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五 章 신타 을휴
그의 몸이 막 떠나자마자 그가 몸을 숨겼던 그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허리께로부터 잘라지면서 쓰러졌다. 곧이어 한줄기 싸늘하기가 뼈를 에이는 듯한 검기가 바짝 그의 등 뒤를 따라 쏘아져 들이닥쳤다. 그 사람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으며 몸에 흑포를 걸치고 있는 비쩍 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몸을 날려 나무위에서 뛰어내리자 즉시 절정의 경신법을 펼쳐 나무 사이를 헤치며 숲이 울창한 곳으로 날아갔다. 아마도 등 뒤를 쏘아오는 그 한가닥 무형의 검기를 떨쳐버리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단번에 수장씩 몸을 날리며 잇따라 몸을 솟구쳐서 거의 숲속에서 벗어나려하고 있었지만 그 날카로운 검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는 몸을 갑자기 멈칫하며 발걸음을 직각으로 옮겨 번쩍 검기를 피하면서 등 뒤에 꽂은 한자루의 커다란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의 무기는 마치 꼭대기가 우산처럼 생겼으며 길다란 중간에는 약간씩 뻗쳐나온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박혀있어서 얼핏 볼 때 마치 커다란 물고기의 뼈다귀를 연상시켰다.
그 괴상하게 생긴 무기를 뽑아든 그는 즉시 두 손으로 자루 쪽을 잡고서 옆으로 쓸듯이 휘둘렀다. 그가 이와같이 무기를 휘두르는 기세는 웅혼하기 이를 데 없어서 사방에서 한차례, 소용돌이치는 강풍이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쌓인 낙엽들을 휘말아 올렸다.
세찬 바람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그 한자루 무기가 나무에 닿기 전에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부딪쳐 부러져서 쓰러졌다.
휙휙 하는 세찬 바람을 가르며 전옥린이 일직선으로 장검을 뻗치고 쫓아왔다.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들이 부러지고 쓰러지는 판국에 전옥린은 긴 휘파람소리를 내며 어느덧 그 소용돌이치는 세찬 바람의 테두리를 돌파하고 있었다.
순간 쩡쩡 하는 음향이 몇 번 울려퍼지고 그 흑의 노인의 손에 들린 괴이하게 생긴 무기 중간에 뻗쳐난 첨인(尖刃)이 다섯 대나 부러져 날라갔다.
그 흑의노인은 매우 당혹하고 성이 나서 한소리 노호를 터뜨리며 손에 든 커다란 무기를 쳐들어 잇따라 삼초를 공격했다.
그 한자루의 무기는 괴상하게 생겼고 무거웠으며 길이도 일반의 장검보다 훨씬 긴 편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이 휘두를 때 그 육중한 무기가 마치 한대의 수놓는 바늘처럼 전혀 힘겨워하는 느낌이 없었다. 더욱이 전옥린이 놀란 것은 그 노인이 펼치는 삼초가 모두 다 예상치도 못한 검법일 뿐 아니라 검식이 펼쳐지자 마치 수양버들 가지가 흔들거리고 버들강아지가 날아오르는 것 같이 초식의 흐름이 유연하고 부드럽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삼초의 검법은 초식마다 물이 흐르듯이 이어져서 면밀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는데 검기가 마치 버들가지가 바람을 따라 흔들거리는 듯 했으나 놀랍게도 지극히 커다란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에 과거의 그가 이와같이 괴이한 무기에다 이같이 이상야릇한 검초를 대하게 되었더라면 틀림없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금응검법 가운데 신묘한 일초를 펼쳐 그 삼초의 괴이한 검법을 상대해야 했을 터이니 맞받아치고 막바로 깨뜨리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흑의노인이 커다랗고 육중한 무기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천생적인 신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고 거기다가 이같이 무거운 무기를 사용해서 그토록 부드러운 초식을 펼치는 것을 보면 내력의 고강함은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옥린이 만약 금응검법으로 맞닥뜨려서 힘으로 부딪치게 된다면 무기와 진력에 있어서 이미 밀리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검이 망가지면서 어느덧 대패를 당하게 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전옥린은 상승의 검도를 터득한 이후 이미 일정한 법식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 검초가 연이어지고, 나아가고 구부러지는 방향이 음유(陰柔)하고 괴이한지라 즉시 검을 마음에 따라 움직이며 물러서기보다 되려 앞으로 나가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방 무기의 테두리 안으로 던졌다.
찰나지간에 그가 뻗쳐낸 장검이 흑의노인의 무기위에 사뿐 걸리게 되었고 사람과 검이 일체가 되어서 마치 버들가지에 붙은 날벌레처럼 바람따라 흔들리며 표연하기 이를 데 없이 움직였다. 그 노인은 삼초를 막 펼쳐내었을 때 한가닥 거대한 압력이 상대방의 검으로부터 무기를 통해 전해졌으므로 초식의 변화마저 모두 제한을 받게 되고 마치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들고 있는 듯 움직일수록 점점 힘들어졌다.
깜짝 놀란 그는 진력을 와락 쏟아내면서 호통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에 든 커다란 무기를 휘두르고, 옆으로 쓸고, 곧장 내리치는 수법으로 나오는 등 그야말로 바람 한 점 샐틈없이 휘둘러서 전옥린을 핏떡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진땀을 흘리며 겨우 세 번 휘둘렀을 때 전옥린은 어느덧 몸을 솟구치더니 그 휘두르는 힘을 빌려서 삼 장 남짓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흑의노인이 막 몸 밖의 압력이 가벼워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머리위에서 한 차례 휘파람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후딱 고개를 쳐들었고 그 순간 한줄기의 눈부신 검광이 번쩍했다가 사라졌고 그의 손에 들린 이상하게 생긴 무기는 쨍하는 쇳소리와 함께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몸을 빼려 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한가닥 차가운 검의 광채가 몸을 찌르듯이 한기를 쏟아내는 가운데 검기는 어느덧 그의 전신을 뒤덮고 말았다.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하마터면 놀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 놀란소리가 그의 입에서 뱉어지기 전에 전옥린의 손에 들린 장검은 어느덧 그의 목줄을 겨누고 있었다. 전옥린은 그 노인을 훑어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그 흑의노인은 전옥린의 검세에 완전히 붙잡힌 꼴이 되어 털끝만치도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마도 그는 한평생 이와같이 고약한 지경에 처해본 적이 없는 듯 얼굴의 표정은 도리어 멍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는 듯 했다. 차츰 정신을 수습한 그는 입술을 꼭 다물고 눈에서도 악독한 광채를 쏘아내면서 전옥린의 얼굴을 주시할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전옥린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귀하의 풍모와 그 무공조예를 볼 때 틀림없이 한때 세상을 도리질하던 고수인데 어째서 성명마저 대지 못한다는 말이오?』
흑의노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입술은 단단히 봉해진 것 같았다. 전옥린은 그의 그와같은 태도에 성이 났다.
『귀하가 자라처럼 머리를 움츠리고 꼬리를 감추는 도배라면 나 또한 사정을 둘 필요가 없겠소이다.』
그는 천천히 장검을 뻗쳐 흑의노인을 찔러갔다. 검끝은 어느덧 노인의 부드러운 목살에 닿게 되었고 그의 안색은 더욱더 참담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마디 말고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입술 한번 움직이지 않았으니 아예 죽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전옥린은 한편으로 무정산의 규칙이 엄한 데 대해 탄복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남삼객 적군이 어째서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바로 그가 그런 생각에 잠기게 되었을 때 별안간 그는 흑의노인의 눈동자에 한가닥 이상야릇한 빛이 번쩍 스쳐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섬칫해져서 어떻게 된 노릇인지 돌아보려 했을 때 등 뒤가 마비되면서 어느덧 네 개의 요혈을 봉쇄당하고 말았다. 그는 온 얼굴에 가득히 놀란 빛을 띄우며 전혀 기척없이 그의 등 뒤까지 다가온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을 해 보려고 했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천하에 그 누가 그로 하여금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암산을 할 수 있었을까?
벽라도주 원현기일까?
그는 정말 고개를 돌려서 한번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몸의 혈도는 이미 봉쇄되어 있었고 전신의 기운은 모두 다 빠져나간 상태여서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자기가 앞으로 쓰러지면서 흑의 노인의 부축을 받았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을 뿐 이미 혼미상태에 빠져 지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전옥린이 암산을 당하여 쓰러지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숲 밖으로부터 나는듯 달려 들어왔다. 밝은 달빛아래, 그 사람이 바로 조금전에 극도의 분노에 차서 자리를 떴던 벽라도주 원현기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몸을 날려 숲속으로 들어오다가 흑의노인이 쓰러지려는 전옥린을 부축하는 것을 보자 큰소리로 물었다.
『다형, 당신이 전옥린을 처치했소?』
천하에 다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은 편이 아니었으니 무림에서 이름난 사람으로는 역시 수십 년간 강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유곡신마 다삼공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흑의노인이 바로 다삼공이었다. 그는 마치 원현기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멍하니 서서 그 어둡기 이를 데 없는 숲속 깊숙한 곳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원현기는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다형, 왜 그러시오?』
유곡신마 다삼공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니라오.』
원현기는 사방을 한번 훑어본 이후 혀를 내둘렀다.
『다형, 조금전의 싸움은 정말 극적이었겠구려. 나는 멀리서부터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소이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 듯 다시 물었다.
『다형, 전옥린은 당신에게 잡혔지만 남삼객은 어떻게 되었소?』
다삼공은 숲속 깊숙한 곳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모르겠구려.』
원현기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전옥린은 남삼객과 결투를 하고 있지 않았소? 그런데 그가 어째서 갑자기 이곳으로 날아왔을까요?』
다삼공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원형, 아무래도 산주(山主)께서 오신 것 같소.』
원현기는 온 얼굴 가득히 놀라운 빛을 띄웠다.
『뭐라고요? 산주가 오셨다구요?』
그는 시선을 들어 숲속을 한번 쓸어보았다.
『다형, 산주는 이미 산을 떠난 지 반년 가까이 되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단 말이오?』
다삼공은 손에 들고 있는 반 토막의 무기를 쳐들어 보였다.
『원형, 이것을 보시오.』
원현기는 의아한 얼굴이 되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을, 산주가 그렇게 했소?』
다삼공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산주가 어째서 내 무기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겠소? 이것은 전옥린의 검에 잘려진 것이라오.』
원현기는 놀랐다.
『그가 말이오? 젊은 그의 무공이 놀랍게도 다형과 평수를 유지했다는……』
다삼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수가 아니오. 전옥린은 이미 상승의 어검술을 연성해서 나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소.』
원현기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당신에게……』
다삼공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등 뒤로부터 암습을 당한 것이라오. 그 당시 나는 이미 그의 검아래 제압을 당해서 목숨을 그에게 맡기고 있었소.』
그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목에 있는 실낱같은 검상(劍傷)을 만졌다. 그는 가슴속으로부터 한차례 한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원현기가 물었다.
『당신은 산주가 손을 써서 전옥린을 제압했다는 말씀이오?』
다삼공은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천하에 산주 이외에 어느 누구가 단 일초에 전옥린을 제압할 수 있겠소?』
원현기는 여전히 의아한 얼굴이었다.
『다형은 산주가 손을 쓰는 것을 보지는 못했고 다만 그렇게 짐작할 뿐이라는 것이오?』
다삼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만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와 같이 번쩍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다음 전옥린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소. 그러니 생각해 보시오. 우리 산주를 제외하고 그 누가 바로 내 눈앞에서 손을 써도 나에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오?』
원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형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러나……』
그리고 그는 곰곰 생각을 해보더니 말했다.
『산주의 무공은 이미 화경(化境)에 접어들었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언제나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소. 그 어르신이 우리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터이지만 어째서……』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멀리서 두마디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삼공은 안색이 일변했다.
『음무극과 사옹 상산이오. 틀림없이 남삼객이 손을 쓴 것 같구려.』
그는 전옥린을 안더니 몸을 날려서 달려나갔다. 원현기 역시 바짝 그의 뒤를 쫓아갔다. 숲속에는 많은 나무들이 전옥린의 검에 잘려서 쓰러져 있었고 또 나뭇가지가 옆으로 줄기줄기 뻗쳐있어 다삼공과 원현기의 행동은 적지않게 장애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수 장을 달려나가게 되었을 때 숲속에서 한마디 매우 위엄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다단주와 원단주는 걸음을 멈추시오.』
다삼공과 원현기는 그 소리를 듣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서 절을 했다.
『노산주님의 만복(萬福)을 빕니다.』
어둠속에 몸을 숨긴 무정산의 산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두 분 단주께선 너무 예의를 차릴 것 없소이다.』
다삼공과 원현기는 고개를 쳐들었다.
『산주님, 감사합니다.』
그들 두 사람의 행동은 모두 일치되었다. 오랫동안 산속에서 그와같은 예의가 습관이 된 것 같았다. 무정산 산주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두 분 단주는 들으시오. 노부는 당신들에게 여러 차례 대사를 일으키기 전에는 남삼객과 어떤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어째서 말을 듣지 않았소?』
다삼공은 온 얼굴 가득히 황송하다는 빛을 띄웠다.
『속하는 명을 받고 산을 내려온 것입니다. 부산주께서 음무극의 비합전서를 받으시고 개방도 양심신공비급을 강탈하는 데 끼어들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무정산의 산주는 그 말을 잘랐다.
『그것은 모두 알고 있소. 부산주의 명은 결코 잘못이 없소. 그러나 당신네들이 공공연히 남삼객이 결투하는 일을 간섭했단 말이오? 더욱이 원단주는……』
원현기 역시 온 얼굴에 황송하고 두려운 빛을 띄우고 그 말이 끝나기 전에 허리를 구부렸다.
『속하는 실로 남삼객의 사람을 다그치고 핍박하는 태도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다단주가 전음입밀로 보낸 주의를 듣고 즉시 그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무정산주는 말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당신은 나의 명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겠소. 허나 당신은 오늘 쓸데없는 오기를 부려 하마터면 나의 큰일을 그르칠 뻔했으니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원현기는 고개를 숙였다.
『산주의 뜻대로 처리하시옵소서.』
무정산주는 말했다.
『좋소, 당신에게 산으로 돌아간 이후 십일간 면벽을 하는 벌을 내리겠소. 만약에 석벽에 새겨져 있는 그 만류귀종(萬流歸宗)의 초식을 깨우친다면 그때 나오도록 하시고 그렇지 않을 때는 다시 이십일을 더 면벽하도록 하시오.』
원현기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띄우고 포권을 했다.
『산주의 은전(恩典)에 감사드립니다.』
무정산주는 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당신들이 즉각 한 가지 일을 해줄 것을 명하겠소.』
다삼공과 원현기는 대답했다.
『산주께선 분부만 내리십시오.』
무정산주는 명령했다.
『다단주는 전옥린을 이곳의 제자들에게 넘겨서 은밀히 산으로 데려가도록 하시오. 길을 가는 동안에 조심스럽게 돌봐야 하며 조금도 그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오.』
다삼공은 머리를 숙였다.
『속하 알고 있습니다.』
무정산주는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노부는 전옥린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소. 산으로 데려간 이후 은사궁(銀獅宮)에 감금하고 노부가 산으로 돌아간 이후에 다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하겠소.』
그리고 그는 좀 더 음성을 낮추어서 나직이 말했다.
『만약에 그가 마음을 바꾸어서 우리 산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면 본산의 역량은 크게 증가될 것이나 그렇지 않을 때 노부는 부득이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소.』
다삼공은 묵묵히 서서 감히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그는 시력을 모아 무정산주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만 한 훤칠한 신영(身影)이 희미하게 보일 뿐 근본적으로 무정산주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무정산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으나 다만 산주의 무공이 절세적이고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것을 알 뿐 한번도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무정산 조직은 여섯 개의 단(壇)과 다섯 개의 궁(宮)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모든 단주와 궁주들은 수십 년간 명성을 떨쳐온 사람들이고 무림을 종횡했던 전대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번도 산주의 참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무정산의 산주는 온 몸을 검은 수건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복면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매번 그의 모습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참된 모습이 어느 것인지 알지를 못했다. 무정산의 산주가 그토록 신비하고 그의 무공이 또한 그토록 고강하기 때문에 모든 단주와 궁주들은 매우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다삼공과 원현기는 엄숙하게 서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정산주는 말했다.
『다단주, 당신은 전옥린을 건네준 이후 황학루로 가서 우정산을 죽이도록 하시오.』
다삼공은 온 얼굴 가득히 의아한 빛을 띄웠으나 감히 더 말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정산주는 이어서 말했다.
『본산의 비밀이 이미 누설된 것을 당신들은 알고 있소?』
다삼공과 원현기는 일제히 대경실색했다.
『아, 본산의 비밀이 이미……』
무정산주는 매서운 어조로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 모든 것은 우정산이 누설한 것이오. 그는 천원단(天猿壇)에 속한 사람이오. 그러니까 그를 산에서 내려보낸 사람의 한 팔을 자르고 뒷산의 표실(豹室)로 들여보내 닷새동안 반성하는 벌을 내리도록 하시오.』
다삼공은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무정산주는 말했다.
『다행히 아직까지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으니 우리들은 그런대로 방비를 할 수 있소. 그렇지 않았다면 부득이 앞당겨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을 뻔했소이다.』
원현기가 물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지금 어떤 사람들이 본산의 비밀을 알고 있는지요?』
무정산주는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 전옥린 이외에 다섯 사람이 있소. 그 가운데 남삼객과 천지이괴는 내가 상대를 하겠소. 원단주 당신은 영빈객잔으로 거서 소림사의 오용과 무당파의 성균을 죽이시오. 그들은 비단 본산의 비밀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베낀 양심신공비급의 진본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반드시 그 비급을 빼앗아와야하오.』
원현기는 물었다.
『양심신공비급은 이미……』
무정산주는 그 말을 다 듣지 않았다.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물건이오. 당신들은 모두 전옥린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오. 그 건네어 준 비급의 마지막 두 장이 이미 찢겨져 나갔단 말이오.』
원현기는 무정산주에 대해서 그야말로 몸뚱아리를 땅바닥에 던지고 넙죽 절을 하고 싶을 정도로 탄복하는 마음이 되어서 허리를 구부렸다. 무정산주는 차갑게 말했다.
『음무극과 상산은 나에게 죽음을 당했소. 그 두 밥통은 스스로 총명한 척 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노부의 큰일을 그릇칠 뻔했소. 노부가 만약 때맞추어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일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갈 뻔했소. 아마 해외쌍선도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되어있고 강호 각대문파도 단결하여 한데 뭉치게 될 예정이었소.』
다삼공과 원현기는 그와같은 말을 듣자 일제히 놀라서 소리를 냈다. 무정산주는 퍽이나 성이 나는 듯 했다.
『노부는 이 십여 년간 음무극의 역할을 중시했소. 그런데 그가 노부의 심혈을 기울인 대사를 저버릴 줄 그 누가 알았겠소. 당신들은 산으로 돌아간 이후 칠지마존 심단주(沈壇主)에게 음무애(陰無涯)를 산에서 내려 보내 음무극의 강남칠성 맹주 자리를 계승하도록 하라고 이르시오.』
다삼공과 원현기는 그저 허리를 구부리고 대답했으며 감히 한마디도 더 묻지를 못했다. 혹시나 무정산주가 그로인해 더욱더 진노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무정산주는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원단주, 구양박을 당신에게 넘길 것이니 당신은 책임을 지고 그를 안전하게 산으로 데리고 가시오. 그가 필요로 하는 스무 명의 남자아이들은 지금쯤 모두 다 산속으로 옮겨졌을 것이오. 그러니 그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한 걸음도 산에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원현기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네 속하는 분부하신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무정산주가 손을 한번 휘젓듯 하자 구양박의 비대한 몸뚱아리가 천천히 날아왔다. 원현기는 덥석 그를 받아들었다. 무정산주는 정중히 말했다.
『이제 되었소. 당신들은 가 보시오.』
원현기가 물었다.
『산주 어르신께서 혼자 남삼객과 천지이괴를 상대하시는 마다에 저희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으신지요.』
무정산주는 즉시 그 말을 받았다.
『그럴 필요 없소. 그들 세 사람은 나 혼자서 상대해 낼 수 있소. 당신들은 남삼객이 이미 노부에 의해 제압당한 것을 보지 못했소?』
다삼공과 원현기는 남삼객이 무정산주에게 사로잡힌 것을 보지 못한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숲속에서 오랫동안 남삼객 적군이 출현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그가 이미 무정산주에게 격패를 당했으리라고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원현기는 남삼객을 미워하고 있었는지라 그 말에 크게 기뻐했다.
『어르신께서 그를 죽였습니까?』
무정산주는 대답했다.
『나는 즉시 그를 놓아줄 작정이오.』
원현기가 무심코 물었다.
『그건 또 어째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무정산주는 설명했다.
『노부와 그는 원래 아는 사이라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죽을 때가 아니오. 나는 그로 하여금 온갖 심혈을 다 기울여서 우리에게 대항하도록 한 연후에 뜨거운 실패의 맛을 보도록 하고 그때부터 나에게 굴복해서 다시는 헛되이 정도의 협사로 자처하지 않도록 굴복시킬 작정이오.』
말을 다한 그는 통쾌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무시무시했으며 마치 사람의 마음과 슬기를 압도하고 억누르는 힘이 실려있는 것 같았고 깊은 숲속에서 멀리까지 퍼져나가며 끊임없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기 때문에 다삼공과 원현기 두 사람은 모두 다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무정산주는 잠시 후 웃음을 멈추었는데 오랫동안 숲속에는 그 웃음소리의 여운이 길게 남아 있었다. 숲속에 다시 정적을 되찾게 되었는데 그 정적은 그야말로 죽음같은 것이었다. 무정산주는 한참동안 묵묵히 서 있다가 말했다.
『당신들은 가 보시오. 빨리 내가 당부한 일을 잘 처리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명심할 것은 일찌감치 산으로 되돌아가고 강호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지 말라는 것이오.』
원현기는 대답을 하고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언제쯤 산에 돌아오시겠습니까?』
무정산주는 대답했다.
『노부가 듣기에 전옥린의 외동아들이 총명하고 근골이 아주 뛰어나다고 하니 그를 제자로 삼고 싶은 생각이 있소. 만약에 내가 그 일을 결정하면 며칠 안에 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두 달 동안 더 기다려야 할 것이오.』
원현기는 이제 더 물어볼 말이 없었다. 다삼공을 한번 바라본 이후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다른 분부가 없으시다면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정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직이 '으음'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원현기와 다삼공 두 사람은 무정산주에게 절을 한 이후에 몸을 돌려서 나는 듯 달려갔다. 다삼공은 숲속에서 벗어나게 되자 손에 들고 있던 반 토막의 무기를 던져 버렸다.
『원형, 우리 산주의 무공은 정말 이 세상에서 무적이구려. 그는 차 한 잔 마실 짧은 시간에 전옥린과 남삼객 적군을 사로잡았소. 나는 그 어르신이 어째서 산을 내려와 단번에 공세를 발동시키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되는구려.』
원현기는 말했다.
『산주께서 지금 가장 꺼리는 상대는 역시 해외쌍선인 것 같더군요. 그 늙은 땡초들은 일신에 불문의 신공을 지니고 있어서 정말 경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지요. 만약 그들이 나서게 된다면 산주께서는 겨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니 우리로서는 다른 한 사람을 상대할 사람이 없는 형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다삼공은 그 말을 이어받았다.
『그것도 물론 이유의 하나겠지만 나는 산주가 어째서 그토록 많은 어린 남자아이들을 산으로 불러모으고 구양박이라는 의원 녀석에게 약물로서 그들을 키워나가라고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구려. 정말 그 아이들 중에서 한 명의 천하제일고수를 키워내서 해외쌍선을 상대하자는 것인지, 아무래도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오.』
원현기는 한참 생각해보고 말했다.
『산주의 지혜주머니에 어떤 현기(玄機)가 담겨져 있는지 그 누가 알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나는 그 어르신에게는 반드시 어떤 중요한 의도가 있다고 믿소이다.』
그들은 한편으로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로는 몸을 날려 급히 달렸다. 그 몇마디의 말을 하는 동안 어느덧 이십여 장을 달려가게 되었고 거의 산허리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이때 그들은 산 아래에서 어린아이의 부르짖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나를 내려줘요.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야해요. 당신이 나를 데려갔다가는 아버지에게 아주 혼이 날 거예요. 나를 놓아달란 말이에요!』
다삼공과 원현기는 서로 한번 쳐다보고 급히 달리던 몸을 멈추고 커다란 바위 옆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보니 세 사람의 그림자가 유성과 같이 재빠르게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앞장선 한 사람의 손에는 하나의 등롱이 들려있었기 때문에 다삼공과 원현기는 똑똑하게 앞장 서서 달려오는 사람의 어깨위에 한 어린아이가 떠메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현기는 그 앞장 선 몸집 큰 노인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뒤에서 따라오는 두 명의 늙은 거지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는 놀라서 말했다.
『다형, 저기 천지이괴, 그 괴상한 늙은 거지들이 왔구려?』
다삼공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나직이 말했다.
『원형, 우리 빨리 숨읍시다.』
원현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어느덧 다삼공에게 끌려서 수풀 속으로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다형, 천지이괴가 뭐 그리 굉장한 물건들이라고 이리 겁을 내시오?』
다삼공은 안색마저 거의 변해서 나직이 속삭였다.
『원형, 미처 설명할 겨를이 없구려. 빨리 숨 쉬는 것을 멈추도록 하시오.』
원현기는 그의 경악에 찬 표정을 보고 속으로 어린아이를 떠메고 있는 거대한 노인이 틀림없이 무림에서 크게 이름놓은 절세고수일 것이라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다만 그는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해서 여느 고수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얼굴색이 변한다는 유곡신마 다삼공이 이토록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호흡을 멈추고 팔에 끼고 있던 구양박을 가만히 풀 속에 내려놓았다. 그들 두 사람이 숨자 산 아래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이 할아버지는 지금 너를 데리고 너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이란다. 그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란다.』
이 몇마디의 말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십여 장 밖에서 들려왔으나 그 말소리가 끝나게 되자 어느덧 원현기와 다삼공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을 지나쳐 갔다.
원현기는 주군좌의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선배님, 선배님이 보시기에 우리들이 늦지 않게 달려가 그들의 싸움을 저지할 수 있겠소이까?』
그 거대한 노인이 대답했다.
『그들이 아직도 생사를 판가름하지 못했다면, 적군이 감히 이 늙은이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을 터이지.』
그의 말이 끝날 무렵에 이미 그들은 멀리 달려가고 있었고 다음 말은 원현기와 다삼공이 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이길래 남삼객이 반드시 그의 명을 들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일까?
그 누구라 그토록 높은 배분의 인물이 있어서 천지이로, 그 전대의 괴물들이 스스로 그를 선배님으로 모시는 것일까?
원현기는 이와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거대한 노인이 이미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겨우 입을 열었다.
『다형, 그 커다란 늙은이가 대체 누구요?』
다삼공은 먼저 전옥린을 옆구리에 끼고 몸을 일으켰다.
『원형, 우선 산을 내려간 이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원현기는 그의 얼굴에 가득 서렸던 경악의 빛이 아직도 가셔지지 않는 것을 보고 더 묻기가 거북해서 구양박을 끼고 급히 다삼공을 따라 몸을 날려서 산을 내려갔다. 그들이 족히 십여 장을 달려가게 되었을 때 원현기는 실로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다형, 그 커다란 사람이 도대체 누굽니까?』
다삼공이 말했다.
『원형, 내 언젠가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소? 내가 강호에 나선이래 두 번 커다란 위험에 처한 때가 있었다고. 두 번째는 산주를 만났을 때고, 그 어르신이 나를 무정산으로 데려갔던 것이라오.』
원현기는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다형은 처음에 신타(神駝) 을휴(乙休)를 만났던 것이죠?』
다삼공은 수긍했다.
『바로 맞추었소.』
원현기는 자못 궁금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신타 을휴는 이미 죽지 않았소이까? 삼십여 년 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오늘 다형이 아마도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이겠지요?』
다삼공은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잘못 볼 수도 있겠지만 신타 을휴라면 나는 결코 잘못 볼 리가 없소. 과거 내가 그를 만나서 얼마나 닦달을 당했는데 그를 잘못 보겠소?』
그는 과거의 몸서리치던 일을 더 들먹이고 싶지 않은 듯 하던 말을 중도에서 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찌되었든 간에 내가 한 평생에 만약 그 누군가를 지극히 두려워한다면 바로 그 한 사람일 것이오.』
원현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 늙은이는 수십 년 동안 강호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는데 또 어떻게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지요?』
다삼공은 말했다.
『그건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가 그 어린아이를 떠메고 갈 때 하던 소리로 미루어볼 때 그 아이는 바로 전옥린의 아들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가 전옥린을 알게 되었을까?』
원현기는 말했다.
『다형, 도대체 신타 을휴는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오? 그의 무공은 어느 정도요?』
다삼공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내력을 이야기해 줄테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무림의 전설적 기인 해외쌍선 가운데 요인신승이 바로 그의 사제이고 피진신니(避塵神尼)는 바로 그의 옛날 연인이었다오. 배분으로 따지게 된다면 아마도 현세의 무림에서 그 보다 더 어른이 될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리고 그의 무공이 어떤가 소문에 들으니까 요인신승마저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했소이다. 그러니 당신도 생각해 보시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원현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하, 이미 죽어서 백골이 진토가 된 줄 알았던 그런 늙은이가 아직 살아있으니 우리 산주가 경솔하게 일을 도모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려.』
다삼공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으음,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진땀이 나오. 그 늙은이가 죽지 않은 이상 우리의 일은 크게 차질이 생겼소. 내가 보기에 노산주마저도 아마 그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오.』
원현기가 자못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다형, 다형이 당해본 경험으로 신타 을휴와 노산주의 무공을 비교하자면 그 어느 쪽이 더 강하겠소?』
다삼공은 한참 머뭇거렸다.
『그건 비교해 볼 수 없는 문제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리고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노산주는 비단 검술에 정통할 뿐 아니라 천하 정사 이도의 무공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소. 거기다가 공력 또한 절세적이라 천하에 이미 적수를 보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오.』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한참 무엇인가를 회상하다가 다시 설명하듯 말했다.
『신타 을휴로 말하자면 불문 출신이라 일신의 신공은 이미 칼이나 검이나 백독이 몸에 손상을 입히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연성되었소. 그의 개성이 굳건하고 성질이 열화와 같아서 우리와 같이 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면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오. 그렇기 때문에 과거 그가 설치고 다닐 때 신타을무명(神駝乙無命)이라는 칭호가 있었소. 그 말은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 누구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소?』
원현기는 감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형, 오직 다형만이 그의 손아래에서 목숨을 건진 셈이니 다형도 한가닥 한다고 자랑할 만 하겠구려.』
다삼공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랑할만 하다구요?』
그리고 그는 자조하듯 말했다.
『그것은 순전히 내 명이 질기기 때문이라오. 그렇지 않다면 내 어찌 이토록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겠소? 다행히 그가 삼십년 동안 강호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림에서 나라는 사람은 이미 없어졌을 것이오.』
원현기는 근심걱정이 된다는 듯 말했다.
『신타 을휴가 그토록 무섭다면 지금 숲속의 노산주께서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 혹시……』
다삼공은 그 말을 가로챘다.
『내 생각에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소. 노산주는 지혜가 바다와 같이 넓은 사람이라 설사 무공에 있어서 좀 벅찬 상대라 하더라도 신타 을휴를 상대할 또 다른 방법이 자연 있을 것이오.』
이것은 그가 단지 짐작해서 하는 말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역시도 자기네들의 산주가 신타 을휴와 맞닥뜨렸을 때 그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자신있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감히 되돌아가서 신타 을휴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도 겁이 났고 또한 무정산주의 명령을 어기는 것도 두려워서 부득이 산을 내려가 성안으로 들어가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만약에 그들이 신타 을휴의 뒤를 따라 갔더라면 틀림없이 한 가지 이상한 일을 발견했으리라. 그것은 산속에서는 이미 무정산주의 종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신타 을휴 등이 그 평애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남삼객이 가슴에 나무로 된 목검을 안은 채 그 평평한 바위 가장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는 얼굴 가득히 더할 수 없는 충격의 빛을 띄우고서 그 평애 아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유곡(幽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느라고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신타 을휴 등이 달려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랑곳하기 싫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곳에 않아서 마치 하늘이 열린 이래로 이미 존재했던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타 을휴는 전모백을 떠메고서 산위로 올랐고 그토록 가파른 비탈길을 달려왔지만 가쁜 숨 한번 쉬지 않았다. 그는 멀리서부터 남삼객이 평애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사방을 한번 훑어보았을 뿐이었는데 전모백이 먼저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
그는 두 번 불렀으나 대답할 사람이 보이지 않자 급히 신타 을휴의 몸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신타 을휴가 달랬다.
『아이야 서두르지 말아라. 그리고 아래로 뛰어내리다가 다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지.』
전모백은 손에 그 바람따라 춤추듯 맴을 돌고 있는 용등을 든채 말했다.
『할아버지께선 아버지가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볼 수가 없지요?』
신타 을휴는 말했다.
『얘야, 너무 서둘지 말아라. 이 할애비가 저 사람에게 물어보도록 하마.』
그리고 그는 전모백을 내려놓고 주군좌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 아이를 좀 돌봐주게나.』
주군좌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모백을 끌어 당겼다.
『얘야, 너는 마음을 놓아도 좋다. 저 할아버지께서 틀림없이 너의 아버지를 찾아주실 것이다.』
전모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아직 어렸고 거기다가 줄곧 금응보에서 자랐기 때문에 좀처럼 바깥출입을 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할아버지한테 끌려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놓고 보니 약간 겁이 났다. 다행히 그의 손에는 아직도 등이 들려있어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어서 좀 나은 편이었다. 그는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신타 을휴는 천천히 남삼객 적군의 등 뒤로 가 서 있었다.
남삼객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나무검을 쥔 채 고개를 숙이고서 평애아래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타 을휴는 남삼객 적군의 등 뒤에 잠시동안 서 있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적군, 전옥린은 어디 있는가?』
남삼객이 말했다.
『그는 죽었소.』
그는 간단하게 한마디를 했을 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 섞여있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비애는 듣는 사람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신타 을휴와 천지이로는 목석으로 변한 듯 뻣뻣이 서 있었고 전모백은 울음을 터뜨렸다.
모백은 발버둥치며 남삼객 적군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주군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발버둥치며 울부짖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지 않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지 않는단 말이에요.』
남삼객 적군은 모백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갑자기 얼굴을 돌리게 되자 눈물이 그만 눈에서 주르륵 쏟아지면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