 잘 관찰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즉 노년을 사색케 하는 <심플 라이프>와 같은 영화가 관객을 많이 모았다는 것은 그만큼 노후 문제가 나의 부모, 나의 문제로 다가왔다는 위기의 뜻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플 라이프>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절정도 극적 엔딩도 없는 담담/담백한 영화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한 일상 묘사에 머무는 심심하고 지루한, 소위 예술 영화인체하는 작품은 아니다. <객도추한> <여인 사십> <남인 사십>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의 삶, 인간관계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그러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옅은 수채화 같은 영화다. 겸손하고 진지한 현실 응시와 표현력이 영화의 미덕임을 확인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내놓는 허안화의 뚝심과 이 같은 소재에 제작비를 대는 홍콩 영화계의 인프라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심플 라이프>는 홍콩의 최고 스타 류더화(劉德華, Andy Lau, 유덕화)가 제작을 자처하고 시나리오에 감동받아 주연까지 요청한 작품이다. 홍콩 느와르의 청춘 아이콘에서 진지한 소품에 돈을 대는 제작자로 성숙한 류더화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윤발, 양조위, 여명, 양가휘 등 홍콩 남성 스타들은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데, 특히 1961년생인 류더화는 대학생으로 분해도 빠져들 만큼 늙는 티가 나지 않는다. 에어콘 수리 기사로 오인 받을 정도로 허름한 잠바와 배낭 차림을 고수하는 <심플 라이프>에서도, 노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콜드 워 寒戰 Cold War>(2012)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출연하는 등, 역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는 류더화와 같은 스타 제작자가 있어 홍콩 영화계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류더화는 <망향 投奔怒海 Boat People>(1982), <화룡만가 極道追踪 Zodiac Killers>(1991)로 쉬안화와 함께 한 바 있다.
<심플 라이프>는 <천녀유혼>시리즈와 <황비홍> 등을 제작한 홍콩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저 리가 직접 시나리오 원안 작업에 참여한 작품으로,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만을 가족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가 고령화 사회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혼자 홍콩에 남은 영화 프로듀서 로저 Roger Leung 량샤오 梁羅傑(류더화)는 잦은 중국 출장 등으로 바쁘게 산다. 그런 그를 돌보는 것은 60여 년 전 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 온 늙은 가정부 타오지에 桃姐/鍾春桃 Chung Chun To(예더셴 葉德閑 Deanie Ip)뿐.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타오지에는 로저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요양원을 고집한다. 자기 집안 식구를 4대째나 모셨으며 자신을 키워주기도 했던 타오지에를 보러 이따금 요양원을 찾는 로저와 양아들 노릇을 해주는 로저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느끼는 타오지에의 이심전심 마음의 교류. 그리고 두 사람 눈에 비추인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은 살아간다는 것,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을 사색케 한다.
출장에서 돌아와도 이렇다 할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타오지에가 자신의 식성에 맞추어 요리해주는 각종 해산물 요리와 우설 찜을 먹기만 하는 로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집안을 쓸고 닦는 타오지에를 늘 거기 있는 가스렌지 혹은 청소기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심한 성격, 즉 허드레 일꾼으로 오해받을 만큼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 등에서 기인할 뿐, 타오지에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이후 로저는 따뜻한 본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관절을 못 쓰게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저의 가족을 돌봐온 타오지에에겐 로저 가족과의 관계가 개인사의 전부다. 노인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온 타오지에가 그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녀가 평생 간직해온 것은 로저와 함께 찍은 옛날 흑백 사진(두 배우의 젊은 시절과 어린 시절 사진의 합성이라고 한다.), 로저가 아기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그리고 자신의 첫 월급봉투일 정도다.
함께 시부모를 봉양해준 타오지에를 병문안 하러 온 로저의 어머니는 로저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는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베풀었던 타오지에와 대조 된다. 즉 로저에게 있어 타오지에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어머니인 것이다. 이는 로저가 누이에게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아플 때 타오지에가 나를 돌봐주어 살아났는데, 이제 내가 그녀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누이는 오빠에게 “어린 시절 유독 오빠만 챙겼던 타오지에가 서운했어. 그러나 나도 타오지에가 키워주었으니 장례식 비용만큼은 내가 부담하게 해줘.”라고 한다.
이처럼 로저의 가족은 타오지에의 헌신을 마음 깊이 감사하며 그녀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로저는 타오지에가 퇴원해 살 집에서부터 요양병원 비용까지, 알아서 준비한다. 형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타오지에를 데려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거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발표회장에 타오지에를 초청하여 타오지에로 하여금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모자지간이나 다름없는 로저와 타오지에의 관계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병원 노인들과 직원들의 일상이다. 정초 연휴 때도 병원에 남아있는 노처녀 최 간호사(진해로 Qin Hailu 秦海璐).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 후 버림받았음에도 아들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서도 모시러 오는 딸. 깊은 병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러 오는 어머니는 병원비 걱정 끝에 말없이 사라진다. 타오지에에게 돈을 빌리곤 하는 노인의 에피소드도 가슴 뭉클하다. 빌린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저가 돈 빌려주기를 거절하자 타오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삽화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전 인생을 짐작할 수 있게 할 정도로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남긴다. 류더화와 예더센을 제외한 요양원 노인들은 비전문 연기자들이며, 요양병원 묘사는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유머와 페이소스가 곁들여진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더해진다.
커튼으로 가림막을 한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한 한 서민 요양병원 스케치는 <여인 사십>에서 여주인공 손여사의 이모와 이모부의 요양원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심플 라이프>는 <여인 사십>의 자매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소재나 묘사에 연관이 많으며,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단정한 화면구성 또한 그러하다.
1961년생인 류더화와 1947년 생인 예더센은 <법외정 The Unwritten Law>(1985)에서 모자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이래 여러 차례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바 있어, <심플 라이프>에서의 자연스런 연기가 가능했고 각종 연기상으로 보답 받았다. 1992년 공리 Gong Li가 <귀주이야기 THE STORY OF QIU JU>로 여우주연상을 탄 이래, 19년 만에 중국어권 여배우로 두 번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예더한에게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대런 아르노프스키 Darren Aronofsky는 "I can't believe how young and beautiful and sexy this woman is!"라는 찬사를 남겼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우정 출연도 <심플 라이프>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로저가 중국 출장에서 영화 일정을 의논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영화인들로는 <천녀유혼><황비홍> 시리즈의 서극 감독, <만추> <도화선> 등의 제작자 시남생, <80일간의 세계일주><의천도령기>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홍금보가 자신의 이름 그대로 출연했고, 요양병원 운영자로는 <초한지 – 천하대전> <무간도>등으로 유명한 배우 황추생이 애꾸눈으로 등장하며, 로저가 제작한 영화 시사회에서는 관금붕 Stanley Kwan 등을 볼 수 있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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