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 강동욱 기자가 쓴 [매당 이수안] 진주시 대곡면 마진리는 재령이씨(載寧李氏)들의 집성촌이다. 고려의 신하로서 지조를 지켰던 모은(茅隱) 이오(李午)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옛날 농사가 잘되는 곳이고 마을 앞에 강나루가 있다 하여 마진(麻津)이라고 이름하였다. 일찍이 학문을 숭상해온 마을답게 한말까지 글이 떨어지지 않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 출신 선비를 찾아 남강을 따라 마진마을을 찾았다. 아직도 선비의 유풍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마을 곳곳에 있는 많은 재실(齋室)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매당(梅堂) 이수안(李壽安). 그는 한말 대학자 면우 곽종석의 제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파리장서 서명인으로 나라의 광복을 간절히 바랐던 이 마을 출신 선비이다. 우선 매당의 유풍이 깃든 매호서당(梅湖書堂)을 찾았다. 석정 하용문이 쓴 기문에 “회봉 선생이 일찍이 선생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옹을 자주 만나 스스로 옹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여겼으나, 옹의 문집을 보고 비로소 전날 알았던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았다. 라고 했다. 회봉선생의 말을 통해 볼때 선생은 남에게 알리기를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이미 아름다운 덕을 가졌으나 또한 정학(正學)으로 정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회봉 하겸진이 매당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하는 내용이다. 매당은 1859년 마호(麻湖)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재령이씨(載寧李氏)로 모은 이오의 15세손이다. 어릴때 부터 자질이 남달랐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으나 학업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끼니를 걱정하면 곧 이르기를, 어머니가 계시면 배는 자연히 부르게 된다고 하였으니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학업에 독실하였으므로 문리(文理)는 일취월장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마을의 선비들 또한 기대가 매우 컸다. 23세 때 모친의 명으로 중부(仲父) 소파공(蘇坡公) 희곤(熙坤)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매당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양부(養父)와 생모(生母)를 봉양하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학업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안일을 돌보면서 틈만 있으면 당대 석학인 후산(后山) 허유(許愈),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을 두루 방문하여 학문을 익혔다. 38세 때 도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함양의 노응규(盧應奎) 또한 의병을 이끌고 진주에 주둔하게 되었다. 노 의병장은 매당을 참모로 삼고자 초청했으나 여의치 않아 사양을 했다. 40세 때는 지리산 자락 덕산으로 가서 평소에 숭모하던 남명선생 묘소를 배알하고, 41세되던 해는 면우선생을 월아산(月牙山)으로 가서 뵙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매당은 이로부터 해마다 면우가 머물던 가야산 밑 다전(茶田)을 찾아 학문을 익혔으며, 배우기를 일생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또 44세 때에는 영해(寧海) 지방을 찾아 존재(存齋)·갈암(葛菴)의 유허지를 돌아보고 집안 사람들을 두루 만나 화목의 정을 나누었으며 돌아오는 길에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참배하였다. 강좌지역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남사(南沙)로 이주하여 문을 닫고 독서를 하면서 틈틈이 인근에 살았던 사촌(沙村) 박규호(朴圭浩),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 극재(克齋) 하헌진(河憲鎭),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등과 자주 왕래하며 학문을 논의하였다. 나라가 망하는 경술국치를 당해서는 비통한 나머지 두문불출하고 글을 지어 벽에 걸기를, “欲死無地하고 欲生非時라. 惟我心在를 惟天翁知라(죽고자 하나 그 곳이 없고, 살고자 하나 그 때가 아니다. 오직 내 마음 가짐을, 아는 이 하늘 뿐)” 이라 하였으니 비장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로부터 왜적의 강압에 항거하면서 마음 속으로 망명을 결심하고 큰 아들인 정산(晶山)에게 명하여 먼저 중국에 가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하였다. 정산은 그 곳에 거주하고 있던 대계 이승희를 찾아가 앞으로 농사 짓고 살 수 있는 곳을 알아보고 돌아왔으나 때마침 뜻하지 않게수해를 입었고, 대계 또한 세상을 떠나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는 수 없이 얼마 뒤에 진주 서쪽 운곡(雲谷)의 단포(舟浦)로 이사를 하여 옥산자락에 초옥을 짓고 은둔하니, 이 때가 1918년 여름이다. 이듬해 고종 인산일에 삼일 만세의거가 일어나자 매당은 곧 광복이 될 것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였으며, 이어 스승인 면우 곽종석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전국유림대표(全國儒林代表)를 거느리고 독립 호소문을 보내게 되자, 매당은 솔선하여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큰아들 정산이 심산 김창숙과 함께 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떠날 때, 임무 완수를 위해 근엄하게 아들을 타일렀는데 때마침 저지하는 자의 방해로 아들인 정산은 떠나지 못하고 심산만이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얼마후 파리장서 일로 대구옥에 복역중이던 면우선생이 6월에 병보석되어 8월에에 세상을 떠났다. 유림들이 전국에서 운집하여 장례를 치를 때 매당은 회봉과 함께 호상를 맡아 장례를 관장하였으니, 그 인품의 탁월함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몇해 후에는 다시 원계(元溪)로 이주하여 후학양성에 전념하였고, 다시 겸재 선생(謙齋先生)의 모한재(慕寒齋)로 옮겨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 정진에 힘쓰다가 1929년 남사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하니, 향년 71세이다. 매당은 일찍이 경설(經說)을 지어 칠서(七書)의 주해(註解)를 완성하고 경서의 깊은 뜻를 철투철미하게 분석하여 마음에 체득하고, 그런 뒤에 후학들에게 전수하였으니 실로 교육자의 사표가 될만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회봉 하겸진은 ‘매당집(梅堂集)’ 서문에 이르기를“매당이 경학에 있어 그 각의(刻意)하여 독조(獨造)함이 진절(眞切)한데도 오히려 세상사람들이 학자들의 설과 같지 않다 하여 비웃으니 어찌 슬퍼할 일이 아닌가?” 하였고, 다시 이르기를, “매당의 논설이 선현(先賢)과 다른 것이 아니라 장차 그 의문을 발하여 정곡을 구하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대개 성리학의 범위에서 한마디 다른 학설도 제기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관습을 깨뜨리고자 한 매당의 학문적 폭을 알 수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77년에 옛날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 제자들이 선생의 유풍을 잊을수 없다 하여 장손(長孫) 일해(一海)씨 및 여러 후손들과 힘을 합친 끝에 마호(麻湖)의 옛 유지에 매호서당(梅湖書堂)을 건립하고 매년 중춘(仲春)에 채례를 거행하며 그의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 기자가 마진마을을 찾았을 때는 매호서당을 아는 사람 조차 드물었다. 물어 찾아간 매호서당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 끊긴지 오래되어 인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한말 대학자인 면우 곽종석의 제자로 파리장서에 서명을 해 학자로서, 또 애국지사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강우지역 선비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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