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분쟁과 전란에 대해 살펴보았지요. 이번 글에서는 무령왕의 대내외적 활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북위 고조의 권력 강화와 남북조의 소강상태
가을 7월 갑오일(13일)에(秋七月甲午),(북)위에서는 고귀빈을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魏立高貴嬪為皇后)。상서령 고조는 더욱 귀하고 무겁게(중요하게) 되어 권세를 부렸다(尚書令高肇益貴重用事)。(고)조는 이전 조정의 옛 제도를 많이 바꾸고(肇多變更先朝舊制),봉지와 녹질을 줄이며(減削封秩),공신들을 억누르고 쫓아내니(抑黜勳人),이로 말미암아서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찼다(由是怨聲盈路)。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47(卷一百四十七) 「남북조 양기3 무제 천강 7년(서기 508년)」
보통 이런 기록이 남는 경우는 신흥세력이 훈구세력을 제압했을 때 상투적으로 나오는 내용입니다. 고조를 그저 흔하디흔한 간신으로 묘사하는 경우지요. 그렇지만 고조가 무턱대고 얄팍한 인물이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고조의 인물됨이야 어떻든 고구려는 서쪽에 대한 근심을 덜었지만 당장 백제에 대해 공세를 취하지는 않았지요.
백제와 고구려가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도 중국 남북조는 다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국력 소모가 뒤따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인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남북조는 각자 군대를 철수시킵니다. 종리 전투 이후 형세가 일단 남조 양나라 쪽에 유리한 상황이었지요. 그렇기는 해도 양나라 측이 북위를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의 전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요.
② 무령왕의 대왜(對倭) 외교(外交)와 내정 정비
북위에 대한 고구려의 적극 외교가 있듯이, 무령왕도 와코쿠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령왕의 적극 외교가 통했는지 와코쿠(왜국)에서도 백제와 외교관계를 이어 나가지요. 원전을 살펴보지요.
3년(서기 509년) 봄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임나(任那)의 일본(日本) 현읍(縣邑)에 있는 백제의 백성으로 도망하여 호적에서 빠진 지 3·4대(代) 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넣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7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 계체천황(繼體天皇)」
임나라는 곳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혹은 어떤 성격의 지역인지는 논란이 많습니다. 학계의 해묵은 논쟁이고 이른바 재야사학에서도 뜨거운 쟁점이니까요. 어떻든 여기에서의 요점은 무령왕이 백제민들을 늘리기 위해 애썼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무령왕은 자국민을 다시 늘리기 위해 이런저런 방안을 강구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지요.
한편 중국 남북조의 상황은 분쟁 이후의 긴장 관계로 미묘했습니다. 양 무제 소연이 다시 공격할까 두려워진 북위 정부는 서기 510년 용장 양대안 장군을 다시 등용하였고, 회수와 비수 방어를 위해 파견했지요. 당시 사람들은 양대안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수차례 양 무제 소연의 공격을 방어해냈지요.
백제 입장에서는 양나라가 적당히 어려워져야 외교하기에도 편했으니 내심 좋았을 것입니다. 이런 남북조의 신경전과 아울러 앞에서 보셨듯이 무령왕이 고구려·말갈군을 격파하자 당분간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고구려가 백제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고 북위에 대한 적극 외교로 방향 전환을 했을 때, 무령왕은 이 기간을 활용하여 내정을 정비했던 모양이고요.
10년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중앙과 지방의 놀고먹는 자들을 몰아 농사에 힘쓰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6 「백제 본기 제4 무령왕(武寧王) 10년(서기 510년) 봄」
무령왕이 제방을 튼튼하게 한 조치는 국가 주도적 정책을 통해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조치로 보입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 상실 이후 수리 관개시설의 확충을 통해 금강 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나아가 국가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지요. 무령왕은 이와 더불어 일종의 ‘일자리 창출’ 사업을 병행했던 것 같습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이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방치되어 있던 떠돌이 백성들을 백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구제도 하고 통제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즉 떠돌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을 땅도 나눠주고 정착도 시켜주는 대신 세금도 거두고 했다는 것이지요. 수리 관개시설 어쩌고는 쉽게 말해 농사지을 물을 끌어올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춰줬다는 말입니다.
③ 북위 실세 고조의 세력 감퇴
서기 511년에는 이른바 한륙도(한반도와 만주)의 4국 모두 별반 큰일은 없었던 듯합니다. 참고로 이 해는 고구려 문자명왕 21년, 백제 무령왕 11년, 신라 지증왕 12년이었지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는 삼국 모두 내정에 전념했던 것 같습니다. 북위와 양나라의 경우도 사면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대체로 내정에 우선순위를 보이고 있고요.
무령왕이 고구려의 문자명왕과 남조 양나라에 대해 외교 경쟁을 하기 두세 달 전에 북위에서는 관리들의 위치가 다소 변화했습니다. 원전을 살펴보지요.
병진일(25일)에 (북)위는 거기대장군·상서령인 고조(高肇)를 사도로 삼고, 청하왕 원역을 사공으로 삼고, 광평왕 원회를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의동삼사를 더하여 주었다.
고조는 비록 삼사에 올랐지만, 오히려 자신이 요직을 떠났기 때문에 언사와 얼굴색에서 불평의 모습을 나타내니,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그를 비웃었다.
『자치통감』 권147 「남북조 양기 3 무제 천감 11년(서기 512년) 정월(1월)」
내용은 이리저리 깁니다만 핵심 줄거리는 나름 간단합니다. 표면상으로는 고조가 사도라는 높은 벼슬로 승진했지만, 이것은 이른바 ‘명퇴’에 가까운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거기대장군과 상서령으로 군사적·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유리한 위치에서 물러났다는 말입니다. 고구려인이자 친고구려파인 고조의 동요는 고구려 문자명왕에게는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