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곁에 머무른 지도 어느덧 한 해가 흘렀다.
군주의 침상 근처에는 딱딱하고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어느 날부터 밤마다 그에게 책을 읽어주느라 내 몸 앉힐 곳이 필요해 쓰지 않는 물건을 가져다 둔 것이 그대로 의자의 자리가 되었다. 군주의 침상 근처에 놓이기엔 어쩐지 초라하게 생긴 물건이지만, 그걸 굳이 어울리는 것으로 바꿀 마음까지 들지는 않았다. 낡고, 초라하고, 딱딱한 의자. 나는 그게 꼭 나 같아서 내 자리로는 퍽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책을 읽어주려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가 문득 언제부터 군주에게 책을 읽어주었더라, 돌이켜본다. 아마 이제 막 잠들려는 그를 두고 나오려다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발길을 돌렸던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잠시 망설였던 시간조차 희미하지만 어디부터가 계산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이냐 물으면 무게추는 진심 쪽으로 기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어리고 서툰 날들에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던 보육원 아이들을 떠올렸으니까. 그 시절 잠 못 드는 아이들을 나는 안쓰러워했다. 누가 누굴 연민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잠시라도 도망칠 방법은 잠드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러나 그때 등 뒤에 있는 사람은 그 애들이 아니라 군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발길을 돌린 까닭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진심 아닌 계산이었으려나.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해가 지고 피로해진 몸을 눕혀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어쩌면 내가 당신에게 무해한 사람임을 호소할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애초에 혼인해도 괜찮을 정도로 안전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이후로는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넘겨짚었다. 군주와 혼인한 후엔 애정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혼인한 이들이 대체로 그렇듯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선에서 자유롭고 안전한 삶을 살아갈 작정이었고.
군주에게는 잠이 잘 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책을 읽어주겠다고 했었다. 때마침 그때 가지고 있던 책이 염정소설이었는데, 그 소설은 도융헌의 애첩인 모희가 세책점에 반납을 부탁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 후로는 습관처럼, 또는 일과처럼 염정소설을 읽었다. 대체로는 모희가 내게 맡긴 책을 읽다가 언젠가부터 내가 책을 고르지 않고서야 지금껏 세워온 계획이 틀어지겠다는 생각이 든 후론 몇 쪽이라도 읽어보고 책을 고르는 성의를 들였다. 한결같은 모희의 취향 때문에 이야기는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백마 탄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 대다수여서 아무리 군주가 염정소설을 좋아한들 그의 마음에 들 것 같지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어딜 가겠어요.」
얼마 전 내가 고른 소설은 어느새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제 뜻을 이룬 후에는 얹혀살던 주인공의 집을 떠나려던 남자는 고단했던 삶을 뒤로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지금껏 읽은 소설의 분량으로 따지자면 사랑 고백쯤은 이미 수십 번도 더 읽었지만, 진정 내 안에 생동하는 존재가 되어본 적은 없으므로 문장들은 그저 종이 위에 까맣게 새겨진 글자에 불과했다. 무심하고 무감하게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는 내 목소리를 군주가 어떻게 들었을지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책을 읽느라 잠시 뻐근해진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무심코,
“내일은 아침부터 눈이 온대요.”
하고 말했다. 주위를 둘러볼 만한 나이가 되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은 눈 오는 날씨에서 낭만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게 눈이 오는 날은 눈 치울 일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몰려드는 추위에 덜덜 떨던 기억이 강해서 차마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줄도 몰랐다.
“같이 눈을 볼까요?”
이제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는 것쯤은 익숙했다.
군주와 처음 만난 날에도 눈이 내렸다.
모희는 언제나처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종이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세책점에서 빌려와야 할 책의 목록은 잠깐 보기에도 유치한 제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너는 무슨 재미로 이런 책들을 읽느냐고 물었고, 그는 나에게 너는 알려줘도 모를 거라고 응수했다. 나는 그에게 기회가 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권했고, 그는 나에게 기회가 있다면 도망이라도 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도융헌의 애첩이었고, 나는 아직 도융헌의 아들이었다. 그렇게 살아갔다.
“인규 씨, 오늘 생일이네요.”
눈 오는 날이라 세책점은 유독 한가했다. 모희가 고른 책 다섯 권을 골라 세책점 직원에게 내밀자, 그는 오늘이 내 생일이라며 한 권을 더 빌릴 수 있으니 책을 골라 가져오라고 했다. 세상은 오늘을 내가 태어난 날로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도융헌의 아들로 입적된 날이기는 하지만 나조차도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모르니 세상이 알고 있는 대로 속아주기로 했다. 오늘을 내가 태어난 날로 알고 있는 세상의 인식은 해를 넘길수록 거북해졌지만 별 도리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니던 세책점이 넓은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좁은 곳도 아니었는데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나와 세책점 직원, 그리고 군주가 유일했다. 그땐 그 사람이 군주인 줄 몰랐지만, 어쨌든 그랬다.
나는 문득 군주의 시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에 관심을 두는지 궁금해진 결과다. 직원은 한 권을 더 가져오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가지고 올 책은 없었다. 그렇다고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를 없던 것으로 만들기는 어딘가 아쉬웠다. 누가 나 세상에 태어났다고 기뻐하거나 반가워했던 이가 있었던가. 그러니 세책점에서 만들어준 별것 아닌 배려를 있는 그대로 누리기로 결심했고, 타인의 관심사인 책을 따라 읽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군주의 시선은 염정소설이 있는 서가에서 머물렀다. 대충 모희와 비슷한 또래인 것처럼 보였는데, 역시 그 나이대 여자들은 염정소설을 좋아하는 건가 짐작했다. 이제 막 죽다 살아난 입장에서야 이야기 속 사랑에 울고 웃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리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취향인 것이 세책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서적은 대체로 염정소설이라는 말을 들었던 까닭이었다. 물론 다른 영역의 책이라면 모를까 염정소설을 따라 읽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군주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는 서가에서 인기가 많다는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인기가 많은 책이라는 사실은 모희 때문에 알았다. 그가 장장 열흘을 기다려서 빌렸던 책이 이번에는 보기 좋게 꽂혀 있었다.
“이거 대신 빌려드릴게요.”
내가 읽을 책을 빌리는 대신, 타인이 읽을 책을 빌려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마침 군주가 들고 있는 책이 딱 다섯 권이었다. 세책점에서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책의 한도로 정해져 있는 권수가 다섯 권이니 무엇을 더 빌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군주는 그제서야 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흘끗 시선이 향한 곳은 내가 들고 있는 책이 있는 쪽이다. 마침 내가 들고 있는 책도 딱 다섯 권이기는 했지만,
“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갑작스러운 요행이 찾아온 탓으로 내겐 딱 책 한 권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책을 빌리려는 내게 직원은 마침 한 시진 전에 들어온 물건이라며, 운이 좋다고 했다. 운이 좋다는 말은 정말이지 처음이라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만난 사람이 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의 이름에는 장미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길가에 핀 장미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꽃을, 그것도 장미를 사서 군주의 화병에 꽂는다. 그건 군주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 중 하나였다. 굳이 장미를 고른 것은 군주의 이름에 장미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발상의 결과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의 방에 내가 두고 간 물건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나를 떠올리게 될 거라는 불순한 의도이기도 했다.
꽃집 주인은 매일 아침 자신의 가게에 들러 눈길 한 번도 주지 않고 장미를 사 가는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언젠가는 다른 꽃들도 둘러보지 그러냐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나는 그제서야 꽃집에 얼마나 많은 꽃이 가지각색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줄 알게 되었다. 과연 아름다운 풍경이기는 했지만, 지난하고 어디 한 구석은 단단히 망가진 생에 꽃까지 들일 공간은 없었다. 이내 주인이 꽃을 사서 어디에 쓰냐고 묻기에 대답 대신 웃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화병에 꽃을 꽂으려는데 군주는 바라는 게 뭐든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영민한 군주는 아마 내 의도쯤은 간파하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를 챘지만, 정작 내 뜻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단언에는 복잡한 감정이 흘러들었다. 어쩔 수 없는 반발심과, 반발심이 불러오는 흥미로움, 그리고 복잡한 감정에 끝에 밀려드는 묘한 안도감. 군주가 애정이라는 순진한 감정에 순순히 마음을 넘겨주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지금껏 주지도, 받지도 못한 애정이라는 감정을 흉내 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내가 무해하고 안전한 사람이라는 증명만 해내면 된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므로,
“들어주지 마세요, 자가.”
당신 뜻대로 해도 괜찮다고. 꽃을 꽂던 화병에서 시선을 거두고 군주를 바라보았을 때 나와 그의 시선이 맞닿았다.
“들어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때의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속단했다. 내 뜻을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은 어쩌면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속단이 낳은 자신감이었다. 들어주지 말라고 해도, 결국 내 뜻을 들어주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한편으로는 시간이 나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후회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정이 이러하니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빌었어야 해. 아무리 애정에 무심하고 저마다 다른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무정한 군주인들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는 사람 앞에서 비정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테니.
크고 작은 거짓과 계산이 모이고 쌓여서, 이제 무엇이 거짓이며 계산이고 또 진심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즈음에 이르러 나는 언젠가 읽었던 염정소설 속 문장을 떠올렸다.
「그 마음에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내면, 왠지 내 마음은 다 타버릴 것 같지.」
현실 아닌 허구 속 문장은 어느새 내 일상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장은 어느새 허구 아닌 현실이 되어 생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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