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제일은행 본점
옛 제일은행 본점의 전신은 조선저축은행이다. 한국 최초로 현상공모를 통해 건물 설계안을 채택했으며 1935년 준공됐다.
서울 중구 충무로에는 오래된 역사의 은행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신세계백화점에서 인수해 이름만 달라졌을 뿐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아직 남았다.
원래 이 자리는 1924년까지 본정 경찰서가 있었다. 1931년 조선저축은행이 부지를 매입해 1935년 신청사를 준공한 게 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다.
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의 설계안은 국내 최초로 현상공모를 통해 채택했다. 공모 채택의 조건으로 은행원 복지를 위한 옥상식당, 안전한 금고, 손님 이용이 자유로운 영업실 완비 등이다. 옛 제일은행 본점은 한국 최초의 철골·철근 구조였다.
서민금융 전당을 목표로 삼았던 옛 제일은행 본점은 6·25전쟁으로 한국은행이 파괴됐을 때 7년여 동안 한국은행 임시 본관이 되기도 했다.
□ 저경궁터(남부 호현방 : 조선시대)
저경궁(儲慶宮) : 인빈 김씨의 사당/중구 남대문로 39 한국은행
저경궁(儲慶宮)은 한성부 남부 회현방에 있던 궁으로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이 살던 곳이다. 정원군은 아들이 인조로 등극한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이곳 언덕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궁(松峴宮)’이라 불렀으며, 영조 때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신위를 새로 봉안하면서 ‘저경궁’이라 했다. 인빈 김씨의 신위는 순종 때 육상궁(칠궁)으로 옮겼다.
▲ 서모의 은혜를 잊지 않다
1555년에 태어난 인빈 김씨는 김한우의 딸로 일찍이 궁궐에 들어왔다. 명종비 인순왕후 덕에 14세의 나이로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처음 ‘소용’에 봉해졌다가 ‘귀인’이 되었고, 후에 ‘빈’으로 승격되었다. 인빈 김씨는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은 해(1577년)부터 17년 동안 4남 5녀, 의안군 · 신성군 · 정원군 · 의창군과 정신 · 정혜 · 정숙 · 정안 · 정휘옹주를 두었다. 선조가 인빈 김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장자 의안군에게 소공주궁을 크게 지어 하사할 정도였다. (소공주궁은 현재 서울시 중구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궁이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25세에 죽었다. 인빈 김씨는 생모를 일찍 여읜 광해군을 옹호했는데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했으니, 그녀의 소생들은 모두 탈이 없었다. 그러나 인빈 김씨가 죽은 후 둘째 아들 신성군의 양자로 들어온 능창군(정원군의 아들)이 역모에 몰려 자살했고, 그 때문에 1619년 화병으로 셋째 아들 정원군이 죽었다. 이에 1623년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니 인조다.
인빈 김씨가 죽기 전 선조는 이미 정원군을 그녀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정해놓았다. 장자 의안군은 요절하고, 차자 신성군은 중종과 경빈 박씨의 소생인 복성군에게 양자로 갔으므로 삼자 정원군이 봉사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정원군의 첫째 아들 능양군이 대를 이어야 했으나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기에 인빈 김씨의 제사는 복창군과 그의 양자 의원군이 지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복창군이 ‘삼복의 변’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인조와 인열왕후 소생인 인평대군은 복녕 · 복창 · 복선 · 복평군을 두었는데, 이 사건 전에 복녕군은 이미 죽었다. 1680년 4월 정원로가 허견 등이 복선군을 옹위하고자 한다는 글을 올렸다. “허견이 말하기를, ‘주상의 춘추가 젊으신데 몸이 자주 편찮으시고 또 세자가 없으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감이 임금 자리를 면하려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니, 복선군이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때 복선군이 아무 말도 없었다 하여 역모로 몰려 삼형제가 죽임을 당했다. 이를 ‘삼복의 변’ 또는 ‘경신환국’이라고 한다. 이 사건 후 후손은 연좌되었는데 복창군의 양자로 들어간 의원군은 본가(복녕군가)로 돌아가도록 하여 연좌를 면하게 했다. 의원군은 인평대군의 장자 복녕군의 차남이었다.
이후 인빈 김씨의 4남 의창군에게 양자로 간 숭선군(인조와 귀인 조씨 소생의 장남)이 인빈 김씨의 제사를 지냈고, 그 아들 동평군이 뒤를 이었다. 1688년 동평군이 다시 역모에 몰리자 숙종은 1689년 의원군을 다시 복창군의 후사로 삼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1701년에 숙종은 선조와 정빈 홍씨 소생인 경창군의 후손 임양군에게 인빈 김씨와 의창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이후 여천군의 집에 옮겨진 인빈 김씨의 사당에는 그녀의 아들인 의창군 부부와 증손자인 낙선군(인조의 서2남) 부부, 이렇게 5명의 신위를 함께 봉안하고 있었다. 이에 영조는 사당을 따로 세우라고 명했고, 1748년에 사당이 완성되었다.
▲ 인빈 김씨의 사당, 저경궁
1755년 여천군이 역모죄로 몰리자, 인빈 김씨의 사당을 송현궁으로 옮겼다. 이때 인빈 김씨의 시호를 ‘경혜’로 올리고, 궁호를 ‘저경궁’으로 개칭해 송현궁이 저경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의창군과 낙선군의 봉사를 임시로 인평대군의 증손자 안흥군 이숙(李琡)이 하도록 했다. 안흥군은 의원군의 아들로 날 때부터 귀가 먹고 벙어리였기에 영조와 안흥군은 글로 대화를 나누었다. 안흥군이 글로 아뢰었다.
“소신이 어제 갑자기 두 왕손의 제사를 임시로 주관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의리와 분수로 헤아리면 마땅히 받들어 행해야 하나 제주(題主)를 고치게 되면 절차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의창군 이광은 바로 선조 때의 왕자로 신의 고조부 능창대군 이전의 삼촌이니, 신의 오대 방조(傍祖)입니다. 낙선군 이숙(李潚)은 바로 인조 때의 왕자로 신의 증조부 인평대군 이요의 동생이니, 신의 오촌 증대부입니다. 두 대(代)의 신위를 이제 마땅히 제주를 고쳐야 하는데 일이 변례(變例, 임시로 바꾼 법례)에 관계되니,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헤아려 주소서.”
이에 영조가 글을 써서 보냈다.
“의창군의 신주에는 ‘오대 방조고(五代旁祖考)’라 일컫고, 방제(旁題)에는 ‘오대 방손(五代旁孫)’이라고 일컬으라. 낙선군의 신주에는 ‘증계조고(曾季祖考)’라 일컫고 방제에는 ‘증질손(曾姪孫)’이라 일컫도록 하라.”
이처럼 아들과 손자가 왕이 되었으나, 제사를 받들 봉사손이 역모로 사사되어 인빈 김씨의 신주는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만 했다. 인빈 김씨의 사당은 1755년 영조 때에야 저경궁이 되었고 하마비를 세우게 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하마비에 ‘을해년’(1755년)이라고 새겨져 있는 이유다. 영조는 저경궁에 자주 들렀으며 많은 어필과 기록을 남겼고 그 후 저경궁은 존속해왔다.
1870년 고종이 여러 사당의 신주를 옮기면서 저경궁의 신주를 한성부 북부 양덕방 계동에 있는 경우궁 별묘로 옮기려 했으나 대왕대비(헌종 모 조대비)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908년에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구 제일은행 본점의 전신은 조선저축은행이다. 한국 최초로 현상공모를 통해 건물 설계안을 채택했으며 1935년 준공됐다.
서울 중구 충무로에는 오래된 역사의 은행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구 제일은행 본점이다. 지금은 SC 은행으로 이름만 달라졌을 뿐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 아직 남았다.
원래 이 자리는 1924년까지 본정 경찰서가 있었다. 1931년 조선저축은행이 부지를 매입해 1935년 신청사를 준공한 게 구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다.
구 제일은행 본점 건물의 설계안은 국내 최초로 현상공모를 통해 채택했다. 공모 채택의 조건으로는 은행원의 복지를 위한 옥상식당, 안전한 금고, 손님의 이용이 자유로운 영업실의 완비 등이었다. 구 제일은행 본점은 한국 최초의 철골·철근 구조였다.
서민금융의 전당을 목표로 삼았던 구 제일은행 본점은 6·25전쟁으로 한국은행이 파괴되었을 때 7년여 동안 한국은행 임시 본관이 되기도 했다.
□ 중앙우체국
‘인천우편국 경성출장소(仁川郵便局 京城出張所)’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가 1901년 3월에 ‘경성우편국’으로 개칭했다. 1898년 10월에 신축한 건물을 사용하다 1915년 건물 앞쪽에 다시 3층 높이의 신청사를 건립했다. 지금의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에 해당한다. 현재 2007년 세워진 포스트타워가 자리했다.
1884년에 생긴 조선 최초의 우편 행정기관인 우정총국은 1884년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폐쇄됐고 1895년 종로구 세종로에 한성우체사가 설치되어 업무를 재개한다.
지금의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에 해당하는 경성우편국은 르네상스풍 석조건축물로 조선총독부 건물과 함께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과 석조가 혼합된 외양에 지붕은 돔 형식이었으며 창틀은 아치형으로 우아했다.
경성우편국 앞쪽으로 나중에 미쓰코시와 조선은행이 건립돼 번화가를 이루게 된다. 이 건물은 6·25전쟁으로 파괴돼 골조만 남았다가 3층 건물로 복구했으나 1980년 철거하고 청사를 새로 건립했다가 포스트타워를 새로 지었다. 2007년 완공된 현재의 중앙우체국인 포스트타워는 친환경 건축물 최우수 등급, 첨단시스템 구축으로 인텔리전트 1등급을 받았다.
□ 홍영식 동상
서울 중앙우체국 앞에 2011년 11월 14일 한국우정의 아버지 홍영식 동상이 설치됐다.
한국의 근대우정은 1883년 홍영식이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뒤 우편의 중요성을 고종께 진언해 1884년4월22일 우정총국을 개설하고 초대 우정총판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같은 해 11월18일에는 서울·인천 간에 최초로 우편업무를 개시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식 우편시대를 열었다.
홍영식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개화사상 공부를 하다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우의정에 올랐다가 청나라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군인에게 죽임당하며 업무중단됐다.
기단 상단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5종을 조각했다. 하단부는 최초로 사용한 일부인을 조각해 근대적 우편제도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조형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