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24일
본문 이사야 53:1-6
제목 예수님,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받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고난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800년 전의 선지자인데 마치 예수님의 고난 받으신 현장을 생중계 하듯이 묘사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그의 겉모습은 초라했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가난했고 무명의 삶을 사셨습니다. 30세가 되어 공적 사역을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빵을 먹여주는 기적을 행할 때 무리가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열렬하게 환영했지만 예수님이 무력하게 잡히고 고난당함을 보며 등을 돌립니다. 성경에 능통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약속된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마저 도망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먼 나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경배하려 왔지만,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실 것을 알던 자들도 관심이 없었고,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한 곳을 알려달라고만 했지 함께 가서 경배할 뜻이 없었고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될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였습니다.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아무도 초라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만 거절함만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거절한 무엄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거절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인사를 건성으로 받는 사람을 보면 “건방진 것”이라며 속으로 욕을 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거절당할 때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자식들에게 버림받아서 이집 저집 전전하는 늙은 부모님들 많습니다. 요즘은 집에 모시고 살 생각조차 없습니다. 우리나라 노인들 75%가 시설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앞으로는 더욱 비율이 높아질 테지요. 사람도 자식들에게 싫어 버림을 당하거나 거절을 당하면 큰 아픔이 됩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에 멸시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죄악으로 가득한 더러운 인간들이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거절하다니 얼마나 가소로웠을까요? 생애의 끝 무렵에는 제자 중 하나인 가룟인 유다에게 배반을 당했습니다. 그가 잡히시던 밤에는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칩니다. 베드로는 세 차례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거절당하실 것을 미리 예언을 하였습니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면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멸시했고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으려 함은 문둥병자를 보는 것처럼 대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 온 자들은 흉악범을 다루듯이 검과 몽치를 들고 왔습니다. 빌라도와 헤롯에게 재판을 받았지만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자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빌라도는 거짓 고발 자들의 말만 듣고 예수님을 사형판결에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라고 예언하므로 고난이 점차 가중될 것을 말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고 흉내 내듯이 옷을 벗기고, 매로 때렸습니다. 로마인들의 채찍은 가죽으로 되어 있고 끝에는 납이 달려 있습니다. 세게 후려치면 납이 살 속에 박히고 잡아챌 때 살점이 뚝뚝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매를 맞으셨고 채찍에 맞은 자국에서는 피가 솟구쳤고 온 몸에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당한 고통도 큰데 더욱 괴롭게 하려고 숨이 차오르고 아픔으로 몸부림치는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아직도 성이 차지 않은 듯이 머리에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눌러 씌웠습니다. 붉은 피가 이마에서부터 온 얼굴을 적시며 어깨에까지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부끄럽게 하려고 두 강도 사이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대적들은 괴로워하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며 조롱했고,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사람이 아니라 벌레로 취급했습니다. 짐승도 이렇게 죽이면 동물 학대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
예수님은 왜 잘못이 없는데 이런 고난을 겪었을까요? 사람들은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4절 상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라고 합니다. 질고는 질병을 말하는 것이지만, 본디 의미는 우리 죄악의 고통을 대신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죄악은 질병처럼 전염되고 죽음에 빠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에 걸린 우리 살리시려고 대신하여 고난받고 죽으셨습니다.
또 5절에서도 고난 받으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과연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고전15:3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그의 죽으심의 이유를 증거 합니다. 5절 하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께서 고난받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졌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죽을병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6절에서 그가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언급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생들이 목자이신 하나님을 뜻을 거슬러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삯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러야 마땅합니다. 꼼짝없이 죄의 대가는 치러야 할 운명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우리 죄악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를 따라 보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죄의 대가를 떠넘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 받음을 자랑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빼면 우린 죽음과 멸망만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예수님을 빼면 맹탕입니다. 예수가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 인생에 의미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운명, 나의 전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큰 희생을 치르시고 구원해 주심을 무엇으로 보답 할꼬 하는 심정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값을 주고 사신 바 되었으니 그런즉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