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학풍천에 빗장 걸어 닫고 홀로 있으니(萬壑風泉獨掩),
긴긴 해 계정에 찾아오는 나그네 없도다(日長無客到溪亭).
해질녘 정신 지쳐 서책 버려두고 나오니(晩來意倦抛書出),
눈부신 신록의 그늘 뜰 안에 가득하구나(潑眼新陰綠滿庭).
이 시는 우곡잡영(愚谷雜詠) 20수중에 있는 계정(溪亭)을 읊은 것이다.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의 조용한 산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계정은 조선조 퇴계학의 정맥을 잇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대선비로 이름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명종 18년)~1633(인조 11년))가 강학을 하던 곳이다. 우복은 본래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태어나 살았으나 28세 무렵 관직생활을 잠시 접고 우산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3년 후인 1603년 계정을 짓고 청간정(聽澗亭)이라 이름 하였다.
#유일하게 草家로 계승
우복은 대사헌에 14번이나 임명된 고관대작의 반열에 들어 있었지만, 귀향하면 이 산중으로 들어가 초라하기 그지없는 계정에서 청검하게 평생을 지냈다. 계정은 그의 이러한 선비정신을 상징하듯이 지금까지 초가로 계승되고 있다.
평생을 청빈한 관료생활로 일관하자 임금은 가정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빈한한 살림을 걱정하여 곡식을 하사하곤 하였다.
우복의 이러한 청빈한 관료정신은 후세까지 조정에서 높이 기렸다. 영조임금 때 와서 이 우산리 일대를 하사하여 사패지(賜牌地)로 지정하였다. 남북십리 동서오리 협곡으로 이루어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은 이른바 우산동천(愚山洞天), 혹은 칠리강산(七里江山)으로 불린다.
진양정씨인 우복은 찬성공 정여관(鄭汝寬)과 합천이씨 사이에 2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19사략'을 읽고, 8세에 '소학'을 절반쯤 읽자 문리가 확 통했다고 한다. 16세 때 진사초시에 합격하였고, 18세 때는 서애(西厓)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24세 때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해 청환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사건 때는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을 추천한 죄로 20일간의 투옥생활을 겪게 된다.
#죽음 무릅쓴 의병활동과 애민정신
3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해 김광복, 김사종 등과 목숨 걸고 항전하였다. 안령산(安嶺山)전투에서 어머니와 아우를 잃고 우복 또한 왜적의 화살을 맞아 절벽에 굴러 떨어지는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그 후에도 김각, 송량, 이전, 이준 등과 함께 구국의 일념으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현재 대구 망우당공원에 있는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우복은 어느 누구보다 임란의 아픈 상처가 깊었다.
47세가 되던 4월 동지사(冬至使)로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7개월여에 걸친 장도에 오르게 된다. 그는 당시 국가의 주요한 무기였던 화약이 임란 후 불과 3천근으로 수입이 제한되자 명나라에 이를 시정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수입물량을 6천근으로 늘렸다. 이로써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 대구부사 시절에는 대구의 식량고인 수성들판이 가뭄에 타들어가면서 굶주리는 자가 늘어나자 지산동에 저수지를 축조하여 세세 풍년을 이룰 수 있는 수해대책을 마련하였다. 지금 이 자리에는 녹원아파트가 들어섰고 그의 공적을 기리던 송덕비는 도시화에 밀려 두 동강이가 난 채 경북대 박물관 앞 비석마당에 겨우 보존되어 있다.
우복이 계정에서 독서와 저술로 보내던 때, 그는 당시 상주목사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의논하고 지방 유지들과 뜻을 합쳐 의료재단 존애원(存愛院)을 건립하였다. 존애원은 당시 의료시설이 취약한 시골 민중이 언제든지 무료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한 의료기관이었다.
#萬言疏와 직언
광해군 시절 온갖 폐단이 속출해 정치가 어려워지자 나약한 문신으로 자처하지 않고 난폭한 광해군에게 일만여자의 직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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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이 머물던 계정 초가지붕위에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 겨울정취를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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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 바로 옆에는 아주 독특한 한옥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산루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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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를 올렸다. 그 요지는 "나라 경제가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고위층들의 관혼상제에는 허례허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 경제인들의 돈을 끌어당겨 내년 세입으로 미리 쓰면서도 검소할 줄 모르니 군주(君主)로서 어찌 구걸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십니까"라고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광해군은 이 상소를 읽고 크게 분노하여 그를 삭직(削職)과 국문(鞫問)으로 벌하려 하였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이항복이 나서서 "그의 말이 과격하나 지극한 충성심을 품지 않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를 처벌하면 언로가 막히고 말 것입니다"라면서 임금을 달래 겨우 수습되었다.
우복은 광해군 시절 사단이 터질 때마다 연루되었다. 이는 불의를 보면 분연히 일어서는 그의 높은 기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를 벌하려 했던 광해군마저 그의 충의정신을 감복해 마지않았다. 정인홍이 북인정권을 수립하여 회재(晦齋)와 퇴계(退溪)를 문묘에서 퇴출하려 할 때에도 영남 사림의 대표로서 그를 제지하였다. 이로 인해 끝내 정인홍으로부터 탄핵되어 해직된 후 무고하게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우복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매우 밝았다. 사계(沙溪) 김장생과 논변한 경서변의(經書辨疑)는 영남학과 기호학의 의견이 교류된 것이다. 훗날 사계는 "오늘날 세상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예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우복밖에 없다"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사계의 제자인 우암(尤菴) 송시열, 초려(草廬) 이유태, 동춘(同春) 송준길 등은 당시 모두 준수한 청년으로서 서인의 핵심 인물들이었지만 그는 동춘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율곡의 제자인 성균관 대사성 정엽(鄭曄) 또한 우복을 존경하였고 늘 성균관 유생들에게 우복의 학문과 언행을 예찬하였다.
그는 한음(漢陰) 이덕형, 백사(白沙) 이항복과 가장 절친하였고 한음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 훗날 우복의 행장은 동춘, 시장(諡狀)은 우암, 묘지명은 창석(蒼石) 이준이 각각 지음으로써 초당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퇴계가 편찬한 '주서절요'를 출판, 반포하였고, 만년에는 주문작해(朱文酌海)라는 제목으로 주자서중의 봉사(封事)와 비지(碑誌)등을 뽑아 10권의 책으로 편찬하였다. 어린이 교육용으로 양정편(養正篇)을 지었고 사문록(思問錄)을 지어 주역, 예기, 의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밖에 상참고(喪參考)와 문집 20권10책이 있다. 훗날 문집간행 후 관각(館閣)의 제현들이 우복문집의 중요저작을 뽑아 4책 분량으로 엮어 하거선영(荷渠選英)이란 제목으로 간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고 문장의 지침으로 삼았다. 훗날 동춘은 우복이 세상을 하직하자 우산리 산중에 혼자 남아 우복의 어린 손자 도응(道應)을 10여년동안 양육하고 가르치면서 우복의 유고를 정리하였다. 이는 마치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의 손자 자사를 가르치며 공자의 묘를 지킨 것과 너무나 흡사하였다.
#對山樓는 계정의 부속건물
우복의 7세손 입재(立齋) 정종로(1738(영조 14년)~1816(순조 16년))는 퇴계학파의 삼고봉(三高峰·청대(淸臺) 권상일, 대산(大山) 이상정, 입재)으로 꼽히는 인물이며, 당대 생존학자로 꼽을 때는 좌대산(左大山), 우입재(右立齋)로 불렸다.
입재는 45세 무렵 계정 옆에 대산루를 지어 영남학맥을 집대성하였다. 계정의 서남쪽에 우복 종택이 있고, 현재 우복의 16세손인 정춘목씨가 종가와 고향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계정의 현판글씨는 선원 김상용이 쓴 것과 미수 허목이 쓴 것 모두가 잘 보존되어 있다.
계정 앞에 있는 문화재 안내문에 계정이 대산루의 부속 건물로 소개되어 있음은 잘못이다. 지은 연대 등을 감안하면 대산루가 계정의 부속건물에 속한다. 계정 위쪽 산언덕에는 우산서원이 세워져 우복을 추모하였으나 대원군 당시 훼철되었고 입재가 강학하던 도존당(道存堂)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