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친 답글: '정의 위에 자비... 자비 위에 정의...'
이에 대한 저의 답글:
정의는 자비보다 하위 개념인 듯 합니다.
정의 없이도 자비 실현은 가능할 수 있으나
자비없이 정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자비가 원인제공으로서 시작이라면 정의는 원인제공에 대한 실현의 과정일텐데,
과정없이 시작할 수도 있으나 시작이 없으면 과정은 없을테니까요. 또한 과정 없이도 시작에 대한 실현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니까요.
좀 다른 논리이지만
'예수의 희생 없이도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는가?' 라는 신학적 질문에서 신학적 답은 '가능하다' 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자신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실현에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과정 없이도 구원의 실현은 가능했다(는 전제가 있고 이 전제에 대한 설명은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적 전제라서 생략하고요).
그러나 자신의 아들 희생을 통하여 인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자신 아들의 희생보다 더 크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라고 오늘의 신학은 결론 내리지요.
아들을 희생시켜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정의이며 그렇게 하신 것은 동시에 정의보다 사랑이 더 큰 개념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으므로 정의는 자비 아래 있지만 자비 위에 정의가 있지는 않는 듯 합니다. 즉 자비는 정의를 필요로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사람이 생겨난 것은 자비에 의해서라면 사람인 남자와 여자라는 인간으로 있는 모양은 정의와도 같아 남자 여자가 반대형상이라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조화관계로서 서로 반대모습의 두 인간이 조화되어 곧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결혼생활을 통해 둘이 함께 사람이 되어가는 것으로서 이 또한 신학적으로는 사람이 되어가는 길이 인간완성의 길이요 곧 구원의 길이기도 하겠습니다. 서로 반대의 인간이 조화되면 자식이 탄생하듯 창조의 원리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양철학사상에서 처럼 있는 모양이 서로 반대이면 대립되어 적대관계에 있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동양철학적 시각의 서로 보완관계로서 조화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마주하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혼란스럽거나 아니면 새로운 인식의 기회적 화두로 받아들일 것인지, 이는 각자에게 달린 듯 합니다.
이에 대한 첨가:
성서에 '돌아온 탕자'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갖고 모두 탕진하고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맞아들에게 소를 잡아 잔치를 베플자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충실히 일만 했던 맏이는 아버지의 처사가 불공정하다는 의미의 볼멘소리 한다. 아버지는 맏이에게 '죽은 아들이 살아 돌왔지 않느냐?'고 타이른다. 즉, 옳고 그름보다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아버에게서 자비가 정의보다 더 본질이며 자비와 정의가 맞부딛힐 때 자비를 선택하라는 성서의 메세지는 오늘의 정의구현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면밀한 성찰을 필요로 할 것이리라..., 무엇때문에 정의를 하는 것인가? 왜 정의를 하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놓치고 정의를 선택하는 순간 간접적으로라도 누구든지 살인자가 될 수 있고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을 못살게 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살인일 수 있어 그만큼 선으로부터 멀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