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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정(李雅亭)의 비왜론(備倭論)에 대한 평(評)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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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저 구한말기 일본군 사진에서...
맨 왠쪽이 신라나 백제계 혼혈 열도왜입니다.
두번째 거인이...진짜 북해도아이누...하이(蝦夷)입니다.
세번째 털많은 자가...숙신계(여진)아이누와 동남아왜의 혼혈왜입니다.
맨 오른쪽이 서남아계 정통왜와 인도나 파키 무굴속민중 흑인계열 튀기 같습니다.
--> Soldats Aïnus dans les rangs de notre arm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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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관리가 일본군들과 뭔 협상중인데...
청나라측 터번쓴 군인들이 온통 개박살 난 얼굴입니다.
청일전쟁에서 깨진 청나라군들이란 얘긴데...
터번...터번..
당대 청나라군은...최소한 중원 서쪽의 이슬람애들였단 반증입니다.
한마디로 구한말의 청나라 관리들 강시모자는...
터번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간편하고 고급스런 최신식 터번이며...
그 시원은 모피모자로 신분을 구별하던 북방족들에서 연유하나...더운 남방계들은 모피를 머리에 덮을 수 없기에
면으로 바뀐게 이슬람이나 힌두의 터번이란 생각입니다.
이 밑에 패잔병들은...우리가 아는 누루하치의 그 청나라 여진족 팔기군이라기 보단...
그들의 속민인 남명(무굴)인들인... 인도 파키 서남아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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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 왜왕이란 자인데...
밑의 사진은...엄청 뽀샵을 가한 초상화입니다.
원래는 키가 작고...못생겨서...사진도 않 찍으려 했던 자랍니다.
국왕의 아들이면...그 어미는 나름 미인였을 것인데...왜 저런 얼굴이 나왔을까...?
최소한 어미나 아비중 하나는...동서남아계 천출이란 반증입니다.
저 밑에 도쿠가와 막부의 사진 보십시여...
정확히 현 한국인들 얼굴이져...그게 전통 삼국유민계 일본인 얼굴입니다.
메이지 천황(일본어:明治天皇 명치 천황, 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은 일본의 제122대 천황(재위: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이다. 휘는 무쓰히토(睦仁, 목인)이며 유소년기의 궁호는 사치노미야(일본어: 祐宮)이다. 일본의 황권을 강화시켰으며 일본 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한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의 개혁정책을 연호를 따 메이지 유신이라 부르며 일본의 근대화를 확립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한 군주로 평가된다.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1세 1원제(一世一元制, 일본의 연호는 천황이 새로 즉위할 때만 바뀔 수 있다는 원칙)를 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재위 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메이지 대제(明治大帝), 메이지 성제(明治聖帝), 무쓰히토 대제(睦仁大帝, Mutsuhito the Great) 등으로도 부른다. 1867년부터 1912년까지 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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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는 고메이 천황의 제2황자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시치노미야이다. 모친은 곤다이나곤(權大納言) 나카야마 타다야스(中山 忠能)의 딸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 慶子)이다. 1852년 11월 3일에 교토에서 태어나 사치노미야라는 궁호를 받았다. 유년시절 그는 체구도 왜소하였고 병약하였으나 그를 극진히 간호한 어의 덕에 잔병치레를 떼었다. 1860년에 황태자가 되면서 무쓰히토(睦仁)로 개명했으며, 1867년(게이오 2년) 1월 30일에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1868년 2월 8일에 탈상하고, 동년 10월 6일) 즉위 의식을 비롯한 여러 제사 의식을 수행한 뒤 10월 12일 교토 고쇼에서 아마테라스 대신 등에게 공개적으로 대제전을 드림과 동시에, 즉위 교서를 내외에 선언하였다. 즉위 초반 그를 추대한 일부 훈신들이 선황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곧 묻혀졌다. 막부의 전횡에 의분을 느낀 일부 개화무사와 개화사상가는 즉위 초반의 그에게 친정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고, 천황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판단한 그는 막부 세력을 제압하고 친정을 할 계획을 세운다.
즉위 초반 그의 왜소하고 병약한 체구를 조절해야 된다는 양의들의 권고에 따라 꾸준히 운동을 하고 육류를 섭식하여 체구와 체력을 단련해 나갔다.
안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19세기 후반의 에도 막부는 도시에서 진행된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쇄국령에 맞선 페리 제독의 내항을 전후로 진행된 개국으로 혼란에 접어들었다. 조정은 특히 존황양이를 내세운 조슈 번 등의 움직임을 기반 삼아 정치적 발언권을 키워나갔고, 막부는 점차 조정의 눈치를 보게 됐다. 이 때문에 막부 안에서는 여러 세력간의 대립이 일어났고 그 기반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1867년(게이오 3년)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조슈 번(야마구치 현)이 도막(막부 토벌) 동맹을 맺기에 이르자 약체화된 막부의 고민은 커졌고, 결국 막부가 붕괴하기 전에 정치권력을 조정에 돌려주겠다(봉환)고 조정에 제의했다. 조정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약 300여 년에 걸친 에도 막부는 종언을 고했다. 이후 정권을 넘겨받은 조정에 저항하던 세력들은 1868년(게이오 4년)부터 1869년(메이지 2년)에 걸쳐 대규모 내란을 일으켰지만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을 주축으로 한 조정군에 의해 토벌됐고, 새 시대가 개막했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9월부터 일세일원(一世一元)을 결정하고,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이어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에도(江戶)를 도쿄(東京)로 고치고 도쿄로 옮겨(이어)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소유였던 도쿄 성(구 에도 성(江戶城))을 궁성으로 정하고, 판적봉환을 허락했다. 1871년(메이지 4년)에는 폐번치현을 단행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다른 한편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신도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하고 신도의 국교화와 천황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영국과 미국 등의 서구 사절단의 화려한 외모에 매료된 그는 신문물 개방의 뜻을 펼친다. 이때 막부(幕府) 세력이 독단적으로 개항을 추진하여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의 반발을 샀으나, 그는 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하는 관주도(官主導)의 개발, 자본력 육성과 정치력, 군사력 강화에 치중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실시하여 각 번주가 다스리던 지역을 천황이 직할하도록 바꾸었고, 1872년 서구식으로 학제를 공포하였다. 1873년(메이지 6년)쯤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신 정부에 널리 퍼진 정한론을 둘러싸고,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와 귀국한 이와쿠라 사절단 사이에 대립이 벌어지자 메이지 천황은 칙서를 내려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중지해 대립이 퍼지는 걸 막았다. 이에 정한론을 주장하던 사이고를 포함한 일부 인사가 사직하면서 유력 인사를 잃긴 했지만, 신 정부는 이후 국내 개혁에 힘을 기울여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1874년(메이지 7년)부터 이어진 자유민권운동에 맞닥뜨리자 1881년(메이지 14년)에 국회 개설의 칙유를 내려 의회 창설 시기를 명시하는 등 노력으로 운동이 격화하는 걸 막았다.
1882년(메이지 15년)에는 군대를 천황의 군대로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내리고, 발표하였으며 군비의 증강에 노력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이후에는 머지않은 의회 창설에 대비해 입헌군주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각제도, 시정촌(市町村)제, 부현제, 군제 등의 제정과 함께 전국에 걸친 관료지배체제를 정비하고 막대한 황실 재산도 마련했다. 1885년에는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1889년(메이지 2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명하여 흠정헌법의 성격을 가진 대일본제국 헌법을 마련해 입헌군주국으로 한걸음을 더 내디뎠다. 황족의 예를 서술한 《황실전범》(皇室典範)을 서술, 편찬하였으며 1890년(메이지 23년) 교육칙어를 내려 천황제 국가를 지탱하는 신민의 배양을 도모했다. '제국헌법'에서 그는 왕의 국가통치의 정치적 대권과 일본 제국의 육군·해군 군 통수권을 명기하였고, 교육칙어에서는 왕이 국민도덕의 중심임을 밝힘으로써 천황제국가를 유지하는 2대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그해 일본 제국 귀족원 의원을 개설하고, 귀족원 의원의 대표를 선출하게 했다. 최초의 의화인 귀족원의 초대 의장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귀족원 의회에 참석하여 수시로 의회 내용을 참관하였다.
그뒤 그는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두는 것에 만족하려 하였으나 정한론이 강하게 대두됨에 따라 조선 병합 정책을 추진, 1910년(메이지 43년) 8월 대한제국을 병합하고, 만주로 진출하는 등 일본을 제국주의적 식민국가로 팽창시키는 정책을 채용했다. 1911년(메이지 44년) 개항 이래의 목표였던 불평등조약 개정으로 명실공히 열강의 하나로 성장해 나갔다.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의 연이은 승리는 천황에 대한 국민적 숭앙(崇仰)과 존경심을 더욱 절대적인 것으로 공고히 하였다.
메이지 천황은 1912년(메이지 45년) 7월 30일에 지병이던 당뇨병의 악화로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7월 30일 오전 0시 43분이지만, 실제로는 7월 29일 오후 10시 40분 경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후임 천황의 즉위식을 전임 천황이 세상을 떠난 날에 올리는 관습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해(다이쇼 원년) 9월 13일, 도쿄 아오야마의 제국육군연병장(현재의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대상례를 올렸다. 대상 이후 메이지 천황의 관은 영구 열차로 옮겨져, 도카이도 본선을 경유하여 교토 남쪽의 후시미모모야마노미사사기로 옮겨져 9월 14일에 매장됐다. 전통적인 일본 시가(詩歌) 양식으로 쓴 10만 여 수의 시조를 남겼다.
아버지는 고메이 천황이며, 어머니는 나카야마 요시코이다. 1867년 이치조 하루코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은 야나기하라 나루코와 사이에서 요시히토 황자를 낳았고, 사치코와 사이에서 마사코, 후사코, 노부코, 도시코 등 네 딸을 얻었으며, 그 밖에도 열 명의 자식을 더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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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과 고종...
흥친왕 이재면...
히로히토 왜왕...
1860년대에 집권...
키가 작다...
공통적으로 국화를 황실무늬로 하다...대한제국은 이화로 바꾼다.
일본 총독부나 정부 문양도 오동나무꽃으로 정한다.
만주국 정부기도...오방색기에서...이화꽃 비슷헌 난초꽃문양으로 병용한다.
오로지 일본 황실만 국화문을 쓰게 만든다.
멀겐 프랑스도 국화문이 왕실문양...
베트남도 그랬던 듯 싶고...
태양을 연상하는 국화문은...어느 나라든 왕실문양으로 즐겨썼던 모냥인데...
왜 대한제국은 그 밑의 내각정부나 어용국 문양인 이화문으로 바꿨을까...?
이 세 나라의 구한말 움직임이 뭔가 한 덩어리로 흘러간거 같지 않습니까,,,?
난 이들 공히...
대륙조선 남방(중원남방)에 구한말에 진출한 무굴(남명)의 잔당 왕손들이라 의심됍니다.
필연적으로 동남아왜들의 피가 섞여 돌아왔기에...키가 엄청 작아졌다 봅니다.
왼쪽부터 흥선대원군
오른쪽 맨 위 사진은 고종
아래에 있는 사진 두장은 흥친왕 이재면 (고종의 형)
--> Le prince Hirohito
히로히토 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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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당시 동전에 박힌 오얏 문양
문갑에 새긴 오얏 문양
대한제국 당시 오얏 문양은 조선 황실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궁궐 가운데 고종과 순종이 머물렀던 덕수궁과 창덕궁에만 존재합니다.
궁궐은 물론 황실에서 사용하던 의복이나 식기, 훈장, 고관들의 관복에도 새겨져 있는데,
어떤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의 강요로 사용하게 됐다고는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대한제국이 독자적으로 제정해 사용했다고 저는 봅니다.
(* 참조 : 박현정, "대한제국기 오얏꽃 문양 연구"(서울대 미대 석사논문, 2002)
일본 황실의 상징 국화 문양
황군(皇軍) 전사자들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에 내걸린 국화 문양
일본 황실은 고래로 국화 문양을 황실의 상징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황실과는 별개로 정부의 문양이 따로 있습니다.
오동나무(桐) 문양이 그것으로 흔히 ‘고시치노 기리(五七桐)’라고 부릅니다.
이는 오동나무 꽃잎 5, 7개를 새긴 것으로, 원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문양이었죠.
이는 '정권을 담당하는 자'의 문장으로 불리는데, 지금도 일본 정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 문양(오동나무 문양)
한편 이 오동나무 문양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 문양으로도 사용됐었습니다.
총독부에서 발행하는 각종 공문서나 상장 등에는 예외없이 이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문양 가운데 오동나무 문양은 일제잔재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각종 문서에 남은 것은 볼 수 있었으나 건축물에 남은 것은 여태 구경하진 못했습니다.
2008년 한일 정상회담 때 이명박 대통령 연탁 앞에 내건 오동나무 문양
오동나무 문양과 관련해 해프닝(?)이 하나 있어서 소개해두고자 합니다.
2008년 4월 도쿄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간에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공동기자회견을 갖기 위해 기자회견장 연탁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앞에 마련된 연탁 정면에 바로 이 오동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일본측으로서는 정부의 문양이라고 하겠지만 우리에겐 총독부 문양으로 비쳐진 것입니다.
보기 나름으로는 일본측이 어떤 저의가 있었다고 볼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 시정1주년(1911년) 기념 일부인으로 사용된 오동나무 문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황실에서도 문양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마지막 황제’로 불리는 푸의는 당시 집정이라는 직함으로 불렸는데,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정하고, 난초꽃을 황실의 문양으로 삼았습니다.
이 문양은 만주국 화폐나 깃발로 제작돼 푸의가 참석하는 공식행사에 내걸렸으며,
만주국 장교 출신들의 모임인 난성회(蘭星會) 기관지에도 실려 있습니다.
[참조-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난(蘭) 문양]
난초 꽃 |
난초 문양을 새긴 컵 |
푸의(가운데)가 참석한 관병식에 등장한 난초 문양 깃발(붉은 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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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개인적으로...
저 위에 거수경례 하는 분이...그 유명한 미남황손 이우황손 같단 생각이 자꾸 든다.
안경 벗으면 많이 닮지 않았을까 싶다...?
고종의 아들이긴 하나 친일파 대원군&이재면 가계의 양자인 의친왕 자손들만 현재 번창했으니...
그들이 만주국에서 벼슬을 누렸을 수도 있다 짐작됀다.
부의황제와 이구왕자의 기구한 마누라관계도 같고...
너무 닮았다.
만주국 1원짜리 화폐 속의 난초 문양(붉은 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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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만주국 1원짜리 화폐...
만주(청나라)애들이 저런 의관 했다는건 금시초문이다.
고로, 구한말기 동북삼성의 만주국은...대륙조선을 격리시키려던 친일 어용왕조다.
주 지배계급은 친일 대한제국 왕손들일 것이라 보인다.
최종결론...
숙신과 황두살위는...서역으로만 퍼진게 아니라 극동과 아메리카까지도 퍼졌다.
그 중 황두실위 계열의 북해도 하이(蝦夷)들의 남쪽에..일본이란 나라는 분명 존재했으니...
우리가 아는 그 더운지방 난쟁이 왜구들은...일본열도 혼혈왜들이 다스리던 서남아제도 수 많은 군소족들이였다 보인다.
이들을 일본이 스스로 이를땐 정식 일본의 영토로 치질 않고...삼도왜(三島倭)등의 왜(倭)라 별칭한다.
원래 그들이 왜구(倭寇)요...그들의 조상은...
위구르(魏)의 이주민이 지배한 티벳남부 인도, 동남아 오지 출신 토왜들이 시원이라 보인다.
왜는 본시 왜노국이란 나라이름이기도 했으나...
본 뜻은 태평양연안 수 많은 제도들의 여러 군소 종족들의 통칭...
그들이 통상 난쟁이라...왜(倭)...그들의 나라는 왜노국(倭奴國)...그들이 도적질하면...왜구(倭寇)...
그들이 연합해 처 들어오면...왜적(倭賊)...
그들의 상국인 극동의 해 뜨는 쪽 본국은...일본(日本)...부상(浮桑)...뭐 이런 식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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