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형 도상의 전개 양상
보주형(寶珠形) 도상(圖像)이 전재되어 있거나 표현된 것으로는 진언집류의 각종 전적(典籍)과 판본(板本), 막새를 중심한 기와류, 석조미술품, 금속공예품, 토기류 등 다양한 불교미술품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전적류이다.
그중에서도 판본으로 구성된 전적류에 보주형 도상이 단독이나 다른 문양과 함께 전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전적류는 책으로 만들어진 경전과 불복장물(佛腹藏物), 묘지에 납입된 다라니의 판본 등이 확인되고 있다.
현재 보주형 도상이 전재된 전적류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차인출불공역대화수경(此印出不空譯大華手經)>이다. 보주형 도상이 부적형 도안의 한가운데에 감싸인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이 판본은 왼쪽에 진언의 종류와 범어를 한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말미에 '지원입사년정해삼월일(至元卄四年丁亥三月日)'이라고 새겨져 있어 1287년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적형 도안 아래에는 명칭과 효험이 기술되어 있는데, 제불공양인(諸佛供養印)-무량억여래인(無量億如來印)-천광왕여래대보인(千光王如來大宝印)-마하화수인(摩訶華手印)-정각보살인(正覺菩薩印) 등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차인출불공역대화수경>은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현존하는 가장 빠른 것으로 당시 보주형 도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있었음을 전해준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와 여러 가지 다라니를 모아 엮은 <제진언집>에 보주형 도상이 종자와 함께 전재된다. 현재 전하고 있는 <진언집> 중에서는 1569년 전라도 안심사에서 중간(重刊)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판본의 앞부분에 보주형 도상이 있는데, 장식적인 연화형 문양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며 사방에 사천왕종자가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아래에 부적형 도안을 배치하고 있어, 보주형 도상이 부적형 도안보다는 한 차원높은 도상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보주형 도상은 이후 간행되는 진언집류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진언집>마다 도상의 형태와 문양 등이 부분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각종 <진언집>에는 독특한 도상이 보주형 도상과 대칭으로 전재되어 있는데, 그 형상이 과일이나 보병 또는 항아리 같기도 하다. 이 도상에 대하여 명확한 명칭은 부여할 수 없지만 보주형 도상과 마찬가지로 장식적인 연화형 문양이 감싸고 있으며, 그 주변에 사천왕종자가 배치된 것으로 보아 보주형 도상 못지않게 중요한 도상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보주형 도상이 1658년 설악산 신흥사에서 안심사본(安心寺本)을 모각하여 간행한 <진언집>에 사천왕종자와 함께 전재되어 있는데, 보주형 도상과 대칭으로 배치된 도상이 1569년 안심사에서 중간된 판본과는 달라졌다.
그리고 중간된 <진언집>, 화순 만연사(萬淵寺)와 도봉산 망월사에서 간행된 <진언집>에도 부적형 도안과 함께 독특한 도상이 있고, 이와 대칭되게 보탑형 도상을 사천왕종자가 감싸고 있다. 이는 보탑형 도상이 보주형 도상과 동일선상에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간행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연화탑상다라니(蓮華塔像陀羅尼)>에는 보탑형 도상과 대칭으로 한가운데 옴자를 새긴 도상이 연화문과 함께 원형문 안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항아리형 또는 보병형 문양이 옴자와 관련되어 있으며, 보탑(寶塔)이 보주(寶珠)와 동일선상에서 인식되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182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주서(朱書)로 개판된 한글판 다라니에도 보탑형 도상과 함께 원형 보주를 연화문이 감싸고 있으며, 사방에는 사천왕종자가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각종 <진언집> 등에 보주형 도상을 중심으로 밀교적 성격이 짙은 다양한 형태의 상징적인 부적형 도안이 함께 실려 있다는 것은 양자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부적형 도안은 보주형 도상보다 작게 그 아래쪽이나 주변으로 배치되어, 보주형 도상보다 하위 성격이며, 부적형 도안이 보주형 도상에 예속되거나 일체화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부적은 일상생활의 문제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많은데, 밀교적인 성향이 짙은 사찰이나 승려들을 중심으로 많이 제작 활용되었다. 그리고 각종 의례나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의식에서도 다라니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처럼 각종 <진언집>에 보주형 또는 보탑형도상들이 부적형 도안과 함께 배치되었다는 것은 이들 도상들이 특별하게 인식되었으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부적형 도안이 경전이나 판본 형태로 간행되어 무덤 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도들을 사찰로 끌어들이고, 다양한 민간신앙을 불교로 흡수하는데 중요한 방편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다라니가 판본으로 간행되어 불복장물의 일부로 여러 봉안물과 함께 납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복장물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범자원상태장계만다라(梵字圓相胎藏界曼茶羅)'는 1295년 조성되었는데, 원형 도상 외곽의 사방에 사천왕종자를 배치하고,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새겼다. 이는 보주형 도상이 불상이나 특정 종자를 상징하는 도상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만다라는 한가운데 불상이나 옴자(唵字) 등 상징성이 높은 종자가 1자씩 새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보주형 도상 판본이 전하는데, 개인 소장의 보주형 도상 판본과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 불복장물이 대표적이다. 이중에서 개인 소장 보주형 도상 판본은 4개의 보주형 도상이 모두 동일하고 엇갈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각각 하나의 판각본으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상은 사각형 구획 안의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배치하고, 상부에는 아미타불, 좌측에는 관세음보살, 우측에는 대세지보살이라고 기록하여 전체적으로 아미타삼삼존불을 의미하도록 했다.
그리고 보주형 도상 하부에 범자로 다라니를 새겼으며, 가운데에 세로로 '대덕오년오월이십일일조판(大德五年五月二十日彫板)'이라고 새겨 1302년 5월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동일한 간행본이 여러 점 확인되고 있어 보주형 도상 판본이 고려 중후기에 특별하게 인식되어 불복장물에 납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평창 월정사 중대 사자암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 발원문(1894년)과 함께 1456년 신미(信眉)가 발원하여 판각한 다라니 1매가 수습되었다. 다라니는 별도의 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하부에 부적형 도안이 배치되고 상부에 사천왕종자가 감싸고 있는 보주형 도상이 위치하고 있다.
1458년 조성된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에서도 판본 다라니가 출토되었는데, 만다라와 함께 보주형 도상을 새겼다.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다라니는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수습된 다라니와 동일 간행본으로 확인되어 당시 판본이 계승되면서 여러 번 인쇄되었으며, 기 간행된 다라니가 유통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는 불복장물에 다양하고 많은 양의 다라니가 봉안되었는데, 여러 도상이 새겨진 다라니가 함께 납입되어 다라니에 대한 신앙이 높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조선시대는 전대보다 많은 양의 다라니가 불상에 봉안되면서 보주형 도상이 별도의 판본으로 간행되어 봉안되기도 했으며, 다라니나 부적형 도안들이 함께 동일 판본으로 간행되어 봉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각종 다라니에서 부적형 도안은 하단이나 좌우측면에 작게 표현되지만 보주형 도상은 상부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가장 크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보주형 도상의 위계나 상징성이 부적형 도안과는 다르게 인식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묘지의 출토품에서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다라니가 확인되고 있다. 충북 음성 나주정씨 정담(丁聃, 1476~?)의 묘에서 미라와 함께 여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시신을 안장한 목관 안쪽 면에서 다라니, 사신도(四神圖), 성숙도(星宿圖), 비천상(飛天像) 등을 각각 낱장으로 간행하여 부착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특히 목관 안쪽면의 한 곳에 각각 1장씩 다라니(23.5×45cm)를 인쇄한 총 3장의 판본 다라니를 부착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다라니의 오른쪽에 장식적인 보주형 도상을 새겼으며, 한가운데에는 만다라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만다라 왼쪽에는 상부에 육자진언을 쓰고, 그 아래쪽에 부적형 도안을 배치하였다.
부적형 도안 아래는 사각형으로 구획하여 그 안에 '성정각 묘시인당 득견불(成正覺 卯時人當 得見佛)', '정토묘 지인당 화정토(淨土卯 持人當 化淨土)', '보우묘 지인파지 파?불?(寶雨卯 持人破地 破?佛?)'라고 명문을 새겼다. 이와 같이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봉안물이 발견된 것은 묘주(墓主)가 살아생전 불심이 깊었던 인물이었으며, 불교적인 사후관에 의하여 극락왕생을 염원하기 위하여 다라니가 시신과 함께 납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파주 금릉리 정온묘(鄭溫墓)에서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다라니가 다량의 출토복식과 함께 수습되었다. 이중에서 적삼과 치마 등의 표면에 보살상, 비천상, 6자진언, 다라니가 새겨졌으며, 시신을 안장한 관 내벽에도 인쇄된 다라니가 부착되었다. 이러한 점은 이 목관이 음성 나주정씨 정담 부부 합장묘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라니에는 보주형 도상과 진언이 새겨졌으며, 부적형 도안 아래에 '귀신불침 당득견불 당생정토 견자애경 위귀인념 자연원리삼재 능피쟁송지액 능산인주서탄지즉출(鬼神不侵 當得見佛 當生淨土 見者愛敬 爲貴人念 自然遠離三災 能避爭訟之厄 能産印朱書呑之卽出)'이라는 명문이 새겨졌다. 이는 다라니를 통하여 귀신이 침범하지말고 부처에 의지하여 정토에 태어나 모든 액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염원 등이 성취되기를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은 알 수 없지만 대전 월드컵경기장 부지 무연고 무덤에서 시신을 감싸고 있었던 저고리 안에서 목판으로 인쇄된 다라니가 수습되었는데, 상부에는 육자진언과 함께 부적형 도안이 새겨졌으며, 그 아래에 만다라와 보주형 도상이 좌우에 배치되었다.
부적형 도안 아래에는 부처를 보고 정각을 이루거나, 죄를 멸하며, 지옥이 아닌 불국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염원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부안 고부(古阜) 이씨묘 출토 다라니도 보주형 도상은 아니지만 사천왕종자로 감싸인 장엄적인 도상과 함께 부적형 도안이 새겨진 다라니 판본이 수습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다라니를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도들을 중심으로 불교적인 내세관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덤 조성자들이 불교적인 세계관에 의하여 무덤을 조성했으며, 궁극적으로 묘주의 극락왕생을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밀교적인 색채가 짙은 부적형 도안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막새기와를 중심한 기와류에도 보주형 도상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범자로 종자나 진언이 새겨진 기와는 크게 막새기와와 평기와로 구분되는데, 이중에서 막새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막새기와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먼저 개태사지(開泰寺址) 수막새와 암막새에서 보주형 도상이 확인되고 있다.
암막새는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양각으로 새기고, 그 좌우에 귀목문만을 배치한 것과 귀목문과 당초문을 함께 배치한 것이 있다. 모두 외곽에 별도의 윤곽대를 마련하여 보주형 도상을 감싸도록 했다. 이중에서 첫 번째 유형은 수막새와 비슷한 시기인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암막새는 강화 선원사지(禪源寺址)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강화 선원사지 암막새는 연주문, 귀목문, 당초문 등의 장식은 개태사지 암막새와 강한 친연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가운데에는 보주형 도상이 아닌 옴자(唵字)를 새겼다. 이와 같이 동일 유형의 기와에서 같은 위치에 다른 도안이 채용되었다는 것은 두 도안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합천 영암사지(靈岩寺址)에서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영암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되어 적연국사(寂然國師) 영준(英俊, 932.01.08~1014.06.02)이 하산하여 머물면서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고려시대까지 꾸준하게 법등을 유지했다.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수막새는 고려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막새면 외곽에 연주문을 배치하고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보주형 도상의 외곽은 화염형(火焰形) 문양이 감싼 형상이다.
개태사지나 영암사지 막새와 유사한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암막새가 전라남도 광주 북성지(北城址)에서 수습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암막새는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새겼는데, 보주형 도상을 감싸고 있는 외곽의 돋을대 표현이 중간에서 굴곡형으로 한번 끊어지면서 꺾이고 있다.
또한 북한 개성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수막새는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삼중 돋을대로 원권문을 새겨 감싸도록 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출토지를 알 수 없는 수막새도 파손되었지만 막새면에 정연한 보주형 도상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원주 법천사지(法泉寺址)에서 출토된 수막새도 화염형 문양이 보주형 도상을 감싼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제작된 막새기와는 보주형 도상이 막새면의 한가운데 배치되고, 그 외곽을 화염형 문양이 감싸도록 했는데 화염형 문양이 중간에서 굴곡형을 이루며 한번 끊기고 있다. 그런데 충주 금생사지(金生寺址)에서 출토된 수막새도 보주형 도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외곽에 사중의 돋을대 문양이 원형을 이루며 한가운데 배치된 보주를 감싼 형태로 표현되어 도상적으로 다른 막새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후 보주형 도상은 조선시대 기와에서도 지속적으로 표현되는데, 고려시대와 비교하여 부분적인 변화는 보이지만 기본적인 도상은 유지하면서, 도상 주변으로 장식이 추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고려말 조선초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한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의 전 사역(寺域)에 걸쳐 범자 막새가 출토되었다.
그중에서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수막새는 막새면 한 가운데 배치된 보주형 도상을 돋을대 무늬로 표현한 것과 선각(線刻)으로 표현한 2가지 유형이 수습되어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기본적인 도상은 동일하다. 회암사지 출토 수막새는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을 배치하고, 그 외곽을 1조의 돋을대가 감싸도록 했다. 그리고 하부에는 연화좌를 배치했으며, 상부에는 화문형(花紋形) 문양이 보주형 도상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고려시대 기와는 보주형 도상 자체만 중점적으로 표현했는데, 회암사지는 보주형 도상 외곽에 연화좌와 화문형 문양이 추가되어 장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보주형 도상 외곽으로 사방에 사천왕종자를 새겨 각종 <진언집>에 전재된 도상과 유사하여, 양주 회암사지의 보주형 도상이 경전에 근거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양주 회암사지 보주형 도상 수막새와 유사한 기와들이 영암 도갑사에서도 출토되었다.
도갑사에서 범자가 새겨진 기와는 여러 건물지에서 수습되었는데, 이중에서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수막새는 회암사지 출토 수막새와 제작 기법이나 도상의 표현 기법이 유사하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도갑사가 왕실과 관련하여 중창되었으며,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기와는 조선초기 중창시에 제작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시대 기와 중에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보주형 도상 암막새가 있다. 출토지 미상의 선덕원년명(宣德元年銘) 암막새와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출토된 천순팔년명(天順八年銘) 암막새이다. 선덕원년명(宣德元年銘) 암막새(1426년)는 일부 파손되었지만 한가운데 연화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보주형 도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보주형 도상 좌우에는 이중의 돋을대로 구성된 원권문(圓圈紋)을 표현했다. 또한 천순팔년명 암막새(1464년)는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이 배치되고, 도상의 좌우는 화염형 문양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두 암막새는 절대연대가 있어 조선초기 보주형 도상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 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서울 은평구에 소재한 진관사에서도 하부에 마름모와 삼각형태의 문양을 연주문(連珠紋)처럼 장식하여 받침대로 삼고, 그 위에 보주형 도상을 양각으로 새긴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보주형 도상은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은 화염형 문양이 감싼 형상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의 보주형 도상 암막새가 춘천 청평사에서도 수습되었다. 기와의 하부가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보주형 도상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은 화염형 문양이 감싸고 있다.
과천 관악산 일명사지(逸名寺址)에서도 보주형 도상이 좌우대칭형으로 새겨진 암막새가 출토되었는데, 하부에 2조의 돋을대가 보주형 도상에서 연장되어 권운문(卷雲紋) 형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충주박물관에도 출토지는 알 수 없지만 명문이 있는 보주형 도상 암막새가 있다.
이 암막새는 한가운데 경전의 도상처럼 보주형 도상을 배치하고, 좌우에 명문(銘文)과 옴자를 양각하였다. 보주형 도상의 하부에는 연화좌가 마련되었으며, 1조의 돋을대가 보주형 도상을 감싼 형상이다. 이 암막새는 명문에 의하여 1559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어 조선중기 보주형 도상의 표현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전 보문사지(普文寺址)에서도 파손된 보주형 도상 막새가 출토되었다. 보문사지에서는 보주형 도상을 새긴 막새기와가 만자(卍字)를 중심으로 육자진언을 새긴 기와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암막새가 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익산 사자사지(獅子寺址), 공주 구룡사지(九龍寺址)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보령 성주사지 암막새는 보주형 도상 외곽에 화려한 문양을 배치하여 경전에 충실한 도상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익산 사자사지와 공주 구룡사지의 보주형 도상은 간략하게 선각으로 표현하여 형식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공주 구룡사지 출토 암막새는 한가운데 연화좌가 마련된 보주형 도상을 간략하게 새기고, 좌우에는 원권문(圓圈紋) 안에 범자를 1자씩 새겼다. 이 기와는 제작 시기는 떨어지지만 보주형 도상 표현 기법은 서울 진관사나 춘천 청평사 암막새와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청주 보살사 극락보전에는 옴자(唵字)가 새겨진 막새기와가 지붕에 활용되고 있는데, 옴자를 새긴 형상이 보주형 도상과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극락보전에 활용된 수막새는 시기를 달리하여 제작된 2가지 유형이 활용되었는데, 첫 번째 유형은 선각으로 옴자를 새겼으며, 두 번째 유형은 굵은 돋을대형으로 옴자를 새겼다. 그런데 모두 한가운데 보주형 도상과 유사한 모양의 옴자를 배치하였으며, 그 주변에는 원형으로 육자진언을 새겨 옴자에 대한 신성함을 강조하는 표현 기법이 활용되었다.
세 번째로 보주형 도상은 기와뿐만 아니라 석비와 암벽 등 석조미술품에도 마애(磨崖)로 새겨졌다. 먼저 광주 십신사지(十信寺址) 석비(石碑)는 비신 앞면에 <대불정존승다라니경(大佛頂尊勝陀羅尼經)>을 음각하고 상부에 보주형 도상을 새겼다. <대불정존승다라니경>은 일반적으로 육각이나 팔각으로 치석된 석주형(石柱形) 조형물인 석당(石幢)에 많이 새겨졌는데, 십신사지는 귀부와 팔작지붕형의 개석을 마련한 장방형 비신에 다리니경을 새겨 보기 드문 예에 해당된다.
십신사지 석비에 표현된 보주형 도상은 굵은 음각선을 활용하여 좌우대칭형으로 새겼는데, 외곽은 굵은 음각선이 보주형 도상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외곽의 굵은 음각선이 모서리 부분에서 굴곡진 형태를 이루며 끊겨 있어 고식(古式)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석비는 원나라 풍이 강한 귀부의 양식과 <대불정존승다라니경>의 성행 시기로 보아 고려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주 광석동 오층석탑 옆 석주형 기둥 표면에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졌음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부는 동자형 인물상이 앉아서 머리와 두 팔을 높이 들어 보주형 도상을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보주형 도상은 굵은 돋을대를 활용하여 표현했는데, 도상의 표현 기법이 고식(古式)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남원 승련사(勝蓮寺)의 서편에 있는 암벽에도 육자진언을 비롯하여 3개의 보주형 도상이 새겨져 있다. 보주형 도상은 외곽부를 일정한 간격으로 다듬고, 그 안쪽에 좌우대칭형으로 새겼다. 하부에는 운문형(雲紋形)의 낮은 받침대가 있고, 상부는 반원형의 돋을대가 반복되어 정상부에 위치한 보주를 받치는 형상으로 조각되었다.
남원 승련사는 일정한 공간의 암벽에 여러 개의 보주형 도상을 표현했으며, 육자진언도 함께 새겨져 있어 보주형 도상이 육자진언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도상이 밀교와 관련된 도상임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달성 대견사지(大見寺址)에도 암벽에 보주형 도상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보주형 도상은 하부에 앙련형(仰蓮形)으로 조각된 연화대좌 위에 다시 받침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새겼다.
도상은 음각선(陰刻線)을 일정한 간격으로 조각하여 굵은 돋을대처럼 보이도록 표현했다. 대견사지 암벽에 새겨진 보주형 도상은 사지에 남아있는 고려전기의 삼층석탑보다는 후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층석탑과 보주형 도상이 맞보고 있어 의도된 위치의 암벽에 보주형 도상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평창 상원사 적멸보궁 뒤편에 세워진 작은 석비의 앞면에는 마애 보탑을 새겼으며, 뒷면에는 보주형 도상을 크게 새겼다. 보주형 도상 하부에는 연화좌가 마련되고, 그 위에 좌우대칭형의 반원형 돋을대를 표현했다. 보주형 도상 외곽은 일정한 너비의 돋을대가 감싼 형상이며, 상부에는 별도의 덮개를 마련하였다.
또한 모서리마다 1자씩 사천왕종자를 배치하여 조선시대 간행된 <진언집>들의 보주형 도상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이처럼 석비 앞뒷면에 보탑과 보주형 도상을 각각 새긴 것으로 보아 두 도상이 동일선상에서 인식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네 번째로 보주형 도상은 동경(銅鏡)이나 청동판 등과 같은 금속공예품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사진첩>에는 사각형 청동판이 전재되어 있는데, 한 면에는 갑옷을 입고 합장하고 있는 사구(四軀)의 보살상이 사방에 배치되어 있고, 다른 면에는 선각(線刻)으로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는 보주형 도상이 새겨졌다.
도상의 외곽은 광주 십신사지 석비나 해주 광석동 오층석탑 옆 석주와 동일하게 돋을대를 마련하여 보주형 도상을 감싸도록 했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불상문(佛像紋 동경)에도 한 면에는 보살좌상이 선각으로 조각되고, 다른 면에는 연화좌 위에 보주형 도상이 표현되었다.
보주형 도상은 합천 영암사지나 원주 법천사지 출토 수막새처럼 외곽에 화염형의 돋을대가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또한 일본 오사카 역사박물관에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동경이 소장되어 있다. 이 동경은 가운데 꼭지가 마련되고, 그 주변으로 간략한 형태의 보주형 도상을 양각으로 새겼다.
그리고 토기에도 보주형 도상이 새겨진 예가 확인되고 있다. 이 토기는 음각용봉탑문 유개호(陰刻龍鳳塔紋 有蓋壺)로 온양민속박물관에서 특별전을 개최할 때 출품 전시되었는데, 항아리 표면에는 사신도(四神圖)와 탑문(塔紋)을 교대로 음각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에도 여러 문양과 명문을 음각하였다. 토기의 표면 상단부는 4곳에 작은 보주형 도상을 음각했다. 그리고 항아리 내부 바닥면에는 비교적 크게 보주형 도상을 음각하고, 그 아래쪽에는 명문을 새겼다.
보주형 도상은 선각으로 하부에 연화좌를 마련하여 그 위에 좌우대칭형으로 표현되었으며, 외곽은 별도의 음각선을 활용하여 도상을 감싸도록 했다. 내부 바닥면에 새긴 명문 중에는 ' (……) 일자대불정존승다라니보리사바하(一字大佛頂尊勝陀羅尼菩提娑婆訶)(……) '라고 하여 보주형 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보주형 옴(om)자 도상의 전개와 상징적 의미에 대한 시론/ 엄기표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