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찰스 본명 : Ray Charles Robinson
그는 그래미상을 다수 수상한 R&B 음악의 거장이다. 대공황 시대인 1930년 9월 23일 미국의 남부지역 조지아주(州) 알바니에서 태어났다. 교회의 찬송가와 세 살 때 이웃집 카페 주인의 권유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놀란 소년이 어쩔 줄 모르며 엄마에게 뛰어갔을 때 동생은 튜브로 만든 조그만 풀장 안에서 익사했다. 형이라고는 해도 고작 한 살 위인 다섯 살에 불과했던 소년은 동생이 물에 빠져 죽는데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적인 경험을 한 이후 이때 생긴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한, 그리고 예민한 청각은 이후 그의 음악과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의사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아이가 곧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선고했다. 어머니는 영원한 암흑 속을 헤매게 될 아들의 미래를 대비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물건들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인한 어머니는 아들의 홀로서기를 위해 청각을 개발하는데 집중을 했으며 아들은 시각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갈 준비를 하며 일곱 살 때 소년은 결국 완전히 실명했다.
피아노반의 정원 초과로 클라리넷반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그때 클래식과 컨트리 뮤직, 재즈와 가스펠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의 음악 작업을 변절이라고 불렀지만 레이 찰스는 이때부터 모든 음악이 자신의 뿌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수리공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공장 잡역부로 일했던 어머니마저 사고로 잃으면서 소년은 15세에 천애 고아가 됐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15세 이후로는 한 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레이 찰스는 블루스 밴드를 따라 투어를 다니며 미국 전역을 방랑했다. 밴드에서 배운 음악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초월했다. 알토 색소폰, 트럼펫, 클라리넷, 오르간 등에 손을 대며 악기마다의 테크닉과 관련 곡들을 섭렵해 음악적 지평을 넓혀가며 18세에 드디어 연주자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됐다. 그때 본명 레이 찰스 로빈슨에서 로빈슨이라는 성을 떼어냈다. 사람들이 자신을 당시 유명했던 프로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과 혼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탁월한 음악적 감각과 한이 녹아 든 깊고 따뜻한 목소리는 이후 솔과 컨트리, 웨스턴, 재즈, 블루스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인정을 받는다. 흑인이며 맹인이었던 레이 찰스는 암흑 속에서 음악이라는 자신만의 빛을 찾아낸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많은 이들이 레이 찰스를 존경했다. 그가 흑인과 맹인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아티스트는 레이 찰스 말고도 존재했다. 수십 년간 미국 연예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레이 찰스는 미국 음악계에서 누구보다도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누구와도 구분된다. 흑인들의 희로애락을 대변했던 소울 뮤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업적은 레이 찰스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리듬 앤드 블루스를 가스펠과 결합시켜 소울 뮤직의 혁신을 꾀한 그의 대담함은 확실히 남달랐다. 1950년대 히트곡인 'I’ve Got a Woman'과 'What'd I Say'는 그야말로 화끈했다. 이 곡들은 얌전한 신도들이 얼굴을 붉히며 들고 일어날 만큼 리듬과 가사에서 교회 음악의 전통과 형식을 파괴하며 소울 음악의 효시로 자리 잡았다. 레이 찰스는 험난했던 자기 삶의 모든 순간을 음악에 담으며 즐겼다. 1960년대 스타의 반열에 올라 전성기를 열어간 이후로도 그가 만들어낸 팝 음악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숱하게 많다. 1962년 레이 찰스는 백인 가수들의 전유물이던 컨트리와 웨스턴을 새롭게 해석한 앨범 ‘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을 발표하며 자신의 명성을 시험대에 올렸다.
흑인 가수가 컨트리 음악을 리메이크하다니. 장르는 구분돼야 한다고 믿는 순수주의자들은 물론 그의 팬들과 안티팬들까지 모두 분노했다. 음악 관계자들은 “무리하고 유치한 시도”라고 질타했다. 주변에선 레이 찰스의 리듬 앤드 블루스 팬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당시 1백만 장이 넘게 팔리는 히트 앨범이 됐다. 앨범의 대표곡 ‘I Can’t Stop Loving You’는 라디오를 틀 때마다 울려나왔다.
50년간 각종 음악 차트의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250번에 이르는 레코딩 작업을 했다. 레이 찰스는 '소울 음악의 대부'였고, 영혼의 목소리를 지녔던 기적의 인물이었다. 그가 평생 받은 그래미 트로피만 13개에 이르며 베스트 셀링 차트에는 76개의 싱글 앨범을 올려놓았다. 레이 찰스는 천재였지만 단명은커녕 오래 살았다. 리듬 앤드 블루스, 컨트리 팝, 재즈, 로큰롤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넘쳐났기 때문일까. 그만큼 숱한 사건 사고도 저질렀다. 인종 차별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했지만 마약의 유혹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위대한 예술가는 17년에 걸친 헤로인 중독으로 세 번에 걸쳐 구속됐고, 정신병원에도 수감됐다. 마약은 외로움과 고통을 잊게 해줬지만 결국은 가정생활과 음악 인생에 치명적이라 할 정도로 해로운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음악이 없었다면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1978년 펴낸 자서전 <브러더 레이>에서 레이 찰스는 "나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다. 음악은 내 피처럼 나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 일곱 명의 여자를 만났고 두 번 결혼 후 이혼했으며 공식적으로만 아홉 명의 자녀를 낳은 열정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적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와는 친구였고 1960년 흑백차별에 항의해 콘서트를 취소한 레이 찰스에 평생 공연중지를 선언한 조지아주가 1979년 "사죄한다"며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를 조지아주 공식 주(州)노래로 선정했고,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일부 공연장에서 파격적으로 공연을 취소해 금전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시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으며 동시에 흑인 아이들의 교육 등을 위해 2천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기도 했다.
열세 번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리듬 앤드 블루스, 소울의 거장 레이 찰스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가슴에 끌어안았고 험난한 인생사를 지닌 어떤 이들보다도 폭넓은 삶을 살았다. 깊은 울림을 지닌 그의 보컬은 특별함 이상의 특별함을 지닌 ‘영혼의 소리’로 평가받았다. 그의 음악적 감성, 그의 레코딩 작업은 숱한 연주자들에게 천재가 주는 감흥이 무엇인지 일깨웠다. 삶 자체가 천재적인 존재, 그것이 레이 찰스였다.
말년의 레이 찰스는 행복했다. 비벌리힐스에 대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LA의 스튜디오에서는 그와 작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는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자신을 연기할 배우 제이미 폭스를 시험했다. 직접 곡을 연주하고 폭스가 따라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았다. 자신의 행동과 버릇을 따라 하며 연주를 한 폭스를 흡족해 했던 찰스는 영화 <레이>가 막 완성된 시기, 세상을 떠났다. 지독히도 절묘한 타이밍이랄까. 2004년 6월 10일 레이 찰스는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급성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인 2004년 3월 완성된 유작 앨범 ‘Genius Love Company'는 또다시 히트 앨범이 됐다. BB 킹, 엘튼 존, 윌리 닐슨, 보니 레이트, 벤 모리슨, 다이앤 리브스, 노라 존스 등 유명 뮤지션들이 참여한 마지막 유작 앨범에서 그는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이 앨범은 2004년 영화 <레이>와 함께 ’레이‘ 붐을 일으키는 데도 톡톡히 기여했다.
'그는 역시 진정한 뮤지션이었다.' _Ray Charles I've Got A Woman - Ray Char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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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OVE is Kang Soo Jeong 원문보기 글쓴이: 불량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