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 위의 말씀에 입각하여 소리내어 반복으로 고백하십시오.
에베소 극장
피온산 기슭의 비탈을 이용해 건설된 이 극장은 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트라얀(Trajan) 황제 시대의 모습이다. 따라서 로마-그리스 타입으로 무척 아름다운 극장의 표본이 되겠다. 고대 극장이 모두 그러하듯이 3부분으로 되어있다. 약 18m 높이의 무대 정면 건물은 3층으로 되어있고 각종 부조와 조각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약 40 m 지름의 중앙 무대는 정교한 음향학적 구조로 되어 있어, 배우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해도 관중석 끝자리의 사람도 모두 알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관중석은 외곽까지 150m의 크기이며, 각 단은 22줄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어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를 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들로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1. 교회 행사 및 소식
➊ 오전 예배후 ‘제직회’가 있습니다. 제직원들께서는 다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➋ 오후 예배후 ‘공동의회’가 있습니다. 세례(입)교인들은 다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건 : 2013년 예산편성 / 조직 및 직분발표
➌ 새로 개명된 카페에 관심과 참여 많이 부탁드립니다.
➍ 구(부구)역장 모임 : 오후 예배후 본당.
- 모임 후 필요시 차량운행 해 드립니다.
➎ 박부자 집사님 무릎수술후 입원치료중입니다.
- 부산 양정 동의 의료원 615호
➏ 오계란 집사님 캐나다로 출국
- 박지선(딸) 졸업 및 대학입학
➐ 신천지, 구원파 조심조심! 담임목사를 비방하고 교회를 비방하고 무료성경공부를 빌미로 유혹하는 자가 많으므로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
➊ 6월6일(목) 오전11시 진해교회 위임식 및 은퇴식, 취임식
-위임 : 박태웅 목사
-은퇴 : 조용문 집사, 오명자 권사
-취임 : 이기운, 이혜련, 박미자
-교회에서 10시 30분에 출발
❷ 영북교회 임직식 및 취임식
-일시 : 2013. 6월 09일(주일) 오후 5시.
-임직 : 박원흠 -취임 : 이호순, 박예자
➌ 이길수 목사 심근경석 1차 수술후 회복중.
-전남대병원 8동 762호실, 2-3차 수술 남음.
서머나 교회
스미르나 라고 하며 현재명은 이즈밀 이다. 터키 남부의 미항으로큰 도시이다. 현재의 교회는 아시아 7교회 중 유일하게 건물이 있는 곳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해 순교한 서머나 감독 폴리캅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잔학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숭배 거부로 서머나 교회는 많은 재정적 궁핍을 겪었다. 그럼에도 서머나교회는 모든 핍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열렬한 신앙을 지켜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 식사 및 설거지 봉사자
<금주> 이명혜, 임소을, 자원자
<다음주> 이명순, 나명자, 정석연, 자원자
화형당하는 폴리갑
서머나 교회는 105년경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맡고 있었다.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다.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아우텔리우스 황제) 순교했다. 익나티우스가 순교한 후 약 반세기 후에 폴리갑이 순교했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삶을 증거했던 인물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아첨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기었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바닷조개껍질이나 땅위에 박아 놓은 창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 주일오전예배 /사회자 / 이종운 장로
폴리캅이 고문당하던 곳, 파고스 언덕
총독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기만 하면, 파고스의 언덕에 있는 경기장에 몰아넣어 군중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해 버렸다. 서머나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듯이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그들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서 주님께 충성을 다했다. 폴리갑은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한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이다.
묵상기도 ᠁᠁᠁᠁᠁ /늘은혜 성가대
예배의 부름 ᠁᠁᠁ / 요13:34
신앙고백 ᠁᠁᠁᠁᠁ / 사도신경
기원 ᠁᠁᠁᠁᠁᠁᠁ / 사회자
※. 찬송 ᠁᠁᠁᠁᠁ / 32장
성시교독 ᠁᠁᠁᠁ / No. 1
찬송 ᠁᠁᠁᠁᠁᠁᠁ / 384장
기도 ᠁᠁᠁᠁᠁᠁᠁ / 이종운 장로
성경봉독 ᠁᠁᠁᠁ / 출애굽기 13:17-22
특송 ᠁᠁᠁᠁᠁᠁᠁ / 늘은혜 성가대
설교 ᠁᠁᠁᠁᠁᠁᠁ / “하나님의 길”
이 도시의 명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향료인“몰약”이란 말에서 유례 되었다고 한다. 서머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왜 이 도시가 “몰약” 이란 뜻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왜냐하면, 서머나에서는 “몰약”이 난 적이 없고, 지금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는 아마존족인 한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 언제까지나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인 이곳을 아내의 이름으로 ‘서머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머나(이즈밀)는 지금도 터키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인구가 450만 명에 이른다. 항구 도시로서의 명성을 지금도 잃지 않고 있다. 서머나는 공업이 발전된 도시는 아니지만, 많은 물품들을 수출하고 있다. 서머나를 중심으로 한 에게 지역에서 생산되는 연초와 건포도를 비롯한 농산물, 그리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터키 대리석, 넓은 목초지에서 건강하게 자란 양들을 통해 얻어지는 가죽 등이 주요 수출 품목이다. 서머나가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길게 뻗어있는 만과 병풍처럼 도시를 둘러쌓고 있는 두 개의 형제산인 시필산(Sipil)과 니프산(Nif)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부들은 시필산과 니프산 사이에서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바라보며 그물을 거둔다. 저녁에는 황혼의 아름다움과 함께 태양이 서머나의 바다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간다. 또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만은 항구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제공하여 이곳을 계속 상업도시와 휴양도시로 발전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서머나에 역사에는 아름다움을 격찬하는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서머나는 아시아의 자랑,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단장, 그리고 아시아의 면류관이다”라고 했다. 루키안(Lucian)은 ‘서머나야말로 아시아의 영광의 도시요, 화려한 한편의 시와 같다.’고 표현했다. 역사가 스트라보는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하였다. 서머나를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서머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요, 이상적인 도시였다. 그곳에 세워진 많은 신전들은 사람들의 영혼에 안식을 주었고, 목욕탕과 마차 경기장들은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켜 주었다
봉헌찬송 ᠁᠁᠁᠁᠁ / 213장
봉헌기도 ᠁᠁᠁᠁᠁ / 한용균 목사
교회소식 ᠁᠁᠁᠁᠁ / 이종운 장로
※. 찬송 ᠁᠁᠁᠁᠁ / 54장
※. 축도 ᠁᠁᠁᠁᠁ / 한용균 목사
폐회 ᠁᠁᠁᠁᠁᠁᠁ / 성도의 교제
※. 표는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누가의 묘임을 입증하는 송아지그림(누가복음)
고대 도시 에베소의 유적에 들어 가는 입구에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 뒤 쪽에 누가의 묘가 있다. 누가의 유해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 안장했었는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했었다. 건물에 누가의 묘지임을 알려 주는 황소의 그림이 부조되어 있다. ‘성지 보존협회’에서 한글로 설명문을 세워놓은 것을 볼 수 있다.
**** 주일찬양예배 찬양집회 오후3시00-
찬양 : 김현우 간사 와 “주 사랑” 찬양그룹
(박수조, 박성희, 김정윤, 조연신, 김상원, 이한나)
기도 : 임소을 집사
본문 : 열왕기하 6:8-17
가족찬송 : 1구역
설교 : 김수근 목사(현, 재건영북교회 담임목사)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찬송 : 두 손들고 찬양
기도 : 사회자
주기도문 : 오직 믿음으로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 께서는 죽기 전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 그리하여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 되며 3차 종교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이가 없었다. 1878년 캐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 속에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번도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사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터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 하였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 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 했다.
<수요일 예배 및 기도회 2013. 6. 05. 저녁7시 30분>
설교자 : 한용균 목사
성경본문 : 사도행전 2:37-42
설교 : “제자”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 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지중해 연안의 파트모스(성서에 밧모섬)섬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가 피살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죽 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세례소 등이 있다.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사원이 있다. 이사베이 회교 사원은 1375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회교 건물이다. 본래는 두 개의 첨탑이 있었는데 17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 다음주 예배 봉사위원
주일오전기도 : 김가연 장로
주일오후기도 : 김광은 집사
주일오후찬양 : 2구역
아데미 여신은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신성시 하였던 신으로 처음에는 킬벨레 (Kylbele)라 불리웠다. 이 여신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쳐 로마와 메소포타미아 및 아라비아에서도 섬기었다. 아랍인은 '라트'로, 이집트인은 '이시스'로, 그리스인은 아르테미스(사냥의 여신), 로마인은 '디아나'로 불렀으며 이오니아인들이 '아데미'라 불렀다. 처음 킬벨레로 불리울 때는 목신 상이었으며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이오니아 문명과 함께 아데미로 이름이 바뀌었고 땅과 다산을 상징하였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헬레네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이었으며 최초로 완전히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었다. 이 신전은 일곱 번이나 파괴되었으나 항상 같은 위치에 재건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해변에 지어졌으나 후에 항구가 매립되어 지금은 바다에서 5km 떨어져 있다. 고대의 신전은 55 x 110 m 크기로 이오니아 양식에 따라 건축되었으나 에베소에 살던 헤로스트라토스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자 불태웠다고 한다. 후에 신전은 당초의 것과 매우 유사하게 재건되었는데 55 x 105m 크기로 대리석으로 된 토대 석 위에 13층의 계단과 2.7m 높이의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인들은 다이아나 신전이라고 부르는 아데미 신전은 1860년대에 영국인들이 이곳에서 신전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 폐허를 발견하기까지 무려 육 년이 걸렸습니다. 소아시아의 모신에게 바치는 이 신전은 주전 천 년경에 세워졌습니다. 이 신전은 주전 350년 알렉산더 대제가 태어나던 바로 그 날 밤에 불에 타 파괴되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이 신전을 재건했는데, 길이가 108미터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전입니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 가운데 이렇게 큰 건물로 처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부서진 조각만 갖고는 이 신전의 모양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잘 보존된 다른 두 신전들을 통해서 아데미 신전이 얼마나 웅장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중보기도하기
① 온 성도가 날마다 성령충만하여 주의 듯을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거룩한 삶에 힘쓰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② 교회에 회심과 구원 역사가 증가하도록
③ 창원 땅의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④ 추수할 일군을 세워주소서
⑤ 담임목사의 성령과 은혜와 사랑충만, 하나님을 경외와 말씀의 능력과 부흥을 위해
⑥ 성도의 산업 (모든 직장과 가게, 운전, 병원, 교사, 약사, 옷집, 목장, 경동테크주식회사, 책통클럽 학원을 위해)
⑦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질병치유, 건강회복, 믿음과 예배생활의 회복,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➇ 교회를 멀리 한 성도와 군복무중에 있는 형제, 유학중에 있는 성도를 위해
➈ 나라(안보, 평화, 전쟁 막아주심, 경제회복, 사회안정)와 북한(무력도발, 공산체제, 신앙자유, 복음으로 통일)과 한국교회와 재건교단의 신앙의 회복, 하나됨, 복음능력회복을 위해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했던 아데미 여신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축제의 행렬은 아데미 신전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데미 신전에서 출발한 아데미 신상과 축제 행렬은 에베소 시의 동쪽에 있는 마그네시아 문을 통해 입성하고, 동방 체육관과 시장, 음악당을 지나서 에베소 시청에 이른다. 에베소 시청 앞에는 또 하나의 아데미 여신상이 밖을 향하여 서 있는데 두 개의 여신상이 만나게 되면 군중들의 열광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에베소의 총독은 관저에서 나와서 아데미 여신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총독의 인사를 받은 아데미 여신상은 크레테 도로를 지나 셀수스 도서관을 거쳐 에베소 광장에 이른다. 광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항구대로를 지나 부두에 이르게 된다. 부두에 이르면, 드디어 소들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드려진다. 남자 사제들이 24마리의 황소 고환을 잘라 아데미 여신의 목에 걸어 주면, 군중들의 열광인 함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도살된 소들이 제단에 올려지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데미 축제가 무르익게 된다.
***** 2013년 6월 추천신앙도서
묵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작입니다 / 서승동목사/ 예수전도단 / 11,000원
겐그레아 해변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약11km 동남쪽에 위치한 항구 이름이다. 당시 고린도에는 2개의 항구가 있었는데 북쪽 항구에서 승선하면 로마로 가게 되었고, 남쪽 항구인 이 겐그레아에서 승선하면 소아시아와 예루살렘 방향인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갈수 있었다. 현재 지명을 케흐리에스(Kehries)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기념하여 항구 방파제에 큰 동상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근협 지역에서 매 2년마다 소위 고린도 지협경기가 열렸는데 이를 Isthmian Games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을 비유하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 절제할 것을 권면했었는데 바로 고린도 지협경기를 연상하며 기록했을 것이다. 이곳은 고린도에서 나가고,고린도로 들어가는 선적의 화물을 취급하고 승선객의 승강장 역할을 감당한 고린도의 중요한 동해항이었다. 바울도 제2차 전도여행의 귀로인 이곳에서 배를 탔다(행 18:18). 이곳에는 겐그레아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에 ‘맑고 순결함’ 혹은 ‘빛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뵈뵈’라는 여집사가 있었다.
***** 2013년 6월 요절 암송 요절(사랑) *****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한일서 3:15>
아프로디테 여신
고린도인들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수호신으로 하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였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자랑하는 3가지 중의 하나인 비너스 상은 그리스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만 본다면 아프로디테의 완벽한 몸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신화에 나타난 아프로디테의 행실은 그리 정숙하지 못한 '사랑의 여신'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의 말씀과 같이 당시 고린도인들의 문란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음란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린도인'이란 은어가 있기도 했다.
***** 뜨거운 갈망 2.
- E.M 바운즈 목사 -
아무리 노력해도 갈망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경우에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의무이다. 이런 의무에 충실할 때 갈망이 생기고, 그것의 표현인 기도가 강해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명령한다. 우리의 건전한 판단력에 따를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말거나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감정에 따라 기도를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해서는 안된다. 갈망이 없을 경우, 우리는 갈망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갈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이런 갈망이 생기면 우리는 갈망의 지시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갈망이 없는 것을 슬퍼하면서 그런 갈망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뜨거운 간절함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아멘>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아크로폴리스(고린도의 높은 도시)라 불리는 이 곳은 해발 575m에 있고 일명'펠로포네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 있다. '에피라' 즉 관찰, 관측소, 경계라는 의미로 주전 7~6세기 경에 성채를 쌓았으며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4세기 경의 축조물로 보고 있으며 성벽은 유스띠니아노스 황제 때인 슬라브 족들의 침공 이전인 주후 583~586년 경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길이는 2,000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띠의 신전이 있어 이 곳에 종사했던 제관과 천여명의 제녀에 의해서 종교라는 명목아래 자행되었던 음행이 유행처럼 번져 외국인들의 발걸음 까지도 잡아 당겼다고 한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수 천명의 무녀들이 살고 있었으며 창녀의 업을 했다. 아폴론 신전의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 쓰인 항아리, 술병, 화병, 물병 등이 있고, 로마시대의 율리아 황제 가의 7개 동상과 신격화된 율리오스 황제의 모습, 네로의 두상, 모자이크, 치료의 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환자들이 신전에서 나음을 받고 신께 감사의 표시로 환부들을 받들어 봉납한 것들) 등이 있다.
***** 빛 가운데 거하면 2 (요일 1:7)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62)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내 양심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한다면, 아무것도 감출수 없는 그 상태에서 놀라운 계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나를 깨끗케 하셨다는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책망하실 만한 것이 내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이 빛은 내 의식 세계에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예리하고 뼈아픈 지식을 동반합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내 안에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성령의 미워하심으로 그것들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의미는 어둠에 속한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빛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함을 의미합니다.
<아멘>
베뢰아의 바울 기념석
베뢰아는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에 있다.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998. 8. 이문범 제공밧 모 섬(Patmos)지리적 배경도데까니스(Dodecanese) 지역의 최북단에 위치한 밧모섬은 북쪽으로 이카리아(Icaria)와 사모스(Samos)가, 동쪽으로는 레입소이(Leipsoi), 남쪽으로는 레로스(Leros)가 자리잡고 있다. 길게 늘어진 섬은 길이가 12.5km로 약간 굽은 리본모양을 가지고 에게해를 향해 뻗쳐있다. 이러한 모양을로 인해 바닷물이 섬깊숙히 들어오면서 셀 수 없는 만(灣)을 형성한다. 꾸불꾸불한 모양의 해안을 모두 편다면 전체 길이가 65km나된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은 중간 부분으로 섬을 거의 갈라 놓을듯하다. 가장 높은 산은 남쪽에 위치한 해발 269m의 프로피티스 일리아스(Profitis Ilias)산이다. 현재의 밧모섬은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그린 책에 나오는 모양과는 조금 다르다. 섬 전체가 제주도와 갈릴리 바다근처와 같은 검은 회갈색의 현무암으로 되어있고 약간의 풍화된 토양을 제외하고 섬 전체가 완만한 능선을 가진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2013년 6월02일 창원 아름다운교회(055-283-3450)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49-7
성 소피아 교회(비잔틴교회로 후에 회교사원으로 사용 되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국가의 중심교회로 사용되었고, 비잔틴이 무너질 때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한 건물에 공유할 수 없는 두 종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소피아의 원래 이름은 Hagia Sofia이다. 터키사람들은 Aya Sofi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의미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성 소피아 교회는 두 번이나 붕괴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세운 건물은 AD 390년에 지어졌다.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이 건물이었던 이 교회는 4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유스티니안 황제 때, 532년에 히포드롬에서 마차 경기 도중 일어난 니카 반란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같은 해에 성 소피아의 재건축을 시작했다. 현재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건물이다. 이 건축에 동원된 기술자는 100여명, 노동자는 만 명이 넘는다. 이 교회는 5년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앙 본관에 반암 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다. 교회의 개장식은 대단히 화려했으며, 황제가 내부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범죄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성화 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많은 모자이크와 프래스코들이 손실되었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된다.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이 교회의 면적은 총 7,570m²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동안 사용했다.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 (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교회/한용균목사
마라나타(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아멘!
소피아 내부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미랍을 보면 정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미랍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교사원은 메카 방향을 향해서 지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 정자 같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예배를 보는 장소로 술탄 압둘 메지트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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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주셨고, 지금도 주시며 앞으로 주실 것처럼, 당신도 그분을 위해 전부 바치라는 뜻이다.” -제임스 패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