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ㅣ영웅: 천하의 시작 Hero , 2002 제작
개요 ㅣ중국 / 무협액션, 드라마 / 15세 관람가 / 98분 / 2003.01.24 / 2020.06.04 (재)
감독 ㅣ장이머우(장예모)
출연 ㅣ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견자단, 장쯔이
나의 별점 ㅣ★★★★
관련 영화 ㅣ와호장룡, 연인, 황후화, 야연.
"검劍의 최고 경지는 상대를 포용하는 것
상대를 해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것."
20년이 되어가는 영화를 이번에 또 보았다.
무협액션 영화의 신기원을 이뤄낸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2000년작>의 뒤를 이은 중국 액션 대작으로
개인적으로는 와호장룡보다 더 절제되고 완성도 높은 무협영화의 최고봉이라 주저없이 손꼽기에.
영화 초반 이연걸(무명)과 견자단(장천)의 첫 대결 장면인 빗속 결투, 양조위(파검)와 이연걸의 호수 위 환상적인 장면,
장만옥(비설)과 장쯔이(월령)의 은행나무 숲 무협 장면은 언제나 경이로움이다.
황홀한 자연을 배경으로 신비롭게 펼쳐지는 최고수들의 절제된 대결구도 속에
각기 변화하는 이야기의 주제와 인물들의 심리(야망, 질투, 사랑, 희생, 죽음)를 상황에 따라 빨강, 노랑, 파랑, 흰색, 녹색,
검정 등의 색色과 옷을 통해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다. '색채와 이미지의 향연'이란 찬사가 아깝지 않은 당연함이다.
분명 여타 무협영화와는 차별화된 특색있는 환타지적 영상미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사건을 인과 관계에 따라 엮어낸 탄탄한 구성도 흥미롭고, 한마디로 영화의 모든 요소가 수준 높게 어우러진
볼거리도 풍부한 감탄이 절로나오는 멋지면서도 훌륭한 영화다.
20년 전 영화라기에는 너무 뛰어난, 어쩌면 앞으로도 쉽게 나올 수 없는!
7개의 나라들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왕 영정은 주변국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전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며 천하를 제패할 야욕을 불태우고 있다.
이들 왕 중 황제에 가장 근접한 진왕이었으나, 중국 3대 고수 파검, 비설, 장천만큼은 경계하여 그들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백보 금지령'을 내려 외부인은 진왕 근처에 접근할 수 없었지만, 장천을 잡으면 황금과 토지를 하사받음과 동시에
20보 거리에서 왕을 알현할 수 있고, 파검이나 비설을 잡으면 황금과 토지에 더해 10보 거리에서 진왕의 술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변방의 하급 장수 무명이라는 자가 3대 고수를 모두 물리쳤다며, 그 증거로 세 사람의 무기를 가지고 진왕을 찾아온다. 그렇게 진왕의 10보 거리까지 오게 된 무명은 진왕을 죽이기 위해 수십 년간 10보 안에서
상대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비장의 검술, '십보일살'을 익힌 상태였다. ……. (인터넷 참조 인용)
당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숨이 멎었다.
세 번째 보는데도 역시 숨이 더 깊게 멈춘다. 그리고는 먹먹하다, 한동안…….
영화속 최고의 고수 '파검'은 모두가 죽이려 하는 진왕을 암살할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는다.
또한 세상을 제패하려는 진왕을 암살하지 말라고 3대 고수인 자객들을 설득하고
결국은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破劍'. 그의 검은 부러져 있다. 스스로 破한 건지 싸우다가 부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는 검법을 書藝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킨 검신이다.
그런 최절정의 최고수가 선택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이의 "평화"를 위한 죽음이었다.
진왕(진시황) 또한 자신이 평생 두려워한 인물인 파검의 영웅적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검을
친히 자객 무명에게 내주며 자신을 죽여도 좋다고 허락한다.
그리고 검(劍)이라는 글자에서 최고의 경지는 상대를 포용하여 다툼이 없는 평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무명 역시 그제서야 진정한 대의가 살생이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다.
무릇, 한 분야에서 최고 경지에 오른 최고수란 그런가 보다.
남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의 더 큰 가치를 심안心眼을 뛰어 넘어 영안靈眼으로 볼 수 있는 신성神性의 사람들.
화살이 빗방울보다 더 무수히 쏟아져 내린 그 죽음의 자리에 덩그러니 자신의 형체만큼 비어 있는,
온 몸으로 스스로 받아낸 화살만큼 화살이 박혀있지 않은 그 빈 공간의 자리에서
예수님 못 박혀 달리신 구원의 십자가가 보였다.
"이 여자를 보아라."(루카 7,44)
천하天下를 지배하기 위한 남자들의 영웅적 이야기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면서
어울리지 않을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루카 복음 7장 44절의 "이 여자를 보아라."라는 말씀과 마주하게 되었네요.
나 자신조차도 다소 당황스러웠고 참 의아하였지요.
이 여자. "여인"이라 표현되지도 않는, 이름도 없는 그저 '여자'로 불리는 하찮은 여자네요.
당시 물건(재산)으로 취급되었던 비루한 여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권력적 기득권자들인 남성의 영웅들인 바리사이들에게,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 "이 여자를 보아라" 하시네요.
어쩌면 내가 쏘아 올린 비화살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은 독화살을 쏟아대고 있는 나를 보라 하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시直視에 의한 자아적 직관直觀 말이지요.
영웅이란 것이
하늘 아래 온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남성성(性)의 권력적 힘의 두드러짐이 아닌
이와 너무나 대비되는 자기 낮춤의 이 여자.
그것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다가서는 몰염치한 여자, 남자의 발에 입을 맞추는 비천한 여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바르는 참회의 여자, 자신의 눈물로 사람(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남자의 발을 닦아낼 수밖에 없는 죄많은 여자"(루카 7,38 참조).
어쩌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하느님의 사람은,
작금의 자신을 올바로 직시하고 깨달아 용기를 내어 진리의 문을 두드릴 줄 아는 죄 많은 사람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네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시는"(루카 15,7) 하느님의 사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죄많은 자신이 "은총이 가득한" 사람임을 알아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드러내는"(7,47), "죄를 용서받은"(48절), "구원 받은", 그래서 "평안히 가거라."(50절) 하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새로운 믿음으로 평안히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가 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은총의 은총을 받아"(요한 1,16) 자신의 죄 많음을 인지하고
진심으로 마음 다하여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그분 사랑 안으로 다가가는 여자의 지극히 단순한,
그러나 담대하고 단단한 참회의 행동.
이런 열린 마음의 행동이 얼마나 감동이었길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행동을 최후의 만찬 때 그대로 재현하심이네요.
이 여자가 행한 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닦아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는 비천한 죄 많은 인간으로서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한 엄청난 "하느님 사건"의 유발자인
하느님 닮은 거룩함이었네요.
그래서일까요?
인간의 대의명분적, 권력적, 위선적 탐욕의 인간 본성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 곧 "신성에 참여하는"(2베드1,4) 이 여자를 "보라" 하심입니다.
무릇 신앙의 고수라 함은 내 죄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에 기대어 회개할 수 있는 진정한 하늘 사랑을 맛본 사람,
그리고 그 신앙의 맛을 "신적 본성"으로 기꺼이 행하는 사람이라고요.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 닮은 신성에 참여하는 영광의 삶일 때, 죽음으로 치닿는 인간 본성의 탐욕적 허울을,
죄를 발견할 수 있다 하시네요.
인성이 신성을 만날 때 용서에 의한 회개가 주어지고, 자아적 옥합을 깨뜨릴 수 있게 되고,
향기로운 향료를 부을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주어지고, 보이지 않는 평화를 볼 수 있고, 희생과 사랑을 할 수 있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는"(갈라 2,20) 신적 삶으로 옮아감이라 하시네요.
회개, 용기, 포용, 생명, 사랑, 자비는 그렇게 하느님의 영을 빌려 하느님의 영에 의해 발생하는,
하느님의 본성에서 피어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 하시네요.
신성에 참여하는 사람은 시선과 생각이 '이 여자'처럼, '파검'처럼 달라지나 봅니다.
행동이 논리를 앞서가는 사랑이 되고, 이제 이 여자는 여자가 아닌 "여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이 주어졌음입니다.
신앙의 결정체인 자유!가 말입니다.
"복음은 뒤집어엎는 해방입니다."(조반니 반누치)
옥합을 깨뜨리는 향기로운 "돌아섬"이 내 안의 칼劍을 버림인가 봅니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죽음을 생명으로, 인간의 본성적 탐욕을 하느님 본성의 사랑으로 옮겨내는 '뒤집음'이 복음이라 하시네요.
나를 그렇게 "되어지게 내어 맡기는 것"이 신앙의 고수라 하심이네요.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 체험을 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들"(테야르 드 사르댕 신부) 입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
"나를 보아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고
감히 고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인'이길 희망해 봅니다!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자기 인생 무대에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오로지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신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이제민 신부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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