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감리회 조선선교회와 갤로웨이 감독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 선교사의 노력으로 조선 선교에 안착한 남감리회 조선선교회는 복음 전파에 박차를 가했다. 1897년 12월 8일에 리드 선교사의 사회로 남감리회 제1회 조선선교회가 개최되었다. 그 이후 윌슨 감독에 의해서 제2회와 제4회 조선선교회가 1898년과 1900년에 각각 개최되었다. 윌슨 감독에 관해서는 ‘남감리회 시작과 읠슨 감독’편을 참고하자. 1899년 제3회 조선선교회는 일본 주재 선교사 램버스(Water Russell Lambuth) 목사가 주관했다. 램버스 목사는 1910년에 감독으로 선출되어 1921년 제1회 만주선교연회를 주관한다. 그에 관해서는 만주선교연회를 다룰 때 살펴보기로 하겠다. 남감리회는 1897년에 제1회 조선선교회를 개최한 이래 1913년까지 총 17회 개최하였다. 그중 감독이 10회, 주재 선교사가 7회를 이끌었다 초창기에는 감독보다는 선교사가 조선교회를 이끌 때가 더 많았다. 제4회 윌슨 감독 이후 제5회는 다시 리드 선교사가 이 회를 주관했다. 아직은 규모가 크지 않은 조선선교회에 매해마다 감독이 내한하여 선교회를 주관하기에는 여의치 않은 점이 많았다. 그러나 1902년에 개최된 제6회 조선선교회는 감독이 내한하여 리드 선교사가 이전에 거주하던 주택에서 선교회를 개최하였으니 그가 바로 갤로웨이 감독이다.
갤로웨이(Charles Betts Galloway Jr.) 감독은 1849년 9월 1일 미시시피(Mississippi)주 코시우스코(Kosciusko)에서 성공적인 의사였던 아버지 찰스(Charles Betts Galloway)와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Adelaide Dinkins, 舊姓) 슬하에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0년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1살의 갤로웨이는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칼로 총검을 만들고 감히 미시시피의 땅을 침범한 양키를 산산조각 내겠다고 결심했다. 1863년 그의 아버지가 더 나은 의료활동할 기회가 주어지는 바람에 가족이 모두는 미시시피주 캔톤(Canton)으로 이사했다. 1866년 1월 3일 갤로웨이는 미시시피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공립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 반 학생들 상당수가 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16세의 갤로웨이가 제일 연소했다. 한 친구는 갤로웨이가 학급에서 늘 앞자리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델타 사이(Delta Psi, 성 안토니홀)라는 사회 및 문학 단체에서 활동했다. 첫 학기 때 갤로웨이는 한 동급생의 방에서 열린 기도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그가 종교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캔톤에 있을 때 그는 감리교 목사와 친하게 만나 자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고는 그 후 목사가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1868년 6월에 공립학교 졸업하고 갤러웨이는 남감리교와 설교자 자격을 얻었지만 안수받게된 12월 연회 개최까지는 샤론 대학 예비 부서에서 청년들을 가르치고 목회를 지도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한 신문에 갤로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비록 18세밖에 안 되었지만 갤로웨이는 연설가요 설교가로서의 능력이 그를 단번에 유명하게 했다.’ 갤로웨이는 안수받기 전이지만 이 대학에서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갤로웨이는 12월 8일~15일까지 개최된 미시시피 연회에서 집사목사(준회원)로 안수받고 야주 지방(Yazoo District) 블랙학 구역(Black Hawk Circuit)에 파송되어 정식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1871년에 장로목사(정회원)로 안수를 받고는 빅스버그 지방(Vicksburg District) 남워렌(South Warren) 지역으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발생된 공석을 채우기 위하여 그는 캔톤으로 보내졌고 연말이 되어서 다시 남웨렌 지방으로 복귀했다. 이듬해 1872년~1873년까지 캔톤에서, 1873년 12월 잭슨(Jackson)에서, 1877년~1881년까지 4년간 빅스버그에 있는 크래우포드 가(街 Crawford Street)교회에서 목회했다. 이곳에서는 금주 운동의 옹호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881년에 갤러웨이는 다시 잭슨으로 돌아와서 목회하고 있을 때 1882년 5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남감리회 총회에서 알라바마, 알칸사스, 루이지애나 및 미시시피에서 남감리교 회의가 후원하는 주간지 뉴올리언스 크리스챤 어드보케이트(the New Orleans Christian Advocate)의 편집자로 선출되었다. 이 일은 목회와 병행하였다. 2년 동안 두 가지 일을 감당하면서 갤로웨이는 힘들었다. 목회자와 편집자로서의 두 개의 업무를 원활하게 감당하기 위해서 갤로웨이는 현재 잭슨에서 신문사 본부가 있는 뉴올리언스로 옮겨야 했다. 1884년 갤로웨이는 크리스찬 어드보케이트 본사에 가까운 부룩크해븐(Brookhaven)에서 목회를 하게 되어 본사와 오가는 시간을 훨씬 줄여서 임무가 더 수월해져서 주간지 편집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한 지역에서 도덕적, 종교적인 삶을 포함한 질문들에 대해서 집중분석도 가능했다. 그는 교회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여행 및 국정에 관해서도 기고했다. 이때 그는 두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금지 핸드북(The Prohibition Handbook)》, 《리누스 파커 감독(Bishop Linus Parker)의 전기》가 그것이다. 1884년 5월 15일 미시시피 언론 협회에서 초청받고 연설했다. 갤로웨이는 감독으로 선출되기 전 1882년 6월~1886년 5월까지 4년 동안 뉴올리언즈 크리스챤 어드보케이트 편집자로 활동했다.
1886년 5월 갤로웨이는 그의 나이 36세 되던 해 남감리회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감독이 된 이후 그는 1886년 10월 20일~25일까지 인디안 지역(현 오클라호마)의 유파울라(Eufaula)에서 인디안선교연회(Indian Mission Conference)를 소집했고, 12월에는 알칸사스와 텍사스에서 연회를 개최했다. 1887년 6월 18개 부족의 대표를 포함한 국제 인도위원회를 위해 인디안 지역으로 돌아와서 부족들에 대해 따뜻하고 정중하게 기사를 작성할 정도로 그 부족단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키오와(Kiowa) 족장인 ‘가련한 버팔로’(Poor Buffalo)’의 연설을 듣고 자기 생애 이런 감명적인 연설은 들은 적이 없다며 기록했다.
갤로웨이 감독은 23년 동안 123개의 연회를 주재했다. 미국 전역에서 설교했으며 선교 활동 지역인 사우디아라비아, 실론(현재 스리랑카), 중국, 쿠바, 이집트, 영국, 프랑스, 그리스, 홍콩, 인도, 이탈리아, 일본, 요르단, 한국, 멕시코, 팔레스타인,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때때로 그는 한 나라에서 여러 달을 머물렀고 연회를 개최했다. 어느 나라에서는 체류 기간이 짧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교파에 상관없이 항상 그 선교지역을 방문하곤 했다. 여행할 때는 미국에서 출판되고 널리 읽혀진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설교했다. 특별히 이전에 농장이었던 곳에 새로운 흑인 교회 봉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흑인 교회와 학교를 세워야 한다면서 백인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호소했다. 분리주의자였지만 그는 흑인 학교에서도 백인을 가르치라고 촉구했다.
갤로웨이 감독은 대학에서의 회심 경험 때문에 대학의 종교 교육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889년 갤로웨이 감독은 연회에서 밀리새프(Millsaps)라고 명칭한 새 대학교설립을 위한 발의도 하였다. 루벤 웹스터 밀리새프(Reuben Webster Millsaps)는 미시시피주 잭슨에 감리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 부지를 내놓았고, 5만 달러에 달하는 놀랄만한 선물도 지원했다. 갤로웨이 감독 역시 거의 5만 달러에 상응하는 금액을 모금했다. 그는 남은 생애 밀리새프 대학의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00년경 갤러웨이 감독은 남감리회 교육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아칸소(Arkansas)의 교인들은 감리교 여자대학 설립을 원하자 갤로웨이 감독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칸소에 감리교 여자대학이 설립되었다. 은 대학설립에 많은 노역을 했다. 이 교회가 운영하는 여성 대학 설립에 관심을 표명했을 때 이 프로젝트를 전적으로뿐만 아니라 아칸소에 헨드릭스 대학(Hendrix College)과 헨더슨-브라운 대학(Henderson-Brown College) 설립에도 영향을 끼쳤고 후에는 밴더빌트 대학 이사장도 역임했다. 또한 존 슬래터 기금(John F. Slater Fund)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위한 장학 기금 마련에도 수고했다.
이처럼 갤로웨이 감독은 적극적인 교육가업을 전개하여 1882년 6월 17일 미시시피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를, 1894년 노스웨스턴(Northwestern University)와 1904년 튜레인 대학교(Tulane University)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889년에는 아칸소의 감리교 여자대학은 갤로웨이 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고 1933년 헨드릭스 대학(Hendrix College)과 합병될 때까지 그 이름으로 유지했다. 콘웨이, 아칸소의 헨드릭스 대학은 여자 기숙사 이름을 갤로웨이로 명명했다. 갤러웨이 감독이 별세했을 때 장례식 당일 미시시피주에 있는 연방, 주, 카운티 및 지방 정부의 모든 지부는 문을 닫고 그를 추모했다.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초등학교와 교회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이처럼 갤로웨이가 지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갤로웨이는 13세와 14세 때 미래의 아내 해리어트(Harriet E. Willis)와 약혼했다. 그러나 그들은 20세 생일에 1869년 9월 1일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리새프 대학(Millsaps Collage)에 졸업하고 잭슨에서 의사가 된 아들 갤로웨이(E. S. Galloway)를 낳았다. 그는 나중에 미시시피주 보건위원회의 장관이 되었다. 갤로웨이는 감독이 되고서 미 남부 전역의 지역 사회로부터 제안을 받았지만 1889년에 잭슨에 본부를 설치했다. 1902년 갤로웨이는 1894년 첫 여행 이후 8년 만에 아내와 함께 떠난 두 번째 아시아 여행길에서 조선에 들어와 제6회 조선선교회를 주재했다. 그 후 1909년 5월 12일에 갤로웨이는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그의 집에서 폐렴과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브라이트 병에도 걸렸었다. 조지아주 잭슨제일감리교회에서 워렌 애킨 캔들러(Warren Akin Candler) 감독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른 후 그린우드 묘지(Greenwood Cemetery)에 묻혔다.
갤러웨이는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금지 핸드북》(잭슨:미시시피주 금지 집행위원회, 1886), 《리누스 파커 감독의 삶과 글쓰기》(내쉬빌:남감리회 출판사, 1886), 《글로브 구역》(내쉬빌:남감리회 출판사, 1895), 《현대 선교 : 그들의 증거적 가치》(내쉬빌:남감리회 출판사, 1896), 《저명한 감리교인:한 권의 12권의 소책자》(내쉬빌:남감리회 출판사, 1897), 《미국 연방의 기독교 또는 이 나라를 만드는 기독교의 영향》(내쉬빌:남감리회 출판사, 1898), 《남부와 흑인:1904년 4월 26일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열린 교육을 위한 제7차 연회 시 행한 연설》(뉴욕:남부교육위원회, 1904), 제퍼슨 데이비스의 《사법 견적》 내용 중 “1908년 6월 3일 미시시피 대학의 갤로웨이 감독이 행한 설교”(미시시피 대학의 게시판, 시리즈 VI, 부록 No.3, 1908), 유고작《위대한 사람들과 위대한 운동:한 권의 설교》(내쉬빌:남감리회 출판사, 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