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 | 舍 | 傍 | 啓 | 甲 | 帳 | 對 | 楹 |
남녘 병 | 집 사 | 곁 방 | 열 계 | 갑옷 갑 | 휘장 장 | 대답할 대 | 기둥 영 |
병사(丙舍) 곁에 통로를 열어 두었다. 이는 궁전(宮殿) 내(內)를 출입(出入)하는 사람들의 편리(便利)를 도모(圖謀)하였음을 일컫는다. | 갑장(甲帳)은 기둥 사이에 마주하고 있다. 이는 동방삭(東方朔)이 갑장(甲帳)을 지어 임금이 잠시(暫時) 정지(停止)하는 곳임을 일컫는다. |
※ 병사(丙舍)
병사(丙舍)는 후한(後漢)의 궁중(宮中)에 있던 정전(正殿) 양쪽에 있던 신하들이 머무는 전각(殿閣)으로, 궁궐(宮闕)에는 갑사(甲舍), 을사(乙舍), 병사(丙舍), 정사(丁舍) 등의 별채를 두었다고 한다.
※ 갑장(甲帳)
갑장(甲帳)은 칠보(七寶)의 구슬로 장식하고 야광주(夜光珠) 등 보옥(寶玉)으로 만든 것으로 신전(神殿)에 둘렀고, 그 다음으로 을장(乙帳)이 있는데 어전(御殿)에 둘렀다고 하는데, 이것을 한무제(漢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만들었다고 한다.
※ 동방삭(東方朔)
중국 전한(前漢)의 문인(文人)으로 자는 만천(曼倩)이다.
기언기행(奇言奇行)으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아 수십 년 간 측근으로 있으면서 태중대부급사중(太中大夫給事中)까지 올랐으나, 재산을 모두 미녀들에게 탕진했으며, 광인(狂人)이라고 불렸다.
한때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상주(上奏)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하여, 답객난(答客難)ㆍ비유선생지론(非有先生之論)을 비롯한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한대(漢代)부터 그에게 황당한 글들을 가탁(假託)하는 것이 유행하여, 지금도 신이경(神異經)ㆍ십주기(十洲記)가 동방삭(東方朔)의 저서로 전해지지만 모두 진(晉) 이후의 위작(僞作)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를 먹어 대단히 오래 살았다고 한다.
동방삭(東方朔) 설화(說話)는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널리 전승되어 왔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동방삭(東方朔)이 목숨을 연장하게 된 것은 저승사자를 잘 대접했기 때문으로 이야기된다. 대접을 받은 저승사자는 삼십갑자(三十甲子)를 살게 되어 있는 동방삭(東方朔)의 수명을 삼천갑자(三千甲子)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고난 동방삭(東方朔)이 붙잡히지 않자, 마고(麻姑)가 동방삭(東方朔)을 잡으려 계교(計巧)를 꾸몄는데, 바로 냇가에서 숯을 씻는 것이었다.
어느날 동방삭(東方朔)이 지나가다 숯을 씻고 있는 이유를 물었고, 마고(麻姑)가 숯을 씻으면 하얗게 된다하여 씻는다고 대답을 하자, 동방삭(東方朔)은 자기가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지만 처음 듣는 소리라고 말해, 결국 자신이 동방삭(東方朔)임을 노출함으로써 잡혀갔다고 한다. 056. 丙舍傍啓(병사방계) 甲帳對楹(갑장대영
肆 | 筵 | 設 | 席 | 鼓 | 瑟 | 吹 | 笙 |
베풀 사 | 대자리 연 | 베풀 설 | 자리 석 | 북 고 | 비파 슬 | 불 취 | 생황 생 |
돗자리를 펴 자리를 마련하다. | 비파(琵琶)를 타고 생황(笙簧)을 분다. |
궁궐(宮闕)에서 연회(宴會)를 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
※ 비파(琵琶)
목이 짧은 중국식 류트로, 중국 악극의 관현악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며 독주악기로도 쓰인다.
중국의 석명(釋名)에 따르면 비파(琵琶)는 밖으로 타면 비(琵), 안으로 타면 파(琶)라고 한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는 서아시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중국에는 2세기경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비파(琵琶)의 형태는 목제 앞판이 달린 배 모양의 얇은 몸체로 되어 있으며, 때때로 몸체에 초승달 모양의 소리구멍 2개가 나 있는 것도 있다.
목 부분에 볼록한 형태의 줄받이가 4개, 그리고 앞판에는 6~13개의 줄받이가 달려 있다.
앞판에 장치된 죄임쇠에서부터 등이 굽은 줄감개집의 양 옆에 붙어 있는 원뿔형의 조율용(用) 줄감개까지에는 견사로 만든 4줄의 현이 달려 있다.
넓적다리에 비파(琵琶)를 수직으로 세우고 술대로 타서 연주한다.
중국 비파(琵琶)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으나, 우리나라 비파(琵琶)에는 당비파(唐琵琶)와 향비파(鄕琵琶) 2종류가 있다.
당비파(唐琵琶)는 사현비파(四絃琵琶)ㆍ곡경비파(曲頸琵琶)라고도 하며, 향비파(鄕琵琶)는 오현(五絃)ㆍ오현비파(五絃琵琶)ㆍ직경비파(直頸琵琶)라고도 한다.
향비파(鄕琵琶)는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연주되었는데, 중국의 문헌인 수서(隋書)와 북사(北史)의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高句麗)의 악기로써 오현(五絃)이 소개되어 있고, 고분벽화에도 비파(琵琶) 그림이 보인다.
오현(五絃)이란 5~6세기경 고구려(高句麗)의 음악에 사용되었던 오현비파(五絃琵琶)를 말하는데, 신라(新羅)는 오현비파(五絃琵琶)를 향비파(鄕琵琶)라고 불렀다.
신라(新羅)의 삼현삼죽(三絃三竹) 가운데 삼현(三絃)이란 거문고ㆍ향비파(鄕琵琶)ㆍ가야금(伽倻琴)을 말한다.
비파(琵琶)는 중국을 거쳐 고구려(高句麗)에 전해졌고,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다.
당비파(唐琵琶)는 남북극시대(南北國時代)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문헌은 고려사(高麗史)의 문종(文宗) 30년 때 기록에 처음 나타나며,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당악(唐樂)에만 사용되었으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서 향악(鄕樂)에서도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연주되지 않는다.
참고로 남북극시대(南北國時代 ; 698년 ~ 926년)는 신라(新羅)의 삼국 통일과 발해(渤海)의 건국부터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우리나라 역사의 시대구분으로, 신라(新羅)를 남국(南國)ㆍ발해(渤海)를 북국(北國)이라 칭한다.
일본의 비파(琵琶)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줄받이가 4개뿐인 일본 비파는 설화와 궁정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생황(笙簧)
생황(笙簧)은 관악기(管樂器)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 전통악기 중에서 유일한 화음악기이며 아악기(雅樂器)로 분류된다.
생황(笙簧)은 서로 길이가 다른 여러개의 대나무 관이 꽂혀 있는 박으로 만든 토대에 취구(吹口)를 통해 들숨과 날숨으로 여러 화음을 내는 악기로 전통적으로는 17관, 오늘날에는 24관의 생황(笙簧)이 주로 쓰이고 있다.
생김새가 봉황(鳳凰)이 날개를 접은 모양이라고 해서 봉생(鳳笙)이라고도 한다.
생황(笙簧)은 본래 중국의 악기로 언제 우리나라에 유입이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찰(寺刹)의 범종(梵鐘)이나 탑(塔)에 생황(笙簧)을 연주하는 사람이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에는 생황(笙簧)을 '마치 봄 볕에 모든 생물이 돋아나는 형상을 상징하고 물건을 생(生)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영종대왕실록(英宗大王實錄)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황엽장()의 사망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생황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중국에서 구입해 연주를 했으며, 중국에 악사를 보내 그 제조법을 구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명맥을 이어오던 생황(笙簧)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맥이 끊기게 되었다가 다시 조명된 악기이다.
057. 肆筵設席(사연설석) 鼓瑟吹笙(고슬취생
陞 | 階 | 納 | 陛 | 弁 | 轉 | 疑 | 星 |
오를 승 | 뜰 계 | 바칠 납 | 섬돌 폐 | 고깔 변 | 구를 전 | 의심할 의 | 별 성 |
계단(階段)을 올라 납폐(納陛)를 하니... | 변(弁)이 맴돌아 별로 의심할 정도이다. |
문무(文武) 백관(百官)이 계단(階段)을 올라와서 임금께 납폐(納陛)를 하는데, | 움직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모자에 있는 장식(粧飾)이 흔들려 마치 별처럼 보인다. |
※ 납폐(納陛)
납폐(納陛)는 고대 중국의 황제(皇帝)가 큰 공을 세우거나 크게 신임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특전인 구석(九錫)의 하나이다.
※ 구석(九錫)
반고(班固)가 편찬한 전한(前漢)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인 한서(漢書)에는 구석(九錫)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거마(車馬) | 이동 시 두 대의 수레가 움직이는데, 그 중 큰 수레는 제후(諸侯)가 타고, 작은 수레는 호위무사(護衛武士)가 탄다. 검은 소 두필과 누런 말 여덟필로 수레를 이끌게 한다. |
의복(衣服) | 곤룡포(袞龍袍)에 면류관(冕旒冠)을 착용하고 붉은색 신발을 신는다. |
악기(樂器) | 조정(朝廷)이나 집에서 음곡(音曲)이나 가무(歌舞)를 감상하는 것을 허용한다. 천자(天子) 앞에서는 팔일무(八佾舞), 왕(王) 앞에서는 육일무(六佾舞)를 추도록 한다. |
주호(朱戶) |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할 수 있다. 일반 신하들은 이렇게 할 수 없다. |
납폐(納陛) | 황제(皇帝) 앞에서 자유롭게 신을 신고 칼을 찬 채로 알현(謁見)할 수 있다. 황궁(皇宮)내 전상(殿上)에 오르려면 원래 신발을 벗고 무장해제(武裝解除)하여야 한다. |
호분(虎賁) | 300명 가량의 호위병(護衛兵)을 사사로이 데리고 다닐 수 있다. |
부월(斧鉞) | 도끼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이 도끼의 이름은 부월(斧鉞)로 살생권(殺生權)의 상징으로 주는 것이며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다만 이 것은 구석(九錫)으로서가 아니라도 출정하는 장수에게 주살(誅殺)을 허락하는 뜻으로 주는 경우가 많았다. |
궁시(弓矢) | 붉은 활 한벌과, 붉은 화살 백개, 그리고 검은 활 열벌과 화살 3천개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이는 역적(逆賊)을 마음대로 토벌(討伐)해도 좋다는 권한의 상징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석(九錫)을 취득한 자가 반대파를 맘대로 숙청해도 되는 권리였다. |
거창규찬(秬鬯圭瓚) | 거창(秬鬯)과 규찬(圭瓚)으로 조상의 제사에 사용할 수 있다. 거창(秬鬯)은 검은 고량(高粱 ; 수수)로 빚은 술이며, 규찬(圭瓚)은 옥(玉)으로 만든 제기(祭器)를 말하는데, 이것은 천자(天子)의 종묘(宗廟) 제사(祭祀) 때 사용되는 것이다. |
※ 변(弁)은 관(冠)의 일종으로 남자가 쓰는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말한다.
058. 陞階納陛(승계납폐) 弁轉疑星(변전의성)
右 | 通 | 廣 | 內 | 左 | 達 | 承 | 明 |
오른쪽 우 | 통할 통 | 넓을 광 | 안 내 | 왼 좌 | 통달할 달 | 이을 승 | 밝을 명 |
오른쪽은 광내(廣內)로 통(通)한다. | 왼쪽은 승명(承明)에 이른다. |
황제(皇帝)가 조회(照會)를 하고 정사(政事)를 보던 궁궐(宮闕)의 중심인 정전(正殿)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광내전(廣內殿)이 위치하고 왼쪽에는 승명전(承明殿)이 위치하고 있음을 말한다. |
※ 광내전(廣內殿)
광내전(廣內殿)은 황제(皇帝)의 서고(書庫)로 이곳에 보관된 서적(書籍)들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 승명전(承明殿)
승명전(承明殿)은 사기(史記)를 교열(校閱)하는 등 학자들이 저술(著述)과 기록(記錄) 등을 하던 곳이다.
059. 右通廣內(우통광내) 左達承明(좌달승명)
旣 | 集 | 墳 | 典 | 亦 | 聚 | 群 | 英 |
이미 기 | 모을 집 | 봉분 분 | 법 전 | 또 역 | 모을 취 | 무리 군 | 꽃부리 영 |
이미 분전(墳典)을 모았다. 분전(墳典)은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준말로, 삼분(三墳)은 삼황(三皇)의 글을 말하고,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글을 말한다. | 또한 군영(群英)을 모았다. 군영(群英)이란 재능(才能)이나 지혜(智慧)가 뛰어난 많은 사람들을 말한다. 즉, 많은 뛰어난 인재(人才)들을 모았다는 말이다. |
분전(墳典)을 강론(講論)하고 많은 인재(人才)들을 모아 치국(治國)하는 도(道)를 밝혔다는 의미이다. |
※ 삼황오제(三皇五帝) -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중국 역사상 삼황오제(三皇五帝)에 관한 설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후대에 재창조된 신화(神話)이기 때문에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의 구성원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주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서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神話)는 계속 재창조되었다.
060. 旣集墳典(기집분전) 亦聚群英(역취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