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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봐야크헬 (그리고 그가 모았다) | 출 35:1-38:20 | 왕상 7:40-50 | 고후 9:6-11 |
<단락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랑 하나님께 결혼 서약서인 ‘토라’를 받고 난 이후 영적으로 높은 차원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가지 않아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 진멸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번 주 토라포션 ‘키 티사 (들어 올려지다)’에서 모세의 중보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통해 다시 그들을 영적으로 회복시키고 살아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가 예슈아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고 새롭게 태어났다면, 죄 가운데서 빨리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똑같은 죄를 반복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은 이번 주 토라포션 ‘봐야크헬 (그가 모았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출애굽기 40장 35절에 ‘...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이 땅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2,500년 후에 모세의 장막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에 여호와의 쉐키나 영광이 회복됩니다 (출 25:8-9, 출 35:20-22).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힘든 광야의 여정에 있더라도 성막 안으로 들어간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그들은 성막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1. 출 35: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봐야크헬)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하나님은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까지 성막 (히 : 미쉬칸 : 하나님의 집, 새 예루샬라임)에 관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출애굽기 35장부터 39장가지 성막을 만드는 과정을 더 자세하게 반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성막은 신랑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가 함께 거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막은 왕이신 예슈아가 이 땅에 다시 오시게 되어졌을 때에 이 땅에 임할 새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며, 이 땅은 창세기 1장, 2장에 나와 있는 에덴동산의 모습으로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금송아지 우상숭배를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가운데 용서를 받고 다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온 회중’ 이라고 부르는데, ‘온 회중’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에다’는 ‘에드’에서 파생된 말로 ‘증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이 시작된 자가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모이게 (히 : 야크헬) 됩니다. 히브리어 ‘크헬’은 ‘카할 (교회)’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아 모이는 곳입니다. 우린 한 사람마다 한 사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부르심을 일찍 찾고, 어떤 이는 늦게 찾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개인의 부르심을 예슈아의 피 값으로 산 교회의 부르심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친목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내기 위해 함께 동행하며, 함께 좁은 문 좁은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교회의 부르심은 무엇일까요?
1) 행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에 나온 순교자 스데반 집사는 모세의 장막을 ‘광야교회’ 라고 표현합니다. 광야 교회의 히브리어는 ‘카할 베 미드바르’입니다. 즉, 초대교회의 모습은 구약시대 성막의 모습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에 가까이 나아가 하늘에 있는 성전의 모습을 직접 보았으며, 하나님은 본 그대로 성막을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25:8-9). 그리고 사도요한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는 것과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계 11:19).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를 직접 본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새 예루샬라임 성전을 사모하였고, 이 땅에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메시야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상을 얻게 될 것을 바라보았고, 세상의 중심인 예루샬라임에서 예슈아와 함께 온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날을 위하여 이 땅 광야와 같은 곳에서 신랑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신부의 모습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계 21:2, 계 21:10-11, 계 21:22-24).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샬라임 성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예슈아를 믿는 믿음을 지킨 신부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계 14:12). 이 과정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모든 대가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슈아를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성경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왕이신 예슈아의 권위를 위임한 교회 공동체의 권위 안으로 들어가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권위는 전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성령 충만하다, 예슈아는 나의 주님이시다,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이는 헬라의 가르침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가르침)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신앙과 삶을 분리시키며 (영지주의), 개인 이기주의 신앙생활과 기복주의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 결과 마태복음 22장 39절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개인적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엡 2:20-22, 고전 3:16-17). 마태복음 16장 18절에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말씀합니다. 참고로 사도행전 7장 38절에 이미 교회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반석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시 내 교회를 재건하신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레미야 31장 4절에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초림 예슈아는 예레미야 31장 4절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슈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반석) 위에 다시 재건하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광야 교회를 만드시고 제일 먼저 안식일 (히 : 샤밧)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단락 2> 2. 출 35: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하나님은 성막건축을 명하시기 전에 샤밧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도 피우지 말라’는 말씀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 즉, 샤밧이란? 우리의 모든 일을 멈추고 신랑 하나님께 집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마다 샤밧을 지키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예행연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샤밧 때에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 집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물론,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중요하며, 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성한 의무입니다 (창 1:27-28). 그러나 샤밧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며, 우리의 마음이 분주하여 하나님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의 시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샤밧 때에 분주하고, 게으르게 하며, 낭비하게 하여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게 하며, 결국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시간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샤밧에 출근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선, 샤밧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를 하며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샤밧은 단순히 노동하는 일만 멈추는 것이 아닌, 세상적인 생각과 감정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 47절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 (쉐마)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자아 (생각, 감정, 계획, 뜻)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아주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갑자기 드는 생각들을 성령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하고, 영적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 좋은 생각이 들어오게 되어지면은, 그 생각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빨리 전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의심이 들기 시작하며, 신뢰감이 떨어지며,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15절에 예슈아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기반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인본주의적 문화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슈아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을 지켜라’는 것은 조건부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지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실일날 시간과 공간의 초월하셔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이곳에 임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멍에의 헬라어 뜻은 ‘연합’ 입니다. 예슈아의 멍에를 매고 있는 사람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쉼이란? 우리의 자아가 예슈아의 십자가에 죽고, 예슈아의 부활에 연합할 때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환경과 재정과 관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샤밧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하루 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믿음의 훈련을 통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멍에를 매고 있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을 보호하고, 파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땅의 일을 멈추고, 하늘의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 분을 기억하고, 그 분을 높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샤밧을 지키는 것이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의 표징이며, 영원한 언약’ 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출 31:16-17). 그래서 샤밧은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를 구분 지을 수 있는 표징입니다.
1) 출 35: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승리의 전리품을 취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승리의 전리품을 우상숭배하는데 사용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신을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하게 됩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위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을 섬기는 행위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하나님은 신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권리포기와 대가지불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가 없는 성도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계속해서 지어져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슈아께서 지상재림 하시는 그 날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