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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인문학의 현장 답사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 문학기행의 의미
문학기행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탐방이 시작된다. 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어디나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문자로 기록되면 문학이 되고 역사가 된다.
역사와 문학에는 사람과 지명이 등장한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의 고향과 삶의 길이 있다. 이 여행은 아득한 역사의 뒤안길을 가기도 하고 얼마 전의 이야기를 찾아 길을 나서기도 한다. 그 길은 자동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지만 항상 우리 눈에 보이는 길만 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길과 상상의 길인 보이지 않는 길도 함께 따라 가는 것이다.
누군가 처음에는 길이 아닌 곳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기에 길이 만들어 졌다.
문학기행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가는 여행이다.
작가와 작품을 알지 못하고 역사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문학기행은 이런 길을 찾고 만드는 여행이다.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러 가지만 그 만남은 생시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우리네 현실적인 삶은 가정이나 직장, 이웃 사람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적인 삶의 한계는 공간이 좁고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문학작품이나 답사처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가공인물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확실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 와 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곤 한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기행이 끝나면 시대를 초월하여 만나는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엿보게 되고 또한 그 곳에서 만난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역사와 문학작품 속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더듬거리며 찾다 보면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찾아 가면 어디선가 살아서 돌아온 듯 착각을 하게 된다.
무언으로 말을 하며 그 장소를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기분으로 답사를 하면 문학의 향기는 소리 없이 피어나는 안개와 같다.
스멀거리면서 퍼지는 향기는 코를 자극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혼을 울리기도 한다.
이 영혼이 머리를 타고 흘러 내려 와 가슴을 흔들면서
향기 있는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마력을 가지게 된다. 문학기행은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지인들을 만나게 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적지, 작가의 생가와 고향마을 고샅길을 걸어 온지 몇 년 이던가.
역사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의미 있게 살다가 떠나간 이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을 찾다 보면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역사문학기행은 남아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응시할 수 있게 하며 작가와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문학기행을 통해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갈 미래의 삶 속에 좌표가 될 수 있다.
이 여행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은 처음 만남이라도 그 친밀한 동질감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기행이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이다.
일상의 삶을 떠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며 자기의 존재 인식을 통해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문학기행은 역사적인 인물과 문학적인 만남을 제공한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만나며 찾게 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인생길의 목표점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역사문학기행은 답사와 여행의 장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서울 문학기행 의미
역사와 문학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많은 장애물을 넘나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와 민족마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학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사학자와 민족작가는 자신의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민족이 말살될 때, 역사와 문학으로 저항하게 된다.
어느 민족에게나 이런 역사와 문학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민족사학자와 민족문학의 작가들이 있다. 작가는 문학작품 어딘가에 자신이 살았던 당대의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다. 그러나 작가가 태어난 장소에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곳도 있다.
특히 서울은 개발로 인해 역사적인 건축물과 인물들의 흔적들은 사라지고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가 '서울역사문학기행'을 시작한 이유다.
문학기행은 역사기행과 달리 때로는 실체가 없는 장소를 탐방하기도 한다. 단지 문학작품 속의 내용과 시 몇 편에 의지하여 작가의 삶과 문학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서울은 600년 동안 조선의 도읍지였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수도다. 숱한 침략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수도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그러므로 서울은 역사와 문학의 보고다. 서울에 삶의 토대를 두지 않은 역사적인 인물과 문인들이 드물기 떄문이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문인들이 살았던 집과 문학작품 속의 무대를 걸으며, 삶과 문학을 나누는 여행은 그래서 의미 있다.
당대를 풍미하던 권세가와 문인들뿐 아니라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들도 상상하며, 눈여겨 볼 일이다. 그들의 삶터를 확인하고,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서울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폐허화 된 작가의 버려진 고택도 있다. 빈터가 되어 풀섶이 되어 버린 집도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고택들이 스러져가는 현장도 있다.
그러나 북촌의 고택들과 성북동의 최순우 고택, 이태준 고택, 한용운 고택(심우장)은 옛 집주인들이 살았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 집 주인들의 평상시 삶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은 작가의 생애와 작품들을 역사적인 상황에서 찾는 여행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상황을 인식하면 답사의 기억은 아주 오래 잔영으로 남게 된다. 이 기억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면서 미래를 성찰하게 만든다.
작가의 고향과 작품의 무대를 역사유적과 연계하고 그 지역의 명소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문학기행의 부대적인 추억을 만든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이 일반적인 여행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지적탐구에 있다. 문학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이 땅의 지리와 역사적인 지식을 얻는다.
문학의 역사는 장구하다. 문인들이 나고 살다 떠나간 곳은 무수히 많다.
우리들은 저마다 의식주와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정신적인 재산인 문학을 무시하는 것이 현실이다.
선진국일수록 자신의 나라 역사와 문인들을 자랑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직 역사인식과 문학적인 토대확보가 미흡하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은 수익성이 없어서 여행사에서는 진행하기 어렵다. 문학단체나 역사학술단체에서 조차 지속적으로 답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전문가의 섭외도 어렵거니와 지속할 수 있는 열정적인 동우회들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기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콘텐츠가 없는 상태다. 제대로 된 단행본이 없는 것도 문학기행 분야가 얼마나 취약한 곳인가를 상징한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은 역사유적을 답사하면서 문인들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는 여행이다.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로 회귀하여 작품을 읽게 되면 작가를 이해한다. 또한 그가 선택한 삶의 길을 알게 된다. 혹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고 해도 당시의 시대사적인 배경을 인식하면 오해가 풀린다.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된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쉽게 동질감을 느끼고 금방 친구가 되는 이유다. 작품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만남의 인연을 만들 수 있다.
문학작품의 무대나 원작자의 고향을 탐방하고 난 후 다시 그 작품을 읽으면 깊고 넓은 지식으로 보답하게 될 것이다.
'서울 역사 문학기행'이 시급한 이유다.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통해 역사와 문학사의 콘텐츠를 얻게 될 것이며, 이는 문학사의 복원적인 의미가 될 것이다.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1858~1902)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이다.
1882년 뉴저지 주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입국한다.
때는 마침 부활절 아침이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조선에 도착하자 그는 조선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한다. 그가 조선의 선교사가 된 것은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조선 선교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근무하면서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 복음전도에 헌신한다. 1887년 서울에 벧엘예배당을 설립한다. 벧엘예배당이 지금의 정동교회이다. 정동교회는 한국에 설립한 최초의 개신교회이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수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루터파의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어머니는 독일계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루터적인 독일 경건주의적인 환경에서 성장한다. 1882년 아펜젤러는 Franklin and Marshall College를 졸업한다. Franklin and Marshall 대학은 랭카스터에 있는 명문 대학이었다. 재학중에 그는 웨슬리적 체험신앙에 감명을 받는다.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결단을 내리고 드루신학교(Drew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한다. 당시 3년 재의 드루신학교는 교양과 지성을 중시하는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명문신학교였다.
아펜젤러의 조상은 스위스의 아피(Appie) 가문이었다. 마틴루터에 의해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아피 가문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참가한다. 그 중 몇 가정이 18세기 청교도 이민열풍을 타고 아메리카로 이주한다. 아펜젤러의 5대조는1735년 펜실베니아에 도착하였을 때에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4대조 때에 이르러서야 서더튼에 자기 소유 농장을 갖게 된다. 그들은 교육과 신앙을 중시했다.
감리교회의 교리는 신약전서 사도신경의 예수의 행적에 근거한다. 당시 감리교는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아펜젤러가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던 이유이다.
신앙과 종교적 경험에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며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3학년 때인 1879년 2월 선교 강연을 듣는다. 2달러 50센트를 선교비로 헌금하면서 선교사의 비전을 간직한다.
1884년 11월 엘라 제이 닺지(Ella J. Dodge)와 결혼한다. 이어 그는 감리교 조선선교부(The Korea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첫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기 위해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는다. 1885년 2월 일본을 경유하여 1885년 4월 5일 부인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마침 부활 주일이었던 그날 제물포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이다.
아펜젤러는 한양의 정동에 한옥을 구입한다. 이곳에서 복음과 교육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1885년8월 4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아펜젤러는 학교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부여 받는다. 배재학당의 설립이 시작된 것이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근무하면서는 아펜젤러는 학교와 병원 등에서 복음을 전한다. 1887년 10월 29일 벧엘예배당을 설립한다. 정동교회의 전신이다.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당시 조선의 국토를 답사함녀서 전도활동을 시작한다.
1890년 종로서점을 개설하고,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한다.
1887년 배재학당 신학과목을 강의한다. 이것이 협성신학교의 설립 계기가 되었다. 협성신학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이다. 아펜젤러에 의해서 배재학당이 설립되고,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이 되었고,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최초의 개신교 대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펜젤러는 조선8도 중 6도의 고을들을 답사한다.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선교 기행 중에 세상을 떠난다.
17년간 조선에서 희생적인 선교와 봉사는 개신교의 선교역사의 밀알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1890년 한국성교서회를 창립하여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897년에는 한글로 발행한 최초의 종교 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회〉를 창간한다. 조선이 외세에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민족계몽운동에도 최선을 다한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부탁으로 배재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부모와 형제들 처와 차식들이 자살을 하거나 모두 학살당한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주경야독으로 와신상담하며,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된다.
1895년 조선에 입국한 서재필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통해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때 아펜젤러의 집에 머무르며 그는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의 학생들에게 역사, 정치, 경제, 교회사 등을 가르친다. 학생 이승만이 대미주의자가 되는 기초를 서재필이 심어 놓은 것이다.
아펜젤러는 1902년(광무6) 그는 목포에서 개최 될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탄다. 불행하게도 군산 앞바다에서 아펜젤러가 탑승한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사망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힌다. 이후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김소월 시인의 삶과 문학
우리 민족의 정서인 이별과 한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시인이 있다.
시집<진달래꽃> 한 권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이것은 그가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정서에 한의 가락을 섞어 서정시로 만드는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이 노래가 되어 우리 겨레의 가슴을 울리며 불러지고 있다.
김소월 시인이다. 서울 정동에 있던 배재학당을 졸업한 김소월은 1902년 외가인 평북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리로 공주 김씨 1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김소월 시인의 고향마을 남단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뒤로는 평안도 8대 명산중의 하나인 능한산이 서 있고 앞으로는 기름진 논밭이 풍요롭게 펼쳐져 있었다. 이처럼 산과 들이 어우러진 고향의 자연은 소월의 맑은 영혼과 시적 서정을 구성하는 샘이 되었다.그러나 그에게는 큰 슬픔이 존재하고 있었다.
김소월의 아버지 김성도는 1904년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다. 약 한달 동안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깨어난 후 정신병자가 되었다.
평생을 폐인처럼 살다가 슬프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를 유년의 김소월은 보면서 자랐다. 이런 슬픈 정서를 지니고 오산중학교와 배재고보를 다니면서 시창작을 한다. 오산학교에서 김억선생에게 배운 시창작은 그의 시세계의 지경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 고향을 떠나 서울 정동 배재학당의 학창 생활도 외로움과 슬픔의 시기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향 언어로 이별과 슬픔의 경험들을 자연과 민족의 그릇에 담으며 민족적인 슬픔과 동일시한다.
당시 문학적인 환경은 서구의 시상과 이국적인 언어 형식들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3.1운동의 실패로 모두가 절망의 늪에서 허덕일 때, 토속적인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 리듬 시를 만들어 민족의 가슴을 활짝 열었다.
이렇듯 김소월 시인은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삶의 이야기를 간결한 시로 표현하였다. 이별과 슬픔이 묻어 있는 당시 민중들의 삶을 시로 카타리시스하였다. 그의 시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만들어 엽서에 담아내는 듯 쉽고 정갈했다. 창작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150여 편의 주옥같은 그의 시들은 민족의 노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김소월 시인의 삶과 문학을 그의 모교 였던 배재학당 터에서 진행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다. 그가 졸업한 배재학당터에서 김소월 시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탐구해 본다.
먼저 김소월 시인 연보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짧은 생애였는지 알 수 있다.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의 외가에서 출생,
1907년 조부가 개설한 서당에서 한문 수학
1909년 사립 남산학교 입학
1915년 남산학교 졸업, 오산학교 입학, 김억 선생에게 시 창작 수업 받음
1916년 남양 홍씨와 결혼
1919년 3,1운동 참여 오산학교 졸업
1920년 시 <낭인의 봄>외 5편을 <창조>5호에,
<먼 후일>외 4편을 <학생계>1호에 발표함
1922년 배재고보 편입, <개벽>지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
1923년 배재고보 졸업
1924년 고향에서 조부의 광산일을 도움. 김동인 등과 함께 <영대>동인으로활약함.
1925년 시집 <진달래꽃> 매문사에서 간행, 시론 <시흔> 발표
1926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구성지국 운영
1928년 <옷과 밥과 자유>외 2편의 시를 <백치>2호에 발표
1934년 고향 곽산 조상 성묘, 12월 24일 오전 8시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됨
1939년 김억에 의해 <소월시초>(박문서관)가 간행됨
1968년 서울 남산에 소월시비가 세워짐
1981년 문화훈장 수여
시 진달래꽃은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동양적인 체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 표현법은 우리 문학의 <공무도하가>, <가시리>, <서경별곡>, <아리랑>으로 계승되다가 김소월이 현대시로 발전시킨다. 결국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정서는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가져 내려온 한과 이별 정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꽃> 전문
진달래는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 불리며,우리나라 전역의 산야에서 무리지어 자란다. 4월에 잎보다 먼저 자주 색꽃을 피우며 키는 약 1m~2m로 작다. 이 꽃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상징적인 핵심어다.
진달래꽃에는 슬픈 전설이 스며 있다.
두견새가 피를 토하며 슬프게 울었기에 그 피를 먹고 자란 꽃이 진달래라는 전설의 꽃이다. 김소월 시인이 당시에 이 전설을 모를 리가 없었으리라.
그가 설정한 이별의 한과 슬픔 등의 정서를 표현하고자 진달래꽃을 소재로 도입하였을 것이다. 4연 12행의 진달래꽃은 떠나는 임을 향한 애절한 사랑과 체념, 극기의 정신이 녹아있다. 진달래꽃은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다. 우리나라의 산 그 어디에나 피어나 누구에게나 친숙한 꽃이다. 김소월은 이 꽃에 우리 민족의 이별과 슬픔의 정서를 접목하게 된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임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 겠다는 사랑의 체념으로 이별을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
비록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가지만 그를 위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는 상황을 만드는 이별 상황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시는 걸음 걸음' 으로 진달래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는 표현에 이르면 이미 가는 임과의 이별은 축복이 된다. 절박한 이별의 슬픔을 오히려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이별의 비애감이 이 시를 최고의 경지에 닿게 만들고 있다.
이별의 아픔을 증오로 표출하지 않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승리의 이별시이다.
이별을 이렇게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축복의 도구는 '진달래꽃'이다. 진달래꽃은 '영변 약산'에 피어 있는 좁은 의미의 꽃이 아니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봄이면 피어나는 보편적인 민족의 꽃이다.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을 상징하는 김소월 자신인지 모른다.
'진달래꽃'은 김소월 시인 자신의 아름답고 헌신적인 순애보의 상징물이다. 자신이 싫어 이별하는 임에 대한 미움 대신에 언제까지나 임에게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이별하는 임을 위해 떠나는 길에 꽃을 뿌리는 행위는 종교적인 헌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진달래꽃이 감동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의 배신에 증오보다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를 떠나보낸다. 그러나 진달래꽃에는 배신으로 떠나가는 임이지만 은근한 만류의 숨결이 은밀하게 숨어있다.
진달래꽃에는 '드리오리다', '뿌리오리다', '가시옵소서','흘리오리다' 등의 의도적으로 종결형 사용하였다. 이것은 시를 더욱 슬프고 애절한 분위기로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떠나보내는 이도 그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떠나는 이가 밟고 가는 '진달래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보내는 이의 분신이다.
이 꽃을 밟고 가는 이는 진달래꽃을 밟으면서 남아 있는 사람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꽃을 뿌리는 것은 이별이 부당함을 임이 깨닫게 하려는 의지도 담겨 있다.
김소월 시인은 이렇듯 치밀한 이별의 시적 은유를 통해 떠나는 임의 길에 진달래꽃을 뿌리는 것이다.
비록 연인이 배신하였지만 그를 사랑하겠다는 자기희생적인 사랑 속에는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행위가 숨어 있다. 이 행위가 떠나는 임의 길에 뿌리는 진달래꽃이다. 가해자가 되어 떠나가는 임은 진달래꽃을 즈려 밟으면서 어쩌면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한다. 슬픔과 한으로 흘러가는 우리 정서의 강을 전통적 민요조 가락이라는 소월이 만든 나룻배로 건너가고 있다.
김소월은 민족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그가 남기고 간 150여 편의
시들은 대부분 우리 국민의 숨결처럼 소곤거리면서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이 시중에서 백미가 진달래꽃이다.
그의 시는 민족 정서와 하나가 되어 흘러가고 있으며 이 물결은 맑고 정결하다.
시어들은 정감이 있으며 간결하고 소박하며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온다.
우리 민중들의 삶을 대변하는 서정적인 자연과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시가 되었다.
7·5조의 민요적인 리듬과, 이별, 슬픔, 그리움, 체념의 정서를 지닌 시 ‘진달래꽃’은 김소월 시인이 우리 민족에 남기고 간 큰 선물이다.
소월 시에는 고향 상실의 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심이 흐르고 있다. 시 <산>에는 이런 고향을 가고 싶고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녹아 있다.그러나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불귀, 불귀” 라는 표현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시 <산>에는 김소월 시인이 지닌 산촌 마을의 정서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오십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물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이 시를 읽고 나면 소월 자신이 당시 지니고 있던 고향 상실의 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심이 흐르고 있다. 시 <산>에는 이런 고향을 가고 싶고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녹아 있다. 그러나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불귀, 불귀” 라는 표현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라는 1연은
김소월 시인 자신의 현재 심정을 오리나무 위에서 우는 산새에 비유하고 있다.
산새가 지금 울고 있는 이유는 깊은 산골 너머에 있는 자신의 고향에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자신의 고향인 ‘산수갑산’이다. 산수갑산은 그가 고향으로 산정한 마을이다. 현실적으로 산새는 고개가 높다고 넘지 못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김소월 자신이 고향을 갈 수 없는 은유적 표현이다.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제 2연에서는 눈이 내리고 덮이는 장면이다.
옛날 사람들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길은 대략 ‘칠팔십리’이다. 김소월 시인이 하룻길을 칠팔십리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경험의 소산이다. 이 거리는 그가 고향을 떠나 어디론가 가야 하는 길이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막연히 거리가 칠팔십리길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찾아가야 한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산수갑산 밑에 와 있다. 산수갑산은 그의 고향 근처이다.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런 유랑의 원인은 자진해서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한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암시한다.
불귀,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십년 정분을 못 잊겠네
3연에서는 삼수갑산은 돌아갈 수 없는 불귀의 땅이다. <불귀, 불귀, 다시 불귀>라는 표현은 다시는 그가 삼수갑산에 갈 수 없는 현실을 표현이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정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고향은 그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진정한 안식처다. 15년을 살았던 고향을 떠나서는 결코 정겨운 삶이 불가능함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그는 고향을 결코 잊을 수가 없으리라.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4연의 장소는 삼수갑산 고개 밑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이것을 가로막는 고개와 눈이 대립하고 있다. 눈이 내린 날 산속마을에는 실제적으로 산에 눈이 와서 쌓이는데, 들에는 눈이 녹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실제적인 상황을 표현하면서도 김소월 시인은 산에 내리는 눈과 들에 내리는 눈으로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표현했다.
산에서 내리는 눈은 고개를 넘는 것을 막는 눈이고 들에서 녹고 있는 눈은 고향으로 갈 것을 재촉하고 있다. 김소월 시인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수 없는 당시 농민들의 보편적인 삶을 산새에 비유한다. 산새가 자신의 집을 쉽게 떠날 수 없듯이
사람도 태어난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음을 표현한다.
시 <산>에서는 그 어디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를 암시하는 시어들이 있다. 눈과 고개이다. 김소월 자신은 고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현실적인 상황과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지의 대립구조를 가지고 이 시를 구성하였다.
실제로 김소월 시인 자신의 삶속에는 늘 이런 고향 번민이 있다. 그가 자살 직전에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 조상들의 묘에 참배하였던 것은 이를 대변하는 내용이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어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이 시의 주제는 현실의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려는 애절한 혈육의 정과 억울하게 죽어 접동새가 된 누이의 한을 노래하고 있다. 식민지 지식인의 허무의식도 담겨 있어 민요적이며 애상적이 분위기를 제공한다.
이 시는 접동새의 전설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옛날 어느 마을에 10남매를 남겨 두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는 한 여인과 재혼을 했는데 계모는 매우 포악하여 10남매를 모두 학대한다.
10남매 중 맏은 딸이었고, 9명은 모두 남동생들이었다.
몇 년이 지나 그 딸은 부자집 아들과 결혼을 약속한다. 딸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왔다. 이를 시기한 계모는 결혼할 예비 신부를 장롱에 가두고 불을 질러 죽인다. 그녀가 죽은 후에 잿더미에서 접동새가 날아올랐다. 낮이고 밤이고 접동새가 슬프게 울었기 때문에 관헌들이 수사를 한 후 범인인 계모를 잡아 불태워 죽였다. 계모의 죽은 혼은 이제 까마귀가 되어 접동새를 괴롭힌다. 이때부터 접동새는 까마귀가 무서워 야삼경에만 나타나 동생들을 걱정하며 슬프게 울었다.
김소월은 이 접동새의 설화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여기에 우리 민중의 정서인 '한' 을 효과적으로 형상화 하여 함께 담았다. 또한 7·5조의 민요의 율격을 기반으로 시의 음악성을 잘 살려 내었다.
소월 시에는 고향 상실의 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심이 흐른다. 시 <산>에는 이런 고향을 가고 싶고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녹아 있다. 그러나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불귀, 불귀” 라는 표현이 이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접동새의 울음소리를 의성화한 '접동, 접동'과 '아홉 오래비'를‘아우래비’로 한 활음조 현상을 이용하여 시를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은 접동새의 슬픔 울음소리를 직접 표현함으로 애상적이고 비극적인 시의 분위기를 유발시킨다. 접동새는 그 울음소리가 슬퍼서 한이나 비극의 정서를 표출하는 문학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7,5조의 표현이 정형화된 제2연의 이표현은 누님을 더 친숙하고 향토적인 표현을 위해 누나라고 표현한다. ‘진두강’은 지형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어디나 흐르는 강의 보통명사로 이해하여도 무방하다. 아홉 남동생을 두고 세상을 떠난 누나의 죽음은 원한에 사무친 것이기에 자신의 마을로 돌아와서 울고 있다. 곧 접동새와 누나가 일체화 되는 장면이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라는 3연은 의봇엄마에 의해 살해된 설화이야기를 그대로 전한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어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라는 제 4연은 접동새를 누나와 동일화 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불설어워‘라는 표현은
매우 서럽다는 뜻이다. 의봇엄마에게 억울하게 살해된 누나의 죽음을 아홉 남동생이 매우 슬퍼서 우는 장면을 연상된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마지막 제 5연은 억울하게 죽었던 누님의 한은 이제 접동새가 되어 밤이 깊으면 나타나
울고 있다. 야삼경은 밤 11시에서 1시를 나타내는 밤의 가장 깊은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존재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은 누나로 환생한 접동새는 아홉 동생이 보고 싶어 자신이 살았던 마을에 밤마다 나타나 울고 있다.
이 울음은 김소월 자신의 울음이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지식의 허약함에 절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울음일 수 도 있다.
김소월 시인의 시 초혼(招魂)은 가곡으로 만들어져 불려진다. 슬픔으로 몸을 떠는 듯한 이런 시를 김소월은 왜 쓰게 되었을까. ‘초혼’은 자신을 사랑하다가 죽은 어린 시절의 연인의 죽음을 노래하였다. 1925년 12월, 김소월이 펴낸 시집 <진달래꽃>에서 처음 발표된 <초혼>은사랑하던 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이 스며있다.연민의 정을 담은 서정과 민요적, 전통적, 애상적 성격이 강하다.주로 7.5조의 3음보로 써내려간 ‘초혼’은 슬픔의 절정을 영탄적으로 표현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사랑하던 그 사람이어!
- 김소월 시인의 시<초혼> 전문
소월이 설움에 겹도록 부르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이 궁금하다.소월이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도록 사랑했던’ 여성의 이름은 "오순"이다.
오순은 소월보다 3살 연상의 여인이었고, 같은 마을에 살았다.유년시절에 그들이 어떻게 연인관계로 발전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은 동네의 남산에 있는 폭포수 아래서 몰래 만났다고 한다.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못하고 이별한다.
소월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친구의 손녀였던 홍실단이와 혼인을 약속했기 때문이다.결국 소월은 14세가 되던 1916년 조부가 정혼한 대로 홍실단이와 결혼한다. 오순을 사랑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은 절망을 낳았다. 소월의 결혼 5년 후에 오순 역시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많았다. 가혹한 학대와 구타를 당하던 오순은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죽는 날 까지 소월을 사랑했던 오순은 상사병까지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월은 ‘초혼’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 시가 가슴을 흔들 만큼 절규로 얼룩진 이유이다.
김소월 시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 속에 녹아 있는 이야기를 흡수하였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지니고 왔던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참담한 역사적인 비극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시에서 위안을 받는다. 김소월 시인의 시가 출현한 1920년대부터 그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흔들었다.
이것은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들의 삶이 그만큼 슬프고 억울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슬픔과 한의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기막히게 표현하였다. 그의 시를 읽으며 감동받았고 노랫말을 따라 부르며 함께 우는 동일체가 되었다. 이 동일체 의식이 있기에 김소월의 시로 민족의 카다르시스가 가능했다. 그의 시가 이렇듯 처절한 슬픔과 절망들을 시로 승화시키게 된 것은 시인 자신의 삶에
이유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시대에 한 나약한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민족에 그는 커다란 선물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라는 비참한 죽음을 하고 떠나갔다. 김소월 시인의 시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때로 슬프고 외로울 때 접동새처럼 나타나 노래가 되어 우리의 심금을 울리곤 한다.
오늘 우리가 읽고 감상한 진달래꽃, 산, 접동새 외에도 100여 편이 넘는 김소월 시인의
시는 모두가 민족의 슬픈 정서가 토대이다.
김소월 시인은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작가로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배재학당은 그가 시심을 키웠던 문학의 산실이다. 배재학당 터를 답사하며 김소월 시인 시를 음미하는 일은
민족의 서정적인 문학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배재학당터에서 읽는 나도향의 <그믐달>
나도향(羅稻香 1902~1926)은 젊은 날에 요절한 작가이다. 정동의 배재학당터를 거닐다보면 중학교 때 읽은 그의 작품 <벙어리 삼용이>가 기억난다. 말 못하는 벙어리 삼용이가 자신의 여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던 기억은 선연하다. 나도향의 본명은 ‘경사스런 손자’의 뜻을 지닌 나경손(羅慶孫)이다. 호가 도향(稻香)이다. '벼의 향기"란 뜻을 가진 그의 호가 이름인 듯 불러지는 작가이다.
1918년 배재고보를 졸업한 나도향은 박영희와 김기진과 어울리며 문학의 꿈을 키운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나도향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이유이다. 나도향은 의학에 관심이 없고 문학에 열정을 보였다. 1919년 집에서 돈을 훔쳐 몰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학비가 없어 포기한다. 귀국하여 1922년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영희 등과 함께〈백조〉동인으로 참여한다.
1923년 경북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1924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출옥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집안은 순식간에 몰락하기 시작한다. 1925년 일본으로 갔다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1926년 8월26일 그는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겨우 24세였다. 그는 떠났지만 한국 문학에 그의 이름은 아직 당당하다. 그의 수필 <그믐달>을 읽고, 배재고보터를 거닐면서 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해본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들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 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웅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뜻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되,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 전문
■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초등학교 때부터 강소천 선생이 지은 ‘유관순’이란 노래를 불러왔다.
이 노래를 부르면 언제나 가슴이 울렁인다. 아직도 삼월이 되면,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에는 짧지만 강렬한 은어가 숨겨 있다. 감옥과 푸른 하늘로 대비되는 시적 발상은 비장한 마음을 지니게 만들곤 했다. 간혹 정동 길을 가다가 이화여고 교정 앞을 지나칠 때면 이 노래가 유독 가슴으로 다가온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는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곳에서 이 노래를 불러보기 위해 이화여고 교정을 탐방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 합니다
옥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 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 강소천의 동요 '유관순'
이 노래를 부르며 자란 분들에게 유관순은 우리 모두의 '누나'이다. 강소천이 시를 쓰고 나운영이 작곡한 <유관순> 노래는 박두진 시인의 '3월1일의 하늘'과 함께 유관순이 우리들의 누나임을 알려준다.
유관순(柳寬順) 열사는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5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부친 유중권은 감리교에 일찍 입교하고, 향리에 흥호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과 계몽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유관순 열사는 유년시절부터 부친의 독립적이며,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성장한다. 이 무렵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3,1운동 직전까지 강력한 무단 통치를 감행했다. 유관순의 뜨거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은 3.1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3,1운동은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았다. 일제 식민지 10년 만에 잃었던 조국을 찾기 위해 대동단결하고 모두들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세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당시 국내에서 당시의 국제적인 상황을 인식한 사람은 희박했다. 그러나 해외로 나간 동포들은 러시아의 공산화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중국 상해의 신한청년당이 3.1운동을 계획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일제는 3,1운동 직후까지도 우리 민족의 자율적인 사회단체의 설립을 불허했다. 종교계와 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하게 된 원인이다.
천도교는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 등 3대 원칙하에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손병희, 권동진,오세창, 최린 선생이 중심인물이다. 불교는 한용운 시인, 기독교는 선우혁, 이승훈, 양전백이 중심인물이었다. 학생들은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연희전문의 김원벽, 경성의전 한위건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독립운동 계획을 모색했다.
1919년 2월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사건은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1918년 말 재일 조선유학생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다.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고 고국에 이 거사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을 들은 국내 독립운동에 뜻을 가진 사람들은 3․1운동 계획을 본격화한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쓴다. 이 독립선언서의 초고는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쳐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된다. 보성사는 천도교에서 운영하고 있었기에 총 2만 1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고종의 국장일로 정했다. 3월 2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거사일에서 제외된다. 거사일에 많은 사람들 참여가 중요했다. 결국 고종 국장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긴다. 3월1일로 거사일이 결정한 이유였다.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서울 북촌의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행동의 통일과 체포 시에 주눅 들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설파할 것을 협의했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33인중에 29명의 민족대표는 종로 태화관에 모여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
한용운 시인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당시 경성의 종로 일대는 강둑이 터진 듯 수만의 인파로 불어난 만세 시위대가 물밀듯이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밤이 늦도록 만세시위는 계속된다.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의 선배들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한다. 만세 시위대가 이화학당 앞을 지나자 유관순은 6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이화학당의 담을 넘는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 푸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그들을 만류하였지만 유관순의 의지를 꺽을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유관순은 3.1운동의 진원지의 핵이 되었다. 3.1운동의 최대 시위는 1919년 3월5일 이었다. 장소는 서울역(남대문역)이었다.
이날 시위 주도는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었다. 경성의 학생 거의 전부가 이날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고종의 장례를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를 주도했다. 약 1만여 명의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행진했다.
이날 시위대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으로 이동하였고, 또 다른 시위대는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으로 전진했다.
보신각에서 만난 시위대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었다. 이날 유관순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각오를 아마 이날 했을 것이다. .
시위가 격화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이화학당의 휴교에 들어간다.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유관순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은밀하게 감추고 고향 천안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이날 이화학당을 떠나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다.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간 유관순은 동네 어른들에게 경성의 3․1운동 소식을 전한다.
부친 유중권은 감리교 속회장인 조인원과 이백하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협력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한다.
유림의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에게도 경성의 만세운동 시위는 유관순을 통해 알려진다.
3월 31일 유관순은 지령리 매봉에 봉화로 다음날 만세 시위의 신호를 보낸다. 다른 지역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한다. 거사일인 4월 1일 충남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날, 그녀는 장터에 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한다.
이날 유관순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반만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일제의 악랄한 지배에 당하고 살아왔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병하고 학대와 모욕을 가하고 있다. 지난10년은 참아 왔지만 이제 결코 참을 수 없다. 지금 세계의 약소국가들이 자기 나라를 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고 있다. 우리도 지금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라 없는 백성은 백성도 아니다.”
그녀의 열변에 아우내 장터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우내 장터의 독립선언식은 조인원 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에 나섰다.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아우내로 몰려왔다. 이들의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이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 선생은 “왜 우리 백성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잔악한 총검에 찔려 순국한다.
어머니 또한 남편의 죽음에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한다. 이에 분노한 유관순은 숙부인 유중무와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과 아버지의 시신을 병천 헌병주재소 앞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항의 시위를 한다.
유중무는 격분한다. 주재소로 진입하는 그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기도 했다. “우리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정당한 일을 했는데 도둑놈들이 왜 총질을 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질타한다 “ 너희들은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앞잡이를 하며 살고 있는가?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이다. 이놈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당장 죽여라”고 소리쳤다.
밖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헌병들은 다시 무차별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유관순,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도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유관순은 고문을 받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주장한다.
공주감옥에서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하며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했던 오빠 유관옥(柳寬玉)을 만난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유관순의 심정을 헤아려 볼 일이다.
법정에서 그녀는 “나는 대한 사람이다. 너희놈들은 우리 조국의 땅을 침략하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인은 너희 놈들이다.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재판 받을 근거가 없도다.”라고 강렬한 주장과 논리를 펼친다. 일제의 재판을 거부한다. 그녀의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에 검사와 판사들도 간담이 서늘하였으리라.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 받는다.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은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절규와 외침이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에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고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한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지 이틀 뒤에 이화학당의 교장 푸라이와 월터 선생은 이 소식을 듣는다. 그들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유관순 열사의 시신 인도를 요구한다. 처음에 일제는 이를 거부한다. 유관순의 학살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일제는 할 수 없이 시신을 인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시신을 인도한 푸라이교장과 월터 선생은 깜짝놀랐다. 상자 속에 든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토막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민족의 재단에 토막의 시신으로 바쳐진 열사가 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삶과 죽음을 알고 박두진 시인의 <3월1일의 하늘>을 읽으면,
비록 삼월이 아니더라도 조국의 해방과 자유의 소중함에 가슴이 흔들린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만세,만세,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짓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 유관순 누나,누나,누나,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을 알았다.
- 박두진의 '3월1일의 하늘' 전문
유관순 열사의 일대기를 함축한 문정희 시인의 시 < 아우내의 새 >는 읽을 수록 가슴 뭉클하다. 이화여고에서는 이 시를 유관순 열사의 동상 뒤의 돌에 새겼다.
풀꽃 하나가
쓰러지는 세상을 붙들 수 있다.
조그만 솜털 손목으로
어둠에 잠기는 나라를
아주 잠시
아니, 아주 영원히
건져 올릴 수 있다.
풀꽃 하나, 그 목숨 바스라져
어둡고 서러운 가슴에
별로 떴다.
꺼지지 않는 큰 별로
역사에 박혔다.
■ 을사늑약과 중명전
1905년은 을사년이다. 그해 11월17일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을사늑약이라는 외교권이 박탈 된 불평등 조약의 장소가 정동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고종은 1904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다. 1904년 덕수궁에 화재가 났기 때문이다. 중명전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친’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 건물이다. 외교사절단 연회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명전은 애초에 덕수궁 경내에 있었다. 그러나 덕수궁 석조전 사이로 길이 나면서 궁궐 밖으로 밀려났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 721평, 연건평 227평(1층 121평, 2층 106평) 제법 큰 규모이다.
고종의 재위기간은 무려 44년이다. 그가 집권한 기간중에 가장 치욕스런 일이라면 자신의 부인 명성황후를 일제의 칼날에 죽게 한 것이며, 1905년 중명전에서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을사늑약을 맺게 한 것이리라. 그러나 고종은 국권 수호의 힘겨운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인물이다. 고종은 1897년 당시 조선으로서는 쓰기 어려웠던 용어인 황제의 나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열강들의 압박에 굴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방도였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능함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일제는 한성의
치안권 등의 권한을 야금야금 탈취하며 고종의 실권을 무력화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1905년 11월17일 밤, 일본의 주모자 이토오 히로부미와 을사오적과 공모한 을사늑약 체결한다. 박제순이 서명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서명이나 옥새 날인을 거부한다.
오히려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친서를 작성해 일본의 주권 침해를 규탄한다. 이 내용은 영국의 ‘트리뷴’지에 보도 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16일자에도 게재됐다.
1905년 11월 17일 밤에 중명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날 저녁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군대가 중명전을 둘러싸고 고종황제를 협박한다. 미리 작성된 조약문을 작성하여 외부대신의 직인이 날인된다. 11월 18일 오전 1시30분이었다.
을사늑약 현장이 어느 방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1층 왼쪽 방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을사늑약으로 우리민족은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한다. 대한제국은 다음 날부터 일본의 보호국의 신세로 전락한다. 을사늑약은 개항장과 13개 주요 도시에는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는 지청이 설치되어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전개한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자결한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를 파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국 대표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역설했다. 결국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은 사라진다. 이 무렵 중명전도 외국인의 사교클럽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중명전에 화재가 난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63년에 중명전은 고종황제의 차남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된다. 그러나 민간에게 매각된다.
■ 북촌의 역사적인 의미
인문학기행에서 수도 서울이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서울은 조선 시대에는 한양이란 이름으로 500년 이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일제 36년과 대한민국 수립 60년 동안 여전히 수도이다. 환란과 전쟁으로 건축물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지만, 그때의 산과 지형은 여전하다. 이곳을 답사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그 시대의 인물을 탐구하며,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이 서울인문학기행의 의미다. 북촌은 서울 역사의 핵심부다.
넓은 의미로는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 북쪽을 의미한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의 북쪽을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율곡로 북쪽 중에서도 주로 삼청동길(사간동길)에서 창덕궁길(원서동길)까지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율곡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진 길은 대략 6개 길로 분류된다.
북촌 제1길은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제2길은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 제3길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별궁길, 제4길은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가회로(재동길), 제5길은 현대빌딩에서 시작하는 계동길, 제6길은 창덕궁 담장을 따라 난 창덕궁길(원서동길)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둔덕에 위치한다. 명당이다. 궁궐에 근무하던 세도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된 것은 일견 당연하다. 남산 근처는 남촌이라 했다. 주로 가난한 선비나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일제는 북촌의 맥을 빼기 위해 남산 근처를 개발한다. 명동과 충무로의 등장이다. 북촌은 일제하에 명맥을 상실하게 된다. 세도가들이 살던 북촌은 퇴락하기시작한다.
기력을 상실한 집안들은 유물들이나 세간들을 팔려고 내놓기 시작한다. 이 거래가 시작된 곳이 인사동이다. 결국 오늘날의 인사동으로 변모의 초기모습은 북촌의 망해가던 사람들이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이 나오던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북촌의 경계가 되고 있는 율곡로는 인사동 초입의 길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의 맥을 끊기 위해 만든 도로다.
■ 경성제1고보 터 답사
-서울교육역사사료관 탐방
-중등학교 발생지
-성삼문, 김옥균 집터
■ 심훈. 한설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강의
경기고등학교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 북촌의 서쪽 입구에 있는 정독도서관이 그 터다.
이 학교는 1974년에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문 고등학교였다. 1900년 현재의 종로구 화동에 터를 잡고 한국 최초의 중고등학교로 개교한다. <경성제1고>이다.
경기고는 1976년 강남 개발 정책에 따라 삼성동으로 이전한다. 다행히 이곳에 정독도서관이 들어섰기 때문에 학교의 모습은 대체로 그대로다. 사옥이나 개인에게 매도되었으면 아마도 답사할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으리라. 동쪽 북촌 입구에 있었던 휘문고등학교가 그 예다. 현대사옥이 자리 잡으면서 해방공간의 역사무대였던 휘문 고교 교정의 옛 모습은 찾을 방법이 없다. 정독도서관이 개관되었을 때에 이곳은 남산도서관과 함께 가장 인기 있던 도서관이었다.
북촌 길의 감고당 길과 별궁 길은 정독도서관을 찾던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길이었다. 풍문여고 입구를 통해 고샅길을 걸으면, 이내 덕성여고에 정문을 통과하고 100m 쯤에 정독도서관 정문에 닿곤 했다. 또 다른 길은 지금의 헌법재판소(옛 창덕여고) 담 길을 휘돌아 좁은 한옥 골목을 통과하여 정독도서관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정독도서관을 가는 골목에는 늘 학생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지금 정독도서관에는 서자 같은 궁궐 건축물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성삼문. 김옥균. 서재필 등의 집터도 있었으니 이 터의 의미는 남다르다.
또한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그 유명한 <인왕산제색도>를 그렸다.
정독도서관 정문을 오르는 계단 옆에는 표지석 3개가 앉아 있다. <화기도감터>라는 표지석에는 이곳이 조선시대 총포를 제조하던 터라고 기재되어 있다. <중등교육발상지>라는 표지석도 보인다. 1900년 이곳에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관립중등학교가 건립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서울교육 사료관 건축물은 1927년에 건축되어 지금은 교육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구 경기고 본관 건물은 1938년에 준공 했다. 경사지를 따라 세 동의 건물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세 동의 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정독도서관이 되었다.3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은 나무다. 늙은 나무 아래서 나는 이 학교 출신들 중에서 특별한 인연이 되었던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흥미로웠다. 그들의 삶과 문학, 죽음에 이르는 길을 더듬다 보면 가슴이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터)을 가거나 찾을 때, 세 명의 경기고 출신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심 훈. 한설야. 박헌영이다.
이들은 모두 경기고 출신으로 3,1운동 때에 만세운동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들의 삶과 문학, 죽음의 궤적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옛 경기고 터를 답사하는 자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 심훈의 삶과 문학
심훈은 1901년에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소설 상록수로 친숙한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또한 영화인이었으며, 독립 운동가였다.
본명이 대섭(大燮)이었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한다. 1917년에는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결혼하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다. 이런 조혼은 당시 우리의 풍습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그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6개월 투옥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한다. 학교는 퇴학당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직업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그가 감옥에서 쓴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면, 그의 애국심에 가슴이 흔들린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 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던 것이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 1919년 심훈의 옥중편지 인용
이 때 그가 선택한 길은 중국 망명이었다. 1920년 어느 날, 중국으로 남몰래 떠난다.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항주의 지강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에 귀국한다. 이 무렵 그는 민족주의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 ‘극문회’라는 염군사의 산하단체를 조직한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이해영과 이혼한다. 1925년에 영화 장한몽에 출연하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문학적으로는 카프(KAPF)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한다. 이 작품이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이다. 시련이 닥친다.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을 당한다. 이 때 함께 해직 된 사람이 박헌. 임원근. 허정숙 등이다. 철필 구락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사회부 기자들이 1926 일제의 민족 언론탄압에 항거하여 언론옹호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단체다.
심훈 선생은 자신의 처지가 미약할 때는 늘 미래를 준비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마음고생을 하던 심훈은 영화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먼동이 틀 때’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든다.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직접 감독을 맡아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이 영화에 대해 임화와 한설야에게 계급적이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가 다시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해는 1928년이다. 기자로 입사해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 하는가’의 평론으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한다. 이듬해 조선일보사에 사직을 하고 일 년 이상을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그가 찾아든 곳이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였다. 1932년에 이곳으로 낙향한 그는 ‘영원의미소’(1933)와 ‘직녀성’(1934)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 위대한 시를 두고 떠나갔다. <그날이 오면>이다.
1936년 동창이었던 한설야. 박헌영을 두고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그의 죽음에 친구들은 모두 참여하지 못한다. 수배나 구속 중 이였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시 ‘그날이 오면’ 전문
이 시는 영국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러의 역저 ‘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함께 뛰어난 시로 평가 받았다. 이 시에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소중함을 향한 간절한 절규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게 만든다.
경성제1고보 터에는 <김옥균의 집터>이기도 했다.
■ 한설야의 삶과 문학
한설야(韓雪野 1900년 ~1976년)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한다. 심 훈. 박헌영과 경성제일고보 동창이다. 그러나 그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지는 못한다. 재학 중에 자신의 고향 함흥고보로 전학을 했기 때문이다. 1925년 조선문단에 소설 <그날 밤>으로 등단한다. 이광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 때부터 큰 역할을 한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카프 문학인들의 검거가 시작되고 한설야도 체포되어 구속된다. 수감이후에 그는 계급성에 입각한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황혼>이다. 황혼은 노동자의 삶과 자본가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해방이후에 그는 북한을 선택한다. 그의 고향이 함흥이고 성향이 사회주의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과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을 역임한다. 한 때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린다. 1953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월북문인들의 숙청을 주동한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1962년 숙청을 당한다.
모든 것을 잃고 그는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며, 1976년 사망했다는 설만 무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가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는 것과 1993년에 북한이 발간한 <문학예술사전>에 그의 장편소설 ‘황혼’에 관한 설명이 등재되어 있다.
복권을 의미한다. 북한은 아마도 그들이 중시하는 예술에서 수령형상소설의 발기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리라. 세 친구 중에 한설야가 가장 오래 살았다.
■중앙고보의 출신 문인의 삶과 문학
--서정주. 이상화. 채만식을 중심으로
외세가 물밀듯이 밀려오던 구한말에 선각자들은 학교를 세우기 시작한다.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구국정신으로 세워진 중앙고보는 1908년 건립된 기호학교가 전신이다. 흥사단이 운영하던 융희학교와 1910년 통합한다. 중앙고보의 발전은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인 김성수가 1915년 인수하여 육성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중앙고보는 북촌 계동의 좁은 골목길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경사진 정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석조로 지어진 서구풍의 본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터는 본래 독립운동가 노백린 선생의 집터였다. 본관 건물은 1937년에 당시 유명한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그는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 두 건축물은 유사점이 많다.
중앙고보 서관 건물은 1921년 건립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하였다.
빨간 벽돌로 건물의 외장을 마감하고, 화강암을 일부 혼용한 고딕풍이다. 지붕은 경사지붕이며, 돌출창을 만들었다.
중앙고보의 동관은 1923년에 준공된 고딕풍 건축물인데,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서관 건축물과 유사하다.
대부분의 창문은 수평아치로 제작하였다. 돌출된 2층 창문은 뾰족아치로 멋을 부렸으며, 아치에 화강암을 끼워 넣었다. 이는 통일된 적벽돌 외벽면에 변화를 주기 위함이다. 지붕에는 삼각형 돌출창을 제작하여 굴뚝을 노출시켰다.
중앙고등학교 개교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문학박물관은 그 규모가 고등학교 박물관으로는 최고다.
3,1운동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이 학교 교정을 거닐다보면,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 학교 출신의 문인들이 많다. 그중에서 이상화. 채만식. 서정주 시인의 시비와 문학비가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이들의 삶과 문학을 찾다보면 이곳이 우리 근대문학의 중요한 장소임을 알게 된다.
■ 서정주 시인의 삶과 문학
서정주 시인은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네 서당에서 한문수업을 받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후 구속되기도 했으며,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학 한 후 이후 자퇴하여 계속적인 방황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문제와 가난하고 천대받는 현상의 극복을 위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빠진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살았으며,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직전으로 직면하기에 이른다. 톨스토이의 “공정한 물질의 분배가 행복을 주겠는가?”라는 선언에 감동을 받아 사상의 자유로움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번민과 방황을 통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김달진. 김동리. 김광균등과 더불어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창간한다. 1938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발간하여 원색적이며, 악마적인 시풍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하는데, 이런 관심의 일환으로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려 지기도 했다. 해방직후 보수문단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자신의 일제하 친일문학행위를 포장하려고 하였으며, 70년대 말 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생전에 1000여 편의 시를 15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으며, 그의 유품은 모두 1만5천여점에 이른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5차례 추천되기도 했지만, 결국 2000년 세상을 떠난다. 일제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군부 독재자 선출과정에서 전두환 찬조연설, 대통령당선 축하의 축시 헌사, 전두환 지지 발언 같은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토속어와 질펀하고 흥미진진한 언어구사로 신화적인 담시를 썼다.
그의 시가 초기에는 원색적인 관능미로 출발하였으며, 오십대 이후에는 전통적인 미학탐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92년 <시와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중앙고등학교 운동장 입구에는 그의 대표시 ‘국화옆에서’ 시비가 서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문학적인 업적은 대단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곳에 시비를 세워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내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시인의 고향마을 질마재에서 멀지 않은 곳인 부안면 인촌리에, 호남 갑부중의 한 명이었으며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던, 인촌 김성수 고택이 있다. 이 집에서 시인의 아버지는 한 때 마름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다. 결코 김성수집안의 머슴은 아니었다.
김성수가 세운 학교에 그가 입학을 하였다가 졸업을 하지 않고 사회주의에 몰입했던
서정주의 유년에 어린 기억을 중앙고보 교정에서 상상해 본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바람이었다.’ 는 싯구절로 인해 청년 시절 나는 온통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가슴 벅찼다. 그러나 늘 가슴을 후벼 파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라는 기막힌 은유에 감탄하기도 했었다.
■ 이상화 시인의 삶과 문학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문인들에게 그 허탈감은 심각했다. 절망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젊은 문인들은 서로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문학동인지의 창간이 그것이다.
창조(1919년 창간), 개벽(1920년 창간), 장미촌(1921년 창간), 백조 (1922년 창간) 조선문단(1924년 창간)등으로 작가들의 원고 발표지면은 많아진다.
이상화. 박영희. 김억. 황석우. 박종화. 홍사용. 오상순. 변영로 등은 1920년대 초에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3,1운동의 실패로 저마다 절망과 슬픔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의 시에는 죽음, 어둠, 잠, 이별, 탄식 같은 단어들이 수두룩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상상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삶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시는 누군가의 간절하고 절박한 생각을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한 문학이다.
시인이 사회적인 상황에 민감한 것은 이런 이유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한다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저항적인 문인들은 자유가 차단된 곳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펜을 들 수 있었다.
중국의 고전인 ‘시경’ 서문에는 ‘마음속에 움직이는 바가 곧 뜻이 되고, 이 뜻이 가슴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절실한 언어로 다듬어지면 곧 시가 된다’고 했다.
결국 절박하고 절실한 속마음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시는 작가의 절박한 생각의 표현물이다. 그러나 이 절박한 상황은 단지 자신의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합리와 부자유한 모순을 비판하면서 저항하는 것이 문인의 참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식민지 상황이라면 문인들은 개인적인 정서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식민 상황의 억울하고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표현하며 독립의지에 불을 붙였다.
시인들은 주로 자신의 절실함과 절박한 상항을 표현한다. 이렇게 창작된 시가 보편성을 지니게 되면 많은 독자들에게는 자기정화를 시켜준다.
언어를 통한 대리만족을 할 수 있도록 시인은 말을 만들어 내는 존재인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는 시를 쓰기 위해 시인들은 노력한다. 그러나 이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물론 예언자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는 시인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은 현실적인 삶에서 자신의 언어들을 찾아왔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작가들은 자유가 차단되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당했다. 일제하의 저항 작품들은 작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그들의 삶과 문학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은 식민지 시절 민족의 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이 시를 읽으면,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의 시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중앙고보 출신 이상화 시인이 일제의 암흑기에 쓴 시다.
우리 민족의 가슴을 흔드는 시였다.
제목이 의문형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다.
이 시가 발표될 무렵은 이미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지도 15년이 지났을 때였다.
3,1운동으로 독립 될 듯 보였던 광복도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차디찬 겨울이 지나고 빼앗긴 조국의 땅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그 산야에 아름다운 꽃이 피는 상상을 하니 기쁨보다는 슬픈 마음이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으리라. 빼앗긴 나라에 봄이 오는 것은 슬프고 잔인한 것이라고 여겼던 이상화 시인은 논둑길을 걸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은 즉자적인 농부에게는 기쁨이지만 일제의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대자적인 농부에게는 슬픔이다.
조국 전체가 남의 땅인데 지엽적인 땅의 현상들은 의미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개벽 70호(1926년 6월호)에 게재된 이 시는1920년대의 대표적인 저항시다. 이 시의 저항이 깆든 의미론적인 시어에 깊은 감동을 받곤 한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은 곧 지평선의 표현이다. 이 지평선은 조국해방이 시작되는 땅이다. 이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작가는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는 신념의 언어를 토해낸다.
그러나 조국해방을 향해 그는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조국 해방의 이상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건강한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3,1운동은 2만 여명의 동포들이 일제의 군경에 의해 살상되었으며, 약 5만 여명이 체포 구금된 세계사적인 대사건이다.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실패한 운동이지만 민족독립투쟁의 불씨를 살려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리의 동포들은 실망하고 탄식했다. 죽음과 투옥을 작심하고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조국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백조, 폐허, 장미촌의 동인 문인들의 작품들은 이런 조국 동포의 상실감을 반영한 것이다.
낭만주의와 퇴폐주의적 경향의 시들이 오래갈 수는 없다. 식민지 조국에 사회주의적인 사상들이 희망의 바람으로 확산된다. 특히 1917년 소련혁명은 제3세계 민중들과 식민지 치하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은 한 때 이런 사회주의혁명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어머니는 김해 김씨는 4형제를 낳았다. 이상화는 둘째였으며, 큰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였다.
다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대구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상화는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한다.
그는 대구에서 백기만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켰다. 검거를 피해 서울에 있는 박태원의 하숙집으로 피신한다. 1921년 고향 친구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난 후에 ‘백조’ 동인에 가입하였으며,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와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이상화의 작품활동은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문단 등단 후 초기에는 '백조' 동인과 함께 문학활동을 하면서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쓴다. ‘나의 침실로’는 ‘백조’3호에 실렸는데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1925년 박영희. 김기진과 더불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창립한다. 이 무렵 그는 저항시의 백미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 동경에서 공부하던 중에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동포들이 살상당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귀국하여, 대구 교남 학교(현 대륜 중고교)의 교사가 된다. 1925년 카프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적인 민족운동을 전환한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좀 더 강한 문학행위를 필요로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이유가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1925년 무렵 사회적인 책무를 느끼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제목의 저항시로 식민지하의 민족현실을 노래한다. 그는 백조동인의 나약하고 낭만적인 시인에서 향토적인 저항시인으로 거듭난다.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일제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한다. 집안이 온전할 리 없었으리라.
저항시를 쓰면서 독립 운동 혐의로 몇 차례 감옥생활을 한다. 그는 살아생전 시집을 출간하지 못한 시인이다. 다만 백기만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16편의 시가 수록되었을 뿐이다. 1943년 43세에 위암으로 최근에 복원된 그의 고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등학교 교정에는 이상화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 소설가 채만식의 삶과 문학
소설가 채만식은 1902년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31번지에서 부친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의 5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의 한학을 배운 후, 서울로 유학하여 1922년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부속제일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입사하여 재직하던 중 1924년 단편<세길로>가 ‘조선문단’ 에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장한 이 후 창작생활을 병행하며, 그의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1936년 기자 생활을 접고 개성에서 금광업을 하던 그의 형 준식을 찾아 갔지만 일 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의 집은 부농에서 차츰 가난하게 되어 갔고 1940년대 들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민족정서에 어긋나는 글을 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채만식의 일생에서 가장 혹독한 오점이 되고 있다.
체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일제의 제안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 슬프게 한다.
지식인에게 가난과 정치, 사상이란 것이 변화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란 것을 다시 채만식에게도 느껴야 하는 것이 먼 길을 달려 묘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연민의 정이 되리라. 그는 다작의 작가였다.
195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장편 11편, 중편 7편, 단편 69편, 희곡 28편, 잡문 74편, 평론 32편, 수필 76편, 꽁트 7편, 동화 3편, 동극 1편, 시나리오 2편, 좌담 3편, 기타 15편, 기행문 10편, 서평 6편, 방송극 1편 등 모두 345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1945년 낙향한 그는 고향에서도 부농이 아닌 가난뱅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인근의 이리(익산시)로 거처를 옮긴다.
이 무렵 그는 책상도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폐결핵으로 병든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글을 써야만 했다. 자신이 거쳐할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탁류>의 성공으로 인세(人稅)가 생기자 1947년 기와집을 마련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어렵게 마련했던 집을 팔아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친하게 지내던 시인 장영창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가난이 가져온 가련한 작가의 애절한 편지를 읽는다.
“장군, 인편에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한 20권만 보내 주소. 그러면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보고 싶은 것 일세”
-- 소설가 채만식 편지중에서
1950년 6월11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이 비록 예술가들에게 형극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리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채만식의 일생에서 가장 혹독한 오점이 되고 있다.
체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일제의 제안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 슬프게 한다.
지식인에게 가난과 정치, 사상이란 것이 변화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란 것을 다시 채만식에게도 느껴야 하는 것이 먼 길을 달려 묘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연민의 정이 되리라. 그는 다작의 작가였다.
195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장편 11편, 중편 7편, 단편 69편, 희곡 28편, 잡문 74편, 평론 32편, 수필 76편, 꽁트 7편, 동화 3편, 동극 1편, 시나리오 2편, 좌담 3편, 기타 15편, 기행문 10편, 서평 6편, 방송극 1편 등 모두 345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1945년 낙향한 그는 고향에서도 부농이 아닌 가난뱅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인근의 이리(익산시)로 거처를 옮긴다.
이 무렵 그는 책상도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폐결핵으로 병든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글을 써야만 했다. 자신이 거쳐할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탁류>의 성공으로 인세(人稅)가 생기자 1947년 기와집을 마련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어렵게 마련했던 집을 팔아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친하게 지내던 시인 장영창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가난이 가져온 가련한 작가의 애절한 편지를 읽는다.
“장군, 인편에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한 20권만 보내 주소. 그러면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보고 싶은 것 일세”
- 소설가 채만식 편지중에서
1950년 6월11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이 비록 예술가들에게 형극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리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재동과 헌법재판소 터
별궁길을 따라 북촌기행을 할 때에 나는 언제나 재동 백송에 인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600살이 넘은 백송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갑신정변, 6,25전쟁에도 살아남아 아직도 그 흰 육체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백송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이곳이 박규수와 홍영식,최린의 집터였으며, 광혜원터였기 때문이다. 백송은 헌법재판소 북서쪽에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며 찾아 오는 사람들을 내려다 본다.
재동 백송을 올려다보면 1884년 12월4일 갑신정변에 죽어간 홍영식 선생의 삶과 죽음이 어른거린다. 어디 그의 죽음뿐인가. 갑신정변에 참여 했던 젊은이들의 가족들도 죽어가야 했다. 그 뿌리는 박규수의 삶과 연관이 깊다. 박규수의 집에 모인 젊은이들이 그가 죽고 난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먼저 박규수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자.
1884년 12월 4일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이 날을 정권 쟁취의 날로 잡았다.
일본군의 후원을 받았지만 준비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주역들 스스로도 불안했으리라.
안동별궁에서 불길이 솟기 시작하자,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이 먼저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안동별궁은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순종이 세자일 때 가례청으로 이용하려고 건축한 궁이다,
갑신정변의 주역중에 지금의 덕성여고 터에 살았던 사람이 서광범이다. 그는 이곳이 담을 넘기가 쉽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이곳에 불을 지르면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될 것을 알고 있었다. 불이나서 풍문여고 방향으로 가던 민영익은 자객을 만난다.
서재필이 보낸 자객이 민영익을 죽이기 위해 여러군데 칼로 찔렀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에 의해 민영익은 간신히 피신한다. 세관본부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으로 민영익을 옮기고 알렌의사를 부른다.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칼에 찔려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왕진을 온 한의사 14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모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알렌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상자 민영익은 이미 출혈이 심하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사망직전이었다.
오른쪽 귀부분의 두개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있었다.
다행히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크게 나 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그에게 바쳤다. 알렌의 치료후에 민영익은 치유되기 시작했다. 죽음직전에 살아난 민영익은 알렌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알렌에게 현금 10만 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참판 벼슬까지 하사한다.
민영익의 괘유는 조선 서양의학을 극대화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서양병원 건립이 과제였던 알렌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이 건립된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40개 침상을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이었다.
홍영식의 집에 관한 알렌의 고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패자의 길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광혜원 건물은 전에 홍영식이 쓰던 집이었는데, 그는 최근의 갑신정변 때에 살해되었다.
우리가 그 집을 인수받았을 때에 극심한 약탈 때문에 집은 뼈대만 남아 있었다.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여 있었다.
그 집을 병원으로 꾸미는 데는 600달러 내지 1천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정부에서 지불하였다.
일 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대가 소요되고,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약품과 시술이 무료로 된다.
약 40개의 침대를 수용할 만 한 방이 있고,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할 수도 있다.”
홍영식의 식구들이 모두 자살한 집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은 설립되었다. 결국 이곳은 피의 땅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옛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규수의 집과 홍영식의 집이 이곳에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결국 그곳이 우리나라 병원의 첫 시작점이기도 하지 않는가. 광혜원을 다시 이곳에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 광헤원이 홍영식의 집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는 것은 잘 한 일이 아니다.
임오군란(1882년)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더욱 대립한다. 이 무렵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형성한 세력들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했다. 이들은 청나라에 조선을 의탁하여 난국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사대당이라 한다. 민영익 김홍집 어윤중 민승호 김만식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청나라에 기반을 두려는 사대당을 반대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고무된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등이다.
임오군란의 사과를 위해 사절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큰 변혁을 이루어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는 모습에 고무되어 귀국한다. 개화파의 개화와 정치개혁의 의도를 알아챈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집권파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무렵 청나라는 독일출신 묄렌도르프를 경제고문으로 추천한다. 그는 당오전이란 화폐를 만들게 한 장본인데 이로 인해 인플레가 극심했다. 이로 인한 사대당의 불만은 대단했다.
1884년 청나라가 프랑스에게 패배하였다는 소식은 개화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개화파 주역들은 일본 주둔 병력을 무력화하여 쿠데타를 도모한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이들의 쿠데타 모의 첫모임 장소는 박영효의 집이었다. 1884년 11월 4일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주역들은 한 달후에 있을 우정총국 개설축하를 혁명일로 삼았다. 이 모임에는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도 참석하였다.
그는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명이면 청군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3일 천하 마지막날 경복궁을 둘러싼 청군은 15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시작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간다 고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종에게 그들은 거짓으로 사대당과 청군이 오히려 변을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대피시킨다.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가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경우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옮겨가자 사대당의 핵심들인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은 궁 입구에서 차례로 살상한다.
12월 5일 창덕궁에서 정변의 주역들은 논공행상식 나눠먹기 자리 배정을 한다.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때 이재선은 좌의정에 홍영식은 우의정에 김옥균은 호조판서, 박영효는 한성판윤, 지금의 외무장관 격인 외무독판에는 서광범이 임명된다. 서재필은 병조참판에 임명되는데, 그는 전위대로 공을 세웠다.
12월6일에는 혁신정강 14개조를 공표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측의 보수 수구파들은 청나라 총독 원세개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청나라군 1500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당연히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여야 했지만 일본군은 쉽게 퇴각한다. 홍범식은 고종을 모시고 북관종료로 가다가 청군에 살해당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법 서재필 등은 일본공사관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입지를 튼튼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은 조선쟁탈전에 와신상담하기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결국 1885년 4월 천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철수가 결정되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 병사 고작 150명이었지만 청나라 병사는 무려 3천 명이었다. 일본이 실리를 추구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는다.
결국 김옥균은 상해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명성황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와 절두산에서 부관참시를 당한다. 혁명의 실패는 보복의 죽음과 피바람이 살기를 부른다.그러나 명성황후도 1895년 일제가 보낸 낭인들에 의해 창덕궁에서 비참하게 살상당한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재동 백송은 인간들의 이런 참극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홍영식의 삶과 죽음
홍영식(1855~1884)은 인생을 짧지만 굵게 산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영의정 출신의 홍순목이다. 그러나 그는 큰 아버지 홍만식의 양자가 된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관직에 나가기는 부족한 것이 많아
독서를 더 할 것을 강권한다. 2년간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이 무렵 그는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등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훗날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을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1881년(고종18년)에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탐방한다. 일본 기행에서 그는 이상재를 만난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이었다.
1883년 미국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을 탐방한다. 민영익, 서재필도 이때 함께 동행하였다.
미국 방문에서 그는 개화의 필요성과 혁명적으로 조선이 혁신되어야 하는 확신을 얻는다.
그는 우리나라 우편의 선구자다. 일본 방문에서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업무는 우편이었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는 ‘마에지마’이다. 그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는 홍영식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홍영식이 우편에 관해 질문한 내용과 직원들이 우편실무를 설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마에지마는 이때 홍영식에게 조선에서도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된다. 그는 우정국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드디어 10월1일 서울과 인천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1884년 12월4일 그들은 혁명을 도모한다.
이들의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한다.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군에 의해 살해 된다. 그의 가족은 모두 죽음을 선택한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가족이 모두 가 음독자살한다.
혁명적인 사고와 실천행위는 이런 비극으로 끝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재동 백송을 보면 죽어야 했던 그의 가족들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슬픈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고 가고 와도 아직 끄덕없이 살아있는 재동 백송이 소중한 이유다.
■선각자 박규수의 삶
박규수(1797~1877)는 본관이 반남이며, 호는 환재이다. 서울 계동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장소에서 출생했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글 공부는 대단한 경지에 올랐지만 곧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상심하여 거의 20년간 칩거하며 독서만을 한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심취한다.
1848년(헌종14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에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벼슬운이 좋았다. 부안현감(1850), 동부승지(1854), 곡산부사(1858)를 역임한다. 특히 1860년(철종11)애 중국 북경 부근의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
이 기행을 통해 그는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구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파악한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한 사실은 유명하다.
진주민란후 백성들을 다른 곳 보다 많이 처형하지 않은 것은 안핵사로 조정에서 파견했던 박규수(1797~1877)의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조정에 진주와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고 보고한다. 물론 관리자들의 책임이 있었음을 보고했다. 아마 박규수의 진주민란 진상보고가 삼정의 문란이 아닌 일방적인 백성들의 책임으로 몰았다면, 조정은 최소한 수 천 명의 진주 사람들을 참살하였을 것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1866년 셔먼호 사건 때는 평안감사였으며 경복궁 중수의 책임자였다. 그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을 가슴아파한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진은 계속되어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대사간 같은 요직을 역임한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쇄국을 풀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강골적인 면을 보여 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계동 자신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한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같은 인물들이다. 중국에서 익힌 견문으로 그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지금 식으로 하면 의식화를 한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수교를 요구한다. 박규수는 최익현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역설한다. 결국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그의 마지막 벼슬은 수원유수였다. 그의 저서로는 ‘환재집’, ‘환재수계’가 남아 있다.
그는 끝내 할아버지 박지원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 혁명의 풍운아 서재필의 삶
서재필(1864~1951)은 전남 보성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본가는 충남 논산이다. 어느해 이른 봄날 나는 그의 본가를 찾아 파란많은 삶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당시에 그는 지금의 정독도서관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서광효와 어머니는 성주 이씨였지만, 부친의 6촌 동생 서광하의 양자가 된다. 결국 7촌 아저씨의 양자가 된 것이다. 양어머니의 동생 중에 김성근이 있었다. 그는 이조참판으로 한양에 살고 있었다. 서재필은 바로 이 집에서 숙식하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한다. 처음 벼슬은 ‘교서관 부정자'였다.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던 직책이다. 이 무렵에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난다.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모신다.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과 교류한다. 이들이 만나 토론하던 장소는 봉원사였다. 지금의 이대 후문 쪽에 있는 사찰이다. 이 무렵 봉원사의 주지는 이동인이었다. 그는 개화파 승려였다. 이동인은 부산 출신인데 일본말을 잘 했다.
당연히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을 습득했다. 이것을 개화파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봉원사는 이런 젊은이들의 아지트였다. 서재필은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렸다.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에 서재필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난다. 이때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도 함께 동행한다.
서재필과 일행은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6개월간 수업을 받는다.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한다. 1984년 1월부터 7월 동안 약 7개월간이었다. 개화파들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하여 조련국을 설립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청나라와 명성황후의 반대로 무산된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된다. 결국 1884년 12월4일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어 전위대의 책임자가 된다. 서재필의 책무는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는다.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살해하고, 민태호, 민영목,조영하 등은 고종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살해한다. 이때 고종은 큰 충격을 받는다.
정권장악 후에 그는 이조참판이 된다. 3일천하 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가 망명한 후에 부모와 3형제등은 처형 당했다. 처는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두 살난 아들도 이때 사망한다. 와신상담하면서 서재필이 살았던 인생역정은 누구나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미국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재필을 달랐다. 와신상담하며,주경야독으로 의사가 된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라고 후회하였다. 이쯤에서 서재필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길고 언젠가 새롭게 조명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들이 그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혁명을 도모하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로 인해 죽어야 했던 부모와 형제들, 처와 자식의 비명소리를 들어보라. 혁명이 어디 아무나 하는 것인가. 그는 미국에서 와신상담하여 성공하였지만,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며 상처였으리라.
■ 만해당
북촌의 계동 43번지는 한용운 선생이 살던 집이다. 1918년 9월 창간된 잡지 유심은 이곳에서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그해 12월까지 발행하고 중단된다. 이 집은 최린이 한용운 시인을 찾아 불교계를 3,1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곳이다. 최린은 당시 이승훈과의 회합을 통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운동 일원화 시켰다.
3·1 독립운동 후 법정에서 ‘서울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유심>지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내설악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다. 만해는 이 <유심>지를 통하여 세계 정세의 흐름을 널리 알리려 하였다 ,
한용운 시인이 <유심>지는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 투고를 계속 홍보하였다.제3호에는 그 첫 번째 현상문예란의 당선작을 발표하였다. 당시 견지동 118번지에 살던 방정환이 ‘고학생’ 과 ‘마음’등 소설로 입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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