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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憬婉獨島茶禮院 自茶學習 745영선[한국 차문화]다문화사 12
(사)한국차인연합회 정경완다례원(吾心堂)에서의 茶사랑(茶학습)은 새해도 계속 열공합니다.
정영선 [한국 茶文化]를 또 다시 두리며 읽기를 시작합니다.
한승원/사람의 맨발에서 - 싯다르타의 마지막 유언 中
"각자 자기의 섬에 자기의 등불을 밝혀 의지처로 삼기 위하여 부디 게으름 없이 정진 하여라"
煮茶學 [十之圖]에서 "글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다 보면 뜻하는 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또한
로빈슨 H.M. Robinson의 독서과정 [SQ3R 방법]"
훑어보기 Survey,
질문하기 Question,
자세히 읽기 Read,
되새기기 Recite,
다시보기 Review 를 바탕으로 나만의 학습방식으로 백번 응용해서
먼저 두드리며 읽고, 원문(漢字) 올리며 읽고, 오타 수정하며 거듭 읽기로. 책 속에서 얻어지는 무궁한 에너지다,
시간 속에 잊혀지는 [차의 개론]을 재학습하면서 그 옛날(다례 입문)을 그리워 함이다.
짱유화의 [자다학] [점다학]을 되풀이 . 거듭, 두드리며 읽기에 이어, 새해는
새해는 [한국 차문화]를 펼치고 또 다시 두드리며 읽기를 시작하는 나( 吾心 )만의 온전한 실천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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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생활의 총서 -1 정영선 著 [한국 茶文化] 너럭바위
제 1 편 차의 개론
제 2 편 다문화사(茶文化史)
제 1 장 고대국가와 남북국가 시대의 다문화
제 2장 고려의 다문화
제 1절 고려사회의 차
제 2절 조정과 왕실의 다례 p 115~
제 3절 고려인이 다생활 P 121 ~
1. 귀족과 선비들의 다생활
2. 백성들의 다생활 p127 ~
3. 승려들의 다생활 p 129
4. 차의 종류 p 133 ~
(1) 마실거리로서의 구분
마시는 차는 다유(茶乳)와 다탕(茶湯)이 있다.
(가) 다유(茶乳)
다유란 고급 덩이차(乳團茶)나 잎차를 곱게 갈아 체로 쳐서 만든 가루차[末茶]를
끓인 물에 넣어 휘젓거나 혹은 차사발에 점다하여 거품을 일으켜 마시는 탁한 차를 말한다.
[다유]를 달리 표현한 말로는 [운유(雲乳)] [백유(白乳)], [향유(香乳)], [설유(雪乳)], [유화(乳花)] 등으로
차의 맛을 적[유]에 비유했으며, 빛깔도 젖이나 눈의 색인 흰색으로 표현했다.
이는 찻가루와 탕수가 어울려 일으킨 거품이 떠서 흰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주 옅은 연두색이나 담황색이다).
다유로 마실 차는 이른 봄에 딴 차로 섬유질이 아주적 은 어린 차싹이라야
찻가루가 고와 가라않지 않으며 흰색의 거품이 잘 생긴다.
가루내어 다유로 마시는 차는 덩이차건 잎차건 아주 고급품이어서
궁중에서 쓰거나 국제간의 예물로 주고받은 어차(御茶)가 대부분이며, 때로는 승려, 귀족, 문인들도 마시었다.
(나) 다방
거친 떡차나 잎차를 끓여 걸러 낸 맑은 찻물을 다탕이라 한다.
인류는 차를 기호음료로 마시기 전에 약용으로 찻잎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기호성과 저장이 필요성으로 다탕이 발달하게 되었다. 궁중에서도 다탕을 즐겨 마셨다,
예종 12년(1117)에 왕은
선(禪)과 도(道)를 즐기는 이자현(이자현)을 어렵게 만나 앉기를 권하고 [다탕]을 내어 이야기했으며
1198년 이인보(李寅甫)가 경주에서 산천(山川)의 제사를 지내고
부석사(浮石寺)에 들렀을 때 어린 중이 [다탕]을 대접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또 이인보의 동생 이시의(李時義)가 쓴 글을보면
[다방]을 오지술병 모양의 그릇에 담아 마시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탕은 또한 [탕약(湯藥)] 혹은 [약]이라고도 불리워졌다.
[고려도경]에 관사(館舍)의 행다를 설명하는 글에
[항상 하루에 세 번 차를 주는데 계속 해서 탕(湯)으로써 주었다.
고려인들은 탕을 약(藥)이라고 했다]고 하여 보통때는 사신들에게 다탕을 대접하였고
고려 사람들은 다탕(茶)을 [약]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끓인 물]을 뜻할 때는 [탕]이라 하지 않고 [익은 물(熟水-숙수)] 이라 하였다.
왕과 신하가 의례로서 식사 전에 마신 [차(茶)]는 대개 다유(茶乳)를 말하며,
식사 후에 마신 [탕약]은 다탕을 뜻했다.
다탕으로 마실 차는 이른 봄의 움싹차가 아니라도
잎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자란 싹으로 떡차나 잎차를 만들므로
차나무의 피해도 적고 많은 차가 생산되어 대중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다점(다점) 등에서도 누구나 값싸게 다탕을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2) 모양으로 본 분류
단차(團茶: 덩이차) : 떡차(餠茶) 유단차(乳團茶)
엽차(葉茶, 잎차)
말차(末茶, 가루차) - 유단차로 만든 것/ 잎차로 만든 것
(가) 단차(團茶, 덩이차)
덩이차는 곱게 가루내어 말차(末茶)로 만들어 다유로 마시는 유단차(乳團茶, 고급단차)와
그냥 끓여 맑은 다탕으로 마시는 떡차(餠茶)로 나눌 수 있다.
유단차은 가루내어 다유로 마시기 위해 만든 고급 덩이차이다,
대개 한식(寒食, 식목일인 4월 5일 무렵) 전,
즉 금화전(禁火前, 혹은 火前)에 움이 튼 어린 차싹을 따서 찌고 찧어 덩이로 만들어 말린다.
유단차는 주로 왕이 마시는 [어차(御茶)]나 국제간의 예물 혹은 하사품으로 쓰인 고급차였으며
고려 초엽의 토산차인 뇌원차(腦原茶)도 유단차에 속한다.
승려와 문인들도 특별히 만들어 즐겨 마시기도 했다.
차싹을 따서 찐 후에 덩이[團]로 만드는 과정을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0세기와 11세기의 토산차인 뇌원차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고려의 문인들이 주로 보았던 육우(陸羽, 727 ~ 803)의 [다경]과
모문석(毛文錫)의 [다보(茶譜), 935년경 저술)]를 참작하면 아래와 같다.
어린 찻잎 --> 찌기 --> 갈거나 찧음 --> 모양 만듦 --> 말림(구멍 뚫음) --> 말리며 보관
어차는 찐 찻잎을 찧거나 맷돌에 갈아서 된 죽 모양으로 만든 후에 조금 굳어지면
용이나 봉황새 혹은 글씨를 새긴 틀에 찍어내어
도65(p141그림 참고하기>와 비슷한 찻덩이로 만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만든 귀한 차는 운반할 때 손의 냄새가 배거나
모양이 손상되지 않도록 나무나 종이로 만든 상자에 보관했는데,
내시(內侍)였던 방연보가 이규보에게 보낸 차는 옥색 상자에 자줏빛 머루덩쿨로 묶었다고 했다.
덩이차를 말리거나 보관하기 좋도록 가운데 구멍을 뚫은 것을 돈차 혹은 전자(전차)라고도했는데,
이규보의 아래 시에서는 녹태전(綠苔錢: 녹색 이끼 같은 돈차)을 점다하여 다유로 마셨음을 알 수 있다.
공대(笻: 대막대) 하나로 녹태전차 개뜨리니
시냇가 청둥오리 졸다가 놀아 깨네
점다(點茶) 삼매의 솜씨 덕분에
반 잔[半甌-사발 구>눈(雪)같은 찻물은 답답하고 타는 속을 씻어주네
조선시대에 흔히 끓여 마셨던 떡차는 고려시대에도 대중적으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떡차는 찻잎이 자라길 기댜렸다가 따서 납작한 떡모양으로 만든 조금 거친 차인데,
대강 부수거나 그냥 그대로 끓는 물에 넣어 끓여 맑은 다탕으로 마셨다.
만드는 방법은 위의 유단차나 조선시대의 떡차 제다법과 같이
찻잎을 쪄서 찧은 다음 모양을 만들고 말렸을 것이다.
떡차는 운반(여행시)과 보관에 편리하며 대개 발효된 차였을 것이다.
(나) 엽차(葉茶, 잎차)
차싹의 모양이 [참새의 혀]와 같다 하여
[작설(雀舌)]이라 이름 붙인 잎차가 문인들의 기록에 나타나기는 12 세기로 ,
다탕이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때와 거의 일치된다.
[작설을 달인다[煮雀舌]듵가, [황금빛 싹을 달인다(煮黃金之芽]고 표현하였다.
조선 초에 명나라 사신에게 [작설]을 선물로 주는 것을 보면
고려시대의 왕이나 귀족들도 고급잎차를 보편적으로 마셨던 것 같다.
자줏빛 차싹을 뜻하는 [자순차(紫筍芽)]나 [작설차(雀舌茶)]는 잎차를 뜻하는 보통명사로도 쓰였으며,
거친 잎차를 [모차(茅茶)]라고 했다.
(다) 말차(末茶, 가루차)
말차는 유단차나 고급잎차를 맷돌[茶磨]에 갈아
고운 체에 쳐서 만든 아주 미세한 찻가루를 말하며, 다유(茶乳)로 마신다.
고려 초의 광종(光宗)은 공덕재(功德齋)를 올릴때 스일 차를 맷돌에 직접 갈았다.
유단차(乳團茶)의 덩이는 차공대 등으로 부순 후에 맷돌에 곱게 갈아
비단체에 친 후 다합에 담아 두었다가 점다하였다.
이인로(李仁老)는 <절의 차맷돌>이란 시에서
[바람이 없는 날
개미 걸음처럼 천천히 달모양 맷돌의 자루를 휘두르기 시작하니,
옥색의 찻가루가 날리네] 라고 하였다.
잎차를 갈 때는 한약을 가는 유발(乳鉢-바리때 발> 이나 약절구를 사용했으리라 짐작된다.
(3) 발효 정도에 따른 분류
고려의 474년이란 긴 세월동안 차의 종류는 발효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크게 발효차(뜸차)와 비발효차로 나눌 수 있다.
발효차는 찻잎을 따서 가공하는 도중에 산화효소의 작용으로 띄워진 차를 말한다.
즉 어느 정도의 습도와 온도가 주어진 환경에서 찻잎의 탄닌(Tannin)에 효소가 작용하면
녹색이 누런 색이나 자색, 혹은 검은색으로 변하게 되고 독특한 향기와 맛이 만들어진다.
옛날에는 대개 차를 물에 끓여서 마셨는데
녹차는 끓이면 카페인과 탄닌이 많이 우러나 맛이 쓰고 떫은 편이나,
발효차는 탄닌이 산화되었으므로 끓여도 맛이 온화하고 독특한 향기가 있다.
차는 오늘날처럼 끓인 물에 우리면 황색이 되지만 끓이면 다탕의 색이 붉은 빛을 띠게 된다.
여름철 기후는 고온다습하여 녹차는 변질되기 쉬운데
발효된 차는 크게 변질되지 않으므로 잎차건 덩이차건 보관이 쉽다.
또한 수월하게 제다하다 보면 자연히 발효되므로 발효차는 오래 전부터 대중적으로 쓰였던 것 같다.
녹차는 찻잎을 따서 발효될 틈을 주지 않기위해 찌거나 덖는 열처리를 하여
효소가 작용되지 않게 하여 건조시킨 것으로 끓인 찻물[다탕]도 녹색이다.
(가) 발효차(뜸차) p 138 ~
이연종(李衍宗)이 쓴 <박치암이 차를 주어 감사함>에는
[봉함 열어 자용(紫龍)을 보기도 전에 이미 종이를 뚫고 차의 향기가 코에 와 닿네]라고 하였는데
뾰족뾰족한 자줏빛이 발효 잎차를 표현한 말이다. 발효차의 붉은 다탕이나 차이내를 [霞-놀 하>]라 하였다.
노아(露芽) 차를 마시니 [귀가 밝아지고 코가 자하를 관통한다[비관통자하]고 하였고,
이곡은 경포에서 차를 석조에 달여 마시며
[자연(자연: 자줏빛 차이내)이 날리네]라고 했다 (煙은 烟과 같은 글자).
말엽의 이숭인(李崇仁)이 목은 이색(李穡-거둘 색>과 유항(柳巷-거리 항> 등과 자리하여
차를 마시며 주고받은 즐거움을 쓴 시에도
솔바람 소리나고 밤은 깊은데 [松風嗚夜昇]
차이내는 항아리(탕관)에서 봄을 떠올리는구나 [霞液發春?]라고 하여,
붉은 다탕이 이내(김)를 하액(霞液)이라 하였다.
다산이 쓴 [아언각비]에 의하면 [霞]란 노을이 아니라 [안개]를 뜻한다고 하였으므로,
자하(붉은 안개)란 붉은 빛 다탕에 어린 다연(다연: 차이내, 차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녹차의 다연(茶煙, 茗煙이라고도 했음)으로는 [청연(靑煙)] 혹은
[얽히고 설킨 다연은 푸르다[? ? 茶煙碧] 등의 표현이 조선시대에 쓰인 기록을 볼 수 있다.
발효된 덩이차인 자단차(紫團茶)가 쓰인 예는
명종(明宗, 1171 ~ 1197)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요히 집에서 좌선(坐禪)할 때는 향로에 좋은 향을 더 넣고,
손님을 맞아서는 자태(자태(紫苔, 자줏빛 이끼) 차를 공대로 깨드려 얼룩지도다]에서
자태란 자줏빛의 이끼 같은 발효차를 뜻하한다
실제로 쪄낸 차를 곱게 찧으면 이끼 같아 보인다.
(나) 불발효차
발효되지 않은 차는 녹색이다, 고려의 고급 유단차는 대개 녹단차(綠團茶)여서
그 찻가루를 [옥가루] [녹향진(綠香眞)] [옥 부스러기]로 표현하였으며 [녹명(綠茗)] [녹태전(綠苔錢)]이라고 했다.
잎녹차는 물에 끓여 마시면 쓰고 떫으므로
어린 차싹을 따서 찐 후에 말려 주로 말차를 만드는 재료로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4) 차의 명칭
(가) 뇌원차 (뇌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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