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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소쇄원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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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 총림 백양사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632년)때 창건했다고 전한다. 거대한바위를 배경으로 좌우에 맑고 찬 계곡물이 흘러내려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가을단풍을 비롯하여 일년내내 변화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대웅전, 극락보전, 사천왕문은 지방문화재로 소요대사부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는 숲길을 지나 백양사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쌍계루가 눈에 띈다. 앞에는 계곡을 막아 만든 연못, 뒤로는 기암절벽이병풍처럼 서 있어 연못물에 어른거리는 쌍계루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쌍계루를 지나면 대웅전과 극락보전, 부도탑이 나온다. 백양사는 창건 당시 백암사였다가 고려 때 정토사로 바뀌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조사가 불경을 읽을 때마다 흰양이 설법을 들었다해서 백양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선도량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던 고승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일제 때 2대 교정(종정)을 지낸 환응, 조계종 초대 종정 만암, 태고종 초대 종정 묵담등 근래에 와서 서옹당 종정 등 고승만도 5명이나 된다. 등산로 쪽으로 올라가면 암자가 많다. 약사암과 운문암, 천진암 등은 경관도 뛰어나다. 절 입구에서 20분 거리인 약사암은 전망대 격으로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백양사의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절 경내와 맞은 편에는 난대성의 늘푸른나무인 비자나무 5,000그루가 군락을 이뤄,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0.5km 구간에 우거진 수백년된 아름드리 갈참나무 거목들, 3,000여 그루의 고로쇠나무와 비자림은산림욕 하기에 더없이 좋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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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호 백암산의 깊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황룡강의 상류를 막아 4개 시. 군. 구의 농토를 적셔주는 젖줄 구실을 하고 있다. 최근들어 장성호는 낚시터, 수상스키, 카누 등 전국적인 수상 관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하얀 포말과 함께 수면을 가르며 질주 하는 수상스키와 잉어, 쏘가리, 빙어, 붕어 등이 많아 강태공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 장성호는 장성관광의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댐 아래 넓게 설치된 주차장과 다목적 광장은 가족이나 직장동료들의 단체활동이 가능하며, 인근 주변 미락단지의 음식맛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할 정도이다.
장성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자리잡은 장성호 관광지는 수려한 경관의 장성호를 끼고 있어 입지적 요건도 좋아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멈추는 곳이다. 장성호 상류 중간지점인 관광지에는 야영장, 가족유희장, 취사장 등의 공간이 조성되어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며, 주위의 산책과 수상관광을 즐길 수 있어 장성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와 야외공연장이 조성되어 장성호와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한 눈에 즐길수 있다.
※수상스키 문의처 : 392-0650(강변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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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입암산성 갈재에 연해있는 입암산성은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687m로 절벽이 많고 산세가 험준하여 옛부터 전략요새지로 알려진 산성이다.
산성의 형태는 산봉을 둘러싸듯 포곡식으로 된 전형적인 산성으로 총 길이는 약 15km쯤 쌓았으며 성의 길이는 3m이고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그대로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성의 밑부분은 백제 것이며, 상부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기토부분에 종출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지표수가 자연스럽게 방출된 점 등에서 선조들의 자연 이용의 지혜를 엿볼수 있다. 서쪽의 갓바위에서는 남쪽으로 넘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고, 사방이 높고 중간은 넓어 외부에서 성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요새지다.
고려말 몽고에 대항할 때에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국난극복의 요충지로서 효종 때에는 성을 개축하여 둘레 길이가 2795보에 달했다. 또한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성내에 흐르는 계곡물로 만들어진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을 더 파서 물걱정이 없게 되었다.
성내 건물로는 대관을 두고 그 동·서에 두각, 그 좌우로는 월곽이 있었다. 이 외에 성안에는 5개의 사찰이 있었고, 승장 1명을 두었으며, 각종 무기를 두는 군기고와 군량 7천석 이상을 비축할 수 있는 창고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정연하게 쌓은 성벽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많은데다 남북의 두문이 남아 있어서 웅장했던 성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으며, 피와 땀으로 내 나라를 지키려던 조상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한 매우 유서 깊은 호국유적이다. 이 성에는 임진때 순절한 별장 윤진의 순의비가 남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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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남문 창의비(長城 南門 倡義碑) 이 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1592)와 이듬해(1593)5월, 그리고 정유년(1597)8월등 3차에 걸쳐 장성 남문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단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조2년(1802)에 건립한 것이다. 1차 남문창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 24일, 김경수 선생을 맹주로 하여 일어났다.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 들어, 그해 11월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고 1,651명의 의병이 496석의 군량미를 가지고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켰다. 그 후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 선생은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 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강한 군사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이것이 바로 2차 남문창의인데, 김경수 선생의 두 아들 극후(克厚)와 극순(克純)이 의병 836명을 이끌고 동년 6월 진주성 혈전에 참전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 의승 70명과 1천여명의 의병이 3차 남문창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안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커서 화군하였다. 남문창의에 참여한 의병장 72위를 오산창의사에 모시고 매년 향화를 올리고 있다.
비의 형태는 108-56cm크기의 사각형 비좌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옥개석을 올렸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을 만들었은데 비각의 지붕형태는 팔작으로 공포는 익공식이다. 비문은 4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전면 중앙에 "호남오산남문창의비"라 비제를 새기고 제현위차, 자제종사, 동창, 의승장, 사노등의 의병단의 중요인물 77명의 직과 성명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새겨진 오산은 장성의 별호이다. 그리고 좌하단에 "만력임진이백십일임술"이라는 건립연대를 명기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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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 영화 민속촌 초가 축령산을 뒤로 한채 동향으로 자리잡은 마을로 태양광선이 좋고 소음 차단이 완벽한 지역으로 영화촬영의 최적지이다. 지금까지 금곡마을은 오지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50~60년대의 마을경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30여개의 고인돌, 연자방아, 당산나무 당산석, 모정, 가옥 등 전통유적이 산재해있다. 마을 어귀의 울창한 당산나무로 시작해 고샅길 넘어 싸리나무 담장에 초가집, 다랑이 논, 황소를 이용한 재래식 영농법, 동네 어귀에서 만난 주름진 할머니의 표정까지 모두 박물관에서나 만날 법한 순 토종이다.
이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이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남면이 고향인 임권택 감독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 '태백산맥'(1994년 제작)과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1998년 제작) 이 외에도 김수용 감독의 '침향'을 비롯하여 MBC TV 드라마 '왕초' 등이 이 곳에서 촬영했다. 또 화가 황순칠이 이 마을을 주제로 한 작품 '고인돌 마을'로 지난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영예를 안았다. 실제로 마을 건너 들판에 여기저기 고인돌이 놓여있어 마을의 유래가 깊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바로 인접해 있는 국내 최대의 삼림욕장인 축령산 휴양림과 연계하여 지난 1995년 부터 전통초가집 건립, 전선주의 지중화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영화 · 민속촌으로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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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휴양림 전북 고창과 경계를 이룬 축령산 일대에는 4~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늘푸른 상록수림대 80여만평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독립가였던 춘원 임종국선생은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무임목지에 1956년부터 30여년간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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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박수량 백비(白碑) 아곡 박수량 선생은 25세에 등과하여 64세까지 39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공직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했을 뿐 명예와 재물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명종은 박수량 선생이 너무 청백하다는 말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그의 생활을 알아 보았더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집은 낡아서 비가 샐 정도라고 하였다.
박수량 선생은 1554년(명종 9년) 1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 장사를 지내 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고 유언을 했다. 명종께서는 선생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며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판서까지 지낸 분이 운상비가 없어 고향으로 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는 비용을 마련해 주고 예장을 명하였다.
그리고 서해 바다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하였는데, 비문을 새기다가 선생의 고결한 삶에 자칫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 그대로 묘 앞에 비문이 없는 돌을 세우니 이 비가 유명한 「白碑」이다. 그 뒤 박수량 선생은 1806년(순조 11년) 2월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성군은 박수량 선생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하여 군청광장에 모형 백비를 세워 현재의 공직자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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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생가 >> 내부구성 :
홍길동 자료관련 영화관
홍길동 자료관련 국내외 학술자료
전시실 체험 코너 : 홍길동 잡기, 바위들기 체험
전시실 기타 구성 : 발굴지 출토유물 10점, 생가모형, 캐릭터 모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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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 서원 서원이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를 주향하고 고암 양자징을 배향한 서원이다. 하서 김인후의 자는 후지, 호는 담재이며 기묘사화 후의 도학 발흥기에 살았다.
그는 모재 김안국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과교류하면서 심성학을 연마하였고 사가독서를 거쳐 정자·박사·부수찬등을 지내다가 을사사화 후에는 퇴거하여 출사하지 않고 오직 성·경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고 그 외에도 천물·지리·율력에도 밝아《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를 비롯한 저술과 그의 시문집인《하서집》을 남기고 있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2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 서원의 문루인 곽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 상하 18칸의 이층 기와집으로 영조 연간에 두번 중개수되었고 문루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문루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 청절당이 있는데 이 건물에는 9칸 대청과 좌우의 3칸 협실이 있고 대청에는 송동춘의 글씨로 된 편액이 있으며 처마 밑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로 된 필암서원이란 편액이달려있다. 그 뒷편 서측의 숭의재와 동측의 진덕재는 영조와 고종 때 중개수된 것으로 서원의 동서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재호는 모두 동춘 송준길의 글씨이고 각기 6칸 13평이며 대청과 좌우에 협실이 있다. 서재 옆으로 3칸의 경장각이 있어서 인종의 어필묵죽을 소장하였고 액호는 정조의 어필이며 청절당 뒷편 중앙에는 사묘로 들어가는 신문이 있는데 그 뒤에는 사묘인 4칸반의 우동사가 배치되었고 북벽에는 하서를 동벽에는 고암을 향사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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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 서원(鳳岩書院) 이 서원은 조선( 朝鮮 ) 숙종( 肅宗 ) 23년(1697)에 망암( 望菴 ) 변이중( 邊以中 )(1546∼1611)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고종( 高宗 ) 5년(1868) 서원철폐령( 書院撤廢令 )에 의해 훼철되었던 것을 1976년 유림( 儒林 )과 후손( 後孫 )들이 1차 중건하였고, 1984년 새로 복원하였다. 망암 변이중 선생은 선조( 宣祖 ) 5년(1572) 사마시( 司馬試 )를 거치고,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화차( 火車 )와 총통( 銃筒 )을 발명하고 순찰사( 巡察使 ) 권율( 權慄 ) 장군( 將軍 )을 지원, 행주대첩( 幸州大捷 )을 이루게 한 분이다. 변이중 선생은 이곳 사당에 주향( 主享 )되었고, 임진왜란 때 입암산성( 笠岩山城 )에서 순절한 윤진( 尹軫 ) 장군( 將軍 ), 광해군( 光海君 ) 때의 간신 이이첨( 李爾瞻 ) 등을 상소공책( 上疏攻責 )하였던 자하( 紫霞 ) 변경윤( 邊慶胤 )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숙종조( 肅宗朝 ) 대유학자인 청류당( 廳流堂 ) 변휴( 邊烋 ) 선생을 추배( 追配 )하였다.
변이중 선생은 명종 1년(1546) 현재 서원이 있는 장성읍 장안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언시, 호는 망암, 본관은 황주, 율곡 이이의 문인이며 선조 6년(1573)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소모어사가 되어 병마, 군기를 수습한 뒤 수원에 주둔하여 기호의 적을 대비하고, 같은 해 조도사가 된 후 양천에 주둔하여 누차 전공을 세웠다. 한편, 화차 300량을 제조하여 순찰사 권율에게 제공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하였다. 조도사를 세번, 독운사를 두번 지내면서 군량 수십만석을 거두어 명군에 조달하였다. 선조 36년(1603) 함안군수로 부임하였으나 2년후에 난임하고 장성으로 돌아와 후생들에게 강학을 하다가 광해군 2년(1611)에 서거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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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고산 서원(長城 高山書院) 고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조선말기의 대표적 성리학자가 기정진이 강학한 곳에 그를 추모 기념하기 위하여 문인 후학들이 1927년 건립한 것이다. 현재는 그의 문인인 조성가ㆍ이최선ㆍ김녹휴ㆍ조의곤ㆍ정재규ㆍ기우만이 배향되어 있다. 서원 경재의 부지면적은 484평으로 여기에는 7동의 건물이 있다. 특히 14평의 장서각에는 노사문집 목판 980매와 노사문집 12책(1질)을 비롯하여 많은 전적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기정진은 정조 22년(1798)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서 중추원사 건의 후손으로 출생하였다. 8ㆍ9세에 이미 경사에 통했다는 천재로 순조 31년(1831)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순조 32년(1832)강릉참봉을 초임으로 시작하여 고종 13년(1876)호조참판에 이르기 까지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오로지 장성의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후생들에 대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자의 생활중에도 고종 3년(1866)병인양란이 발발하자 조정에 방비의 계책을 상류하여 시행하게 함과 동시에 몸소 의거하고자 군사를 모집하다가 소모어사의 권유로 부득이 중지한 일이 있다. 선생이 조선(朝鮮) 고종(高宗) 15년(1878)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인데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하여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고 편액을 건 곳이다. 기정진 선생은 조선(朝鮮) 말기(末期)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으로, 사당에 주향(主享)되었으며, 이최선(李最善), 기우만(奇宇萬), 조의곤(曺毅坤), 김록휴(金錄休), 조성가(趙性家), 정재규(鄭載圭) 선생 등 5위의 신위(神位)가 배향(配享)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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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에서 소쇄원 가는길 0. 전라남도 담양군(출발지) 1. 중파사거리(0.657km) 2. 담양읍교차로(1.432km) 3. 29번국도(7.266km) 4. 원강교차로(0.246km) 5. 원강교차로(2.034km) 6. 887번지방도(0.995km) 7. 887번지방도(6.24km) 8. 887번지방도(0.162km) 9. 소쇄원(0km)
▣ 소쇄원 -> 고불총림백양사(44km) ▣ 고불총림백양사 -> 장성호(24km) ▣ 장성호 -> 입암산성(22.7km) ▣ 입암산성 -> 장성 남문 창의비(9km) ▣ 장성 남문 창의비 -> 금곡영화민속촌초가(10km) ▣ 금곡영화민속촌초가 -> 축령산휴양림(2km) ▣ 축령산휴양림 -> 장성박수량백비(4.5km) ▣ 장성박수량백비 -> 홍길동 생가(3km) ▣ 홍길동 생가 -> 필암서원(5km) ▣ 필암서원 -> 봉암서원(6km) ▣ 봉암서원 -> 장성고산서원(13k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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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화 |
전라남도 장성군 / 홍길동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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