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효 바람따라 구름따라 햇빛따라 떠나는 사색기행.중국해외여행.
(천안문광장/세계최대의 황궁 = 자금성/만리장성/장가계
원가계/황석채/천문산)2011년10월29일(토)~11월2일(화)4박5일. ★
♤1일차 :중국 {북경} 여행 일정 : 2011년 10월 29일(토요일).
2.여행 코스 :※ 서태후 여름별장 [이화원] 관광.
※ 특식 :북경오리구이.
※ 석식 후 [북경서커스] 관람.
3.1박 호텔 : 퍼시픽 호텔/동급(4성급)
☞ 서태후(1908년사망)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이허위엔]
(청조 마지막 태후 :황제의 어머니) 정치/인사/전쟁에 관여함 :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흔히 서태후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이화원은 몽고의 원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다. 금나라의 별궁이던 이곳을 원나라 시절, 호수와 산을 만들어 지금에 모양새를 대충 갖추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다. 서태후는 워낙 이곳을 좋아해 2월인 봄에 왔다가 겨울이 다 된 11월에야 자금성에 돌아갔다고 한다. 북경서쪽 외곽인 해정구(하이디엔취)에 위치해 있으며, 북경 시내에서 15km 떨어져 있다.
이화원 전신은 북경 청의원으로, 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때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광서 14년(1888년)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다시 재건했으며 이 때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1900년 이화원은 또다시 팔국 연합군의 선공을 당했다.
서태후는 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건대한 자금을 들여 복구에 나선다. 이화원은 무엇보다도 규모면에서 엄청나며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로 호수에서 파낸 흙으로 쌓은 산이 만수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그 중 수면(호수)이 전체의 3/4을 차지한다.
서태후가 이화원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이였으며, 1903년부터는 대부분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1908년 죽을때까지 5년간 집중적으로...)
서태후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곤명호/는 인공호수”이지만,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곤명호수 동쪽 기슭에 있는 17공교의 난간에 새겨져 있는 544마리의 사자도 꼭 볼만하다. 곤명호수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곤명호수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최고의 인기 코스다.
이화원의 주요 명소로는 [정문인(동국문)/덕화원/장랑/불향각] 등이 있다.
☀동국문 :이화원의 정문이며 “삼명양암” 무전식 건축양식.
☀덕화원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경극장”.
☀장랑 :동쪽으로 “요월문”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석장정”까지 728m에
273칸의 화랑으로 이어진 복도/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긴 복도이다.
☀불향각 :만수산 앞의 산비탈길에 세워진 21m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
이화원 상징적 건축물. 1층(운외천향)은 :천수관음상/2층은 :건륭제 때의 삼세불상/3층은 :불향각 건축 관련 내용.
☞ 북경서커스(북경공인구락부/조양극장
PM 5:15/7:17 두 차례) 관광 (석식 후) :
북경 서커스는 곡예와 다양한 기술이 집대성된 중국 고유의 전통예능이다.
인체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접시돌리기/자전거묘기/의자에서 균형잡기/구멍속 빠져나오기/오토바이 5대타기 등 이다.
북경 서커스 단원들의 정년은 25세라고 한다. 이들은 3살 때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북경 서커스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으며, 25세 정년을 맞으면 공공기관등에 국가가 취업을 시켜 준다고 한다.
♤2일차 :중국 {북경/장가계} 여행 일정:2011년 10월 30일(일요일).
2.여행 코스 :※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 (만리장성)= 왕복케이블카.
※ 북경 = 수도박물관 관람(중식 후)
3.2박 호텔 : 람천 호텔/동급(4성급)
☞ 중국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
장성(1,100m = 만리장성/창청).
세계 7대 건축물, 8대 불가사의 [만리장성]= 왕복케이블카.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북경)에서 서북쪽 75k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이라는 곳에 있다.
이곳 만리장성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산세는 험준한 편이며, 장성 위에서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그 길이가 5만m에 이른다.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쌓았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게 되자 남측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말하는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만m 길이의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때 쌓은 것들이며, 만리장성에 설치되어 있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는 좀 더 편하고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 7대 건축물이며,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이다.
또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 중식 후. 북경 = 수도박물관 관람 :
북경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 중에도 북경 천안문 광장 가까이 있는 [중국국가박물관]도 잇습니다만 중국 사람들이 엄청 찾고 있어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이 쉽지가 않는 곳이다.
북경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다보면 “무시띠역” 가까이에 중국 수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 공공건물이 대부분 크고 넓다는 것이다.
수도박물관은 최근에 지어졌으며 고대유물보다는 실생활에 관련된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예를 들어 :금/은/옥/서예품/장식품/옷/장신구/생활가구/불상,,,등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서 5층까지 있으며, 3층은 :금/은/옥/도자기/장신구. 4층은 :도자기와 불상을 시대별로 전시. 5층은 :옛날 북경 모습과 테마관이 있다. 결혼풍습, 집안가구, 옛 상점,,,등. 그리고 [중국국가박물관]에 비해 급이 떨어져 유물과 내용이 판넬로 의존하는 것이 많다.
※각 나라마다 문제점 :한글설명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수 없다는 것.
현지 가이드가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는 것.
사진 설명은 붙이지 않고 그냥 눈으로만 감상 한다는 것.
♤3일차 :중국 {장가계} 여행 일정 : 2011년 10월 31일(월요일).
2.여행 코스 :※ 천자산 = 상행/케이블카.
하룡공원.
어필봉 선녀산화.
☀ 원가계 이동.
천하제일교.
미혼대.
백룡엘리베이터 하행.(4시간 소요)
금편계곡.
십리화랑 = 모노레일 왕복.
3.3박 호텔 : 람천 호텔/동급(4성급)
※ 코스 :천자산케이블카등정→하룡공원→천대서해→어필봉→선녀산화→원가계→천하제일교→미혼대→백룡엘리베이터로하산
(소요시간:약4시간) 난이도 :중급.
☞ 천자산(주봉우리1,250m) = 상행/케이블카 :
무릉원("대자연의 미궁"과 "지구 기념물")
무릉원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개발이 가장 늦은 곳이니 만큼 자연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천자산의 풍경은 시야가 넓으며 기세가 웅장한 맛을 지닌다. 기이함과 수려함, 더불어 야성의 미까지 삼위일체가 된 곳이 이 풍경구이다.
특히 “운도/월휘/하일/동설”의 4대 명관을 지녀서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천자산 주봉우리에 오르면 무릉원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자산 동/남/서 3면은 바위산이 수풀처럼 하늘을 받들고 있으며, 그 사이로 깊은 계곡들이 뻗어 있어 마치 천군만마가 포효하며 달려오는 것 같다.
☞ 하룡공원
(글자는 :1995년3월.강택민 총서기가 직접 쓴 것이다) :
천자산 자연보호구에 속해있는 전망대로 중국의 10대 원수 중 한 명인 하룡장군을 기념하는 거대한 동상이다.
동상 높이는 6.5m/ 무게는 9톤/ 근래 100년 동안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장 큰 동상이다.
☞ 전설이 있는 [어필봉] :
장가계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하나로 천자산 자연보호구역에 속해있다.
흙 없는 돌 봉우리 사이사이에 푸른 소나무가 자라는 모습이 “마치 붓을 거꾸로 꽃아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전쟁에서 진 후 하늘의 천제를 향해 황제가 쓰던 붓을 던진것이 땅에 꽃혀 만들어진 봉우리라하여 [어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천자산 풍경구의 신비한 곳, 선녀산화 :
매년 봄과 여름이 되면 “천풍”이 불고 구름이 표류하는데, 그 모양이 선녀와 같다고 하여 “선녀산화”라 이름 붙여졌다.
천자산 자연보호구에 위치한 풍경구로서 “석봉”이 운단에 서 잇고, 산 아래와 산 허리에 야생화꽃이 목화밭처럼 펼쳐져있다.
☞ 원가계 이동/ 자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품,
“천하제일교” :
1982년에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천하제일교”는 자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품으로 실제 처음 발견 했을 당시에는 수(隨)나라 때 만들어진 석교로 알려졌을 정도로 정교하다.
14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여러 차례의 지각 변동과 기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 천연 석교는 300미터 높이의 바위 둘을 너비 2미터, 길이 20미터의 돌판이 잇고 있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놓여있기에 다리위를 거닐다 보면 아찔한 느낌마저 든다.
☞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미혼대” :
천자산에있는 곳으로 정신(혼)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하여 미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미혼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한 부분이 2m 정도 더 높으며 면적이 100제곱미터 정도로 열댓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다.
불규칙적으로 뽀족하게 솟아있는 석봉들이 안개에 쌓여있는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과 같고 그 아름다움에 빠져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광대한 자연 속에 그대로 동화되어 버린다.
☞ 백룡엘리베이터 하행 :
장가계 국립 삼림공원 내 수요사문에 위치하는 백룡 엘리베이터는 높이만도 335m 되는 세계 제일의 관광전용 엘리베이터이다.
실제 운행 높이는 313미터로 밑으로 156미터는 산속 수직동굴이며 그위 170미터는 산에 수직 철강구조를 설치하여 만들었다.
수요사문, 금편계, 삼림공원에서 원가계, 천자산, 오룡채를 3대의 엘리베이터가 연결하여 운행하고 있다.
☞ 금편계곡 :
※ 코스 :금편암→쌍구탐계→천리상회→기반봉(약 2시간).
장가계 산림공원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편이라는 “금편암”을 지나서 흐른다는 데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늘어서 있는 돌길은 전체 길이가 7.5km로 통과하는데 2:30정도 소요된다.
서쪽으로는 비파계로 모여들며, 동쪽으로는 삭계로 들어가는 한 줄기의 깊고 고요한 협곡이다. 길 옆에 천여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잇어서 공기가 상쾌하며 한적하다.
☞ 야생화의 고향, [십리화랑] = 모노레일 왕복 :
협곡의 양쪽으로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고 5km 길이에 야생화의 향기가 날린다.
기이한 봉우리와 암석이 각양각색의 형상을 띠고 있어서 마치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십리화랑의 길을 따라서 들어가보면은 “전각루/수성영빈/양면신”등의 10여개의 관광지가 있다.
♤4일차 :중국 {장가계/북경} 여행 일정 : 2011년 11월 1일(화요일).
2.여행 코스 :※ 백장협(차창관광).
※ 황룔동굴.
※ 보봉호수(유람선).
☀ 황석채(중식 후) = 케이블카 왕복.
☀ 천문산(케이블카) 천문동 천문산 산사(리프트 편도)
3.4박 호텔 : 람천 호텔/동급(4성급).
☞ 삭계곡 풍경구의 무릉원, [백장협] 차창 관광(바이장샤):
백장협이란 모양새가 우뚝 솟은 암벽이 있는 계곡이다.
그 높이가 백장이라고 하여 백장협이라 이름 붙여진 곳이다.
백장협은 무릉원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삭계곡 풍경구에 있는 고대 전쟁터다.
(반마춘/마도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곳으로 고대 전쟁과 연관이 있는 곳이다.
☞ 장가계의 아름다운 용암동, 황룡동 [황룡동굴].
(1983년에 발견 = 28년전에 발견.2011년10월기준) :
보트를 타야만 동굴 내부를 둘러볼 정도로 웅장한 황룡동굴은 각양각색의 석순이 장관을 이룬다.
무릉원의 제일 동쪽에 있는 삭계곡 북단으로 7km 떨어진곳에 있다.
석회암 용암동굴로 중국 10대 용암동 중에 하나이다.
☀[정해신침]이라는 곳은 황룡동에서 가장 기이한 풍경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종유석으로 높이가 27m에 달한다.
1998년 중국 [평안보험공사]라는 보험회사에서 1억원(인민폐)의 보험을 든 것으로도 유명 하다.
이곳 외에 “미궁/용궁” 등 기이하고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황룡동굴은 상하 총 4층으로 되어 있으며, 동굴을 지탱하고 있는 종유기둥의 길이를 모두 합한 것이 14,000에 달한다.
☞ 장가계의 비취, 보봉호.
보봉호수(유람선 40분 탑승관광):
매표소 입구에서 25정도 걸어올라가면 배를 탈수 있는 선착장에 도착한다.
유람선으로 40분 가량 보봉호수를 돌아보는데 신선이 되어 무릉도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황석채(1300m) 풍경구.(중식 후) = 케이블카 왕복 :
※코스 : 정해신침→ 남천주→ 적성대→오지봉→ 육기각 후 후 케이블카로 하산 (약 1시간 30분)
“황석채에 오르지 않으면, 장가계에 온 것이 헛되다”라는 말이 있다.
장가계 삼림공원에서 가장 크고 볼거리가 집중되어 있는 코스이다. 경사가 심한 돌계단이 계속되지만 산정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봉우리마다 말 그대로 천하절경이다.
황석채 지명 유래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한/ 장량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고통을 당할 때 사부인 황석공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해서 {황석채}라는 지명이 붙여졌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황석채의 모양이 숫사자 같다고 해서 황석채라고 부른다는 설이다.
☞ 장가계의 혼, 전문동. 천문산(1518.6m/티엔먼산/케이블카)
천문산 산사(리프트 편도) :
☀코스 :천문산케이블카등정(편도40분)→천문번수→북부강천문영전→영정원→운몽선정→남부강천문→목석기연→신선좌→앵두만→천문산사→관괴곡동→선경기석→소천문→야불장보→이나소옥→천문동관광→ 하산(소요시간 :약 6시간)난이도 :중급.
천문산은 고대에는 [운몽산/고령산]으로 불리웠으며, 장가계의 산 중에서 역사에 가장 먼저 기록된 명산이다.(장가계 최고봉이다)
※ 해발 1,000m 높이 정도에서 돌봉우리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멀리서도 독특한 모양새를 알아 볼 수 있다.
이 터널의 이름은 천문동(天門洞)으로 지난 1999년에 열린 세계 곡예비행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유명해졌다.
천문산은 장가계 시내에서 8km 떨어져 있는 산으로, 산의 사방은 모두 절벽이며, 봉우리는 하늘에 닿을 듯하며, 그 기세 역시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하다.
천문산 정상까지 가려면 시내에서부터 이어진 세계에서 최장거리 7.45km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편도 35분이 소요된다.
다시 케이블카를 내려서 99개의 고개를 버스타고 올라가면 999개의 가파른 계단까지 올라야 한다.(천문산 최고의 전망대다)
☞ 천문산 산사(사찰) :
천문산에 위치한 사찰로 원래 당대에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중국 호남성 서부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가 후에 그 유적만 남은 것을 청대에 재건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명대사찰 입구에“천문산사”라는 현패가 걸렸을 만큼 높은 산 기슭에 종종 구름에 싸여 있고 고아한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워 마치 해탈한 신선이 사는 곳과 같았다고 한다.
현재 볼 수 있는 모습은 청대 스타일의 종고루/천왕전/대웅보전/관음각/장경각/법당 등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남향의 천문산사에 올라 내려다보면 탁트인 시야에 천문산의 푸르름이 가득찬다.
♤5일차 :중국 {북경/김포} 여행 일정 : 2011년 11월 2일(일요일).
2.여행 코스 : ※ 천안문광장.
※ 세계최대의 황국 {자금성}.
※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천단공원} = 북경의 소호.
※ 798 예술 거리 관광.
3.5일 마지막 일정 : 김포 도착.
☞ 세게에서 가장 큰 광장/ 중국 민주화의 상징
[천안문광장(天安門廣場)/티엔안먼꽝창] :
북경 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천안문 광장은 중국 사람들의 드넓은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다. 천안문 광장은 원래 1651년에 설계되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시멘트로 접합되고 네 배나 큰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체 면적이 44만㎡이며, 동시에 백만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중의 하나로 꼽힌다.
또한 여러개의 인상깊은 건축물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천안문,
동쪽은 중국 국가박물관, 서쪽은 인민대회당, 그리고 남쪽에는 모택동 기념당이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중국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 광장은 옛부터 대규모 군중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 등이 이어졌다.
천안문 광장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1989년 4월 중국 전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이 운동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확산이 되어 서로 손을 맞잡고 천안문 광장으로 점차 운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당시 지도자였던 “덩샤오핑(登小平)”은 이들을 진압할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결국은 같은 해 1989년 6월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과 시민들을 기관총 난사와 전차 동원 등의 무력을 이용해서 강제 진압함으로서 사건을 마무리시켰다.
이후부터 천안문 광장은 중국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천안문광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는 해가 뜨는 새벽에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이다. 행진곡과 함께 군인들이 정렬하여 나타나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는데, 이 의식에 걸리는 시간만 거의 30분 정도 소요된다.
국기 게양시간과 강하 시간은 매번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넓은 중국 대륙에서 해가 뜨고 지는 자리와 천안문 광장의 지평선이 서로 일치할 때를 계산하여 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양식이 거행될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지나갈 수 없고 대신,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는 것은 괜찮다.
해가 어슴프레 뜨는 새벽의 오묘한 기운 속에서 벌어지는 이 작지만 웅장한 의식은 외국 관광객들 뿐 아니라 북경을 방문한 타 지역의 중국인들에게 북경에 오면 꼭 놓치지 말아야 할 필수 코스이다.
※ 천안문 :
천안문은 광장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명 영락 연간인 1417년에 지어졌으며 옛날에는 황제가 사는 성의 정문이다.
그 당시에는 “승천문”이라고 불렀다가 청대에 개조된 후부터는 “천하를 편안하게 하라”라는 뜻의 “천안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3.7m 높이의 천안문은 황제의 대형 의식이나 새 군대 파견을 위한 행사를 위해 이용되었다. 황금색 기와 지붕과 높이 추겨든 추녀, 그림과 조각으로 단장된 대들보, 그리고 주황색의 웅장한 기둥들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하얀색 대리석 위에 새겨진 조각들은 하늘의 평화와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 중국 역사상 최대의 기념비 [인민영웅 기념비] :
천안문 광장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인민영웅기념탑은 1952년에 세워진 기념비로 높이 37.94m에 탑 토대만 3천여 평방미터의 중국 역사상 최대의 기념비이다.
탑에는 모택동 주석의 친필로 쓴 “인민영웅영수불후”8글자와 중국 현대사가 대형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인민대회당 :
광장의 서쪽에 위치하는 인민대회당은 높이 46m/길이 336m/ 너비206m 건축면적이 17만 평만미터에달한다.
※모택동 주석 기념당 :
천안문 광장의 남쪽에 있는 모택동주석 기념당은 1977년 9월에 지어졌다.
기념당은 북청/첨앙청/남청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방부 처리된 모택동의 시신이 첨앙청 내에 있는 수정관에 뉘어져 있고 주위에는 전국 각자에서 올라온 진귀한 꽃들이 관을 두르고 있다.
북청 상층에는 모택동/ 주은래 등의 개국원로의 혁명업적이 나열되어 있다.
※ 중국 국가 박물관 :
천안문광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중국 국가박물관은 2003년2월28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959년에 세워진 중국 역사박물관과 1961년에 세워진 중국 혁명박물관이 합쳐져 만들어진 곳으로 건물높이 33m/길이 313m/너비 100m의 웅장한 기세를 가졌다. 인민대회당과 서로 마주보고있으며 지속적으로 개보수를 진행하고 있다.
☞ 세계최대의 황국
마지막 황제의 배경인 {자금성/쯔진청}=세계문화유산1987 :
북경시의 중심에 위치한 명.청대의 황궁으로, 천안문 정문으로 들어가 울창한 가로수 길을 따라 단문과 오문을 지나 보이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고궁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과 같은 금지 구역이다”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전체 면적은 72만평방미터이며 총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1406년~1420년에 건축된 이래로 5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현재는 105만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문물이 전시 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흔히 “3전”이라 부르는 “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나타난다.
3전에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의 내정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는 “건천궁/교태전/곤년궁”등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육궁과 서육궁이 자리잡고 있다.
방어의 목적으로 궁전 밖에는 10m 높이의 담이 있는데, 밖에는 넓이52m/깊이 6m 호성강이 흐른다. 4면의 담에는 문이 있는데 남쪽에 “오문”/북쪽에 “신무문”/동쪽에 “동화문”/서쪽에 “서화문”이 있다.
1988년 개봉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꼼꼼하게 관광을 하는 데에는 하루가 꼬박 걸리고 그냥 대충 가로질러 가는 데에만도 2시간 정도가 걸릴 만큼 넓은 곳이다.
☞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천단공원} = 북경의 소호 :
명·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풍년을 기원하던 곳으로, 북경시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면적은 270㎡이다. 명 영락(永樂) 4년(1406)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영락 18년(1420)년에 완성되었다.
천단은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명·청나라 황제들이 매년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시의 황제에 봉해진 자들은 스스로를 "천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제왕의 중요 업무였다.
그래서 고대 설계사들은 "하늘"을 상징하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힘을 다했다. 천단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명확하게 내벽과 외벽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북쪽의 벽은 원형, 남쪽의 벽은 사각형으로 원형은 하늘을 상징하고 사각형은 땅을 상징한다. 이것은 중국 고대의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이다.)"에 부합하는 것이다.
북쪽 벽은 또한 남쪽 벽에 비해서 높은데, 이것 또한 "천고지저(天高地低 :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두 개의 벽은 또한 천단을 내단과 외단으로 구분하는데, 주요 건축물은 내단에 있다. 북쪽에는 기년전(祈年殿)과 황건전(皇乾殿)이 있고,
남쪽에는 원구단(圓丘壇)과 황궁우(皇穹宇)가 있다. 천단공원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기년전(幾年殿)으로,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다.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궁전이며, 높이는 38m이다. 3층으로 이루어진 푸른지붕은 유리기와라 불리고 하늘을 상징하는데 명대에는 아래부터 자주색,황색,푸른색의 3색이었다고 한다.
중앙의 '용정주(龍井柱)'는 일년 사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진(2시간)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개의 절기를 각각 상징한다. 천단공원은 천단관련 건축물들을 중심으로 큰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공원 안에서 새벽부터 검술과 태극권을 하는 중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른 새벽부터 전통악기를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며 수십 명이 함께 모여 큰 소리로 노래부르는 모습, 일렬로 줄 맞춰 서서 느린 동작의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중국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세부정보 : 운영시간 08:30 - 18: 30.
입장료 비수기: 10위안(11월1일-3월31일), 성수기:15위안(4월1일-10월31일), 공원 입장료 외에 공원 내에 있는 천단 주요건축물 입장료 20위안을 따로 내야한다. (공원입장과 천단 주요건축물 입장을 함께 할 경우 비수기 때는 30위안, 성수기에는 35위안을 내면 된다) ※ 북경 지하철5호선/텐탄둥먼역
☞ 북경 798 예술 거리 관광 :
북경 798번지 옛날 구소련과 독일의 기술로 세운 무기공장으로 신중국 공업화의 증언이 된 지역이다.
냉전이 끝나고 무기생산이 활력을 잃자 중국 정부에 의해 전자타운으로 조성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2002년 예술가들이 임대게약으로 예술공간으로 활용이 되고 조성되자 정부에 의해 문화창의산업지구로 지정되엇다.
798은 원래 공장지구의 번지수다.
관광지구로 많이 알려진곳도 798번지다.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나 멋스럽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꾸며진 거리가 인상 깊이 새겨질것이다.
☀ 중국을 48년간 통치했던 “서태후”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알고가기 :
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로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함풍황제가 죽은 후 서태후가 낳은 6살 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그리하여 28세부터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서태후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누는데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했다. 귀족 집안이었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 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이쁘장하게 생긴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186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략 했을 때 함풍황제는 [열하로 도망가] 병들어 죽고 말았다.(중국의 황제들과 우리나라의 왕들은 주색을 너무 즐긴 까닭인지 수명이 다 길지 못하다.)
함풍황제가 죽자 그의 유일한 아들인 서태후가 낳은 동치 황제가 황제로 되면서 황비에서 황태후가 되었는데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 그리고 또 황제의 황후도 황태후로 되었는데 동쪽채에 살았다 하여 동태후라 하였다.
결국에는 동태후가 제1태후 서태후가 제2태후였고. 동태후는 동치황제의 양모였고 서태후는 동치황제의 생모였다. 즉위한 동치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살밖에 되지 않았기에 두 태후가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또한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서태후는 야심가였으며 정치에 흥취를 가졌고 동태후는 정치에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인자하고 사리 밝은 동태후 때문에 서태후는 대신들한테도 환심을 살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미워하게 되고, 6살에 즉위한 동치황제가 17살이 되자 결혼하고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결정했지만, 동치황제 자신도 생모인 서태후의 성격을 닮아서인지 폭주가이고 성격도 날카로왔다. 그 후 생모인 서태후는 항상 정치만 관심하고 무슨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되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보니 충돌이 많았고 동태후는 조용했다.
그러니 동치황제는 차츰 생모인 서태후를 멀리하고 동태후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를 택할 때도 동치황제는 양모인 동태후가 좋아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았고, 이런 일들로 서태후는 동태후 때문에 자기와 친아들사이의 관계도 벌어진다고 동태후를 눈에 든 가시처럼 생각했다.
결국 동태후는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고 모순의 충돌이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면 어느해 추석날 동태후, 서태후는 궁중에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 지낼 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 발자욱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함풍황제 생전에 동태후는 중국 태후(제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함풍황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한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함풍황제는 서태후가 자기아들이 황제로 되었다 하여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갔다.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언니가 몸져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중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해서 내피를 중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마음이 약한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여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하면서 함풍황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틀려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번은 서태후가 몸져누웠다. 동태후는 서태후를 보러 몇 번 다녀왔는데 서태후의 태도는 웬 일인지 친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몸져누운 서태후가 동태후한데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동태후가 죽었다는 소식이 궁중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식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의심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동태후는 몇 일 앓지도 않고 동태후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동치황제가 황후를 택할 때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았다하여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자주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동치황제의 황후를 핍박했다. 이에 너무나도 실망한 동치황제는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밤이면 변복을 하고 몰래 기생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얼마 후 병(天花)들어 죽고 말았다. 아들이 죽자 서태후는 자기가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하여 남편을 핍박해 죽였다는 죄명으로 동치황제의 황후를 죽인다. 그리고 또 3살밖에 안되는 광서황제를 자리에 올려놓고 수렴청정을 계속한다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여동생과 서태후의 시동생이 낳은 아들이다.)
후에 광서황제가 19살이 되자 서태후와 정치상 충돌이 있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서황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 사람들의 지지하에 유심파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변법이라고 하였다.
허나 103일만에 변법은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요즘의 가택연금으로 생활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같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극히 부와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짝은 빵)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사치꾼이었고, 또한 아주 거짓투성이었는데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광서황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사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난다고 했다. (정상적 사람이 하루에 머리카락 50개 빠지는건 정상)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중국에 여인들이 남자한데 쎈양하는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한데서 전해졌는가 본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으며 황제의 결혼식 날 황후의 가마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
첫댓글 서경솔잎산악회는 해외 여행을
자기집 가듯이 가는것같아여.
대장님
부럽사옵니다요.
그런데 날짜별로 정리를 정말 멋지게 하셨네여.
두번씩이나 읽고 갑니다.
이곳을 꼭 가보고 싶다는 압박감이 밀려오네여.
어디서 이렇게 좋은 글들을 모아오셔여.
여행을 했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날짜별로 해주시는분은 처음보네여.
여행사들은
대충해주고 쇼핑만 하는데여.
박~~수를 보내네여.
ㅎㅎㅎ...
이렇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솔잎에 애정을 가져주심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성의있는 메뉴얼에 감탄을 쏟았습니다. 차분히 끝까지 읽고나니
많은 공부가 되었으며 그중 서태후가 매일 보았던 경극 의 내용을 알고 나니
기회가 주어진다면 경극을 보고 싶습니다. 노고에 머리숙여 감사 드립니다.^^*
시험보면 다들 만점 받을것 같아요.
열정적으로 이끌어주는 광효님 ~수고 하심에 찬사를 보냅니다
넘 잘하셨네요 대단하세요,,감사 드립니다,,산우님 한눈에 쏙쏙 참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