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추억
지루하고 암울하던 庚子年이 지나가고 辛丑年 새해가 밝았다. 여든다섯 번의 설을 맞이해도 금년 같은 희한한 설을 처음이다. 기차들 딸들은 아예 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지만 맏이는 그래도 장님이라고 한사코 오려는 것을 내가 결단코 못 오게 엄명을 내리고 한적한 시골집에 내년설도 기약할 수 없는 두 늙은이가 우두커니 앉아서 떡국을 먹고 있으니 이제 가물가물하여지는 빛바랜 추억이 떠오른다.
첫째 떠오르는 것은 어릴 때 때때옷 입고 세배 드리는 것인데 우리 시대에는 세뱃돈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우리에게는 제일 큰집인 율리댁이 바로 옆에 있어 맨 먼저 차례를 드리는데 好자敏자 가의 宗孫 집이라 설날에는 모셔놓은 神主를 내어 와서 제사상위에 세워놓고 제사를 드렸다. 내가 아주 어릴 때에는 밤중에 드리는 忌祭에도 참례하여 밤중에 먹는 젯밥 맛은 세상에서 제일 맛이 있는 밥이었다.
다음에는 안마을에 있는 초산댁 큰집에 가서 차례를 드리는데 내 증조할아버지 내외분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이니 할아버지까지 삼위에 차례를 드리고 마지막으로 일찍이 돌아가셔서 나는 뵈옵지도 못한 삼촌 수동 아재 차례를 드리고 나면 오전이 다 갔다. 이것은 아주 어릴 때 추억이고 6.25이후에는 세상이 변하여 각자의 집에서 드리는 차례만 드렸다.
제일 많이 떠오르는 추억은 소년기에 접어들어서 설날을 시작하여 정월대보름까지는 밤을 새우는 일이었다. 그때 우리문중에 36년생 쥐띠가 가시나 머슴아 합하여 여덟이나 되어 위아래 한 살만 보태도 열댓 명은 되었다. 밤에 모이면 노는 것은 윷놀이가 주동이고 막간에 엣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때 장소는 안마을에는 호랑이 같은 할배님들 특히 명고 할배, 천정 할배님이 계셔서 얼씬도 못하고 주로 변두리 솔안에 영수네 집 용정댁 태관이 집 노항댁 태은이 집. 내려오면 골안에 종가집 왼쪽 방이 주 무대이다. 종가댁 덕재 아지매가 혼자 계셔서 젊은 아이들이 와서 노는 것을 좋아하셨다. 가끔씩은 구장터에 있는 강원댁에도 모였다.
이때 제일 스릴이 있는 것은 마을에 닭이 수십 마리 도살되고 오리 토끼도 여러 마리가 죽었다. 다 백수건달에 부모에게 용돈 타서 쓸 형편은 되지 않으니 서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리란 것이 돈 내지 않고 몰래 남의 닭을 잡아먹는 것인데 그렇다고 도적질은 아니다. 그 집 아들이 잡아내오고 다른 사람들은 망을 보는 것이니 도둑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님들은 켜있던 불을 끄고 기침을 두어 번 하시는데 이것은 많이는 잡아가지 말라는 신호이다. 제일 큰 서리는 영수네 집에서 모여 노는데 나가서 잡아온 것이 닭이 다섯 마리 오리 토끼가 각 한 마리였다.
이때 일을 리드하던 사람은 쥐띠 동갑내기보다 한 살 아래인 소띠 덕포댁 연이와 용정댁 태관이가 잘 하였다. 장소섭외 음식물 준비는 주로 연이가 잘하였고 놀이를 짜는 것은 태관이가 많이 하였고 윷말 쓰는 것도 귀신 같이 하였다. 놀이를 하는데 화투는 내기를 하지 않으면 두 판을 넘기지 못하는데 윷은 아무 내기가 없어도 밤새도록 놀 수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모가 나올 때, 상대편 말을 잡았을 때 그 짜릿한 흥분은 말할 수가 없다. 춤도 추고 뛰다가 보면 구들이 꺼질 때도 있었다.
가끔씩 술을 먹을 때가 있는데 이때에도 술내기 하면 내가 바보짓을 잘 하였다. 한 번은 종갓집에서 놀 때 우리보다 한 살 아래 또래인데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고 향렬은 중자가 기계국수 한 사발과 막걸리 한 사발을 같이 시작해서 먼저 먹을 내기를 하였다. 그 아재는 국수를 먹고 나는 술을 마시는데 내가졌다. 나는 국수를 그렇게 빨리 먹을 줄은 몰랐다. 또 한 번은 구장터 강원댁에서 모였는데 막걸리 한 동이를 한잔씩 다 돌리고 한 되쯤 남은 술을 누가 입 때지 않고 한꺼번에 마실 수 있는 사람해서 또 내가 지원을 하여 삼일을 술에 취해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많았지만 이제 기억이 다 희미하여지고 왜 우리 세대가 이러한 놀이가 왕성하였는지를 생각해보니 6.25사변 후에 안정되지 못한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라서 그런 풍조가 있었다고 생각이 된다. 集姓村이라는 문중개념도 우리세대 후에는 점점 희박해진 것 같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세상에 맞이하는 신축년 설은 허무하게 지나간다. 설이라고 아침부터 한복을 갈아입고 있어도 세배하려오는 자손은 하나도 없고 전화만 왔다. 맏이는 영상통화를 하여 얼굴만 보았다. 종일 두 늙은이가 무료하게 앉아서 한 사람은 TV만 보고 나는 지난날 추억만 해본다. 이제 신축년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문중일가가 다 잘 되기를 빕니다.
첫댓글 작은아버지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늘 건강하시고
좋은 글을 많이 남겨주셔서
저희 집안과 우리 문중의 큰 언덕이 되어주시소~
옛날 입암 소년딸래 모임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저는 아버지가 경찰관 하시느라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라는 바람에 방학 때만 입암 큰집에 갔는데 그런 모임에 대해 얘기만 엄청 듣고 끼이지는 못해서 늘 부럽기만 했습니다. 용띠 동갑으로는 중예, 태훈, 태현 등 몇사람 있었는데 항렬은 제가 낮고 학년은 제가 높은데 (한해 일찍 들어감) 큰아버지가(구장터 덕천댁) 노는거 좋아하면 안된다고 하시고, 경중 경고 교복 입고 가면 사촌누이들도 (범띠, 뱀띠) 저는 공부만 하는 줄 알고 또래들 소개도 시켜주지도 않고 해서 어른 될 때까지 동갑내기들과 한번도 어울려본적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아쉽고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