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병대 한국전 전사 - 목포지구 전투
해병대 한국전 전투중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전투중에 하나가 목포지구 전투입니다. 해병대 전사에 워낙 유명하고 화려했던 전과를 내었던 전투가 많아서 목포지구 전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경인지구 전투를 수행하여 서울을 탈환하게 됩니다. 이후 경인지적 잔적 소탕등을 하다가 작전명령에 따라 바로 원산으로 상륙(행정상륙)하게 됩니다.
타 부대들은 인천에서 원산으로 바로 가게되는데, 특이하게 해병2대대는 인천에서 목포로 가서 작전수행후, 다시 원산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제가 생각할때는 해병대의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내륙 작전중인 육군을 도와 바다에서 내륙으로 투사되어 협동작전을 하고 다시 바다를 통해 타지역으로 이동하는 것..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에서 해병대의 활용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당시 목포지역은 아군 지역이라 바다에서 내륙으로 전개하였어도 상륙작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상륙작전은 기본적으로 적지에 투사되어 탈취해야 하는 것이기에..)
덧붙여, 한국전에서 해병대의 해상기동이 가능했던 것은 연합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에서 북한의 실수중에 하나는 한반도 바다를 활용하는데 미숙했다는 점입니다.
[대한민국 해병대 한국전 전사- 목포지구 전투]
서울 수복 이후 적군에 대한 소탕작전은 서울,경기 이북 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남쪽 지역의, 개전 이후 1~2개월 이상이나 북한군의 점령 아래에 놓여 있던 지역들 가운데서도 미처 퇴각하지 못한 적 병력이 산악지대로 은거하여 간헐적으로 치안 교란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약 2만명 가량의 적군이 잔존 중이던 전라남도 목포는 특히 큰 골칫거리였다. 이들은 미 육군제 7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의 남북 협공으로 퇴로가 차단되어 궤멸된 전라도 주둔 북한군 병력으로 500명의 무장병력 외에 죽창과 철창을 갖추고 있었다.
월출산 국사봉으로 은신한 후 장흥, 함평, 나주, 영산포 등지에 출몰하여 방화,납치,살인, 약탈을 일삼던 이들의 후방 교란은 전세가 역전된 이후 북한에 대한 총반격을 계속해 나가고자 했던 국군과 UN군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다.
본래 광주에 주둔한 국군 제20연대 소속 1개 대대가 전라도 일대의 적 잔당 소탕의 일환으로 목포 치안확보의 책임까지 맡고 있었지만, 병력 규모의 한계 때문에 목포까지 담당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이에 해병대는 목포에서의 북한군 잔당을 색출, 진압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고서 제2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해병 제2대대는 10월 18일 인천을 출발, 다음날 목포에 도착하여 산정국민학교에 본부를 세웠다.
*** 목포지역 소탕작전 일자별 전투기록
1950년 10월 18일 : 제2대대 인천을 출항
1950년 10월 19일 : 제2대대 목포에 도착, 목포 산정국민학교에 대대본부 설치
1950년 10월 30일 : 삼광면에 적100여명의 등장 정보를 입수하여 제5중대 소속 1개 소대 투입, 섬멸
1950년 11월 1 일 : 제5중대 영암 일대에서 3일간에 걸쳐 소탕전 실시
1950년11월 3일 : 제2대대의 각 중대별 소대 병력을 차출하여 부대 본부를 중심으로 수색정찰 돌입
1950년 11월 6일 제7중대 소속 수색정찰소대 나주군에서 적과 조우, 소탕 (잔당 27명 생포)
11월 8일 오후 10시 제6중대 영암에 도착, 인근 경계작전 돌입
11월 12일 제5중대장과 나머지 주력부대들도 차례로 도착, 이후 국사봉을 따라 포위, 소탕작전 실시
11월 23일 각 부대 다시 본부로 귀환
전과: 적 14명 사살, 120명 생포
피해:해병대원 1명 부상
출처: 대한민국 해병대 , 김재엽, 살림출판사, 2006년
<사진>
1. 목포지구 작전 요도 (출처: 대한민국 해병대, 김재엽, 살림, 2006년)
2. 해병대 한국전시 이동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