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중도하차했던 중학시절 이야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푼 희망의 꿈을 안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입학한 학교는 진도읍에 있는 진도 중학교인데, 당시 손재형(서예가이며 국회의원을 지냄)선생이 이사장을 맡고 계셨던 사립학교였다.
당시 진도중학교는 광주고등학교에도 수석입학을 시켰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던 제법 명문학교로 인정받는 학교였다.
학교가 있던 곳은 현재 군청이 들어선 자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은 진도종합중고등학교로 이름이 개칭되었지만, 당시는 중학과정만 있었다.
우리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2~3년 전에 고성중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선택은 자유였다.
또한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루고 들어갔다.
우리 동창생중 함께 진학한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4명이었다.
가계에서 하 윤홍, 허 광무, 박 병무, 이렇게 3명이었고, 향동에선 나 혼자였다.
그런데 향동에선 1년 전 졸업했던 김 두지친구가 함께 동창생으로 입학을 했다.
그 시절엔 중학교도 경제사정으로 누구나 다니질 못했고, 두지 친구도 그런 사정 때문에 한해가 늦춰진 셈이다.
읍내에 학교가 있기에 주로 방을 얻어 자취생활들을 했는데, 나는 처음엔 학교관사로 들어갔다.
학교 관사였기에 학교 다니기에 더없이 편리했고, 여러 학생들과 사귀는데도 유리하였다.
관사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당시 학교에 재직 중이던 박 영(국어담당)선생이, 나의 6촌 큰아버지이셨기 때문이었다.
큰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연대 전신)출신인데다, “님 의 노래”라는 시집도 냈던, 상당한 국문학 실력을 갖고 계셨던 분이셨다.
큰아버지 배려로 관사에 들어가긴 했지만, 교육환경은 그리 원만치를 못했다.
우선 가족이 다섯 식구였고, 거기다가 김 완수란 1년 선배 되는 친구가 있었는데, 방이 두 칸 밖에 안 되니 서로가 불편한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다 넉넉한 하숙비를 드리고 있었던 게 아니고, 그저 나 먹을 것 정도 갖다 드리고 신세지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당장 다른 방도가 없기에 한해는 관사에서 보내고, 이듬해는 김 두지 친구와 자취생활을 했다.
자취하던 곳은 동 외리(東 外里)였는데, 둘이서 자취할 때가 방이 넓어 좋았고, 마음도 자유롭게 지냈던 것 같다.
관사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매주 주말이면 시골집에 와야 된다.
집에 오는 이유는 다음 주 먹을 양식과, 반찬거리를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곡식은 자루에 넣어 세끼 줄로 짊어지고, 김치 등은 당시엔 비닐포장이 없던 때라, 작은 항아리에 담아 손에 들고 다녔던 게 당시 상황이었다.
버스가 없기에 산길로 읍내를 오가려면, 그게 만만치가 않았다.
도로도 지금처럼 반듯하게 나있지도 않았고, 비탈진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토요일 날 집에 오는 시간은 더없이 기분들이 좋았다.
우선 학교공부에서 해방이 되었고, 모처럼 고향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립던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더욱 여름이나 가을철엔, 산딸기나 으름 등이 열려 있어, 그걸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집에 올 때는 이렇듯 기분들이 좋지만, 일요일은 대부분 가사 일을 도와드리고, 다음 월요일에 돌아갈 때는 상황이 달랐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을 먹으려면 입맛도 깔깔해서,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짐을 챙겨,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한다.
아무리 바삐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지만, 이날만큼은 어김없이 지각이었다.
당시 함께 주말 때 동행했던 학생은, 우리 동창생 말고도 숫자가 좀 더 있었다.
고등학생이 두 명 있었고, 여중생(서중)몇 명을 포함해서 전체가 10명쯤 되었다.
그때 함께 고생하며, 정들었던 추억은 잊혀 지지 않는데, 그 후 만나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마음 늘 떠오를 때가있다.
특히 이중에 조기남이란 친구는, 학교에서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건 동기는 다름 아닌 재건 체조에 있었다.
당시 5,16혁명직후에, 재건 체조란 게 나왔다.
체조시간이면 그게 하기 싫어 도망 다니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시간에도 빠지는, 소위 ‘빠구리’ 친다는 학생들 말이다.
전교생이 체조하는 시간인데, 이날따라 기남이가 빠구리를 쳤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곳곳을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기 남이를 찾아냈다.
숨어 있던 곳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던 폐 우물이었다.
그곳에 친구가 숨어 내려간 것은, 아무도 찾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였는데, 낙엽이 쌓여 매탄가스가 올라와, 그 유독가스에 질식사를 한 거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하필이면 우리친구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그 아픈 기억은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다.
나의 자취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 함께 지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나왔기 때문 이였다.
할머니 친정 오빠 되시는 베들이 할아버지 둘째부인이 방이 있으니 오라는 거였다.
그 할머니는 쌍 정리(雙 井里)에 사셨는데, 집은 허름한 초가집이었지만, 외아들이 나와 동창생이기에 지내기에 마음 편했다.
또 한 할머니가 마음씨가 좋아서, 나의 불쌍한 처지를 많이 다독거려 주셨다.
아들과 동갑이기에, 친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그 아들역시 나와 더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그 친구의 별명이 개똥이라 했는데, 개똥이란 별명은 천하게 불러줘야 명(命)을 길게 이어간다고 붙여졌던 이름이다.
한편 초라한 초가집에 방도 둘밖에 없었는데, 작은방에서 함께 지냈던 분은 공교롭게도 성불구자인 60대 노인이었다.
아마 그분도 오갈 때 없어서 할머니가 불쌍히 여겨 함께 지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분이 게 딱지만큼 좁은 방에서 세끼를 꼽는 다거나, 짚으로 뭔가를 자주 만들었기에 환경이 별로 좋지를 못했다.
학교관사 시절도 그렇고, 할머니 댁에 있을 때도 공부하기엔 실상 부적절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이만한 환경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큰 문제가 발생했다.
할머니가 갑자기 베들이 본가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본부인이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홀로 계시다가, 합쳐 살기로 합의가 된 것이다.
일찍부터 혼자 사셨지만, 아마도 본실(本室) 큰아들 눈치도 있어 뒤늦게 들어간 듯싶다,
할머니로썬 대단히 잘된 일이었으나, 나에겐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가 2학년 겨울 방학 직전이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심히 막막한 상황이 되었다.
거기다가 작은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위장병으로 고생하셨는데, 시골 형편으론 그 뒷감당도 부담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작은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네가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나온들 그걸로 뭘 할 수 있겠느냐?
차라리 네 머리로 고등고시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ㅡ
그때 나로썬 대단히 중대한 기로였다.
선택의 주사위는 나에게 있지만, 여러 가지 주어진 상황을 고려할 때,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학업을 계속하려면 안정된 거처가 필요했고, 집안형편도 걱정 없이 지원될 수 있어야만 했는데, 모든 게 여의치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큰 꿈을 갖고 도전의 기회를 가져보라는 그 제안이 오히려 타당할 듯싶었다.
그리하여 이제 방학이 끝나면 3학년으로 올라가는 그 시점에서, 나의 중학생활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서 독학(獨學)이 가능하리라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오판이며 착각이란 걸, 날이 가면 갈수록 뼈저리게 느껴왔다.
학교를 그만둔 이후, 단한권의 책도 사본일이 없었고, 공부할 수 있는 그 어떤 배려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나의 운명은 예측할 수없는, 고난의 항해를 할 수밖에 없도록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ㅡ
첫댓글 중도 하차한 중학교시절이 아쉽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