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남긴다 외 2편
강순희
초등학교 교감 퇴임
2018《수필춘추》등단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
대경상록수필창작교실 회원
“발로 뛰며 사람을 남긴다.”
동네를 지나는데 이삿짐 트럭에 붙어있는 글귀가 발길을 잡았다.
‘사람을 남긴다.’라는 말이 묵직하게 와 닿는 순간, 태백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침노을이 곱게 물든 시각, 메시지가 왔다. 가이드는 차번호, 타는 곳은 물론 버스 사진까지 보내주었다. ‘기차 타고 협곡 여행’과 ‘태백 해바라기 축제’를 향해 버스는 출발했다. 가이드는 ‘아저씨’나 ‘아지야’라고 부르지 말라며 재미있게 자신을 소개했다. 목소리가 좋고 특유의 억양도 어색하지 않고 세련미가 느껴졌다. 미스터 리 ‘가이드님’은 가는 곳마다 버스에 타야 할 시간을 메시지로 알려주었고 여행객들의 사진도 멋있게 찍어주었다.
버스가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배롱나무는 여름을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수줍게 서 있었다. 버스는 봉화군 분천역에서 멈추었다. 분천역 산타마을은 눈발만 날리지 않을 뿐, 8월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자그마한 역사에는 ‘분천’이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는 빨간 바탕에 하얀 글씨로 ‘Zermatt’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안내판을 보고 2013년 백두대간 분천역과 스위스 알프스의 체르마트 기차역이 자매결연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난로와 나무 벤치가 놓여 있고 창문에는 양 갈래 머리 같은 커튼이 달려 있었다. 대합실 밖에도 다섯 가지 색으로 알록달록 색칠한 나무벤치와 빨간 우체통이 놓여 있었다.
무궁화호로 달리는 협곡 여행을 위해 강릉행 열차에 올랐다. 좁은 철로를 따라 기차는 구불구불 달려 나갔다. 덜컹거리는 열차 레일 소리와 함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기암괴석 위에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고 절벽 아래로 맑은 물이 굽이굽이 흘러갔다. 기차가 짧은 터널을 들락거릴 때마다 건너편의 푸른 산들은 숨바꼭질하듯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양원, 승부, 석포역 지나며 40여분을 달려 철암역에서 내렸다.
철암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구문소로 이동했다. 구문소는 낙동강 상류 황지천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돌문을 만들고 깊은 연못을 이룬 곳이라고 한다. 구문소 옆 도로에 일제강점기에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자연석을 뚫어 만들었다는 터널이 있었다. 나제통문을 닮은 그곳을 지나 언덕 위 계곡으로 들어섰다. 회색 바위들이 층층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비췻빛 계곡물은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갔다. 여기저기 서 있는 큰 소나무와 야생화가 거친 계곡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태백 고생대 자연사박물관이 가까이 있었지만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하루 종일 머물며 천천히 보고 싶은 신비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기대하던 해바라기 축제장에 도착했다. 태백 고원 자생식물원은 삼수령 아래 해발 800~900m 높이의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아홉 마리 소가 누운 형상이라 하여 ‘구와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으로 해바라기 꽃밭은 평지에 2만 평과 언덕 너머로 3만 평에 걸쳐 펼쳐져 있다고 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고 따가운 오후의 햇살에 더위를 느꼈다. 꽃밭 가운데를 지나는 산책로를 피해 그늘이 있는 갓길을 걷기로 했다. 길 가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백일홍이 가득 심어져 있고 산제비나비가 훨훨 날아들었다. 해바라기는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고원은 잣나무와 낙엽송, 해바라기의 큰 잎사귀 등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넘쳤다. 활짝 핀 해바라기 꽃의 노란 물결은 그 초록빛에 다소 묻혀버린 느낌이었다.
산책을 하는데 계속 노랫소리가 들렸다. 입구에 들어오면서 보았던 통기타 가수가 부르는 편안하고 익숙한 음색의 노래였다. 해바라기 꽃밭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는 막 노래를 끝내고 있었다. 무대 앞쪽에 ‘심장병 어린이 돕기’라고 써 놓은 하얀 상자가 눈에 띄었다. 성금을 내려고 갔다가 얼떨결에 만원을 내고 앞에 놓여있는 앨범 CD만 들고 돌아섰다. 돌아와 생각하니 성금을 따로 내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노래 잘하는 그는 오지의 축제장을 돌며 오늘도 작은 음악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여행의 마지막 장소인 태백시 삼수동 금대봉 산기슭의 용연동굴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동굴 입구 광장까지 1.1km 구간을 무궤도 용연 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공기도 맑고 산허리를 돌아 오르는 기분은 상쾌했다.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 수더분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용연동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동굴이라고 소개하며 안전모 끈을 조여 머리에 맞게 쓰고, 휴대폰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옷 지퍼를 꼭 채우라고 했다.
“겸손한 자세로 보세요.”하며 구부리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굴 내부의 화려한 종유석을 본 후 내려가기 위해 세 칸의 용연 열차에 사람들이 타고 출발을 기다렸다. 그녀는 ‘우리’ 용연 동굴을 찾아주셔서 고맙다며 열차가 떠날 때까지 허리 굽혀 연신 인사를 했다. 태백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가득하며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루하루 초록빛이 짙어가는 들판은 결실을 향해 달려가고 하늘은 넓은 가슴에 하얀 구름을 띄웠다. 여름은 풍경이 완성되는 계절이 아닐까? 들판과 함께 바라보는 하늘의 구름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청소하는 일품 노동자입니다. 화장실이 막히면 일이 밀려서 일당을 못 버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미안합니다. 평화로우시길 빕니다.”
축제장 화장실에 이런 글을 붙여 놓고 일하는, 이름 모를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여행은 풍경과 함께 사람을 남긴다.
골목길 여행
강순희
대구 중구 골목 투어 근대로(路)의 여행 2코스는 근대문화골목이다.
청라언덕 선교사 주택을 출발하여 계산 성당, 이상화 ․ 서상돈 고택, 약령시, 진골목을 지나 화교협회(소학교)에 이르는 1.64km 길이다. 황사가 심하던 봄날, 도서관의 인문학 수업 과정 중에 일행과 함께 탐방을 다녀왔으나 하루 만에 보고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그 뒤 시간이 날 때마다 가끔 들러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5코스까지 있지만 특히 2코스에는 많은 근대 건축물과 이야기를 품고 있어 늘 가보고 싶은 곳이다.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얼마 전, 3.1 만세운동길 90계단을 오르고 싶어서 늦은 오후에 그곳으로 향했다.
90계단 아래 섰다. 올려다보니 하늘에 맞닿아 있는 것처럼 계단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계단은 가운데에 경사로가 있어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랐다. 계단 왼쪽을 따라 ‘3.1 만세운동길’이라는 글씨가 적힌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다. 봄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는데……. 청사초롱 모양의 키 낮은 가로등도 깃발 아래 줄지어 서 있었다. 사진 액자들은 주로 계단의 오른쪽 벽에 걸려 있었다. 계산 성당과 대구 전경, 대구고보, 계성학교에서 본 서문시장, 신명학교, 남성정 예배당(현, 제일교회) 등 만세운동과 관련된 사람들과 20세기 초 대구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다.
3.1 운동 당시 청라언덕 주변은 솔밭이어서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숨기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큰 장날인 3월 8일, 계성, 신명, 대구고보 학생들이 서문시장 큰 장터에 모이기 위해 달려갔다. 남학생은 장에 가는 복장으로 여학생은 빨래하러 가는 모습이었다. 여학생들은 ‘조끼허리’를 달아서 흘러내리는 않는 치마를 이때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이 길을 오르내리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90계단을 오르면 청라언덕에 이른다. 이 길은 선교사의 길이기도 하다.
청라언덕은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언덕이어서 동산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사들이 교회, 학교, 병원을 설립하고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명명한 곳이다. 선교사들은 원활한 선교활동을 위해 동산을 구입하고 12채의 집을 지었다. 보존 상태가 좋은 3채가 남아서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청라언덕의 가운데를 지나는 내리막 길 끝에는 터널 형태의 문이 있다. 한쪽 벽에는 독립 만세를 외치는 선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일일이 그림을 그린 후 구워서 만든 타일로 모자이크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 다른 쪽은 독립유공자의 벽이다. 타일 하나하나에 독립유공자의 이름을 새긴 후 밀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이름은 지금도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90계단을 통해 청라언덕으로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챔니스 주택이 있다. 챔니스 주택은 1910년에 지어졌는데 안산암의 성돌을 초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집이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방갈로 형태의 건축물이다. ‘각시탈’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라고 한다. 대구읍성이 허물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돌이 대부분 근대건축물의 기초 석으로 쓰이면서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는 커다란 느릅나무가 서 있었다. 태풍 때 쓰러진 나무를 지지대를 받쳐서 살려낸 것이라고 한다. 챔니스 주택은 의료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고 의료선교사인 존슨 가족이 사용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이 피아노가 부산항에서 낙동강 나룻배로 옮겨 1901년 사문진 선착장을 통해 들어 온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피아노라고 한다.
블레어 주택은 최초로 지어진 선교사 주택인데 청라언덕의 가장 남쪽 경사진 땅 위에 있다. 블레어 주택에는 성돌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교육, 역사박물관이며 일층만 개방하고 있다. 지지대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집 앞의 향나무가 인고의 세월을 담고 있었다.
챔니스 주택과 블레어 주택 사이에 ‘동무생각’ 노래비가 있다. 동무생각은 박태준이 곡을 짓고 친구인 이은상이 노랫말을 붙인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이다. 이곳은 박태준의 추억이 서린 푸른 담쟁이덩굴이 휘감겨 있던 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짝사랑했던 신명학교의 여학생이다. 지금도 청라언덕에는 담쟁이가 곳곳에 남아있지만 선교사 주택의 벽에는 담쟁이가 거의 없었다.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담쟁이를 제거했다는 이야기를 문화 관광 해설사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동산의료원 방향으로 제일교회의 웅장한 건물 앞쪽에 스윗즈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스윗즈 주택은 대구의 선교사 주택 중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 191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대구 읍성이 허물어지면서 나온 안산암의 성돌을 주춧돌로 하여 지은 이층 집이다.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한옥 기와를 올려 이채롭다. 창 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곱고 투명한 빛은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현재 선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윗즈 선교사는 독신여성으로 선교활동을 하다 40대 후반에 사망했다고 한다. 청라언덕 은혜의 정원에는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의 묘지가 있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머나먼 이국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며 끝내 이 언덕에 묻힌 분들이다.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90계단 앞쪽에 있는 쌈지공원의 바닥에는 1920년부터 2009년까지의 일들이 연표처럼 적혀있었다. 1921년 현진건 빈처, 1928년 박태준 오빠 생각, 1937년 헬렌 켈러 동산 신명학교 방문 등 대구 예술가들의 업적과 대구의 역사를 돌에 음각으로 새겨 근대사를 이야기로 담아낸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계산 성당 쪽으로 큰길을 건너 이상화 고택으로 들어서는 골목 근처에 정성껏 또박또박 써 놓은 글귀가 마음을 끌어당겼다.
“골목길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이자 문화이며 소중한 문화재이다. 골목길 은 우리가 살아온 상상의 공간이며 창조의 시작이다. 대구 근대골목으로 의 조그만 여행을 통해 잊힌 추억과 삶의 공기를 찾다.”
골목길에는 앞서 간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근대골목을 여행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건너 옛사람들과 마음속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길에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남겨놓을 것인가?
나의 노후대책
강순희
나의 노후대책은 마음과 몸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건강한 마음을 갖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몸의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은 국민체조와 내 마음대로 지어 낸 스트레칭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밖으로 나가서 8,000보 이상 걷기로 마음먹었다. 새해 첫날 다짐했지만 매일, 내 의지와 다르게 주어지는 새로운 숙제 때문에 빼먹는 날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글쓰기와 읽기를 생활화하고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인지 능력이 활성화되고 뇌 운동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글쓰기 중에서도 수필 쓰기를 하고 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 과연 수필인지 확신은 없다. 일기 같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겪은 일을 쓴 글이라서 신변잡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막 수필이란 연못에 한발 들여놓은 청개구리가 잎사귀 위에서 보호색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나 할까? 상록아카데미에서 3년째 수필 강좌를 듣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느끼며, 글로 남기는 것의 중요함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어느 순간 번뜩 떠오르는 상념을 한 두 줄 적어 놓고 그것을 뼈대 삼아 살을 붙이고 늘리면 글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수필 쓰기에 대한 이론도 배우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기성 작가들의 수필집을 읽을수록 수필 쓰기는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생활 속에서 글감을 구해 보려고 사람들도 관찰하고 주고받는 말도 유심히 들어보기도 한다. 인상 깊게 본 일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기도 한다. 여행을 가거나 문화재 답사를 하면 팸플릿을 가져온다. 많이 쌓아두었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다. 음식 재료와 글을 쓰는 글감의 속성은 비슷하다. 싱싱한 식재료도 유통기한을 넘기거나 냉장고 안에서 잊히면 음식쓰레기로 변하고 만다. 살림의 고수는 제 때 음식을 만들어 먹고 끝까지 활용하며 과감히 버릴 줄도 안다. 글감도 마찬가지다. 메모나 사진으로 남기고 일기로 써 두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기억은 생생한 맛을 잃는다. 글감도 유통기한이 있다. 아무리 좋은 글감이라도 적절한 시기에 쓰지 않으면 기억이 희미해지고 수필로 쓰지 못한 제재는 삭제라는 운명을 맞는다.
잘 쓰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신에게 더 엄격하라는 말로 받아들여본다. 또 감동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에서 온다는 말을 통해 용기를 내어 본다. 글은 자신을 거짓 없이 드러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글을 내놓는 것이 늘 부끄럽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단 몇 줄에서라도 공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군더더기가 적은 따뜻한 글을 쓰고 싶다.
수레의 두 바퀴처럼 마음의 건강과 함께 가는 것이 신체적 건강이다. 허리라도 삐끗해서 통증 때문에 걷는 것조차 불편한 날에는 우울해지고 세상만사가 귀찮아진다.
건강을 위해 D봉사단에서 바른 자세 걷기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걷기 협회 전문가에게 배운 것을 좀 더 연구하여 바르게 걷고, 재능을 나누기 위한 모임이다. 동아리 회원들은 대부분 일흔을 넘긴 분들이지만 나이보다 건강하고 젊어 보인다.
‘나도 10년 후 저런 체력을 유지하며 바르게 걸을 수 있을까?’ 그분들의 모습을 내 노후의 본보기로 삼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두류공원에 모여 평소에 개인적으로 하던 걷기를 서로 평가하며 자세를 바로잡고 있다. 활동이 시작되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기체조도 하고 손뼉도 친다. ‘바르게 걷기 재능 나눔 봉사단’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열심히 하고 있으면 공원에 나와 터벅터벅 걷던 시민들도 관심을 갖고 배우러 온다.
동아리 회장님의 열정적인 지도가 시작된다.
“11자 발로 서서 뒤꿈치 먼저 대고 엄지발가락 힘주고 넘어가세요.”
“손은 계란 쥔 것처럼 부드럽게 주먹을 쥐고, 팔은 굽히지 말고 앞뒤 45도 시계추처럼 흔드세요.”
“턱은 당기고 가슴을 열고 시선은 10~15m 앞을 보고 조금 빨리 걸으세요.”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막상 걸어보면 팔다리가 마음처럼 따라주지는 않는다. 힐링 숲에서 몸을 풀고 두류공원 여울길을 한 바퀴 돌며 땀을 흘리면 몸은 더 가벼워진다. 한 줄로 서서 똑바로 앞을 보고 바르게 걷는다. 걷는 중에도 회장님은 자세를 교정해 주느라 바쁘다.
“종아리, 허벅지, 온몸에 힘주고 걸으세요. 팔은 노 젓는 것처럼, 팔을 뒤로 한 번씩 젖히면 오십견 예방도 됩니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흔들리는 은빛 억새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오늘을 인생의 황금기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아무리 소박하고 작은 일이라도 매일 하면 대단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이들과 함께 건강하게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