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연극의 서막
지금 하는 이야기는 ‘삶과 죽음’이라는 큰 연극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필자)의 희망과 실패에 대한 것입니다. 성공한 이야기와 방법을 읽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실패냐고 나무랄 독자분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고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처음부터 성공한 이야기지만 ‘그 인물’로서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 혼란스러운 몇 가지 장면들이 지나가고, 연극 안에서 어느 날 그 인물은 세상과 함께 슬며시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하나의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가까스로 일어나서 걷고 낯선 사람들과 교류하고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면서 매우 거친 주변 환경에 동조(同調)되는 과정은 큰 충격인 동시에 두렵고 신기하고 질리는 복잡한 감정을 경험케 하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러 왼쪽 가슴에 큰 수건을 달고 엄마의 손을 잡고 아침에 학교로 걸어가는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어릴 때 설날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갔습니다. 사촌 누나가 말해주었습니다.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당에 가지만 나쁜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내용의 말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실수로 나쁜 일을 해서 지옥에 가면 큰일이구나 싶은 두려움이 은근히 일어난 것은 물론이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도무지 믿기 어려울 만큼 두렵고 기이하며 심하게 공정하지 않다는 느낌이 올라왔습니다. 어째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죽음까지 준 것일까 라는 알 수 없는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그런 식의 느낌이었습니다. 장차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생전 처음 구체적으로 다가온 인식은 그 인물의 기억에 각인되어 심리적 상처로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교에 가니 학교 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뜻도 모르는 가사의 팝송을 듣고 육체의 본능에 따르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덮여 앞선 그런 의문은 잠시 잊히는 듯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연극무대에서 퇴장하는 장면을 매우 슬픈 방식으로 연기(演技)하셨습니다. 그 후에 어떤 계기로 늘 잠재되어 있던 상처와 의문이 분노와 함께 폭발하였습니다. ‘신이여, 당장 내 앞에 나오시오, 나에게 답을 주시오, 신이라면 생명을 빼앗지 마시오, 당신이 반항하는 나에게 줄 형벌은 고작 죽이는 것이 다이지 않소’ 이런 심정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고 하는 ‘그 인물’의 장차 죽음에 대한 통탄과 억울함과 알 수 없음에서 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신도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사회는 그런 심리 상태의 일상화를 정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았습니다. 대학교에 간 이후는 훌륭한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의문과 상처와 슬픔의 대체로서 술도 즐겨 많이 마시고 연애도 하였고 좋은 직업과 결혼을 위하여 직업공부에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그 인물은 간혹 요가·명상 서클에 들르기도 하였고 손에는 오쇼 라즈니쉬나 라마나 마하르쉬의 책이 들려있기도 하였습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거친 상태가 상당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상태는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충분히 다 하고서야 스스로 물러갔고, 요행으로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아서 그냥 열심히 일하고 술 마시고 즐겼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서 심각한 문제가 떠올라 왔습니다. 오래된 그 생각과 느낌이 정면으로 도전해 왔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의 낙관적인 전망과는 다르게 상태는 이미 대체로 복잡해져 있었습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일단 직업을 바꾸어 생활의 방책으로 삼았습니다. 이제는 진지하게 진리를 공부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고 신을 찾아서 궁극으로는 죽음을 넘어가는 길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남겨진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마음은 급했습니다. 해가 곧 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 일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이루어지고 고통과 시련이 동반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는 듯했으므로, 출발선에 서 있는 그 인물은 매우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계획하여 효율적인 방법을 찾지 않으면 낭패는 물론이고 시간 낭비만 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직관에 의하면, 비효율적인 방법에는 기존의 대중적인 거대 종교 시스템들이 포함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형이상학과 신비주의는 제외하고, 모호하지 않고 과학적인 통찰로 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지식체계를 자세히 찾아보았습니다.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연구된 주역과 사주추명학이 사람의 정체를 가장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듯했기에 공부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공부는 오랜 기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역학(易學)은 일생에 일어나는 현상을 이성적 감성적 관계적 측면에서 통계 분석적으로 잘 설명하지만, 일생 이전과 이후, 모든 현상의 근원과 목적, 절대자와 의식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본으로 역학 공부를 이어가는 동시에 깨달았다고 소문나고 어느 정도는 공인된 살아 있는 참 스승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진심으로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직접 만나서 배우고 교류할 수 없는 죽은 성현들의 가르침 즉 서적류를 통한 배움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찾아보면 인연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부지불식 간에 찾고 배우고 추구하는 그 인물의 역할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그러는 동안 세상이 빠르게 변화해 가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네 가지 다른 버전의 가리킴과 만날 수 있는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말로 표현하면 매우 간단합니다. ‘빛과 소리에 대한 집중’, ‘저항하지 말라, 신념 체계를 놓아라’,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바로 이것이다’
네 개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을 배우고 찾으면서 웃고 울고 감동하고 실망하고 사랑하고 증오하는데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흐른 줄도 몰랐습니다. 그 인물에게는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론은 해피엔딩이 아니었습니다. 이 연극이 차라리 동화였다면 ‘그 인물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공부해서 결국 깨달음을 얻고 인가를 받아 영원히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았다’로 끝날 수 있을 텐데, 신은 그런 결말을 그 인물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인물은 집으로 돌아오는 정거장에서 여러 번 서럽고 원통하게 울었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아무도 없는 구석에 숨어서 울었습니다. 아무것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여태까지 이놈은 도대체 뭐를 했나’라는 환멸감과 허탈함에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그냥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려고 해도 어디로도 갈 데가 없어졌습니다. 손을 보니 빈손이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이젠 지긋지긋한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그만두었습니다.
오래전에 그 인물이 목적으로 삼은 ‘깨달은 사람이 되기’로 한 희망을 이젠 버려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연극의 각본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훌륭하게 될 그런 인물이 아니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중장년 중에 하나로 판명되었습니다. 청년일 때는 삶의 연극이 그렇게도 위대할 줄 알았는데 연극의 결말은 몹시도 초라하고 위축된 상태로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즈음에 참 기묘하게도 20년 전에 그 인물로부터 욕을 먹은 신이 등장합니다. 신은 매우 짓궂습니다. 열심히 찾으면 신은 자기를 숨깁니다. 찾기를 포기하면 불현듯 나타나 살짝 자기를 보여 주고 다시 도망가버립니다. 그 인물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상의 일을 마치고 밤에 누워 잠에 빠져들기 직전,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비일상적인 의식상태가 몇 번 찾아왔습니다. 무엇인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미지근한 방식은 기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시했더니 오히려 더 찾아왔습니다. 이런 의식에는 체험자가 없었습니다. 체험자가 없는 의식에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경험자와 아는 자는 없고 앎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앎의 대상이 없으므로 무엇을 알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무지(無知)도 아니었습니다. 빛이 모든 곳에 가득 차 있지만 비출 대상 없이는 그냥 어둠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빛 안에 대상이 나타나면 빛은 대상과 자기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온통 하나인 의식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식은 그저 있다가 불현듯 대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상이 있는 바로 그곳에 대상으로 있으면서 대상을 경험하고 압니다.
체험자가 없으므로 ‘평소의 나’는 비일상적 의식의 경험자도 소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의 나는 결코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영원의 시간 동안 수행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라는 진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의식이 홀로 드러날 때는 반드시 그리고 항상 자아가 부재(不在)해야 한다는 법칙이 무언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홀로 드러난 의식 혹은 비일상적 의식을 지금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이 인물’은 자신이 부재(不在)한 곳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고 마치 체험이나 한 듯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체험자 없는 의식은 온통 하나인 투명한 앎이고 모든 앎의 원천이기 때문에, 자기를 알리거나 설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의식은 ‘그저 하나로 있음’을 종료하고 스스로 상전이(相轉移, phase transition)를 일으켜 자기 모습을 ‘자아와 세계’로 바꿉니다. 이때 새롭게 건립된 ‘이 인물’은 자신이 부재해야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의식의 대리인 혹은 대변인으로서 마치 자신이 체험자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은, ‘이 인물이 없어도 거대한 무엇이 여전히 존재한다’라는 사실입니다. 거대한 무엇이 존재하는 데 이 인물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믿기 싫은 사실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거대한 무엇 안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등장인물이었습니다. 거대한 무엇에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가장 적당한 것이 의식이라는 이름일 뿐 그 이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이 인물은 의식 안에서만 출몰하는 반면에 의식은 항상 그대로 존재한다는 이해와 실감은 있지만, 일상생활 중에서 자주 이 인물의 관점에 서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전처럼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종종 거대한 무엇을 상기할 때마다 항상 처음처럼 새삼스럽게 그 불가사의와 비상식성에 경악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 꿈의 세계가 상식으로 알려진 만큼 그렇게 허망하고 가치 없는 세계가 전혀 아니라는 이해가 찾아왔고, 꿈속에서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꿈꾸기를 이어가는 자각몽(自覺夢, lucid dreaming)을 여러 번 꾸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형이상학 전통에서는 언제나 자각몽 연구와 수행을 매우 소중하게 취급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꿈꾸는 주체는 자아가 아니었습니다. 꿈은 개인적인 의식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꿈의 세계는 온통 하나인 의식이 펼치는 작업이었습니다. 현실에도 등장하고 꿈에도 등장하는 자아는 꿈속의 내용이지 꿈꾸는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왜 반드시 잠을 자야만 하고 꿈을 꾸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앎도 일어났습니다. 꿈과 자각몽에 대한 이해는 거대한 무엇을 계속 확인해 주고 있었습니다.
시시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하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일까요. 새롭게 얻거나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생사와 무관하게 처음부터 우리는 바로 지금 이 투명한 의식이었습니다.
책 『자유롭게 살고 유쾌하게 죽기』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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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궁극의 결론
이것은 궁극의 진실
이것은 궁극 유일의 지혜
그 어떤 신비하고 기묘한 영적 세계를 주유했을지라도
그 어떤 엄청난 종교적 체험을 했을지라도
히말라야에서 먹고 마시지 않고 100년을 보냈을지라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길의 끝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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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오직 하나다.
세계와 의식은 하나로 같다.
물질 비물질 모든 세계는 단일의식의 자기 자각이다.
삶과 죽음은 단일의식의 자기 깨달음이다.
단일의식은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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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ultimate conclusion
This is the ultimate truth
This is the ultimate and singular wisdom
No matter what mysterious and strange spiritual world you have traveled to
No matter what incredible religious experience you have had
Even though you spent 100 years in the Himalayas without eating and drinking
You have no choice but to come back here after all.
This is the end of every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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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only one consciousness.
The world and consciousness are one and the same.
Material immaterial, The whole world is the single conscious self-awareness.
Life and death are self-awareness of the single consciousness.
The single consciousness does not die.
There is nothing to di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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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하나님이라고 붓다라고 말했고
지금은 단일의식이라 말한다.
흩어져 있는 보석을 하나의 실로 꿰는 작업
[ 고요한 묵상 10 ]
시공간 안에 물질이 들어 있습니까?
아니요
물질이 있으니까 시공간이 있고
시공간이 있으니까 물질이 있게 됩니다.
물질과 시공간은 같은 것입니다.
시공간이 의식이 아니고 다른 것일 수 있나요?
의식은 이처럼 바늘구멍 틈새 하나 없이
꽉 차 있습니다.
MINDFUL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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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은 자유의지가 없으니 운명의 노예인가요?
아니요
자유가 아니라면 운명조차도 아니지요
실체가 아닌 임시 연극 배역에게 자유도 아닐진대
무슨 숙명이 가당키나 할까요?
전부 헛생각
*****
하루에도 열두 번 각성과 미망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문제일까요?
아니요
완전해지기를, 완벽해지기를, 천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이 모양 이 꼬라지 그대로
소명(召命)을 선택하여
단일지혜 소식을 自我와 他我에게
전달하기 시작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문제는커녕 재밌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요
*****
단일의식이라는데,
자꾸만 몸속에 들어앉은 나라는 개인 느낌을 떨칠 수 없어서
자주 괴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 느낌은
단일의식의 일인다역 장엄한 연극과 생명 축제의 본래 설정입니다.
걸작품이지요
이 느낌은
하나인 의식이
목화토금수 의식 원소들의 서로 다른 배합비율의 필터를 거치면서
잠시 잠깐 다양한 뉘앙스로 나타난 것입니다.
단일 햇빛은 각양각색의 색 유리창을 통과해서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완전히 다른 분위기들을 만들지만
그 모든 다양한 모양과 색깔은
단일 햇빛입니다.
*****
지금 세계 내용을 말해보라
지금 의식 내용을 말해보라
세계와 의식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지요
우리 모두에게 세계는 몇 개입니까?
1개
그렇다면 의식은 몇 개여야만 합니까?
1개
의식은 세계와 일치하기 위해서
몸 안에 있어야 합니까?
몸 밖에서 세계와 같이 있어야 합니까?
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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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식 내에서 생물과 무생물은 같이 있습니다.
무생물에는 생명이 없을까요?
아니요
생물과 무생물은 평등한 생명의식일 수밖에 없지요
생물은 생물의식세계를 무생물은 물질의식세계를 연기합니다.
가슴이 먹먹하도록 신비합니다.
*****
지금 이렇게 의식이 의식한다는 진실
지금 이렇게 존재가 존재한다는 진실
참으로 경이롭고 경이로우며
왜 의식이 의식하는지
왜 존재가 존재하는지는
다만 심장 터지게 경이로울 뿐
알 수 없습니다.
알 필요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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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전하는 소명을 선택한
사람의 아들은 특정 개인이 아니기에
머무는 집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집이고
모든 길이 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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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이 그리운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까요?
모든 길이 그 길이고 모든 길이 집입니다.
우리는 길 위에 있지 않았고 늘 집 위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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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이 가득 찬 항아리를 이고 가는 여인이 있습니다.
배역 개인이라면 가용자원이 극히 미미합니다.
그 파워는 AAA건전지 단 1개입니다.
연기자 단일의식을 알기를 갈망하고 그 지식을 듣기를 진정 원하면
그 파워는 원자력 발전소의 총 전력량을 다 사용할 것입니다.
항아리 안에는 늘 곡식으로 가득 차고
이 세계는 항상 천국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첫댓글 _( )_
합장_( )_
조견은 비추어 만물을 나타나게 한다는 뜻이니,
조견이 곧 의식입니다~
_( )_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여기까지 이르렀고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임을 배웁니다.
한가지 외람된 말씀일수도 있겠으나,
이 모든 바탕은 마치 프랙탈 구조와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일종의 "패턴" 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프랙탈은 영원한 무한 구조이므로,
"의식" 도 피창조물에 지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요
아주 먼 미래에 완벽한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은 너무 전지전능하여서
계(상)를 만들고 또 의식 시뮬레이션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은 다시 무한 반복될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이 세계는 정보일까요.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가슴이 시원해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곧바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비일상적 의식 이야기는 그 어떤 형태의 개인 체험 이야기가 아니며,
그저 "우리 본래면목 의식"에 대한 담담한 진술임을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그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깨달음 체험, 깨닫는 사람, 체험의 소유자, 깨달음과 체험의 상관성, 개별 영혼, 영혼의 진화,
그런 것들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은 그 어떤 것일지라도 장애입니다.
기대나 희망은 개인이 하는 것이기에 유위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다른 이름은 완전한 포기, 완전한 절망입니다.
이것은 가장 깊숙한 비밀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누구에게나 하루에 8시간씩 비일상적 의식이 찾아옵니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은 체험자와 체험대상이 사라지는 비일상적 의식 출현입니다.
만약 지금 있는 것만을 기대하거나 희망한다면,
기대와 희망은 언제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는것 같습니다.
수심결 강의를 듣고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세상에 이런일이!
너무도 맑고 투명 합니다.
구도기를 읽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20년의 세월과 집에 돌아오니 내가 찿고자 하는것이 내 주머니 안에 있었다는것.
제 이야기 같았습니다.
또다시 혼란에 빠지고……또 뭔가를 잡으려하고……
저도 모르겠습니다……왜 이런 글을 쓰는지……
혹시라도 개인 통화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통화드리고 싶습니다.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또한 시절 인연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나눔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반님, 대단히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강독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셨다니, 이 스피커도 많은 위안을 받습니다.
아직 통화나 모임 인연은 하늘이 주시지 않는 듯합니다.
자주 들리셔서 지혜로운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늘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인연따라 책과 유튜브 강의를 알게되었고, 유튜브 링크로 카페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명쾌한 유튜브 강독 잘 듣고 있습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유튜브 동영상에 댓글을 허용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내용도 있어서 악플도 있겠지만, 같은 길을 가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함께 볼 수 있어서 댓글도 많은 도움이 되어서요~
선지식 벗님~
반갑습니다,
강독을 잘 들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강독이 더 진행되어 지고 또 인연따라 댓글도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
정말 솔직한 방랑기 잘읽었습니다.
나자신을찾아 다닌지 저도 어엿30년이 지났네요.
그러나 저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분이계셔서 기뻤습니다.
유튭등등.감사합니다.뵙고도 싶은데 어디에겨시는지..만나뵐수는 있는분인지..
정말 솔직한 방랑기 잘읽었습니다.
나자신을찾아 다닌지 저도 어엿30년이 지났네요.
그러나 저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분이계셔서 기뻤습니다.
유튭등등.감사합니다.뵙고도 싶은데 어디에겨시는지..만나뵐수는 있는분인지..
일단 책 구입해서 다 읽고 싶네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0.31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